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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하느님을 믿는 것은 이웃을 위해 자기 자신을 소모하는 것
조회수 | 2,551
작성일 | 05.08.26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제자들에게 예고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들과 대제관들과 율사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을 말립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복음서는 일어난 과거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문서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이 사실만 보도하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당신이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미리 다 알고 계셨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렇게 미리 다 알고 계셨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참다운 죽음이 아닙니다. 죽는 인간은 자기 죽음 후의 일을 모릅니다. 인간 체험에 죽음은 의심과 절망이 뒤섞인 심연으로 빠져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게쎄마니에서 ‘아버지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는 ‘하느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기도하셨다고 복음서들은 전합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예수님이 과연 알고 계셨다면, 이 기도들에는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을 말린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베드로는 자기 스승이 유대교 실세로부터 고난을 당하고 죽기까지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스승에 대한 베드로의 충직함에 감동하고 감사하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의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탄’이라 부르면서 당신에게 장애물이라고 꾸짖으십니다. 가혹한 꾸짖음입니다.

복음서들은 초기 교회의 믿음을 수록한 문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초기 교회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후,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과 더불어 제자들은 예수님의 삶을 배워 실천합니다. 그들이 복음서들을 집필할 때,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자기들의 기억과 믿음과 실천을 함께 수록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이미 어떤 실천을 하고 있었고,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그들은 그들이 믿고 실천하는 바를 그들의 복음서 이야기들 안에 담았습니다.

복음서들이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다 알고 계셨던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그분이 죽음을 피하다가 잡혀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평소에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으신 결과가 죽음이었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제자들의 공동체가 도달한 해석입니다. 이 해석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생명을 충만히 사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가르쳤고, 그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라, 죽이는 사람들 앞에서도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를 베푸셨습니다. 이 해석이 반영되어 각 복음서는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리라는 예고를 세 번이나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스승을 말리자 예수님이 보이시는 격한 반응도 사실 보도이기보다는 예수님에 대한 초기 교회의 신앙을 반영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시해야 할 것은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스스로를 내어 주는 데에 있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그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스승에 대한 인간의 정리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은 훌륭한 분이시니까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제자의 당연한 생각입니다. 복음은 그것을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죽음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신앙인이 읽어야 하는 하느님의 일이고, 이것이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철이 든다는 것은 자기 일을 자기가 알아서 해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일을 자기가 알아서 한다는 것은 자기의 미래를 위한 대책도 자기 스스로 세우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젊을 때 공부하여 자격증도 따고, 수입이 있으면 저축도 하며, 보험에도 가입합니다. 자기의 미래를 자기 힘으로 보장하려는 의도에서 하는 일입니다. 이런 생활 태도에 익숙한 우리는 신앙도 자기 한 사람의 미래를 보장하는 대책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리의 선교사들이 잘 외치는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는 말도 각자 자기 미래를 위한 대책을 세우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이라는 미래를 쟁취하라는 말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아 불행한 운명에 처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자비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믿고 가르치신 하느님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 자신의 미래를 위한 대책을 세우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우리의 삶 안에 받아들이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를 중심에 둔 우리의 좁은 시야를 버리고, 하느님이 중심에 계신 넓은 시야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때때로 고통스런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제 목숨을 잃는 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내 한 사람이 배부르고, 내 한 사람이 편안해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내 주변에 배고픈 사람, 고통스런 사람이 있으면, 그것을 없애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이 중심에 계신 넓은 시야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자기 한 사람 잘되기 위한 호신술(護身術)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비밀리에 교섭하여 기적적 혜택을 얻어서 자기 한 사람 잘되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비록 고통스러워도, 하느님의 자비와 베푸심을 자기 주변에 스스로 실천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소모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강요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원하는 만큼, 또 자기 능력만큼 실천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자기가 “할 일을 모두 하고 나서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가 17,10)라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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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지고 가기

