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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구원을 위한 사랑과 자비
조회수 | 2,139
작성일 | 05.08.06
오늘 전례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혹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즉 모든 신적인 현시, 나타남의 행위는 사랑과 자비의 행위라는 것이다.

제1독서 : 1열왕 19,9a.11-13a: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주님

하느님 야훼께서는 하느님의 산인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신비스럽게 나타나신다. 이세벨 왕후의 비호를 받던 바알의 모든 예언자들을 살해하고 왕후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고 엘리야는 호렙산으로 피하였다. 오랜 도보여행으로 심신이 지친 엘리야는 하느님에 의해 놀랍게 원기를 회복한 후(1열왕 19,5-8) 그는 밤을 지내기 위해 한 동굴에 이르렀다. 그 때 야훼의 말씀을 듣고 동굴 어귀에 나와 섰다(11-13절 참조).

야훼께서는 모세 때와 같이 ‘바위를 산산조각 내는’ 격렬한 바람, 지진, 불길 가운데 나타나시지 않고 다정한 친구처럼, 은밀히 속삭이시며 살랑거리는 바람처럼 말씀하시며 나타나신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고 빨리 지나가는 그분을 알아 뵙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엘리야는 그분을 알아 뵙고 존경의 표시로 ! “겉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운다”(13절).

이 하느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위대한 사건뿐만 아니라, 거의 무의미하게 보이는 작은 사건 속에서도 현존하심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작은 일들을 통하여 충실성을 요구하신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노동, 만남 등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고통과 걱정에서까지도 충실성과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중대한 기회에만 등장하시는 분이라면 그분은 결코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방관자’가 되기 쉽다.

복음 : 마태 14,22-33 : 풍랑에 시달리는 배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권능과 자비를 드러내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들에게 친구로 다가오시는 분이지만, 또한 우주의 지배자로서의 권능도 가지신 분이시다. 또한 마태오는 예수님의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을 야훼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 홍해를 무사히 건너는 모세의 모습에 비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빵을 많게 한 기적 후에
즉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가라고 명하셨다. 이 기적사화는 두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즉 예수께서는 밤새 기도하시려 혼자 산에 오르시고(23절) 제자들은 폭풍우 속에서 살려고 애써 노를 젓고 있다. 그 폭풍우는 오직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야 멈추게 된다(32절). 즉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언제나 흔들리고 불안할 것이다.

이제 ! 그분의 현존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기도하러 가셨다가 사도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개입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잘 알아보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론적 차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아 뵙고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물위를 걷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무서운 생각이 들자 물에 빠지게 되고 예수께서 그를 구해주시며 믿음이 약함을 책하시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친다. 이때 제자들은 주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고백한다(28-33절 참조).

이 대목에 교회론적 관점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열정에 차서 그분을 닮아보려고 자신도 그렇게 해달라고 청한다. “주님이십니까? 그러시다면 저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28절). 그러나 처음보다는 신앙이 강하지는 못했다. ‘그러시다면’이라는 가정을 붙이고 있다. 또한 믿음이 있었다고 해도 거센 바람을 보자 그 믿음은 곧 사라져 버렸다. 베드로는 불! 과 몇 초 안 되는 사이에 최고의 신앙심과 의심으로 인한 극도의 두려움을 체험한다.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은 아니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31절).

우리는 풍랑에 흔들리는 배의 모습에서도,
베드로의 모습에서도 교회에 하나의 본보기가 되고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강한 반대를 무릅써야 하는 역사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같이 느껴진다. 그분께 대한 용기있는 믿음이 요구되지만 믿음이 별로 강하지 못하다. 위기에 부딪치게 되면 즉시 공포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하시기 위해 현존하신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그분께 의탁하여야 한다”(G. Barbaglio, in I Vangeli, Assisi 1975, p. 344).

