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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주님께만 의탁하라
조회수 | 2,115
작성일 | 05.08.06
흔히 세상은 고해(苦海)요 인생은 나그네의 여정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원하는 것을 다 소유하고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한평생을 아무런 근심과 고뇌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 원인은 이 세상이란 곳이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도 천국도 아닐 뿐더러 동시에 인간 자신도 근본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란 것입니다. 이처럼 양자가 모두 불완전하기에 인간의 삶 속에 따라오는 근심과 불안 및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21세기인 오늘을 특징 짓는 것들은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으나 그중 가장 확실한 것은 우리 모두가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개인을 봐도 그렇고 사회나 국가 세계 등 모든 것은 내일을 알 수 없는 불확실 속에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7월 7일 영국 런던에서 또 대형 테러 참사가 터졌고 지구촌 곳곳에는 각종 자연재난 사고도 끊일 날이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불어닥칠 수 있는 개인적인 불행과 고통도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모든 사람은 세상이라고 하는 고해에 배를 띄워 불확실한 항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매순간을 잠재적인 불안과 공포증 속에서 살아가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우리의 험난한 인생 항로를 헤치고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분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야훼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은 생명이요, 그분을 떠나는 것은 곧 죽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편 23편에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이천 여 년 전 갈릴래아 호수 위에서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하나의 사건이었지만, 이 사건의 모습은 험난한 세상바다를 건너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험난한 세상바다를 헤치고 하느님의 나라에까지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해주실 수 있는 분은 주님 그리스도뿐 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마태오 11, 28)

오남주 프리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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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호숫가 산에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호수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배로 떠났는데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역풍을 만나 시달리고 있습니다. 한밤중에 예수님은 물위를 걸어서 배에 오시고 제자들은 그분을 유령으로 착각합니다. 예수님은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청해서 물위를 걷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이 불자 그는 무서워하였고, 물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주님, 살려 주십시오!” 하면서 비명을 지릅니다.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를 잡아 주셨고,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오늘의 이야기입니다.

복음서는 초기 교회가 그들의 믿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기록한 문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이야기들 안에 담아 전합니다. 그 이야기들 안에는 실제 일어난 사실에 대한 초기 교회의 기억도 있지만, 그들이 예수님 혹은 하느님에 대해 믿고 있던 바가 담겨 있기도 합니다. 초기 교회는 구약성서의 이야기들에서 빌려 각색하기도 하고 과장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서 안에서 만나는 것은 과거에 일어난 사실에 대한 정확한 보도가 아니라, 초기 교회의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의 감수성은 그 시대 사람들의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정확한 사실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 사실을 전하는 사람의 해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해석은 그것을 듣는 사람 각자의 몫입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도 과거의 이런 감수성이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려 혼자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구역성서에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신 분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헤어져 자기들만 배를 타고 떠났던 제자들은 물 위에서 바람과 파도에 몹시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물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오십니다. 같은 물 위에서 제자들은 시달리고 위험에 처해 지고, 예수님은 그 위를 태연하게 걸으십니다. 제자들은 세파에 시달리고 예수님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으십니다.

