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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조회수 | 2,494
작성일 | 05.08.06
우리 하느님께서는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 아무런 두려움도 걱정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크신 은혜를 받고 느끼며 살아가면서도 나에게 닥친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일들로 인해 하느님을 잊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 체험의 생활이라고 하지요. 언제 어디서나, 어떨 때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은 이렇습니다. 깊은 밤 풍랑에 시달려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고,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오인하고, 예수님이심을 확인한 베드로는 예수님께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해서 물 위를 걷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물에 빠져 비명을 지르며 예수님께 살려달라 애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치는 상황을 체험하게 됩니다.

분명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체험하며,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의 모습을 본 제자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체험한 제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닥친 한계 상황에서는 주님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주님의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잊고 우왕좌왕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삶의 여정에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사건들 속에서 하느님의 섭리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 체험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죽음의 공포에 우왕좌왕하는 제자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하며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위로와 힘을 주시는 하느님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참다운 제자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거듭되는 하느님 체험을 통해 점점 주님의 제자가 되어갑니다. 우리 또한 일상사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체험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도 참다운 제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 매일을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주님만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약한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마태 14,27)

이기환 사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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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때문에 탄 배인데...

차를 운전하다보면 평생에 한 번 정도는 접촉사고를 내거나 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고 후에 기분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고가 주일미사에 참여하러 가다가 일어난 일이라면 기분도 기분이지만 ‘놀러가던 길이면 몰라도 성당에 가는 길이었는데 사고하나 막아주시지도 않고…’ 이런 생각이 들면서 예수님께 섭섭한 마음이 살짝 들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제자들이 호수를 건너기 위해 배를 탔다가 거센 파도를 만나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배를 타면 누구나 순항을 원하는 법. 더구나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게 된 것은 그렇게 하도록 재촉한 예수님 때문이었는데 호수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탄 배인데…’ 하는 볼멘소리가 나올 법도 합니다. 세상살이의 위험과 곤경을 피해갈 수 있도록 종종 예수님께 기도를 바치는 우리의 심성으로 볼 때, 예수님의 명령대로 움직였다가 어려움에 처해 버린 제자들의 상황이 다소 의아하게 생각될 수도 있겠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주일미사에 나오다가 자동차 접촉사고를 당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산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살이에서 겪어야 할 여러 가지 어려움들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어도 힘든 세상살이, 안 믿어도 힘든 세상살이라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의미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배경이 되는 호수(바다)는 신약성경에서 종교적인 의미로 악의 세력이 넘쳐나는 곳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귀들이 예수님의 허락을 받아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 떼에게 들어가고 그 돼지 떼들이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은 이야기(마태 8,28~34)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는 악의 세력들이 자기들의 원천으로 돌아갔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호수에서 거센 바람과 함께 파도를 만난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서 다가오시고 그들을 구해주시는 오늘 복음의 장면에서,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악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영원히 이별하지 않도록,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악의 세력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통해서 무엇을 청하고 무엇을 바라십니까? 열심히 믿어서 내 하는 일 잘되고, 가족들 건강하고, 집에 우환 없고 그저 어려움 없이 한 생을 살기만을 바라는 신앙이라면 성당에 와서 기도하는 이들이나, 팔공산 갓바위에 올라가 비는 이들이나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 신앙의 목표는 우환이 없는 편안한 세상살이가 아니라, 악의 유혹과 위험에서 지켜주시는 예수님의 보호를 받고 마침내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행복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성호 요한 신부
  |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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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느님의 현존 약속과 현실의 확실성이 주는 혼란 속에 흔들리는 우리에게 스승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불안과 불확실로 허우적거릴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의 상황이 그러합니다. 두려움과 불안의 상징인 밤바다, 거센 파도와 바람들… 예수님은 배안에 계시지 않고 제자들만 남아 있습니다. 그 배는 역풍을 만나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 베드로는 스승 예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에게 들려온 그 음성은 주님이신 예수님의 현존에 확신을 주었고 곧장 어둠속의 밤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스승 예수의 현존에 대한 확실성이 있었기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기에 발생하는 모든 어둠의 현실을 대변하는 두려움과 불안함을 뛰어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장 눈앞에서 펼쳐지는 거센 바람으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여 물속으로 빠져버렸습니다. 베드로의 눈앞에서 펼쳐진 현실의 확실성은 보이지 않는 주님의 현존 약속을 의심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과 베드로의 모습은 세파에 시달리면서 두려움과 불안에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있습니다. 신뢰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참으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뢰는 약속을 충실히 지킴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과 인간의 신뢰, 그것이 만나서 베드로를 두려움과 불안, 불확실성을 뛰어 넘게 만든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의 약속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당신 약속에 충실한 하느님과 그 약속을 신뢰하고 충실히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그것이 신앙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본적인 신뢰의 관계는 자주 인간의 배신으로, 인간들의 약속 어김으로 끝나버릴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약속보다는 물질적인 것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확실함을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한 나의 경험과 지식을 앞세우며 나의 계산을 더 믿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질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그러한 두려움은 하느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우리를 위기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오늘 베드로가 물에 빠져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교우여러분!
우리 교구 설정 초창기 어려웠던 시절 교구를 이끌었던 초대교구장 드망즈 주교님이 생각이 납니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 같은 여건 속에 교회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믿고 살았던 분, 하느님과의 약속에 충실하셨던 분…. 주교좌계산성당, 신학교, 교구청, 성모당을 둘러보면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당신 현존의 약속에 충실한 분이신지,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현존을 믿고 약속에 충실히 응답해야 하는지를 느끼고 깨우치게 해줍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의 확실함에 더욱 신뢰를 두는 모습과 약속된 하느님의 말씀에 더욱 신뢰를 두는 모습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어떠한 두려움도 불안도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느님의 현존 약속에 대한 신뢰는 우리 신앙인들이 끊임없이 추구해야 될 믿음의 행위입니다. 오늘도 끊임없이 흔들리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김태형 베드로 신부
  |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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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물 위를 걸으시는 능력자 예수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 바쁜 하루를 보내십니다. 남자만도 오천 명을 먹이시는 일이 있은 다음에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호수 건너편으로 배를 타고 먼저 가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혼자 남아 군중을 돌려보내십니다. 이렇게 바쁜 하루를 보내시고도 잊지 않으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바쁜 하루를 보내시고도 혼자 기도의 시간을 갖는 예수님을 보면, 늘 기도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새벽까지 그렇게 보내시고는 제자들이 있을 호수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당신께서야 능력(?)이 있으시니 물위를 걸어서라도 가실 수 있지만, 제자들은 배 시간에 맞춰 보내고 싶었나봅니다. 어쩌면 당신이 좀 더 바삐 움직이더라도 제자들만큼은 쉬게 해 주려는 배려인지도모릅니다. 높은 파도를 보고는 바람을 꾸짖어 제자들이 편히 가게 했어야 하나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다가가는 예수님을 향해 유령이라고 소리치는 제자들을 보니 ‘아직도 나를 잘 모르는구나. 내가 하느님의 아들인지 그만큼 얘기하고 보여 줘도 알지 못하니 아직 더 가르칠게 많구나.’라고 생각하시며, “이제 내가왔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여기 함께 있지 않느냐? 걱정할 것도 겁낼 것도 없다.”라고 말씀하시는데 베드로가 의외의 제안을 합니다. 자기도 물위를 걸어 당신께 갈 수 있게 해 달라는 겁니다. 문제될 것은 없지만 어떤 능력을 갖는다고 걱정이 사라지는 건 아닌데, ‘아직도 배울게 많구나.’하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해 보라고 허락하셨지만, 아니나 다를까 베드로는 거센 바람에 두려워져 버립니다.