"용기있는 믿음과 의탁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말은 오늘의 교회에도 해당된다.
오늘의 교회는 종교적 윤리적 인간적 문제들을 정면으로 맞대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 때문에 제자들처럼 폭풍우에 휩쓸려 갈 듯한 두려움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27절).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항상 역사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또한 항상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권능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필요한 것은 우리의 용기있는 믿음이다. 이것이 충족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사랑과 권능은 결코 약화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베드로 사도처럼
확고한 신앙을 갖지 못하고 넘어지고 쓰러질 수 있는 나약한 존재들이며, 그리고 풍랑에 시달리는 배와 같이 교회도 세상의 조류를 거슬러 가며 격랑에 심하게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항상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구원해 주심을 믿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계시를 담고있는 이 가르침을 교회론적으로 바꿈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께 대한 용기있는 믿음과 의탁하는 태도를 가지도록 한 것이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당신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삶의 도우심을 청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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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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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잘 될 때, 우리는 주님을 잊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은, 얼굴에 기름기가 돌고, 웃음이 끊이질 않으며 모든 것이 뜻대로 잘 된다는 이른바 ‘만사형통’의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만사형통의 삶을 꿈꾸거나, 그러한 삶에 맛들인 사람들은 재물, 명예, 권력과 같은 것을 세상에서 얻고 모든 것을 부족함 없이 누리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의 진정한 행복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에 주목해 봅니다. 무서운 바람을 멈추게 하신 예수님 앞에 제자들은 엎드려 절하며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께 신앙을 고백한 것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베풀 때도, 병을 치유하실 때도, 놀라운 말씀으로 가르치실 때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신앙고백은 겁에 질려 풍랑에 시달리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을 때, 강한 바람을 멈추시고 그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구한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졌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기에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훌륭한 스승님의 부름을 받았고, 예수님과 함께 그 멋진 여정에 동참한 것이 한없이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존경했으며, 예수님에게서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기적을 체험한 군중의 환호를 들으며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얻게 될 영광과 영예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만족했으며 행복했고,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것이 다 잘되리라는 기대와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되면서 제자들은 그들의 삶에서 예수님을 잠시 잊게 됩니다. 예수님과 몸은 함께 있지만 제자들은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예수님은 수난의 십자가 길을 걸어가지만, 제자들은 누가 당신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될지에 대하여 묻는 영광과 영예의 길을 추구하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가지 못하고 빠져버린 것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있어서 어떤 분이신지를 또다시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많은 것을 얻고 만사형통의 삶을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을 잊고사는 불행을 겪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죽을 고비에서 자신을 구해준 분이 예수님이심을 보고 그때서야 비로소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나를 구해주시고, 나를 살게 하시며, 나에게 생명을 다시 주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알 수 있는 ‘신앙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그 힘든 체험은 거친 풍랑 속에서 물 위를 걸어서라도 예수님께서 계시는 그곳으로 걸어갈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우리에게 줄 것입니다.

이정재(베드로) 신부
  |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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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 독서(1열왕 19,9ㄱ.11-13ㄴ)는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엘리야는
마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그랬던 것처럼
40일에 걸쳐서 하느님께서 머무르신다는 호렙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숱하게 불평을 늘어놓았기 때문에
미안해서,
아니 부끄러워서 하느님 앞에 선뜻 나서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마치 다 잊으신 듯이 당신과 맞서자고 엘리야를 부르십니다.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태풍과 지진이 일어난 듯했으며, 불이 타오르듯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소란스럽고 파괴적이며
별안간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엘리야처럼 소란스럽고 파괴적이며 불같은 성격으로는
하느님을 뵐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이런 소용돌이가 지난 다음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엘리야는 하느님을 만나러 얼굴을 가린 채 동굴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엘리야가
도시에서 멀어지고,
호기심을 주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를 지나고,
높은 산의 고독함에 친숙해질 때
그때서야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을 깨우쳐줍니다.

오늘 제2 독서(로마 9,1-5)는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무시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간청하는 내용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몹시 격한 감정으로 자기를 반대하는 동족들에게 자신의 아픔을 말합니다.
얼마나 커다란 아픔이었는지
차라리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나가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이라고 합니다.
소위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받았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오로 사도에게 거짓말로 하느님을 선포한다고 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지만
모두 당연히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로마 9,6)
그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진리는
그리스도를 바탕으로 세워졌으며,
자기 양심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께서 증언해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즉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격한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영광송을 바칩니다.

오늘 복음(마태 14,22-33)은
바다를 밟고 다니셨던 하느님께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군중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 하시고,
따로 기도하시려고
하느님께서 머무르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산에 오르셨고,
오랜 시간동안 거기에 머무르셨다고 합니다.

이때에
제자들은 뱃머리를 벳사이다 쪽으로 돌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 스타디온(192m) 떨어져 있다면 한참 떨어진 것입니다.
파도에 시달리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의 표현은 의도적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지 못하는 제자들의 공동체는
적대감을 품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고,
안전하지 못함을 상징적으로 말해줍니다.