팔레스티나 주변에는 광야가 많습니다. 게다가 강우량이 적어 물이 아주 귀합니다. 이런 여건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을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생명수의 강’(요한 7,38)이라는 표현의 출처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다와 같이 많은 물은 두려워합니다. 갈릴래아 호수도 그들은 바다라고 부릅니다. 그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고 사람이 빠지면 생명을 잃습니다. 따라서 호수나 바다와 같이 많은 물은 그들에게 의심, 무질서, 두려움, 죽음 등을 의미합니다. 구약성서 창세기에 노아홍수 이야기가 있고, 출애굽기에는 이집트를 탈출하는 백성이 홍해바다를 건너면서 자유를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따라서 팔레스티나 문화권에서 물은 생명이지만 또 한 편 의심이고 불안이며 죽음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물위에서 거센 파도를 만나 불안에 떨고 있고, 주위는 어둡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입니다. 우리를 엄습하는 여러 가지 불안이 있고 어떤 때는 도저히 헤어나지 못하고 죽을 것 같은 어둠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일들은 많습니다. 태풍이나 폭우와 같은 자연 재해와 테러나 전쟁과 같은 재난은 예외로 두더라도, 우리를 늘 불안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질병, 실패, 가난, 교통사고 등의 위험이 우리를 늘 불안하게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또 가족을 위해 불안은 항상 있습니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은 그런 불안을 딛고 그 위를 초연하게 걸으십니다. 예수님은 불안과 공포를 의미하는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알아봅니다. 그 말씀은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리를 믿고, 계명을 지키고, 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고 안심하고 겁내지 않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겪고 있는 불안과 공포와는 대조적인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청해서 그분을 향해 물위를 걷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가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에 시선을 주자 자기의 안전을 의심하였고, 그는 물에 빠져듭니다. 예수님의 말씀 따라 걷는 신앙인이라고 해서 불안과 공포에서 완전히 면제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은 거센 바람을 만나고, 비록 자기를 삼킬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있어도 그분의 말씀 따라 걷습니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라는 베드로의 비명은 불안과 공포 앞에서 하는 신앙인의 외침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는 불안과 공포가 없는 삶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겪는 불안과 공포를 똑같이 겪으면서, 그러나 주님을 부르면서 사는 삶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 사람이 겪어야 하는 불안과 무질서에서 기적적으로 우리를 구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우리와 함께 극복하십니다.

불안과 공포와 불행이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만 무사하고 안전할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늘 불안하고 공포를 느낄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불안과 공포에 떨고 움츠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기적적으로 보호해 주신다고 억지 부리며 안심하고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것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 나의 존재, 내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 이 모두를 하느님이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에 대한 은혜로운 마음을 안고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같이 사람들이 세파에 시달릴 때 찾아가고, 그들이 절망에 빠졌을 때 구해 주는 노력을 합니다. 그리고 신앙인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안심하시오. 겁내지 마시오.’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들이 안심하고 겁내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잡다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잃을 것을 걱정하고, 일이 잘못 될 것을 두려워하며 불안에 가슴조리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나 자신이라는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무는 태어나고 자라고 사라지지만 숲은 있습니다. 우리도 받았듯이 잃고, 태어났듯이 사라집니다. 태어남이 은혜로운 것이 듯이 사라지는 것도 은혜로운 일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은혜로움을 실천하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나무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베푸시는 하느님이 계시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계시고, 그분을 따르며 그분에게서 배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백성인 숲이 있습니다.

서공석 신부
  |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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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용기를 내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이유가 바로 당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나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통해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서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용기를 주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그것은 바로 세상에 두려움을 갖는 내 안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믿음이 없음을 나무라셨습니다. 베드로의 두려움을 나무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두려움에 부드러움으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안심시키셨습니다. 마치 가위에 눌려 놀라서 깨어나 우는 아이를 어머니가 꼭 안아주듯,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두려움에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두려움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나무라신 이유는 너의 두려움에 내가 함께 있는데 왜 이 사실을 믿지 못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약함에서, 두려움에서, 감추고 싶은 과거에서, 즉 내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두려움 속에서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이 계시는 곳을 계시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려움을 약점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두려움이 우리에게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진정한 약점은 우리의 두려움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강함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그리면서 그런 하느님을 믿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애써 강한 척하고, 많이 가진 척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척합니다. 자신은 하느님과 함께 있는 강한 존재임을 보이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크고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가운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1열왕 19, 11∼12 참조)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는 것은 우리가 강할 때가 아니라 우리가 약할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한 우리 모두는 행복합니다. 우리의 약함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하느님의 손길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김원석 아우구스티노 신부
  |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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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돌보아 주시는 스승님,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떤 처지에 있든지 늘 돌보아 주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스승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닮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줍니다.

복음의 서두를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먼저 건너편으로 건너가라고 재촉하십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후 제자들이 흥분한 군중들에게 사로잡혀 잘못된 길에 빠져들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입니다. 스승님의 따뜻한 마음이 보입니다.

