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가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60 66.4%
[서울] 잘못한 형제 구하기
조회수 | 2,769
작성일 | 05.09.02
제가 군복무 시절에 겪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내무반의 고참병 한 사람이 불쑥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 신부된다고 했지? 나도 누나가 성당에 다녀서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었어. 그런데 한 번은 주일에 누나와 함께 성당에 갔는데, 미사 끝나고 나오니까 신발장에 벗어 두었던 내 신발이 없어진 거야. 새 신발이었는데 말이야. 화가 나서 성당에 다시 안 나갔어. 성당에 도둑이 있으면 어떻게 하냐?”

교회는 세례를 받고 새롭게 태어나 착하게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만,
그 안에서 죄와 잘못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믿는 이들에게는 신앙의 걸림돌이 되고, 믿지 않은 이들에게는 교회를 비난하는 구실이 됩니다. 사실 신자들이 범하는 죄와 잘못으로 인한 문제는 교회가 처음부터 안고 있었던 문제입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심각하게 잘못을 저지르는 신자들 때문에 적지 않게 고심했던 것 같습니다(1고린 5,1-13; 갈라 6,1; 2데살 3,14-15 참조).

이렇게 교회 내의 죄와 잘못은 지속적으로 어려움을 안겨 주는데,
오늘 복음은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가르침을 줍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잘못한 이들에 대한 대처는 세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에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사람 존중’의 정신이 배어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잘못한 형제를 일대일로 만나서 그 잘못을 타일러 주는 것입니다. 보통은 한 사람의 잘못을 직접 일깨워 주기보다는 뒤에서 흉을 보고 주위에 소문을 내는데, 이런 경우 잘못의 당사자는 회개는커녕 억하심정으로 더욱 빗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예수님은 먼저 일대일의 대화를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일대일의 대화가 효과를 보지 못하면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한두 사람 더 데리고 가서 다시 한 번 설득하는 것입니다. 혼자보다는 여러 사람이 같은 목소리로 얘기하면 귀담아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한 이가 회개할 수 있도록 최대한 기회를 주는 조처라고 하겠습니다.

이것마저도 실패로 끝나면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교회 공동체에 잘못한 이를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는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으로 여기라고 하십니다. 교회 안에는 주님이 거하시기 때문에 교회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주님과 교회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큰 잘못을 하면
당사자의 구원이 위협받는 것은 물론 교회의 신뢰성마저도 손상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잘못을 묵인해서는 안 되고, “그 죄인에게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라고 타일러”(제1독서)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훈계는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의 정신”(제2독서) 안에서 형제를 구하는 것을 목표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죄인의 죽음이 아니라 죄인이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

서울대교구 손희송 베네딕토 신부
460 66.4%
사랑의 충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에게 가장 많이 충고를 해 준 사람은 부모님입니다. 지금도 저의 건강을 염려하시면서, “신부님, 살을 좀 뺐으면 좋겠고 운동을 꾸준히 하세요”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어느 부모님이나 자녀들을 위한 사랑의 마음에서 그들이 올바른 길을 가도록 충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가끔은 이런 부모님의 충고가 다 큰 자식들에게는 잔소리로 들리기도 하지만, 부모님의 자식들에 대한 충고가 이어지는 까닭은 부모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여전히 당신들의 가슴 안에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저는 저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충고하는 데는 어려움을 느낍니다. 일단은 서로가 눈살을 찌푸릴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불편한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과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지거나 악화될 것이라는 걱정에 웬만하면 그냥 참고 넘어갑니다. 그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용기가 없기도 하지만, 사실을 고백하면 나에게는 잘못한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이 부족합니다. 그가 만약 나의 가족이었다면, 그를 사랑하기에 용기를 가지고 그의 잘못에 충고를 했을 것입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마태 18,15). 복음은 다른 사람을 대동하거나, 교회에 알리기 전에 나에게 잘못을 범한 그와 단둘이 만나라고 강조합니다. 복음에서 죄를 지은 사람을 가리키면서, 어떤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를 형제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그가 비록 나에게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신앙 안에서 한 가족을 이루는 형제자매임을 분명히 합니다. 형제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는 그것을 밖으로 떠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남들이 모르게 그에게 조용히 다가가서 충고를 합니다.

죄를 타이르고 충고를 해 주는 것은 형제를 대하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열린 마음은 형제에 대한 사랑의 마음에 토대를 둡니다. 참으로 가까운 친구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서로 간에 서슴없이 충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친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에 대한 열린 마음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가까운 친구가 아니라면, 충고로 인해 관계에 금이 가고 친구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친구가 형제보다도 가까운 사이라면, 우리는 잘못한 친구에게 기꺼이 충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친구를 잃는 두려움보다 친구를 아끼고 사랑하는 열린 마음을 지닌 까닭입니다. 마찬가지로 단둘이 만나서 타이르고 충고하는 것은 먼저 그를 향한 열린 마음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형제에게 충고할 때, 율법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충고의 토대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만이 충고는 힘을 지니고 또한 효력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충고는 잔소리일 뿐입니다. 충고가 법과 규정에 기초하고 있다 할지라도, 잔소리처럼 쉽게 흘려듣게 됩니다. 사랑의 충고를 하기 위해 우리는 잘못한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이의 잘못을 타이르기 전에, 먼저 그를 사랑하기 위한 토대에 서기 위함입니다. 기도하고 충고하면 잔소리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충고하면 그것은 나의 충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충고가 됩니다. 나의 충고를 통해 주님께서 그의 잘못과 부족함을 채워 주는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김영춘 베드로 신부
  | 09.05
460 66.4%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사랑입니다

이런 말 들어보셨는지요?
 
