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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버들 피리
조회수 | 2,585
작성일 | 05.08.27
제가 갖고 있는 어릴 적 아름다운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버들피리에 대한 추억입니다. 초등학생 때 친구들과 함께 보리피리나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곤 했습니다. 물오른 버드나무를 칼로 잘라 아주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버드나무를 비틀면 속나무와 껍질이 분리됩니다. 적당한 거리로 칼로 구멍을 내고 한쪽 끝의 껍질을 적당히 긁어내지요. 그리고 껍질을 나무에서 조심스럽게 빼내면 훌륭한 피리가 됩니다. 구멍 크기와 길이가 제각각이어서 도레미솔의 정확한 음색이 나질 않아도 적당하게 배합하여 불어대면 아주 신이 나고 즐거워지지요. 버들피리를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 불 때면 더욱 재미있고 신이 났습니다. 들판을 걸으며 제각각 신나게 피리를 불어댔습니다. 먼저 소리가 나는 것이 신이 나서 좋았습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친구들이 자기 멋대로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들이 한데 어우러져 재미난 화음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요즈음 경제적으로 살기가 어려워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아주 낮게 평가를 합니다. "내가 이것 밖에 못되나."하고 자책하기도 하고, 자신의 못난 부분만을 확대시키기도 합니다. 자신에 대한 실망을 넘어서 자신을 그렇게 낳아준 부모나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한번은 피정 중에 면담이 있었는데 한 피정자가 "자신은 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서품을 앞둔 사람이었는데 그 뉘앙스가 하느님께 초점을 둔 고백이 아닌 자신에게 초점을 둔 고백으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이러한 말을 해 주었습니다. "여기에 대나무 파이프와 황금 파이프, 보석으로 장식된 파이프, 프라스틱 파이프가 있다고 합시다. 이러한 파이프의 용도는 무엇입니까? 물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대나무 파이프나 황금 파이프, 다이아몬드 보석으로 장식된 파이프나 프라스틱 파이프 이들 모두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그 파이프가 하느님이라는 바다와 연결 되어 있다면 모두가 같은 물을 세상에 흘러 보냅니다. 거기에는 부족하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피정자는 얼굴이 활짝 펴졌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바다와 같은 하느님의 마음에 내 전존재를 박고 그분 진리의 말씀이 흘러나오도록, 그분 사랑이 흘러나오도록 자신을 열어 놓는 것이 아닐까요?

어릴 적 버들피리의 추억을 다시 떠 올립니다. 굵은 버들피리는 굵고 낮은 소리를 냅니다. 가는 피리 소리는 가늘고 높은 소리를 냅니다. 굵고 가는 피리소리가 어울려 함께 소리를 내면 더욱 아름다운 소리가 되어 푸른 들판을 더 빛나게 만들었던 그 때가 그립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렇게 살아간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심한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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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거기까지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인 오늘 복음은 별개의 내용처럼 보이는 두 부분(마태오 16,21-23; 24-27)으로 되어있으며, 지난주일 복음(마태오 16,13-20)과 연결해서 보면 더 흥미롭다는 말로써 서론 이야기를 대신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오늘 복음은 주님의 수난 예고입니다. 본시 이야기라는 것이 본 내용 보다도 예고편이 더 재미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예고편은 재미가 없습니다. 재미는커녕 썰렁한 분위기입니다. 그래서(재미없어서) 조금 전에(지난 주일복음) 예수님으로부터 새 이름도 받은 후 최고의 칭찬을 듣고 하늘나라의 쇳대?까지 받아든 베드로 사도가 '맙소사 주님!' 하며 하나도 재미없다고 항의 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베드로더러 당신의 예고편을 제대로 이해 못하였다고 아주 호되게 야단치십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내 놓아야(루가 12,48) 하는 것인지, 최고의 칭찬을 받은 베드로는 최악의 꾸중을 듣게 되고 마침내 사탄이라는 소리까지 듣고 맙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베드로도 나쁜 말을 한 게 아니었습니다. 스승이 죽으신다고 말씀 하시는데 그렇게 하시라고 말하는 제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고 야단을 치십니다. 뭘 어쩌라는 걸까요? 실로 대략난감 입니다.