제자들을 보내시고 나서 혼자 조용히 기도를 하십니다. 세상의 파도에 맞서서 살아가야 하는 제자들을 위해서 당연히 기도를 하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을 걱정하시고 기도해 주시는 스승님이십니다.

그리고 파도와 맞바람으로 시달리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십니다. 제자들은 유령으로 오해를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힘들어하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시어 오해를 풀어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스승님이십니다.
이런 스승님의 격려에 힘입어 베드로는 주님이 계신 물 위를 걸어갑니다. 그리고 물에 빠져 구해달라는 제자에게 스승님은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믿음을 가져라”고 훈계하십니다. 신앙의 걸음걸이를 가르쳐 주시고 우리가 잘못하거나 실수를 하더라도 친히 손을 내밀어 주시고 신앙의 훈계로 우리를 양육해 주시는 스승님이십니다.

사랑 가득하신 스승님 밑에서 제자들 역시 스승님을 믿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하는 처절하고 갸륵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체험한 후 흥분의 현장을 떠나고 싶지 않았겠지만 스승님께서 가라고 하시니 떠나는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파도와 맞바람 때문에 힘들어 포기하거나 바람 부는 대로 편한 곳으로 뱃머리를 돌리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승님께서 목적지를 정해주시니 스승님의 명령대로 저녁이 되기 전부터 새벽까지 건너편으로 가고자 사투를 벌이는 충실한 제자의 모습을 봅니다.

스승님을 유령으로 오해하기도 했지만 예수님이심을 확신하고서는 예수님이 계신 물 위를 걷겠다는 용기를 가집니다. 자연의 이치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지만 그래도 스승님께서 계시고 불러주시니 초자연적인 곳으로 감히 발을 내디뎌 보려고도 합니다. 넘어지고 빠지더라도 주님이 계신 곳을 향해서 나아가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제자의 모습을 봅니다.

제자들을 사랑하고 돌보시는 스승 예수님과 스승님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스승님이 계신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은 오늘의 복음입니다.

▦ 부산교구 김효경 다윗 신부 : 2017년 8월 13일
  |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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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예로보암의 죄를 따라 하느님의 형상을 만들어 세워 놓은 단과 베텔에서 제사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 시돈 임금의 딸 이제벨을 아내로 맞아 바알에게 예배를 드리기까지 합니다. 그는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그보다 더한 짓을 함으로써 그 이전의 그 어떤 임금보다도 하느님의 분노를 돋우었습니다.(1열왕 17,29-34) 또한 이제벨은 주님의 예언자들을 학살하기까지 하였습니다.(1열왕 18,4)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분노하시어 이스라엘에 가뭄을 내리실 것이라고 예언하는데, 그의 예언에 따라 이스라엘에는 삼 년 동안 이슬도 비 한 방울도 내리지 않게 됩니다.

삼 년이 지난 뒤 엘리야는 아합을 찾아갑니다. 그러자 아합은 엘리야를 보자마자 대뜸 엘리야 때문에 이스라엘에 이러한 불행이 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이 모든 일이 아합 임금 때문에 벌어진 일임을 분명히 밝힙니다.(1열왕 18,16-19) 그리고는 카르멜 산에서 바알과 하느님 가운데 누가 진정한 주님인지 가리자고 말합니다. 결국, 주님의 불길이 바알의 예언자들을 모두 삼켜 버리며 하느님이야말로 진정 주님이심이 드러나고, 이스라엘에는 전과 같이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이제벨이 엘리야를 죽이려 하자 엘리야는 두려워하며 그곳을 떠나 브에르 세바로 도망가서 주님께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청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엘리야를 다독이시며 그를 당신의 산 호렙, 곧 시나이산으로 이끌어 들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엘리야 이야기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왜 이렇게 죽음까지 맞아야 하는지 하느님께 따져 묻습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로 일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야 하는데 혼자 남아 목숨마저 위태로워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합니다. 이런 엘리야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 모습을 드러내시는데, 크고 강력한 바람의 모습도, 지진의 모습도, 불같은 모습이 아니라,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그에게 나타나시어 엘리야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엘리야를 위해 직접 나서시어, 모든 일을 제자리로 되돌려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1열왕 19,18)

이처럼 주님께서는 당신 일을 하는 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를 돌보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곤 합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의 외침처럼 “나 주님께 바라네. 주님 말씀에 희망을 두네.”(시편 130,5)라고 노래하며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면서도, 종종 주님의 현존을 의심하곤 합니다. 이는 오늘 복음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은 배를 저어가다가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다가가시자 그들은 오히려 혼비백산합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로 걱정하며 예수님을 의심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권고하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또다시 의심하다가 물에 빠집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주님께서는 조용히 배 위에 오르시면서 풍랑을 멈추어 주십니다.

