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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조회수 | 2,435
작성일 | 05.07.29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은 참으로 많습니다. 어떤 기적은 네 복음 중에 단 한 번 기록된 것도 있고, 각각의 복음서에 두 번, 세 번 기록된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은 네 복음에 무려 여섯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부터
이 기적에 대해 그만큼 관심이 컸고, 이 기적을 입으로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아주 신나했다는 증거입니다. 수없이 이야기하고 전하다보니 두 갈래 전승으로 갈라졌고 도합 여섯 번이나 복음서에 기록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군중들을 애절히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은 동정심일 수도 있고 자비로운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 하면 가장 적합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무언가 얻어 볼까하고 수많은 군중들이 그분을 따라다녔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군중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늦은 저녁이 되었지만 그들에게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가진 하찮은 음식,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무려 오천 명이 되는 장정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이 모두는 불쌍한 군중들을 끝없이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 병들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과는 비교과 되지 않을 정도로 많습니다. 몇몇 단체나 뜻있는 분들이 그들을 위해 헌신하고 노력하지만 역부족입니다. 이들 모두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그때 예수께서 빵과 물고기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기도를 드리신 것처럼
오늘 미사에서 사제는 빵과 포도주를 들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 그것을 우리들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손을 빌려 사람들을 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의 굶주림을 제자들이 예수께 보고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이제 우리들의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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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손삼석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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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신비 기적 일으켜 보자”

오늘의 복음말씀 요지는 주님을 만나려고 외딴 곳까지 몰려온 군중을 측은히 여기신 예수께서, 어느 소년이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드리려고 사도들에게 갖고 온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여명이나 먹이시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다고 하는 놀라운 기적의 이야기이다.

주일학교에 다니는 꼬마들은 이 기적의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듣지만, 많은 지식인들은 「설마 그런 일이 있었을까?」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 기적은 나눔의 신비가 만들어 낸 기적이라고 봤을 때에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소년이 가지고 있던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이 소년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겠다고 히니까 그의 엄마가 배고플때에 먹으라고 싸준 도시락이었다. 한창 성장하는 소년은 식욕도 왕성하고 소화도 빨리 되어 점심 때가 지나서는 무척 배가 고팠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년은,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자기가 먹지 않고 통째로 예수님께 드리고 싶어서 사도들에게 전달했던 것인데, 예수님은 그 도시락을 또 당신이 드시지 않고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굶주리면서 하루종일 당신을 따라 다닌 엄청난 군중을 측은히 여기시어 사오십명씩 무리지어 풀밭에 앉힌 다음 제자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게 하시니까, 거기에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고 보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많은 군중들이 굶주린 것은 빵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갖고 있는 음식을 이웃과 나누기가 아까워서, 자기마저 못먹다 보니 도시락을 가져온 사람이나, 못가져온 사람이나 모두가 굶주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어떤 소년이 자기의 도시락을 송두리째 예수님께 봉헌했고, 예수님은 그 도시락을 당신이 드시지 않고, 그 많은 군중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셨다. 이 모습을 본 군중들은 감복한 나머지 모두가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그렇게도 아까워 나누지 못했던 음식을 이웃과 나누어 먹게 되었고,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은 음식이, 그 당시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던 여행용 가방 구실을 하던 낚시 바구니 비슷한 광주리로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고 추측한다면, 그것은 빵과 물고기의 분량이 불어나서 오천명 이상이나 되는 군중을 배불리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는 기적 보다도 더 큰 기적일뿐 아니라 우리가 받아들이는 데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복녀 마더 데레사 수녀는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부족함이 없이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셨지만, 욕심많은 사람들의 욕구를 다 채울만한 세상은 만들어 주시지 않았다』라고 하셨다. 이 세상의 많은 분쟁과 불의와 폭력과 빈곤과 불행들은 나눔의 정신 보다도 욕심이 우세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나는 동남아 여행을 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나라는 비옥한 땅이 너무도 넓었고, 자원도 풍부한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너무나도 가난하게 살기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누가 대답하기를,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나라의 전체 국민중 5%의 사람이 그 나라의 75% 땅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5%의 부자는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못하다. 이 세상에 자기의 재산으로 만족하는 재벌이 어디에 있는가? 욕심많은 사람에게 재산은 마치 바다에서 표류하는 사람의 갈증을 풀어주지 못하는 바닷물과 같다. 바닷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만 증폭되기 때문이다.

