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가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63 42.4%
[수도회] 인생의 풍랑 앞에서
조회수 | 2,367
작성일 | 05.08.06
군사독재정권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양심의 소리에 차마 귀를 막지 못해 청춘을 차가운 콘크리트 벽 안에서 보낸 의인(義人)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무자비한 절대권력의 완강하고 높은 벽 앞에서 두려움을 느낄 때도 많았습니다. 때로 수치심에 치를 떨기도 하고, 생명의 위협도 자주 느꼈습니다.

다행히도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신앙과 낙천적 성격이라는 큰 버팀목이 그분의 흔들리는 삶을 잡아주었습니다. 담장 안에서 그분의 삶은 오직 두 가지뿐이었습니다. 독서와 기도생활. 기도생활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갈고닦았고, 독서를 통해 자신의 정신세계를 계속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다른 양심수들은 극심한 분노와 좌절, 억울함과 답답함으로 미칠 것만 같은 나날을 보냈습니다. 지속적 스트레스, 영양의 불균형으로 인해 여러 사람이 중병에 걸려 죽어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오히려 수감생활을 통해 더욱 균형잡힌 영육간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삶의 중심을 제대로 잡기만 한다면, 어떠한 뜻밖의 상황이 우리를 엄습할지라도 우리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열악한 분위기가 우리 삶을 덮칠지라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이 되시고, 우리가 그분을 굳건히 신뢰한다면 그 어떠한 인생의 풍랑 속에서도 우리는 내적 고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역풍은 일상적 일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은 나약한 속성상 언제나 흔들리고 표류하기 마련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춥고 배고픔, 상시적으로 다가오는 십자가는 기본입니다. 때로 우리가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수립했던 계획들이 송두리째 물건너갈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난데없이 날아온 돌에 맞아 우리의 온 삶이 한순간에 무너질 때도 많습니다. 단 하루도 못 보면 못 살 것 같던 그 사랑을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야만 하는 거짓말같은 순간을 맞이할 때도 있습니다. 역풍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어쩔 수 없이 맞이해야 할 손님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 안에 굳건히 자리하실 때, 그분께서 우리 중심에 살아계실 때, 우리는 어떤 세찬 역풍 앞에서도 보란 듯이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내면 깊숙이 그리스도 그분께서 형성돼 있다면 그 어떤 세상 풍랑 앞에서도 안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역풍을 만난 제자들 모습은 어찌 그리 우리 모습과 빼닮았는지요? 역풍을 만난 제자들은 겁에 질려 제정신들이 아닙니다. 그 상태에서 나타나신 스승을 보고 제자들은 혼비백산한 나머지 겁에 질려 유령이라고 소리지릅니다. 스승을 본 제자들은 반가워하기보다 부들부들 떱니다. 천지의 창조주이자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과 한 배에 타고 있으면서도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로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아직 자신들의 내면에 그리스도가 형성되지 않은 제자들, 아직 갈 길이 먼 제자들의 한심스럽고 미성숙한 모습입니다. 제자들 신앙 안에 아직 스승에 대한 정확한 대상 파악이 이뤄지지 않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역풍을 만난 제자들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 모습 같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매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우리 안에 주님이 항상 현존해 계신데도 불구하고 우리 역시 '주님이 어디 계신가?' 하고 외칩니다. 그분께서 늘 우리 안에 머물고 계시기에, 그 어떤 풍랑이 다가와도 안전함에도 우리는 걱정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합니다.

아직 갈 길이 먼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 모습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코 실망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으십니다. 제자 공동체의 갖은 결함 앞에서도 지속적으로 인내하시며 계속 그들을 향해 손을 내미십니다. 때로 인생의 역풍을 통해 제자들을 단련시키시는 등, 제자들 신앙을 한 단계 성숙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십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세파에 시달려 정처없이 표류하는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기꺼이 손을 내미십니다. 죽을 고생을 다하며 허우적거리는 우리에게 천천히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위로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

------------------------------------------------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463 42.4%
노를 저어 나아가는 신앙인

오늘 복음(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신 기적)은 지난 주의 복음(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 바로 다음에 나오기에,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 복음이 예수께서 허기진 이들을 위해 베푸신 기적이었다면, 오늘 복음은 절망 속에 있는 이들을 위해 베풀어 주신 기적입니다.

제자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을 통해서 가슴 벅찬 기쁨과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갈릴리 호수 한 가운데로 배를 저어가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해면보다 평균 280미터가 낮은 호수입니다. 주위에 높은 산에 가로막혀 있기에 갑작스런 돌풍이 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하기만 했던 호수라도 갑작스레 강한 돌풍이 불어와 파도를 일으킵니다.