먼저 생각해 볼 사실은 베드로가 야단을 맞은 시점입니다. 시몬 바르요나였던 어부가 이제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칭찬과 함께 막중한 책임도 맡습니다. 바로 그 순간이 그가 주님으로부터 사탄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시간입니다. 잘 나갈 때 스스로 삼가고 무거워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마치 우리들처럼 세상과 교회 안에서 새 이름 받고 직함 하나 받았다고 스스로를 삼가지 못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직분 하나라도 받으면 스스로의 능력인 냥 어제의 형제자매를 우습게 여기거나, 성직을 무슨 능력에 따른 직업처럼 생각하며 변해버린 우리들의 자화상처럼 말입니다. 아무튼 이제 죽으신다는 주님 앞에서 손사래를 치는 베드로는 더 이상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 잡던 순박한 어부 베드로가 아니라 엉뚱한 방향으로 내달리려는 본래의 베드로로부터 이탈되고, 왜곡되고, 소외된 다른 베드로였습니다. 빨리 변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변한 것이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의 사랑 말고는 이 세상의 모든 가치와 우리 모두는 변화합니다. 그러기에 변화자체가 나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어디로부터 어떻게 변화하는가 하는 방향성이 문제입니다. 새 이름과 새 직 분을 받은 베드로가 변하는 것은 자연의 순리와도 같습니다. 주님은 그 변화 자체를 야단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욕심과 더불어 교묘하게 숨겨진 야심으로 방향 지어진 베드로의 잘못된 방향을 질타하신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말로는 주님의 안위를 걱정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투자와 그 결과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심한 꾸중과 함께 그런 베드로를 흔들어 깨우십니다. 베드로야, 이 사탄 같은 놈아 정신 차려라!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뿐인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면 됩니다. 나의 방향이 틀린 것을 알게 되면 눈물과 함께 제 방향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나, 제자나, 이웃이나, 동료가운데 그 누가 오늘의 베드로가 되어서 그를 흔들어 깨워야 할 때 주님처럼 해야 합니다. 흔들어 깨우되 그 이상은 어떤 것도 마음에 담거나 감정으로 지니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를 최악으로 야단치시고 계속해서 그를 사랑하신 주님처럼 말입니다.

배달하 신부
  |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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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뜻 버리고 하느님 뜻 따라야

성모상 앞에 있는 봉헌함의 돈이 자꾸 없어지자 신부님이 도둑을 잡으려 아기 예수상 뒤에 숨어서 지켜보았습니다. 해질녘이 되자 한 거지가 들어와 성모상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성모님, 오늘도 한 푼도 벌지 못했습니다. 하오니 아무 말씀 없으시면 허락하는 걸로 알고 돈을 가져가겠습니다."
 
그는 인자한 표정으로 말없이 서 계신 성모님께 꾸벅 감사인사를 드린 후 봉헌함에 손을 들이밀었습니다. 다급해진 신부님이 소리쳤습니다.
 
"안 돼!"
 
놀란 도둑 거지가 고개를 홱 돌리자 아기 예수상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기고만장해서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너희 엄마가 가져가라고 하시잖아!"
 
이 불경스러운 우스갯소리에서 도둑 거지의 순수한 믿음은 기특(?)하지만 '성모님이 가져가라 했다'는 것은 억지 중 억지입니다. 눈앞의 상황을 제멋대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고 적용한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마치 하느님 뜻인 것처럼, 자신의 뜻을 이뤄가면서 마치 하느님 뜻을 실행하는 것처럼, 자신을 위하면서 마치 하느님을 위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 사도가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고초를 겪은 후 십자가에서 죽을 거라고 하시니까 베드로가 펄쩍 뛰며 반대합니다. 하느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간적 눈으로만 봐서 예수님 십자가를 반대한 것입니다.
 
하느님 뜻과 인간 생각은 이렇게 다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심하게 꾸짖고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뜻을 따르려면 자신의 뜻을 버려야 하고, 자신을 죽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신자들은 하느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뜻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느님 뜻을 내세워 자신의 일을 정당화하지만, 많은 경우 그들이 내세우는 '하느님 뜻'은 사실 알고 보면 '자신의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하느님 뜻에 맞추려 하지 않고 하느님을 자신의 관점에 맞추려 합니다.
 