사랑은 나눌수록 커지고, 고통은 나눌수록 작아진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는 모으는 것도 나누는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면, 그 모은 재산들은 생명력을 상실하여 어느 누구에게도 행복과 보람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나눈다는 것은 자기가 쓰고 남은 것 중의 일부를 나누어주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예수께서는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라고 묻는 어느 부자 청년에게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고, 그가 풀이 죽어서 떠난 다음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 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하셨고, 아나니아와 삽피라 부부는 밭을 팔아서 그 일부는 숨기고, 나머지만 사도들 발 앞에 내놓자 사도 베드로는 『당신들은 어쩌자고 하느님을 속입니까?』라고 말하자 그들은 즉시 기절하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당신이 주실 수 있는 것은 아낌없이 전부 주셨고 마지막에는 당신 자신마저 우리에게 먹이로 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여 주었으니 우리도 우리 자신을 나누어 줌으로써 나눔의 신비 기적을 일으켜 보자.

허성 신부
  |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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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을 시켜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신 이야기였습니다.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것을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근을 해결해 주는 분으로 잘 모셨겠지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한 두 사람이 한 끼니를 먹을 수 있는 분량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5000명이 먹고도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의 보도라고 생각하면, 우리에게 많은 의문이 생깁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은 기적적 무료 급식을 한 인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은 먹는 것을 기적적으로 해결해 주는 분으로 처신하지 않으셨습니다. 돌을 빵으로 바꾸어 보라며 유혹하는 자의 말에 예수님은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못하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마태 4,4)고 대답하셨습니다.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시오”(마태 6,25)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행복 선언’에서 예수님은 배부른 사람이 아니라 굶주리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의문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이야기의 무대는 갈릴래아 호수 주변입니다. 그곳에 과연 오천 명도 더 되는 사람들이 운집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가? 외딴 곳이라면서 먹고 남은 것을 담은 열두 개의 광주리는 어디서 구했는가? 음향 시설도 없고, 자동 배식 장치도 없는 시기에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을 어떻게 통솔했으며, 그들에게 어떻게 배식했는가? 이런 의문들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사셨던 인물이고, 우리가 그분을 알 수 있는 것은 초기 교회가 그분에 대해 남긴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하는 문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어떤 구원이신지를 알아들은 사람들이 남긴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도 동시에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구약성서의 언어전통 안에 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당신을 믿는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모세의 깨달음과 그 하느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예언자 엘리사가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이야기(2열왕 4,42-44)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 저자들은 이런 구약성서의 언어를 빌려서 그들이 체험한 예수님과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배에서 내려 거기 모여든 많은 군중을 보시자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군중들을 헤쳐 보내어 각자가 자기 먹을 것을 마련하도록 하자는 제자들의 제안에 예수님은 ‘여러분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성서의 모세와 같이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가르치신 분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사람은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돌보아 주고 고치는 노력을 합니다. 엘리사 예언자는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의 사람들을 먹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보다 훨씬 더 큰 분입니다. 빵은 4분의 1로 줄이고 먹은 사람은 50배로 늘렸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가진 것을 나누어 많은 사람들을 먹입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은 인간의 병고와 굶주림을 하느님의 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고 고치고 먹이는 놀라운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각자가 자기 병을 걱정하고 각자가 자기 먹을 것을 해결하는 것이 인간 사회의 질서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이웃의 아픔을 측은히 여깁니다. 그리고 일용할 양식을 하느님이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감사하며 이웃과 나눕니다. 하느님의 축복으로 인간이 산다는 사실을 감사하는 신앙인은 그 은혜로움을 이웃과 함께 나눕니다. 이런 나눔이 있으면 우리 주변에 굶주리는 사람이 없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먹고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는 말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나눔의 실천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오늘의 복음에는 초기교회가 실천하던 성체성사에 대한 기억도 들어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말은 초기교회가 성체성사를 위해 사용하던 표현양식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성체성사는 나눔의 신비를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측은히 여기고, 베푸시는 분이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신앙인도 이웃을 측은히 여기고 이웃과 나눌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의 정의 실천은 주변 사람들에게 무자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받은 만큼 주고 준만큼 받아내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노동한 만큼 벌어서 그만큼 누리며 사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지향하는 정의와 공평은 이런 것입니다. 그것은 외딴 섬과 같이 살기 위한 정의이고 공평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의 정의와 공평을 배우고 실천합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최후 심판의 이야기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정의와 공평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말은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를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와 공평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 안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 넣으셨다고 말합니다. 나와 내 가족이 잘 먹고 건강해서 행복할 수만 없습니다. 측은히 여기고 축복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면서 살 것이 요구된 인간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숨결을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향하는 정의와 공평은 인간다운 사회를 위해 부족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제도적으로 공평하게 하겠다던 공산주의의 말로를 우리는 압니다. 그 사상은 이웃을 측은히 여기지도 않고, 이웃에게 축복이 되는 나눔도 외면한, 냉혹한 사상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측은히 여기고 나누는 따뜻한 인간 생명으로 된 사회를 원하십니다. 그런 실천으로 이루는 정의와 공평을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의 이야기는 측은히 여기시는 예수님, 나누어서 풍요롭게 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주면서 우리도 배워서 하느님의 자녀 되라고 촉구합니다.