“어휴, 못 살겠다. 죽겠다.” 누군들 정말 죽고 싶은 사람이 있겠습니까만, 삶의 무게에 짓눌릴 때 무심코 내뱉는 말입니다. 여기 또 다른 푸념이 있습니다. “저주를 받아라, 내가 태어난 날!(예레 20장, 14절) 자신의 생일을 두고 저주하는 심정. 오죽 힘들면 그러했겠습니까?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빌론 유배를 예고하면서, 유다 백성들의 진정한 회개를 호소했지만, 되돌아온 반응은 냉소와 혐오, 그리고 살해의 위협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레미야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의 처절한 심정을 드러낸 고백 중 다섯 번째의 것입니다. 자신의 예언직을 두고 주님의 꾐이라 하고, 주님의 말씀이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된다고 하며,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겠다고 할 정도이니, 그 가슴앓이가 어느 정도인지는 여러분도 충분히 짐작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쳐서 견디지 못할 정도로 주님의 말씀이 뼛속에 들어 있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결국 예레미야는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끝끝내 자신의 임무를 이어갔습니다. 그건 바로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였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장, 24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보며 즐기는 악취미를 갖고 있다는 말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바로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당신께서 예루살렘에 가시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것을 예고하는 대목입니다. 누구나 피하려는 고통이지만, 당신 스스로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기꺼이 지겠다는 결의에 찬 모범을 보여주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으로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거나 묵인해주는 것이 훌륭한 처세법인 양 받아들여지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방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십자가를 회피하려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오히려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로마 12장, 2절)

김정호 베네딕토 신부
  |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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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삐용’합시다

모임에서 건배사를 하게 될 때가 있다. 술잔 앞에 놓고 긴 건배사는 분위기 깨기 십상이다. 간단하면서도 주목을 살 수 있는 건배사를 하기란 쉽지 않다. 최근에 내가 자주 하는 건배사는 ‘빠-삐-용’이다. 교회 사목에 어울리는 말 같기도 하다. ‘빠삐용’이란 “빠지지 말고 삐치지 말고 용서하며 살자”란 뜻이다.

빠지지 맙시다.

공동체의 기본은 참여에 있다. 가톨릭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모두들 각자의 삶을 살고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이고, 하느님 나라의 한 가족이다. 포도를 알갱이로 팔지 않고 한 송이씩 팔 듯 포도나무의 가지인 우리도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하느님 앞에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듯이 공동체에 내가 빠진 자리를 대신 메워줄 사람은 없다. 성당의 큰 봉사자가 아니어도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신자의 의무이다.

삐치지 맙시다.

간혹 성당에서 인간 관계의 불편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다. 성당의 봉사자나 때론 수도자들에 대한 불만을 표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성당은 친목 단체가 아니다. 내 생각과 비슷하고 내가 좋아할 사람들만 있는 곳이 아니다. 나의 친소와 관계없이 모두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들이다. 형제끼리 싸우면 좋아할 부모 없듯, 하느님도 반목하는 자녀들을 곱게 보실 리 없다. 내 생각만 주장하며 공동체에 불화를 일으키고 투정을 부리기보다, 열린 마음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대해야겠다.

용서합시다.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누군가를 용서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얼마나 많은 용서를 받고 있는지를 따져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주님을 배신하고 세속의 즐거움에 빠져 지낸 일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리는 고통 속에서도 주님은 언제나 나를 용서하셨다. 행여 자존심이 상하거나 쑥스러워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 힘든 대상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 주님께 기도드리는 건 어떨까. 이미 내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이 용서와 화해의 방법까지 일러 주실지 모른다.

여름의 뒷걸음질이 끝나면 만나고 싶은 친구들이 있다. 지금은 귓가에 흰머리가 숭숭한 성당의 주일학교 친구들. 신부님, 수녀님께 혼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가끔씩 만나 한잔 하자고 권할 생각이다. 물론 그때도 내 건배사는 ‘빠삐용’일 것이다.

탁은수 베드로 신부
  |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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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희망을 갖고 미래를 예상하며 살아갑니다. 현실 안에서의 충실한 삶은 자신의 미래를 보장해 줍니다. 모두 같은 모습이 아니라 각자 처해진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로 약속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대로‘주어지고 해야 할 일’에 충실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십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며, 예수님 입장에서는 꼭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면에만 집착해서 스승을 위한답시고“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합니다.‘부활’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수난’에만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하시며 아주 강하게 야단치십니다.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심한 질책을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만 만일, 우리 자신이 주님을 위해서 한 일인데 마찬가지로 심한 질책을 받게 된다면‘우리 자신’은 어떠한 반응을 보이게 될까요?(묵상)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약속’대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형제 여러분,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을 우리는 얼마나 충실히 따르고 계십니까?‘자유’라는 명목으로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편하게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자유(의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따르는 것을 선택할 때, 올바른 것을 선택할 때 비로소‘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이유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알려주고 있습니다.“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이 말씀은 보상과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삶’을 사는 사람, 즉‘능동적인 전례 참여’와‘희생과 봉사, 선행’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은총을 받게 되고 더 많고 깊은 사랑을 받게 될 것입니다.‘종말’때 절망과 두려움이 아니라‘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 부산교구 우종선 신부 - 2017년 9월 3일
  |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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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탄아, 물러가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태 16,16)라는 질문에 시몬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당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유다 지도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야 한다는 사실을 밝히기 시작하십니다.

