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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십자가가 은총임을 깨닫는 순간
조회수 | 2,496
작성일 | 05.08.27
며칠 전에 한 아이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아직 '새파란' 나이임에도 꾸부정한 어깨에 잔뜩 주눅이 들고 '삭은' 얼굴을 보니 산전수전 다 겪은 듯했습니다. 알고 보니 아이는 이미 두 번이나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을 나온 후 '더 이상 방황은 없다'며 굳은 각오를 세웠지만, 와 닿는 현실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사람들 시선도 곱지 않았습니다. 취직하는 곳마다 뭔가 꼬여서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쫓겨나오기를 밥 먹듯이 반복했답니다. 아이의 그런 모습 앞에 저는 너무도 안타까워 할 말을 잃었습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녀석이 왜 이렇게 힘이 없냐고 가슴 딱 펴고 힘내라고 잘 될 거라며 어깨를 두드려줬지만, 아이는 피식 웃기만 했습니다. 덩치는 산만한 녀석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이렇게 말해서 또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이 세상 어딜 가도 절 받아주는 데가 없어요. 다시 '그곳'으로 들어가는 게 오히려 편할 것 같아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일자리든, 있을 만한 곳이든 조만간 알아봐주겠노라고 타일러 겨우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 아이가 지고 가는 십자가가 너무나 커보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아이가 지고 있는 십자가 무게를 덜어줄 수 있겠는지, 며칠을 두고 고민했습니다.

이 한세상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양한 삶의 십자가와 그 십자가에 수반되는 좌절, 고독과 직면하게 됩니다. 난데없이 다가온 병고, 실직, 가정파탄, 우울증, 신경과민, 거듭되는 실패…. 그 끝도 없는 어둠의 터널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의문 앞에 서게 되겠지요.

'진정 하느님이 계시긴 하는 걸까? 하느님께서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라는데, 어찌 이렇게도 철저하게 나를 망가트릴 수가 있겠는가? 하느님께서는 어찌 이리도 큰 십자가를 내게 보내시는가?'

때로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느님도 무심하시지'라는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십자가는 난데없이, 그리고 쉼 없이 다가오는 것입니까? 피할 방도는 없습니까? 어떻게 십자가를 이해해야 합니까?

한평생 십자가를 예방하면서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조심 살아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누구도 무작정 십자가를 피해 다닐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중 하나가 '십자가에 대한 적극적 수용' '십자가의 가치 인정' '십자가에 대한 의미 부여'입니다. 결국 십자가 앞에 대범해지는 길입니다. 십자가에 지나치게 연연해하지 말고 십자가를 친구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십자가 가운데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고맙게도 우리가 매일 걷는 십자가 길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십자가의 인간' 예수님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가 지고 가는 매일의 십자가에 대한 이해와 수용, 의미 부여가 가능합니다.

번민과 고통의 십자가가 엄습해오는 순간은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순간으로 생각하십시오. 치욕의 십자가가 다가오는 순간은 하느님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은총의 순간임을 기억하십시오.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이런 날과 마주치겠지요. 수많은 지난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가슴 치게 되는 날이. 그 혹독했던 고통이야말로 그분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날카로운 비수 같아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그때 말 한마디야말로 가장 효과가 탁월한 내 인생의 보약이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고 싶었던 그 지루했던 일상의 굴레들이 행복의 원천이요 도구였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시시해 보이는 순간순간이 꽃봉오리였음을 깨닫는 순간. 결국 십자가는 은총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 말입니다.

그런 순간이 조금이라도 빨리 다가온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그 순간은 우리 삶과 신앙이 크게 한 단계 비약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은 정녕 깨달음의 순간이요,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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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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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사는 길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고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라고 세 차례에 걸쳐 예언하셨다(마태 16,21-23; 17,22-23; 20,17-19). ‘되살아나다’라고 번역된 말은 본래 ‘일으켜지다’라는 뜻이다. 곧 예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겪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지만 하느님에 의해 일으켜지셨다는 대비 사상이 들어 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이순신 장군이 이 성경의 구절을 알았을까? 그 역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라는 명언을 남겼으니, 이는 보편적 진리가 아니던가?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당신 사랑을 완성시켰다고 생각했고, 그분 안에서 생명을 얻도록 우리에게 당신 아들을 보내신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깨닫게 하셨다고 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사랑이 십자가를 통해 자신 안의 모든 것을 치유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변화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믿었다. 그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시고 우리의 고통을 끝까지 함께 나누다가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영광을 드러내신 분이시다”(안셀름 그륀).