서공석 신부
  |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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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와 나눔

오늘 복음은 너무나 잘 알려진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들은 다음 행한 기적인데, 인간적으로 친구를 잃은 슬픔에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어렵고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 보잘것없이 적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어른만도 오천 명 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일 수 있었을까?

오늘 복음은 우리들의 이러한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줍니다. 기적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과 하느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 그리고 제자들의 나눔의 실천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온 사람들에 대해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세례자 요한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은 사람들의 일시적인 열광에 대한 보답이기 보다는, 사람들이 직면한 현실의 문제에 대해 함께하는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히 어렵고 힘든 처지의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기적은 큰 능력의 행위가 아니라, 사랑과 함께하는 마음의 실천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 그리고 빵 다섯 개는 그 많은 사람들이 먹기에는 너무도 적은 양에 불과 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불평과 원망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더 달라고 청하기보다는, 오히려 보잘 것 없는 것에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드린 감사의 기도, 그 자체가 어떤 힘을 지녀서 빵을 많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술을 외워서 요술을 부린 것도 아닙니다.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부족함에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마음, 그 것은 궁핍과 쪼들림이 감히 파고 들어올 수 없는 하느님의 충만함이었고 축복이었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현존이었습니다.

제자들은“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미약하지만, 사람들 앞에 모두 다 내 놓음으로써 기적을 가능하게 합니다. 부족하고 별 보잘 것 없는 양이지만, 티끌이 모여서 태산을 만들듯, 나누지 않았으면 보잘 것 없지만, 나누어 먹음으로서 열두 광주리가 남습니다.

요즈음은 풍요속의 빈곤이란 말을 절실히 느끼는 시기입니다. 없고 부족해서 빈곤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더 가지려하고 만족할 줄 모릅니다. 나눌 수 있는 것을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누지 않습니다. 감사하며 풍요롭고 아름답게 살아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척박한 세상을 만들며, 풍요함 속에서 메마르게 살아갑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아득히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서도 체험할 수 있는 기적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주위에 나누는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김성남 야고보 신부
  |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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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시비지심과 예수님의 측은지심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갈릴래아에서 자신의 공적 생활을 시작하신(마태 4,12) 예수께서 오늘은 그의 죽음소식을 접하시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셨다. 아마 요한의 죽음을 애도(哀悼)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었을까?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 육로를 통해 몰려들었다. 예수께서 계신 곳은 어디든지 이렇게 사람들로 붐빈다. 예수를 찾는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으로 마음이 심란했을 터인데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고 그들의 모든 청을 들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신다. 그들을 향한 측은한 마음이 드셨기 때문이다. 타인의 어렵고 가엾은 처지에 대한 측은한 마음은 ‘사람다운 사람’의 가장 기본 태도이다.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던 맹자(孟子, BC. 372-289?)도 이미 사람이 타고난 착한 본성의 발로를 사단(四端)으로 보았다. 사단은 군자(君子)가 행해야 한다는 네 가지 품성인 사덕(四德)에 해당하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에서 우러나는 네 가지 마음을 말한다. 사단은 곧 인(仁)에서 우러나는 가엽고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에서 우러나는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에서 우러나는 남을 공경하고 겸손히 사양하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에서 우러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가릴 줄 아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맹자가 정리한 사단의 마음이 예수님을 통해 한층 돋보이는 대목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이 데려오고 스스로 찾아온 병자들을 모두 고쳐주시자 때는 저녁이 되었다. 동시에 제자들에겐 끼니걱정이 함께 엄습하였다. 제자들은 그나마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전에 군중을 해산시켜 끼니를 각자가 해결하도록 할 참이었다. 시비지심의 발로인가? 그러나 제자들의 시비지심보다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앞선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16절)는 것이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란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뿐, 자기들이 먹기에도 부족한데,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아찔하고 눈앞이 캄캄했을 것이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예수께 청하여 사람들을 헤쳐 물리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조족지혈(鳥足之血)도 안 되는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주란 말인가?