물에 빠지는 것이 겁나고 두려웠던 베드로는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능력이 생겼고 지금 물을 밟고 서 있지만, 거센 바람 앞에서 또 다른 두려움이 생겨 버립니다. 작은 두려움도 용기전체를 잃게 만드는 모양입니다. 어쩌면 모든 두려움은 혼자여서 느끼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두려움을 없앨 능력이 있어도 혼자 있다고 생각하면 쉽게 용기를 잃게 되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떠는 베드로에게 바람을 이길 또 다른 능력이 아니라 손을 잡아 주는 행동을 하셨나 봅니다. 두려움을 없애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내 손을 잡아 주는 그 누군가인데, 혼자서 어떤 능력에 기대어 살아가려는 우리들에게 제자들의 고백은 의미심장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고백말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런저런 걱정 가운데 바쁘게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가운데서 함께하시며 내가 함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려 기도 중에 만나기를 바라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 안에서 그분의 능력만 바라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 봅니다. 문제를 해결해줄 능력자로서의 예수님을 찾는다면 매 순간,‘왜 이번에는 도와주지 않으시는가?’ ‘다음에도 잘 도와주실까?’ 의심하고 걱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이 필요하지, 능력자 예수님을 곁에 두려고 환심을 사려는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 대구대교구 이압돈 압돈 신부 : 2017년 8월 13일
  |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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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우리가 믿고 살아야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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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말미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어제 저녁 큰 사건(오병이어의 기적)이 있고 나서부터 지금 새벽까지 제자들은 역풍을 만나 안간힘은 쓰며 배를 몰고 있는데 물 위를 걸어오시는 스승을 목격합니다. 베드로는 청하여 스승과 함께 물 위를 걷습니다. 그러다 무서워 빠진 베드로는 스승에 의해 구해지고, 그가 배에 오르자 불던 바람마저 멈춘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스승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제자들이 스승의 진면목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지치고 놀라서 엉겁결에 터져 나온 두려움 섞인 탄성같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오병이어’라고 알려진
대단한 사건에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큰 사건이 있은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반대편으로 떠나보내고 혼자 군중을 돌려보내십니다. 제자들을 재촉하여 군중들과 떼어내어 떠나보내신 것은 그들이 이 대단한 빵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군중들 사이에서 읽히는 이상한 기운을 알아차리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잽싸게 다독이고 감동을 주어 질서정연하게 돌려보내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사명, 선포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오늘처럼 물 위를 걷거나 걷게 하는 기적을 행하는 분, 마귀를 몰아내고 병든 이를 치유해 주는 의사, 혹은 죽은 이까지 일으키시는 신통방통한 능력의 소유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들을 보며 스승이 선포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를 알아가기보다 돈이 되는 능력이라고 생각되는 스승의 그 기술을 배우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 스승이 선포하고 살아내고 있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분의 사명은
세상에서 이루어가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며, 내가 살고 그들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빵 사건을 통해서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며 겁에 질려 “유령이다!”라며 스승을 한낱 물 위를 걷는 유령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하신 것은
믿음이 약하고 의심하여 물에 빠졌으니 믿으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으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가르치고 보여 주었고
같이 살고 있는 하느님 나라가 진정으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한 일들, 특히 너희들이 가진 그 몇 안되는 빵과 물고기로 오 천 명이 공동 식사를 한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야 하지 않느냐?’는 안타까움에 터져 나온 한마디 외침입니다.

우리가 믿고 살아야 하는 것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그분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살기 위해
우리는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고 힘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때로 위험과 두려움에 빠진 이들을 구하며 인내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나의 기도와 인내는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 목숨 걸고 하느님 나라를 살며 전했듯 형제자매들에게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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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오상직 베네딕토 신부
2020년 8월 9일 ‘대구대교구 주보’에서
  |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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