결국 예수님께서 바로 ‘나만’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마음 깊이 깨닫게 된다. 이기적인 생각 같지만 ‘나만’을 위하여가 결국 ‘모든 사람을 위하여’가 되는 것이다. 십자가 뒤에 부활의 영광이 주어진다. 삼종기도 때마다 우리는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 주소서”라고 기도한다. 십자가란 죄악, 절망, 슬픔, 고통, 실패, 더러움, ‘죽음의 대명사’였는데, 그 사형틀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제는 구원, 기쁨, 희망, 사랑, 생명의 도구가 되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십자가를 벗어버린 채로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한다. 그래서 고통의 십자가를 치워 주기를 바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다.

김장 김치가 맛을 제대로 내려면 배추가 다섯 번 죽어야 한다. 땅에서 뽑혀서, 통배추의 배가 갈라지면서, 소금에 절여지면서, 맵고 짠 양념에 범벅이 되어서, 김치독에 담겨 땅에 묻혀야 제대로 된 김치 맛을 낸다고 한다.

내가 죽지 못하니 내 안에 죽어 계신 예수님을 내가 살려 내야 한다. 죽어야 산다. 이것은 보편 진리이며 변할 수 없는 진리이다. 또한 자기 비움이 있어야 한다. 나는 과연 내 자신을 얼마만큼 버릴 수 있는가? 오늘 내가 져야 하는 십자가는 무엇이고 얼마나 무거울까?

걱정할 것 없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아버지시기에 나를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시기에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십자가 무게를 지워 주시며, 아울러 그것을 지고 갈 수 있는 힘도 주시는 분이시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

박문식 베네딕토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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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마태오 복음 16장 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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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십자가이다. 십자가가 행실이 되고 행실이 십자가가 된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찾게 되는 십자가가 생명이다. 십자가의 언어가 영혼의 언어이다. 십자가를 질 때 모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느님의 영광은 십자가의 영광이다.

나의 뜻을 내려놓아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자신을 버려야 십자가를 자연스레질 수 있다. 목숨을 버려야 목숨을 얻을 수 있다. 살아있기에 십자가가 있다. 흐르는 것이 십자가이다. 행실대로 갚아주는 것이 십자가이다. 끝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십자가이다.

사람을 키우는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약속이 이루어진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데려다 줄 나의 십자가에 감사드린다. 갚아야 할 십자가의 빚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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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0년 8월 30일
  |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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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성적인 신앙과 인간적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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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있고 나서,
예수께서는 처음으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겪고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예고하십니다. 이 예고 앞에서 베드로가 심하게 반발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를 향해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꾸짖으십니다. 이 꾸지람 앞에서 머물러 보고 싶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이 꾸지람은 베드로는 물론 모든 제자들을 향한 꾸지람입니다. 이 점은 마르코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꾸짖기 전에 먼저 다른 제자들을 둘러보셨던 것입니다(마르 8,33 참조).