제자들이 바로 이 돌풍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은 한 시간이면 건널 수 있는 호수를 새벽이 되기까지 건너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역풍이 불어 배의 전진을 막았고, 큰 파도가 덮치면서 배 안에 물이 찼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계속해서 노를 저으면서 물을 퍼내야만 했습니다. 비록 뱃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제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배의 이 고물에서 저 고물까지 또 좌현에서 우현까지 뛰어다니면서 물을 퍼내며 정신이 없습니다. 모두 두려움과 절망 속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그 누가 하느님을 찬미하고 영적 진리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이 두려움과 절망 속에 사로잡혀 있기보다 그들 발밑에 무엇이 있었는지 의식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들 발밑에는 바구니가 하나씩 놓여 있었습니다. 그 바구니들은 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서 남자만 해도 5천 명을 먹일 수 있었던 구원자 예수님의 능력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능력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했을 때, 제자들이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둘 분이 아닙니다.

그럼 제자들이 역풍을 만나서 고생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산에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울부짖던 그 순간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시고 있는 동안, 제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계속해서 노를 저어야 합니다.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계속해서 노를 저어야 합니다.

그 제자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는 수시로 풍랑이 이는 갈릴리 호수와 같습니다. 어떤 때는 생의 풍파가 너무나 격심해서 앞으로 나아갈 의욕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침에 눈떠서 저녁 잠자리에 들기까지 계속해서 세상 풍파 앞에 굴복하지 말고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송봉모 토마스 모어 신부· 예수회
  | 08.08
463 42.4%
“인생이라는 배와 풍랑”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후에 예수께서는 얼른 제자들을 배를 태워 보내고 당신이 손수 사람들을 돌려보내십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기도하러 산으로 가십니다. 이제야 비로소 하느님 아버지와만 함께 있는 시간을 보내십니다. 예수님께 꼭 필요한 시간이었지요. 우리도 조용히 산에 오르는 시간, 우리 삶을 돌아보며 하느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동안에 제자들이 타고 갔던 배가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갑자기 풍랑이 일기로 악명이 높은 호수입니다. 평시에는 그림처럼 잔잔하고 아름다운 호수가 갑자기 성난 듯 풍랑을 일으킵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에서 이런 풍랑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기도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배에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을 때 역풍을 만나 시련에 빠지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이 참으로 우리에게 복음, 즉 기쁜 소식인 것은 우리가 역경에 처할 때가 있지만 그때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구원의 손길을 내미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오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바람이 거세게 불어 닥칠 때, 우리 삶의 여정이 험난한 길을 따라 걷게 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손을 내미십니다. 순풍에 돛단 듯 흘러가는 것이 인생은 아니지요. 순탄치 못한 때가 더 많은 것이 우리네 인생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유혹에 빠지려고 할 때, 우리가 슬픔에 잠겨있을 때,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을 알아보는 눈과 열린 마음입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이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나다, 안심하여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곧 주님을 알아보고 그분께 다가갔습니다. 늘 제자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같은 주님께 다가가려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처럼 우리 인생길에 바람이 불어 닥치면 믿음이 약해져서 주님이 거기 계시다는 것을 잊고 무서워합니다. 베드로는 그때 주님께 구해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믿음이 약해져서 어려움에 처하게 될 때 도와달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달라고 외치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용기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약함 때문에 자주 넘어지기도 했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지녔기 때문에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청합시다.

우리가 늘 주님이 우리 삶에서 함께 계시면서 진정 우리가 필요할 때 마치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다가 가시듯’ 우리에게도 놀라움으로 다가오신다는 것을 잊지 않기로 합시다.

예수회 류해욱(요셉) 신부
  | 08.08
463 42.4%
물 위를 걷자

홀로 산에 오르시어 따로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역풍을 만나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 곁으로 물 위를 걸어오셨다. 욥은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이라 한다(욥기 9,8 참조). 베드로가 주님을 믿고 있는 동안에는 그분처럼 물 위를 걸어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자 그만 물에 빠지기 시작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베드로의 외침에 예수님은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며 그를 붙잡아 주셨다(마태 14,29-31).