새벽(3-6시 사이: 부활하신 시각)이라고 하는데
성경의 전통에 의하면 구원의 시간을 말합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면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제자 공동체를 의도적으로 괴롭히는 파도를 제압하신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그분이 유령인줄 알고 두려워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의 인사방식대로
아주 다정하고 조용하게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6절) 하십니다
(물 위에서는 작은 소리도 크게 들림).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실 때 하셨던 말씀(창세 15,1; 26,24)이며,
“나 말고는 하느님이 없다.”(신명 32,39)
“내가 바로 그분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나 이전에 신이 만들어진 일이 없고,
나 이후에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으리라.”(이사 42,10)
“내가 바로 그분이다.
나는 처음이며, 나는 마지막이다.”(아사 48,12)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라”고 합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물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걷습니다.
모두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걸었습니다.
베드로가 당신께 주님이라고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주신 것입니다(마태 28,18).
그러나
예수님께 대하여 의심을 했었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바람을 제압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두려움이 느껴지는 순간 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능의 손을 내미시고 붙잡아주십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물에 빠진 이유를
믿음이 약해서 의심을 했기 때문이라고 꾸짖으십니다.
장면은 즉시 배 위에서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즉시 바람이 그쳤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아니 배(교회) 안에 있는 공동체가 모두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두 가지 기적,
즉 물위를 걸어오심과 파도를 잠재우시는
그분의 권능을 보고 제자들이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셨듯이
우리 교회를 어려움에서 항상 구해주시는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줍니다.
교회가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는 늘 두려움과 아픔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아니 우리가 예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가르침에 우리 자신을 송두리째 맡겨드린다면
불안전한 물과 바람을 헤쳐 나갈 수 있음을 깨우쳐줍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바다를 밟고 다니셨던 하느님(시편 78,20)이심을 깨우쳐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떠났던 상황에서 맞이하는 어려움,
그때마다 찾아주시는 예수님을
확고한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련과 위기에서 벗어났을 때,
그때서야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는 어리석음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누구나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나 바오로 사도처럼 격한 감정으로는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없습니다.
엘리야처럼 고요하고 고독한 곳에서 기다릴 때,
바오로 사도처럼 차분하게 하느님을 찬미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베드로처럼 두려움 없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세상의 파도를 헤치고 뛰어들려고 할 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방식대로 살면서
하느님을 만나려고 한다면
늘 실패하고 세상의 파도에 휩쓸리고 말 것입니다.
그때마다
마치 시편 저자처럼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목까지 물이 들어찼습니다.
깊은 수렁 속에 빠져 발 디딜 데가 없습니다.
물속 깊은 곳으로 빠져 물살이 저를 짓칩니다.”(시편 69,2-3)라고 외칠 것입니다

방효익 신부
  |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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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용기를 내어라.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맞바람이 불어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을 그대로 놓아두시는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을 합니다. “지난번 폭풍 때는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타고 계셨지만, 지금은 제자들 뿐 입니다. 그분은 호수에 파도가 일도록 허락하십니다. 이것은 모두 그들이 세속적인 것들로 부터 쉽게 보호받기를 희망하는 일이 없도록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이 밤새 파도에 시달리도록 두십니다! 그들의 굳은 마음을 확실하게 일깨우기 위해서지요”(마태오 복음 강해 50, 1).

쉽게 얻은 것은 쉽게 포기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반면에 쉽게 보호를 받지 않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어렵게 얻은 것은 그만큼 오래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을 갖기란 쉽지 않은 듯합니다. 왜냐하면, 시행착오를 겪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시행착오를 두려워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지금 내게 놓인 상황이 그리 불편하지 않아 굳이 바꿀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행착오를 겪기 위해 내가 얼마나 떨어져야 하고, 그래서 다시 올라오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 예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 위해하향 조정된 목표와 수준에서 안주하려는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시행착오에 대한 두려움과 결과에 대한 불안이 찾아와 마음이 먹먹할 때,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우리는 두려움 없이 신앙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에 따라 물 위를 걸으며 믿음의 생활을 해 나간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무력감은 우리를 괴롭힙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에 놓인 것과 같은 마음이 들어 신앙의 길을 포기 하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매일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를 바치고, 계명을 충실히 지킵니다. ‘예전에 배 위에서 나를 건져주셨던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 것일까?’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찾아 올 때에 ‘예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외치고 싶기도 합니다. 더욱이 그런 마음에 의심도 찾아옵니다. 그런 의심에 예수님께서는 물에 빠진 베드로를 가만히 놔두지 않으시고 손을 내밀어 붙잡으시며 그에게 묻습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하신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믿음이 없다고 꾸짖으시는 느낌표가 있는 말씀이아니라, 주님께서 안쓰러운 마음으로 우리에게 물음표를 던지시는 말씀으로 다가 옵니다. 예수님의 물음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하고 싶은지 묵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수원교구 한창용 시몬 신부 : 2017년 8월 13일
  |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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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위기와 신앙의 동거’(마태오 14,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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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 속 장면은
오병이어의 드라마틱한 나눔(마태오 14,13-21 참조) 이후, 다시 평온을 되찾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분주했던 하루를 마무리하고자 외딴곳을 찾으셨고, 제자들은 스승보다 먼저 ‘타브가’ 지역을 떠나 북쪽에 위치한 ‘카파르나움’과 ‘벳사이다’ 근처를 향해 배를 저어나갑니다(요한 6,16; 마르코 6,45 참조).