열성적인 신앙과 인간적 욕망으로 갈라져 있는 베드로의 이중적인 모습은
다른 제자들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베드로가 수난을 예고하신 예수님을 붙들고 했던 말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22절)는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대신해서 했던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일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이기적 목적만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보다는 주님이 우리를 따르도록 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할 일을 정해 주기보다는 우리가 주님에게 할 일을 정해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복음성가 중에 다음과 같은 성가가 있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우리가 입으로 이 성가를 부르면서
우리 몸과 마음도 이 성가를 부르고 있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입으로만 이 성가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양손은 재물을 잔뜩 움켜쥐고 있고, 입으로는 예수님밖에 없다고 하면서 마음은 세상 온갖 명예와 인간적 정념(情念)에 붙들려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베드로처럼
자기 내면에 있는 어떤 이해나 욕망을 하느님의 뜻이라 부르면서 그것을 채우려고 합니다. 분명 하느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은 하나의 섭리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예언자 요나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도망치려 할 때 요빠 항구에서 배 한 척을 발견합니다. 막 출항하려는 배를 보면서 만약에 요나가 하느님 섭리로서 그 배를 타고 도망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섭리를 자기 식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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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송봉모 토마스 모어 신부
  |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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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가?
아니면 그분의 걸림돌이 되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오늘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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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으로부터 수제자 직분을 부여받은 것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은총의 선물로 받은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가족들이나 친지들, 고향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서 마음껏 대놓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을텐데, 입을 다물고 있느라고 고생 많이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던 베드로 사도를 향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놀랄 정도로 날이 잔뜩 서 있습니다. 거의 독설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간 공들여 쌓아올린 높은 탑이 일거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오 복음 16장 23절)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수님은 인재 양성의 대가였습니다. 제대로 된 제자 하나, 그것도 수제자를 키우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수제자 특별 교육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조화롭게 섞어가며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때로 큰 격려와 칭찬도 아끼지 않으시지만, 절대 우쭐해지거나 기고만장하지 마라고 강력한 철퇴와 자극도 동시에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수제자가 스승님으로부터 사탄이요 걸림돌이라는 강력한 질책을 듣게된 가장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짚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하느님 나라는 생각하지 않고 세상의 달콤함만 추구했던 것입니다. 고통과 십자가, 희생과 헌신은 철저히 외면하면서, 세속적인 성공만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도 예수님의 제자요 사도들의 후계자로 살아가면서, 그분의 분신이요, 그분의 기쁨이고 영광이 되는 존재로 살아가기보다는, 그분의 걸림돌로서 사탄처럼 살아가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키는 사람들, 생명수와도 같은 복음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존재 자체로 이웃들에게 민폐요 진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주님께서 그토록 혐오하시는 이 시대 사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갈길이 먼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대대적인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엄중하게 베드로 사도를 질책하셨고, 삶의 근본적인 태도나 노선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킬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요 오른팔이 되는가? 아니면 그분의 걸림돌이요 사탄이 되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고통과 십자가를 기꺼이 수용하는가? 아닌가? 에 달려있습니다.

오늘 우리 각자 어깨 위에 얹혀진 십자가, 때로 포기하고 싶고, 즉시 내려놓고 싶은 생각 간절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짐을 통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며, 동시에 영원한 생명의 길에 참여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오늘도 억지로,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감사와 기쁨의 마음으로 매일의 십자가를 짊어져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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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2020년 8월 30일
  | 08.30
460 76%
우리의 삶의 현실에는 갖가지 어려움들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특히 요즈음은 코로나 19 감염원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어려움과 고통, 죽음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비록 그 형태는 다를지라도, 결코 그것들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어찌할 수 없는 불편함과 어려움, 고통과 죽음은 우리의 무능과 약함과 한계를 깨우쳐줍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십자가가 구원의 힘’임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일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통을 극렬하게 보여줍니다. 예레미아는 기원전 6백년 전후, 유다왕조가 이집트와 연합하여 바빌론의 침입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오히려 “유다는 망해야 한다. 바빌론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선포했던 예언자입니다. 이는 유다왕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반역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과 사제, 거짓 예언자들과 관리들이 일어나 예레미아를 잡아 가두고 폭행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미움을 당하고, 고통당하고, 폭행당해야만 했습니다. 예레미아는 이러한 극한적인 고통 속에서 원망조로 이렇게 읊조립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거리만 되었습니다.”(예레미아 예언서 20,8)

그러나 모두에게 저버림을 받아도, 자신이 반역자로 취급될지라도, 결국 외쳐야만 하는 하느님의 말씀이 그에게는 존재의 근거요 힘이요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과 죽음을 수락하는 삶, 그 안에 구원이 있음을 본 까닭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힘임을 본 까닭입니다.

<제2독서>는 십자가가 구원의 힘임을 믿음이 구체적으로는 봉헌이란 형태로 드러납니다. 곧 일상 속에서 자기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곧 일상의 크고 작은 갖가지 어려움과 고통을 사랑으로 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거룩한 산 제물”이요, 바로 이것이 우리가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칠 것을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의 메시아적 행위, 곧 구원의 행위는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곧 당신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내어줌으로써 성취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충격적인 말씀 세 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21절)는 예고 말씀으로, 승리자와 통치자로 등장할 것으로 예상했던 메시아가 수난을 받아 패배자의 모습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것이요,