백령도로 가는 여객선이 심한 파도로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180여 명의 사람들이 불안해하며 뱃멀미를 하고 아이들은 울기도 했다. 승무원들도 긴장하고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을 하는데, 할머니 한 분이 태연히 눈을 감고 묵주기도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 무섭지 않으세요? 풍랑이 심하고 배가 위험해요….” “아무 걱정 없어요. 큰딸을 만나러 가는데 배가 섬에 잘 닿으면 큰딸을 만날 것이고 배가 물 속으로 빠지면 석 달 전에 몹쓸병으로 죽은 막내딸을 만날 것인데… 모든 것을 하느님 손에 맡겨야죠.”

젬마 할머니 같은 믿음만 있다면 세상에 무엇이 두렵겠는가? 순교할 수 있는 믿음이 100이라고 하면 나의 믿음은 90, 75, 50(?)….

믿음이란 마음 속의 앎이요, 증거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앎이다. 겨자씨만한 살아 있는 믿음을 구하고 길, 진리, 생명이신 주님께로 나아가야 하겠다. 믿음의 가치를 체험한 이들의 말씀을 들어보자.

오로지 믿기만 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믿기 위해 하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알기 위해 믿는 것은 신성에 가깝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바르고 확실한 단 하나의 길은 믿음의 길입니다. 이 길은 덕에 나아가려는 사람의 길입니다. 감성의 온갖 것이 제 아무리 뛰어나도 사사로운 온갖 빛에 눈을 감고 걸어야 할 길입니다. 어둠 속에 있어도 믿음과 희망 안에 사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하느님은 당신을 지켜 주십니다.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마치 생명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역사가 하느님의 선물인 것처럼… 그 삶은 본질적으로 어둠 속의 도약이며 더 똑똑히 말하자면 볼 수 없는 하느님께 대한 도약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까를로 까레또).

믿어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먼저 믿어라. 그러면 나는 네가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너에게 더 위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존 포웰).
믿음은 겸손을 전제로 하고, 믿음은 기다릴 줄 알며, 깊이 있는 신뢰이다. 경험보다는 믿음이 진리를 더 빨리 파악한다(칼릴지브란).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 11,6).

박문식 베네딕토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 08.08
463 42.4%
[수도회] 참 행복한 삶

▪ 사랑, 기도, 믿음

누구나의 소망이 행복한 삶일 것입니다. 행복은 선택이자 발견입니다. 언젠가 살아야 할 행복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선택하여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행복도 발견입니다. 행복을 선택하여 살려 할 때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행복입니다. 알게 모르게 삶에 녹아있는 행복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에어콘 작동 성공! 역사적인 날! 감사합니다. 시간되면 잠시 오세요!”

어제 원장수사에게 보낸 텔레그램 문자 메시지입니다. 마침내 제 집무실에 공동체 형제들의 사랑으로 에어콘이 설치되었습니다. 작년에도 제자들이 에어콘을 해 준다는 것을 사양했지만 이번은 형제들의 사랑을 수용했습니다. 선풍기만으로는 참 불편했고 우선 면담성사차 무수히 찾는 분들을 생각했습니다.

세삼 형제들의 사랑에 감동했습니다. 여러 형제들의 에어콘이 잘 되느냐 묻는 평범한 말 속에도 사랑이 묻어 있었습니다. 한 형제는 고장난 문 열쇠 장치를 보고 곧 고쳐준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 없이도 수도형제들의 사랑의 배려를 발견하며 새삼 사랑도 발견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비상한 사랑이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사랑입니다. 어제 성무일도 새벽 독서기도시 계속됐던 시편 136장의 후렴과 미사시 신명기 제1독서도 잊지 못합니다.

시편 136장은 26절 까지 계속 반복됐던 후렴이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였고, 신명기 독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정말 하느님의 크고 작은 사랑을 체험하면 주님의 자비를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상에 널려있는 평범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형제들을 통한 크고 작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 하느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입니다.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전례기도 하느님 사랑은 물론 이웃 사랑의 촉진제가 활력소가 됨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사랑의 샘’같기도 하고 ‘사랑의 발전소’와도 같은 매일 규칙적으로 평생 바치는 시편공동전례기도입니다.

참 행복한 삶의 첫째 요소가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 삶의 의미이자 전부입니다. 삶의 허무에 대한 유일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갖췄어도 사랑빠지면 공허할뿐 사랑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 제2독서의 바오로의 동포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큰 감동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의 양심도 성령안에서 증언해 줍니다. 그것은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육으로는 내 혈족인 동포들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동포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바오로에겐 커다란 슬픔이자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과연 북녘 동포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어느 정도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지옥의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기 위해 성불을 포기했다는 지장보살이 생각납니다. 그리스도교의 지장보살처럼 생각되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고린토 1서 13장의 사랑의 찬가에서 보다시피 ‘사랑의 대가’ 바오로입니다. 동포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바오로의 하느님 사랑도 놀랍습니다.