몸이 좀 아프고 피곤하면 '하느님도 이해하시겠지'하며 주일미사에 빠지고, '남들도 다 그러니까 하느님 뜻에 크게 어긋날 게 없다'며 옳지 않은 것을 고집합니다.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에게는 '때가 되면 주님이 다 도와주실 거야'하며 꽁무니를 뺍니다. 바로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처럼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면서 하느님 뜻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정신병원을 뛰쳐나온 한 환자가 큰 고목에 올라가 자살소동을 벌였습니다. 출동한 경찰이 만일을 대비해 나무 주변에 매트리스를 깔고 환자를 설득했지만, 환자는 곧 떨어져 죽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가족과 경찰은 할 수 없이 종교의 힘을 빌려보기로 하고 스님과 목사님을 모셨습니다.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을 외우고 목사님이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간절히 기도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오신 신부님이 나무 가까이 다가가 말없이 환자를 바라보고 십자성호를 그으며 축복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렇게 발작하던 환자가 나무에서 조용히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환자가 신부님의 십자성호 긋는 모습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사제가 십자성호를 긋기 위해 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고(l),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긋는 모습을 보고, "너, 나무 위에서 아래로 안 내려오면 이 나무를 (옆으로) 잘라버린다"로 알아듣고 잽싸게 내려온 것입니다.
 
잘못 알아들은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하느님 뜻을 따르게 됐습니다. 삶이 고통스럽다고 고통을 피해 죽으려는 자신의 뜻을 버리고 소중한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하느님 뜻을 실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잘못 알아듣고 하느님 뜻을 따르게 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하느님 뜻을 깨닫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도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라고 전합니다. 우리 행동이 정말로 하느님 뜻에 맞는지, 아니면 하느님 뜻인 줄 착각해 자신의 생각을 실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박용식 신부
  |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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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 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즉 하루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 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리며, 새날이 시작되면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엎어 주는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압니다. 그렇지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낙타는 당신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당신에게 짐을 얹어 주십니다. 이 때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짐을 받으십니까? 낙타와 같은 겸손한 모습입니까?

요즈음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려는 젊은이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혼해서 남편 또는 아내라는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결혼을 해도 자식을 낳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식을 짐으로 여깁니다. 배우자에게도 자식에게도 매이기 싫다는 것입니다. 곧 십자가를 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일찍 혼자 됐어도 자식을 자기 십자가로 알고 모두 키웠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고 자기 전 생애를 바쳤습니다. 모두가 자기 운명으로 자기 십자각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운명은 내 운명이고 네 운명은 네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까? 첫째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따르면 제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로 십자가를 져야 하느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십자가를 부인 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따릅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를 위해 지신 십자가이기 때문에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가 무겁고 힘들수록 삶의 은총도 보람도 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짐이 되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천국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 원주교구 김태진 베네딕토 신부 - 2017년 9월 3일
  |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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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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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의 주제는
그리스도교 신자로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의 신앙이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참된 신앙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당시 제자들이 생각하던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메시아에 대한 기대감을 저버리고 예수님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예언자들이 고난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예수님 자신도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함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은 그 길이 편하고 행복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가 백성들에게 진실을 알려줌으로써 겪어야 하는 고통에 대하여 하느님께 불평을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예언자로서 소명을 받았을 때 장차 큰일을 하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더니 오히려 날마다 놀림감이 되고 모든 이에게 조롱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거부하려고 애를 쓰지만 뼛 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딜 수가 없다고 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우리의 삶 자체를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정신을 새롭게 하고 자신이 변화되게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신앙과 생활의 일치를 이루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즉 나의 삶 안에서 세상을 본받지 않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나 자신이 바뀌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깨달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에게 있어
너무도 쉽게 빠지게 되는 잘못이
예수님을 내 방식대로 받아들이면서 따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고통받는 종의 모습으로서의 메시아임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잘못 알고 있는 베드로는 그분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성공만을 앞세우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우리는 매일 자기를 버리고 자신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보다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며
그분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따르기에는 우리 자신이 너무도 부족하고,
그런 부족한 모습을 인정하기가 싫어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노력을 뒤로 미루거나
좀 더 쉽고 편한 방법으로 따르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보다
큰일을 위해 작은 것을 버리는 자유로운 결단이며
뚜렷한 목표를 위해 적극적으로 자기실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놓으신 예수님이 바로 그 본보기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계신 하느님,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 희망, 기쁨을 감추고 있는 것을 더 참을 수 없기 때문에
늘 새로운 시작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모두 안에 있는 하느님 말씀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타오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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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성현 대건안드레아 신부
2020년 8월 30일 ‘원주교구 주보’에서
  |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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