<둘째>(22-23절)는 베드로와의 대화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리라는 전대미문의 놀라운 예고요, <셋째>(24-28절)는 고난 동참 요구와 상급 약속으로, 메시아를 따르는 자에게는 능력과 권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에의 동참이 요청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베드로처럼, “맙소사 주님!” 하며,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양 여기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려움과 고통과 죽음을 피하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는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하고 우리를 질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그런데 우리는 십자가를 받아들이기보다 피하려 합니다. 마치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결국에는 자신을 ‘제물’로 내어놓아야 하고, 되고자 하는 자신을 내려놓아야 하고, 나아가서 하느님께 희망하는 것마저 기꺼이 버리고 오로지 하느님의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쉽게 베드로처럼, “맙소사 주님!”(마태 16,22) 하며,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로 치부해버리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어려움과 고통과 죽음을 피하려고 할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마태 16,23)

그렇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변 안전을 위하고 있을 때, 혹은 자신을 귀찮게 하는 노고를 피하고 있을 때, 또는 그가 나에게 잘해주는 지를 따지고 있을 때, 바로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구원의 힘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곧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에 동참하는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자신을 살아있는 제물로 바치게 하소서!
제 삶이 산 제물로 드리는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하소서!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마태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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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길을 인도하시는 당신을 따라 걷게 하소서.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면서도 따라 걷게 하소서.
한두 번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어도 피하지도 거부하지도 말게 하소서.
자신을 지키기보다 타인을 살리기 위해 끌어안게 하시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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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20년 8월 30일
  | 08.30
460 76%
참으로 삽시다

-사랑하라, 새로워져라, 겸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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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참으로 살 수 있나?
요즈음 누구나 묻게 되는 질문일 것입니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대해 구구절절 처방도 많습니다만 딱 부러진 처방은 없습니다. 참으로 불확실하고 예측할 수 없는 미래입니다. ‘탐욕-기후위기-팬데믹19-홍수’라는 일련의 관계를 봅니다. 버려지는 무수한 쓰레기들을 볼 때 마다 정말 이래도 되는가 싶습니다. 뿌리에는 무지의 탐욕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어제 읽은 ‘사제생활 십요司祭生活 十要’(산위의 마을; 박기호 신부)라는 글이 생각납니다. 사제만이 아니라 믿는 모든 이들이 명심해야할 내용도 있습니다. 아주 잊고 지내기 쉬운 일상적이자 본질적인 요소들입니다.

-1.오늘 미사를 나의 첫 미사처럼, 마지막 미사처럼, 오직 한 번뿐인 미사처럼 봉헌하자.
2.미사 30분전 반드시 제대 앞에 앉아 기도하자.
3.모든 사목에서 주님과 동업하고 동료들과 협력하자.
4.복음과 인문학 서적을 늘 가까이 하며 시대의 징표를 주시하자.
5.매일 한 시간 이상 육신 노동으로 건강과 창조성을 일깨우자.
6.매사에 옳음을 따르되 ‘내 생각이 반드시 옳다’고 믿지 말자.
7.화났을 때 결정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별하자.
8.경어와 친절과 예의를 습관되게 하고, 선물은 감사히 받되 즉시 나누자.
9.‘부러워할 것’과 ‘부끄러워할 것’을 가려 알자.
10.게걸스럽게 먹지 말며, 명품과 유락을 밝히지 말자.-

한마디로 요약하면 오늘 지금 여기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다하며 제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로 늘 새롭게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늙음도 죽음도 아닌 녹슨 삶입니다. 맑게 흐르는 강물같은 삶이 아니라 웅덩이에 썩은 물같은 고인 삶입니다. 삶이 녹슬면,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이 되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막 살아도 안되지만 흐릿하게 살아도 안됩니다. 오늘 지금 여기 깨어 참으로 맑고 향기롭게, 늘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어제 주보에서 읽은 어머니를 그리는 아들이 생전에 주고 받았다는 모자의 대화가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0일전 1월1일 새해 인사차 어머니를 찾아 뵈었다. 그때 평소 안 하던 말씀을 하셨다. “널 내가 낳았다는 게 믿기지 않아.” 평생을 가톨릭 신자로 살아오신 어머니에게는 맞지 않는 질문을 무심코 해봤다. “어머니는 이 세상 다시 태어나고 싶으세요?” “너를 아들로 만난다면 또 태어나고 싶지.”-