오늘 복음의 핵심은 마태오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이다. 4복음서 전체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빵의 기적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마르 6,32-44; 마태 14,13-21; 루가 9,12-17; 요한 6,1-15)과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마르 8,1-9; 마태 15,32-39)의 두 가지 형태로 전해진다. 알다시피 오천 명의 기적은 4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으나, 사천 명의 기적은 마르코와 마태오만 전하고 있다. 물론 마르코복음이 구전(口傳)이나 예수어록의 원전(原典)에 제일 충실했을 것이고, 마태오와 루가복음은 저자의 의도에 따라 다소 수정을 가하였으나, 요한복음은 원전의 기적사화를 토대로 완전히 독창적인 신학을 펼치고 있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4,12-18-35) 중 비유설교(13장)와 공동체설교(18장) 사이에 등장하는 주된 모티브는 ‘빵’이다. 적어도 마태오복음 14,13에서 16,12절까지에 기록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이끌어 가는 핵심적인 사상이 바로 ‘빵’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은 우선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14,13-16)으로 시작하여, 그 가운데 사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15,31-39)을 삽입하고, 마지막 부분에 가서 두 가지 빵의 기적에 대한 의미해석(16,9-12)으로 마무리 된다.

복음이 전해주는 빵의 기적은 다른 기적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메시아적 특성을 드러내는 기적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많은 기적들을 체험하였다. 자신들의 평범한 이론과 습관들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예수님은 마치 평범한 일처럼, 그냥 우리가 늘 생각하고 행하는 패턴처럼 여기신다. 가진 것이 많건 적건 간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사가가 단순한 빵의 기적을 가지고 생명의 빵(성체성사신학)을 구상하거나(요한 6장), 마르코복음에는 없는 ‘여자와 어린아이들’(21절)을 끌어들여 누구나 참여하는 미사성제를 마태오복음사가가 구상하든지 간에, 오늘 예수님의 복음(福音)은 가진 것이 많든 적든 간에, 있는 것으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것이다. 모자라는 것은 예수께서 스스로 채워 주실 것이다. 오늘은 빵의 기적으로 모자람을 채워 주셨지만 머지않아 자신의 몸을 내어놓는 죽음과 부활의 기적으로 모자람을 채워 주실 것이다. 이로써 세례자 요한의 죽음소식을 접하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던 예수님의 속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다. 예수께서는 빵의 모티브를 통하여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서서히 예고하시려는 것이다.(마태 16,13 이하)

박상대 신부
  |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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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복음

되돌아보기보다 새 것으로 채움 받는 주일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해 드리고 싶은 복된 주님의 날입니다. 그런데 이사야가 전하는 하느님의 마음이 바오로 사도에게 듣는 진한 사랑의 고백이 기쁘지만은 않습니다. 하루를 돌아보는 저녁기도시간, 그 씁쓸한 편린들은 우리를 많이 부끄럽게 하니까요. 그럼에도 이 부끄러운 것들과 씁쓸한 것들 탓에 오히려 더 큰 감사를 깨닫게 해 주시니 주님의 은혜가 놀랍기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능력은 할 수 없는 것이 없고 미치지 않는 곳도 없습니다. 그렇게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오너라’ 이르시고 ‘내말을 들어라’ 하시며 그것도 모자라 오는 모든 이를 살려주고 변치 않는 자애를 베풀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절대로 변치 않는 것이기에 바오로 사도는 확신하며 우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환난도 역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이나 위험 그리고 죽음마저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고 증언 합니다.

그럼에도 내 교만이 주님과 멀어지게 하고 내 시기가 주님을 등지게 하며 내 이기심으로 주님을 떨쳐낼 수 있습니다.

묵상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봉헌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주님의 기준에 턱없이 모자라는 우리의 삶, 주님의 뜻에 결코 따르지 못하는 우리의 행위, 주님의 말씀에 모른 척하는 우리의 마음을 봉헌할 때 그분께서는 변화시켜 주실 것을 이르심이 아닐까 짚어 봅니다. 우리의 죽음과 삶과 미진한 상황을 봉헌할 때 그분께서는 새롭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으로 받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리 가져 오너라” 주님은 호소하십니다.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돈이 없어도 값을 치루지 않아도 되는 공짜라고 외치십니다. 그분의 채워주심은 어찌나 풍성한지 모든 이가 배불리 먹고도 공짜로 열두 광주리에 가득한 보너스도 있습니다.

우리가 얻은 기쁨과 행복이 넘쳐나서 세상의 모두를 배부르게 하기를 하느님께서는 소원하십니다. 매일 매일 그분께 아닌 것을 갖다 드리고 그분의 것으로 꽉꽉 채움 받아 참 행복을 세상에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장재봉 신부
  |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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