우리는 엘리야나 제자들처럼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두려움에 떨며 주님을 의심합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커다란 바람도, 커다란 불도, 커다란 힘도 아니라, 정말 실바람 같은 잔잔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언제나 조용히 다가오시어 우리 곁에 머물면서 힘과 용기를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오늘도 용기를 내어 살아갑시다. 그리고 이번 주간 맞이하는 성모 승천 대축일을 지내며 용기를 잃지 않고 주님과 함께 사셨던 성모님을 본받는 참된 성모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합시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7년 8월 13일
  |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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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참 매력적인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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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참 바쁘신 것 같습니다.
마태오 복음 14장이 말하고 있는 예수님의 일정을 적혀 있는 그대로 알아들으면 그렇습니다. 그 복잡한 일정 속에서 순간순간 바뀌어야만 했을 예수님의 감정선을 한번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무리하게 상상력을 동원해서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어이없는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동지와도 같았던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참을 수 없는 먹먹함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소식을 듣자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십니다. 그곳에서 홀로 목놓아 우셨을까요? 이런 예수님의 심정과는 무관하게 군중들이 몰려듭니다. 그분은 자신의 슬픔보다는 사람들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시며 사람들을 치유하고 가르치는 ‘일’을 또 하십니다.

‘감정처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참 잘하시는 분으로 보입니다. 엄청난 감정의 폭풍 속에서도 차분히 사람들을 먹이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 제자들을 가르칩니다. 제자들의 미숙함에 속상할 법도 한데 오천 명을 먹이시면서 제자들에게 담담히 이 일의 의미를 알려줍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후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군중을 돌려보내십니다. 군중을 돌려보내는 일을왜 제자들에게 맡기시지 않고 손수 하셨는지 상상해 봅니다. 날이 저물어가니 돌아가는 군중들이 걱정되었을까요? 아니면 그들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던 마음이었을까요?

예수님은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십니다.
저녁때가 될 때까지 혼자 그 산에 계십니다. 아버지와 함께 오늘의 일을 나누는 일을 하셨을까요? 아니면 미처 다하지 못한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마저 하셨을까요?

그런데 곧 호수에 맞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납니다.
기도 중에,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고 있을 제자들이 갑자기 생각이 나서 걱정되셨는지 서둘러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달려갑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제자들에게 달려갔지만 당신을 보고 제자들이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댑니다. 또 한 번 제자들의 미숙함에 속상할 법도 하지만 제자들을 애정어린 마음으로 다독입니다.

의연하시고, 당장의 상황에 철저하게 깨어 있으신 모습,
당신의 감정과 당신이 해야 할 일을 구별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참 매력적인 한 인간이십니다. 인간이신 이분의 매력은 곧 하느님의 매력입니다. 이분의 매력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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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상효 필립보 신부
2020년 8월 9일 ‘부산교구 주보’에서
  |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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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5   [대구] 자비·겸손·찬미·평화·사랑  [1] 2264
774   [대전]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160
773   [제주] 탈란트의 가치  167
772   [부산] 받은 것을 베풀고 나누고 살자  [1] 2437
771   [안동] 모든 이에게 주신 선물  2064
770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탈렌트talent의 비유)  [4] 1878
769   [수도회] 일상에 대한 진지한 접근  [1] 2590
768   [전주] ‘즉시 그리고 기쁘게’ 나누는 삶  2668
767   [서울]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3] 2914
766   [인천]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  [1] 1474
765   [수원] 깨어 있음의 중요성  [4] 3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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