예수님께서 동석하지 않은 배는
처음에 순항하는 듯했지만, 한밤중에 들이닥친 맞바람과 너울성 파도에 결국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이 탄 배에 다다랐을 때는 제자들이 사투를 벌이느라 거의 ‘넋이 나간 상태’였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삼킬 듯 일렁이는 파도,
난파선처럼 기울어지는 배. 이 상황에서 누군가 거친 호수 위를 걸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본다면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유령’으로 오인되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도, 그들은 눈앞의 스승을 뵙고도 무섭
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루카 24,37 참조). 슬픔과 절망으로 제자들의 내면이 가리어진 상태입니다.

어둠, 강풍, 파도, 난파와 같이,
이번에는 내면‘밖’의 여러 갈등 상황이 제자들을 쉴새 없이 몰아세웁니다. 다급해진 제자들은 마음의 여유가 사라지고 내면의 눈이 가리어져 바로 곁에까지 다가온 스승을 한 번에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처럼 내 존재 안팎을 둘러싼 여러 난항이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세상 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오 14,27)

예수님의 이 한 마디가
잠들었던 ‘내면의 눈’을 다시 뜨게 합니다. 비로소 삶의 악조건에서 다시 고개를 들어 그분을 천천히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 “오너라!”(29절) 베드로에게 하셨듯이 우리 각자에게도 용기 내어 당신 곁으로 ‘다가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이처럼
‘신앙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가장 빛을 발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사가 평온할 때는 내 신앙의 넓이와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모든 것이 제대로 작동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막상 크나큰 어려움과 직면할 때,
과연 나는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쉽게 좌절하고 괴로워만 하는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하느님을 신뢰하며 이를 담대하게 극복하려고 애를 쓰는지 분명히 판가름 날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려는 신앙은 절체절명의 위기일수록 전화위복의 값진 원천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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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박현창 베드로 신부
2020년 8월 9일 ‘수원교구 주보’에서
  |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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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7   [의정부] 사랑하라는 계명  [3] 2566
796   [대구] 심판의 기준  [2] 2718
795   [마산] 예수님은 나의 왕인가?  [4] 3597
794   [전주] 최후의 심판  [3] 3008
793   [부산] 연민과 봉사의 실천  [6] 3088
792   [안동] 구원의 길  [4] 3019
791   [대전] 희망을 품고 살아 갑시다.  [1] 1567
790   [수원] 그리스도께 합당한 신뢰와 사랑을  [5] 3198
789   [춘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3] 3181
788   (백) 연중 제34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독서와 복음  [1] 2755
787   [수도회] 모든 것이 다 선물입니다  [2] 2162
786   [청주] 주인을 바라보는 눈  178
785   [군종] 내가 가진 작은 것에서 부터  [1] 2232
784   [인천] 주님께서 주신 탈렌트  [2] 2352
783   [마산] 나의 달란트 어떻게 쓸까?  2327
782   [춘천] 착하고 성실한 종  [1] 2279
781   [수원] 결실을 맺는 활동적인 신앙생활  [3] 2409
780   [광주] 착하고 성실한 종, 악하고 게으른 종  142
779   [원주] 시든 꽃과 같이  2356
778   [서울] 하느님의 구원 계획  [5] 2644
777   [전주] "묻어둔 달란트를 적극 활용하자”  [1] 2512
776   [의정부] 받은 탈란트를 이웃을 위해  [1] 1772
775   [대구] 자비·겸손·찬미·평화·사랑  [1] 2264
774   [대전]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160
773   [제주] 탈란트의 가치  167
772   [부산] 받은 것을 베풀고 나누고 살자  [1] 2437
771   [안동] 모든 이에게 주신 선물  2064
770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탈렌트talent의 비유)  [4] 1878
769   [수도회] 일상에 대한 진지한 접근  [1] 2590
768   [전주] ‘즉시 그리고 기쁘게’ 나누는 삶  2668
767   [서울]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3] 2914
766   [인천]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  [1] 1474
765   [수원] 깨어 있음의 중요성  [4] 3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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