“그분은 만물위에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입니다.”

오늘 제1독서 로마서 마지막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철저한 하느님 사랑이 있어 동포들에 대한 큰 슬픔과 아픔을 감당할 수 있었음을 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참 행복한 삶의 첫째 요소가 사랑입니다. 그러니 사랑을, 행복을 부단히 선택하고 발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참 행복한 삶의 둘째 요소가 기도입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기도해야 사람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마침내 기도와 삶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 저절로 호흡같은 기도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의 주인공들인 엘리야, 바오로, 예수님 모두가 한결같이 기도의 대가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한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기도하는 예수님입니다. 빵의 기적후 예수님의 신속한 대처가 인상적입니다. 분명 군중들과 제자들의 열광에 유혹의 위기를 느끼셨음이 분명합니다. 기도가 예수님을 지켜줬습니다. 제자들을 재촉하여 보내시고 군중들을 돌려 보내신후 지체없이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신 주님이십니다.

이렇듯 예수님처럼 매일 일상에서 잠시 떠나 기도할 수 있는 외딴곳 기도처를 마련해야 합니다. 관상에서 흘러나오는 활동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하여 분도회의 모토도 ‘기도하고 일하라.’입니다.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도, 제자들의 곤경을 알아챌 수 있었던 비결도 바로 아버지와 일치의 기도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분명 기도중에 풍랑에 위기를 겪던 제자들을 구해낼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기도의 힘’이였음을 깨닫습니다.

진정 찾아갈 곳은 ‘기도처’뿐이요, 진정 만나뵈올 분은 ‘하느님’뿐입니다. 살아갈수록 절감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그랬고 바오로가 그랬고, 하느님의 산 호렙을 찾은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하느님은 시끄럽고 혼란하고 요란한 와중에는 만날 수 없습니다. 고요할 때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강한 바람, 지진, 불속에서가 아닌 고요중에 하느님을 체험한 엘리야입니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동굴어귀로 나왔다.’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했고 간절히 하느님께 기도한 엘리야 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기도처인 산처럼, 하느님의 산 호렙 역시 엘리야의 가시적 중심이자 기도처였음을 봅니다. 여기 하느님의 산, 불암산 기슭 요셉수도원 하느님의 집에서 항구히 정주하며 기도의 삶을 사는 우리 수도형제들입니다.

셋째, 참 행복한 삶의 요소가 믿음입니다.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세상을 떠날 우리들입니다. 사랑하면 기도하게 되고 기도와 더불어 믿음의 성장과 성숙입니다. 타고난 믿음도 없습니다. 시행착오를 통해 보고 배우는 믿음입니다.

제자들이 믿음만 있었어도 풍랑에 혼비백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파도 흉흉한 밤, 호수가 상징하는바 인생항해중 곤경중의 우리 삶입니다. 믿음의 눈만 있으면 늘 함께 계신 주님이신데 제자들은 믿음의 눈이 닫혀 있었습니다. 하여 부끄럽게도 물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서 “유령이다!” 두려워 소리를 질러대는 멘붕의 제자들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일상에서 어려움을 직면할 때 마다 늘 상기해야 할 오늘 복음의 핵시 말씀입니다. 두려움을 몰아내는 믿음입니다. 애당초 믿음이 있었다면 이런 혼란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어 두 번째 믿음 부족을 보여주는 베드로의 적나라한 모습도 교훈입니다. 물위를 걸어 주님께 가다가 거센 바람의 유혹에 걷잡을 수 없이 두려움의 바다에 빠져드는 베드로였지만 그의 대처가 참으로 신속하고 정확했습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즉시 화살기도를 바치는 베드로입니다. 이어 “아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주님의 애정 가득한 꾸중을 들었지만 이런 체험을 통해 베드로는 물론 배안의 동료들의 믿음도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위태한 순간 구원받은 제자들의 이구동성의 신앙고백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 고백, 사랑고백, 희망고백, 찬미와 감사의 고백과 더불어 깊어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진정성 가득한 고백은 얼마든 좋습니다.

예전 중환자실의 노신부님을 문병했던 기억을 잊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의 화살기도와 흡사했습니다. 너무 괴롭고 아파 끊임없이 호소하는 듯한 말마디가 기도처럼 들려 간병 자매에게 설명을 부탁했습니다.