이제껏 많은 병자를 고쳐주며, 빵도 많게 하여 배고픈 이들을 먹이는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당황해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하던, 아니 전혀 바라지 않던 방식의 하느님의 계획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통, 죽음, 어려움을 없애 줌으로써 사람들을 편안하게 살도록 이끌어 주는 메시아가 아니라,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처럼 다른 이들의 조롱거리가 됨으로써 주님의 일을 이루게 되는 그런 메시아임이 드러난 것입니다.(예레 20,7-9)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베드로는 이번에도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을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 고백 뒤 처음으로 하느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밝히신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는 스스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아니, 오히려 하느님의 계획을 방해하며 나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베드로를 두고 “사탄”, 곧 유혹자라고 부르십니다. 당신께서 밝히신 하느님의 계획을 방해하고 다른 길을 가도록 하는 “유혹자”라는 말입니다.

사실, 베드로의 주장이 전혀 이해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라면 당연히 메시아가 병도 고쳐주고, 가난도 없애 주며, 모든 억압을 풀어주는 분이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모든 것이 잘 되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길이 이와는 전혀 다른 길, 곧 고통과 수난, 죽음을 향한 길임을 밝히십니다. 세상 모든 이를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기 위해서는 당신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 역시 진정 구원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려면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밝히십니다. 베드로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옳지 않다고, 자신이 따라야 할 길에 적합하지 않다고 반대합니다.

베드로의 반대가 예수님께는 큰 유혹으로 다가왔을 수 있습니다. 실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에 같은 유혹을 느끼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기도하시며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길이 당신의 길임을 분명히 알고 계셨기에 기꺼이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며 당신께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수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혹을 물리치신 것은 이때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에게 처음 유혹 받으셨을 때도(마태 4,1-11), 사탄에게 “물러가라”라고 명하시며 유혹을 뿌리치신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동일한 유혹 앞에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명하십니다.

하지만 이번에 말씀하신 “물러가라”(휘파게)라는 표현 뒤에는 “내 뒤로”라는 뜻을 지닌 “오피소 무”라는 표현이 덧붙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명령은 “떠나라”는 명령이 아니라, “내 뒤로 물러서라”는 명령이 됩니다. 사탄처럼 유혹으로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지 말고, 그냥 당신 뒤로 물러서 있으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 뒤로 물러선다는 것은 예수님 뒤를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말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하듯이 우리 몸 전체를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로마 12,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것만이 자신의 목숨을 진정 얻는 길임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이것만이 영원한 생명, 곧 하늘나라로 나아가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7년 9월 3일
  |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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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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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능력이나 가치를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또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이 잘되기를 바랍니다. 실패나 좌절보다는 성공함으로써 자신의 삶이 평안하고 행복해지리라 생각합니다. 신앙인인 우리도 은연중에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기대합니다. (성가 515장 후렴 : 주여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 생에 기쁘고 즐겁게 해주소서.)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사람 즉, 예언자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알아보고 존경해주리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죄를 지적하며 심판하시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회개하기보다, 거짓 예언으로 여기고 예레미야를 거짓 예언자로 매도하고 붙잡아 때리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치욕과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신 안에 있는 그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더라고 고백합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미리 밝히시는데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는 장면을 전해줍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온 이스라엘 백성이 믿고 따라야 할 분으로 결코 백성의 지도자들에 의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이와 같이 오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불행함을 고백하는 예레미야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는 베드로를 만나게 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태 겪어보지 못한 비정상적인 나날을 보내는 우리는 계속 들려오는 뉴스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 시련이나 반대에 부딪히지 않고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바라지만, 현실적으로 그러지 못할 때 불행하다고 여기고 하느님께로부터 벌을 받거나 버림받은 것이 아닐까하는 두려운 생각마저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꾸짖으십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습니다.
신앙인인 우리가 바라고 행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로마 12.2) 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려움이나 시련을 피할 수 있게 되기를 청하기보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과연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실까 하는 것을 묵상함으로써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고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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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세명 안드레아 신부
2020년 8월 30일 ‘부산교구 주보’에서
  |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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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9   (녹) 연중 제30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5] 2261
768   [수도회] 신앙의 핵심은 오직 예수님  2074
767   [전주]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2139
766   [청주] 내 생명, 내 재산, 내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  1273
765   [대구] 하느님께 바쳐야 할 몫은 내 안에서부터!  [1] 2263
764   [춘천]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1] 2228
763   [원주] 거지신앙과 순교신앙  1030
762   [수원]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로”  [1] 2156
761   [군종] ‘너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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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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