유언과도 같은 이말보다 자식에게 큰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분명 아들 마음 안에 영원히 살아있을 참 잘 사셨던 어머니임이 분명합니다. ME모임에서 다시 태어나도 부부가 되고 싶은 분은 손들어 보라 했을 때 가만히 눈을 뜨고 보니 자기 부부뿐이었다는 어느 자매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저 역시 다시 살아도 수도사제로 이렇게 뿐이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요즘 산책때 자주 즐겨 부르는 ‘늙은 군인의 노래’(김민기)가 있습니다. ‘이강산’ 대신에 ‘수도원’을, ‘군인’대신 ‘수도자’를, '어언 30년' 대신 '어언 40년'을, ‘푸른옷’ 대신 수도복 ‘검은옷’을 넣어 불러 보며 영원한 현역, 주님의 전사로서의 신원과 영적 전의戰意를 새로이 하곤 합니다.
-“나 태어나 수도원에 수도자 되어
꽃피고 눈 내리길 어언 40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수도원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검은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

정말 하루하루 살아온 전혀 회한도 아쉬움도 없는 수도생활입니다. 그래도 저절로 후반부 “꽃다운 이 내 청춘”을 되뇌며 때로 거울을 보곤 합니다. 퇴영적이 아니라 오히려 저에겐 영적 전의를 새롭게 하는 노래입니다.

저절로 자문해 보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참으로 진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셋으로 요약됩니다.

첫째, “사랑하라!”입니다.

말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 저의 하느님, 제 영혼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화답송 후렴처럼 늘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사랑은, 예수님 사랑은 말씀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말씀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은 영혼의 식食이자 약藥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자 빛이자 영입니다.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깨어 늘 말씀에 귀기울였던 말씀의 사람이자 말씀을 사랑하고 살았던 말씀의 선포자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다섯 번째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예언직의 비극에 대한 원초적 고백입니다. 평생 매일 강론을 써야 살아갈 수 있는 저에게도 공감이 가는 고백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말씀을 사랑했던 예레미야인지 깨닫습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

주님은 불입니다. 사랑의 불, 말씀의 불입니다. 무지의 쓰레기를 태워버리는,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말씀의 불, 사랑의 불입니다. 사랑의 불이, 말씀의 불이 불붙어 정화되고 성화된 영혼은 말씀을, 하느님을,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 “새로워져라!”입니다.

몸은 노쇠해가도 마음은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깊어져야 합니다. 육신의 탄력은 떨어져도 영혼의 탄력이 떨어져선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코 무감각, 무기력, 무의욕, 무의미, 무감정, 무의식이 되어선 안됩니다. 하여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바오로 사도가 가르쳐 주는 진리입니다.

바로 오늘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에 앞서 나온 ‘하느님 찬미가’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가 새로운 삶을 위한 마르지 않는 샘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의 권고를 통째로 인용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참으로 말씀을 사랑할 때, 하루하루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에 충실할 때, 저절로 정화와 성화의 은총이요 분별력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늘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늘 맑게 흐르는 강같은 영혼으로, 늘 녹슬지 않고 반짝이는 영혼으로 늘 깨어 사는 것입니다.

셋째, “겸손하라!”입니다.

겸손해야 비로소 사람입니다. 삶은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겸손의 여정입니다. 삶의 깊이를 반영하는 겸손입니다. 그러니 삶의 모든 부정적 일들은 겸손의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그냥 두면 상처지만 겸손의 계기로 활용하며 치유와 더불어 영적성장에 성숙입니다.

섰다 하면 넘어집니다. 예수님의 인정과 축복에 잠시 방심했던 베드로 큰 유혹에 빠져 반석 같은 존재가 걸림돌 같은 존재로 전락하는 순간 예수님의 충격적인 처방입니다. 말 그대로 겸손의 수련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타고난 믿음도, 겸손도 없습니다. 겸손할 때 배웁니다. 이런 사건을 통해 베드로는 자기의 한계와 약함을 깊이 체험하면서 겸손을 배웠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배움의 여정, 겸손의 여정입니다. 겸손을 배워가면서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겸손의 여정에 결정적 처방을 주십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물음은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나?’로 구체화됩니다.

답은 다음 말씀 하나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그대로 십자가의 길은 겸손의 여정, 비움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닮아 참 내가 실현되는 예닮의 여정, 구원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사랑과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날이 갈수록 새로워짐), 겸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끝으로 제 자작 좌우명 기도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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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0년 8월 30일
  |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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