“날 살려 줘!”

겉으로는 진지했지만 속으로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날 살려 줘, 날 살려 줘, 날 살려 줘,---’ 곤경중에 끊임없이 바치기에 얼마나 적절한 짧은 기도문인지 감탄했습니다. 십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참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사랑하십시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도 끊임없는 선택이자 발견입니다. 기도하십시오. 기도해야 삽니다. 허무와 무의미의 어둠에서 벗어납니다. 결국 찾아갈 곳은 기도처뿐이요 만나 뵈올 분은 하느님뿐입니다. 믿으십시오. 하느님을 믿어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입니다.

셋은 하나로 연결되었음을 봅니다. 사랑할 때 기도요 기도할 때 믿음의 성장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중의 기도가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주님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 사랑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모두에게 참 좋은 믿음을 가득 선사하시며 두려움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주십니다.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2017년 8월 13일
  | 08.13
463 42.4%
[수도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 27)

다시 거센 바람이 불어옵니다. 출렁거리는 두려움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마주하게 되는 우리의 두려움에서 주님을 찾게 됩니다. 두려움이 가리키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의 바닥에서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어쩔 수 없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의 밑바닥에서 믿음을 택하게 됩니다. 우리를 이끌고 가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주님께 맡겨버리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두려움 때문에 해야할 것을 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용기를 내어라."(마태 14, 27)

살아있음은 용기를 내어 주님께 가는 것입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물위를 걷게 하시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걸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두려움의 문을 열어젖히고 우리 또한 주님 사랑에 흠뻑 빠져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적시지 않는 믿음은 모두 가짜입니다. 열렬한 믿음에서 가장 정직한 신앙고백이 울려 퍼집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태 14, 33)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7년 8월 13일
  | 08.13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804   [수도회] 예수님을 따르는 길  [1] 2783
803   [제주] 우리 주교님, 나의 주교님  86
802   [원주] 가깝고도 먼 길  [4] 3077
801   [광주] 누가 우리의 왕인가  [1] 2758
800   [서울] 하늘나라 백성이 지녀야 할 모습  [7] 3320
799   [군종] 자신을 내어 놓는 삶  [1] 1740
798   [인천] 그리스도 우리의 왕  [4] 3016
797   [의정부] 사랑하라는 계명  [3] 2566
796   [대구] 심판의 기준  [2] 2718
795   [마산] 예수님은 나의 왕인가?  [4] 3597
794   [전주] 최후의 심판  [3] 3008
793   [부산] 연민과 봉사의 실천  [6] 3088
792   [안동] 구원의 길  [4] 3019
791   [대전] 희망을 품고 살아 갑시다.  [1] 1567
790   [수원] 그리스도께 합당한 신뢰와 사랑을  [5] 3198
789   [춘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3] 3181
788   (백) 연중 제34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독서와 복음  [1] 2755
787   [수도회] 모든 것이 다 선물입니다  [2] 2162
786   [청주] 주인을 바라보는 눈  178
785   [군종] 내가 가진 작은 것에서 부터  [1] 2232
784   [인천] 주님께서 주신 탈렌트  [2] 2352
783   [마산] 나의 달란트 어떻게 쓸까?  2327
782   [춘천] 착하고 성실한 종  [1] 2279
781   [수원] 결실을 맺는 활동적인 신앙생활  [3] 2409
780   [광주] 착하고 성실한 종, 악하고 게으른 종  142
779   [원주] 시든 꽃과 같이  2356
778   [서울] 하느님의 구원 계획  [5] 2644
777   [전주] "묻어둔 달란트를 적극 활용하자”  [1] 2512
776   [의정부] 받은 탈란트를 이웃을 위해  [1] 1772
775   [대구] 자비·겸손·찬미·평화·사랑  [1] 2264
774   [대전]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160
773   [제주] 탈란트의 가치  167
772   [부산] 받은 것을 베풀고 나누고 살자  [1] 2437
771   [안동] 모든 이에게 주신 선물  2064
770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탈렌트talent의 비유)  [4] 1878
769   [수도회] 일상에 대한 진지한 접근  [1] 2590
768   [전주] ‘즉시 그리고 기쁘게’ 나누는 삶  2668
767   [서울]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3] 2914
766   [인천]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  [1] 1474
765   [수원] 깨어 있음의 중요성  [4] 3089
1 [2][3][4][5][6][7][8][9][10]..[21]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1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