"남이야 전봇대로 이를 쑤시건 말건 무슨 상관이냐?"한 마디로 참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 시대 많은 사람들은 남의 일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을 뿐더러 특히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우리에게 오늘 독서와 복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누가 악한 길을 가고 있을 때 지나쳐서 그 사람이 죽게 되었다면 경고하지 않은 사람에게 죗값을 묻겠다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또한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하고 말씀하십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타일러도 말을 잘 듣지 않고 선생님이 학생을 야단치기라도 하면 봉변당하기 쉬운 시대가 요즈음 우리가 사는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잘못된 길을 가는 이에게 바른 길을 가도록 충고해야 할 의무를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지혜롭게 바른 길을 안내할 수 있을까요?
 
신부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는 동안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2년을 지내면서 앞날이 혼미하던 그 시절, 답답한 마음에 어떤 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늦게까지 이야기도 하고 술도 마시면서 1년 반을 지냈는데 어느 날 새벽 4시쯤 집에 들어갈 때였습니다. 담을 넘어 들어가니 어머니가 서 계셨습니다.
 
"왜 담을 넘어오느냐? 벨을 누르면 언제든지 문을 열어줄 터이니 다시는 담 넘어 다니지 말거라."
 
어머니께서는 이 말씀만 하시고는 두말도 없이 들어가 버리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한 말씀이셨지요. 그 다음부터는 밤늦게 다니지 않았습니다. 충고라는 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되는 것이지요.
 
오늘 제2독서는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 13,8)라며 사랑이 충고의 정신임을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심을 가지고 대하면 사람은 반드시 변하기 마련입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빅토르 위고의 「장발장」 이야기를 아시지요? 주인공 장발장은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빵 한 조각을 훔쳐 먹습니다. 그리고 이 빵 한 조각 때문에 수감과 탈옥을 반복한 끝에 19년간 중노동을 선고받고 출소하지만 전과자란 낙인 때문에 어디도 몸을 두지 못하고 미움과 적개심만을 키우게 됩니다. 그러던 중 어떤 사람의 안내로 밀리에르 신부를 만나게 되고 하룻밤을 성당에서 묵게 됩니다. 신부는 장발장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먹을 것을 주며 위로합니다. 장발장은 처음 받는 인간적인 대접에 감격하게 되고 양심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나 신부가 잠든 사이 장발장은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은 접시를 집어 들고 도망칩니다. 경찰에 붙잡힌 장발장은 성당으로 끌려오지요.
 
"신부님, 혹시 은 접시를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래도 이 사람이 성당에서 훔친 것 같아 검문하다가 잡아왔습니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장발장을 바라보고 있던 신부님이 대답하지요.
 
"아닙니다. 그 접시는 내가 이 사람에게 선물로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은촛대까지 그에게 가져가라고 쥐어줍니다.
 
그 날 이후 장발장은 딴 사람이 됐습니다. 이름을 바꾸고 열심히 일해 백만장자가 되고 존경받는 시장이 되었습니다. 불쌍한 이웃을 돌보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지요.
 
충고는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내 이웃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혜롭게 충고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공동체를 만들라는 가르침이지요.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체험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이기양 신부
  | 09.05
460 66.4%
용서하는 사랑

오늘 복음성서에서 첫째 교훈은, 어떤 형제가 우리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형제적 사랑으로 타이르며 참고 기다리며, 용서하는 사랑을 증거 할 수 있는 증인 세 사람이나, 교회 공동체를 동원해서라도 회개시키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교훈은,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곳에는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밝히심으로써, 우리 개인들은 먼저 다른 무엇보다도 교회란 공동체와 떨어진다면 주님과도 떨어진다는 엄연한 현실을 지적하십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살인 강도 유괴 치한 등 강력 사건들의 연속이나 그 해결책은 속수 무책인 것입니다. 느느니 증오심만 팽배하여 극에 이르고, 나만 안 당하면 그만 이라는 공범자적 이기주의는 신문 뉴스 소식이 하루 지나면 휴지 쪽같이 내동댕이쳐 버리듯 무관심뿐입니다. 이에는 이빨로 악에는 더 큰 처벌만이 능사가 된 죄와 벌의 악순환으로 희생자만 늘어갑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한 개인이거나 공권력을 가진 공동체나 인간다운 면과 인내로이 기다리는 용서하는 사랑으로 개과천선시키기보다, 이건 죄를 지었으면 일벌백계주의로 한 번 벌하여, 백 가지 범죄를 막겠다는 죄와 벌의 악순환뿐이니, 인간을 구해야겠다는 구석은 털끝만큼도 없지 않습니까?

어떤 왕이 법을 하도 많이 만들어 자기 백성을 꼼짝달싹도 못하게 매어 놓기만 하더니, 결국 자기 자신이 만든 법에 의하여 자동 처단되었다는 것입니다. 무릇 생명체 있는 지렁이에서 쥐와 인간에 이르기까지 풀어놓는 데 없이 매어 놓기만 하고, 막다른 구석으로 몰기만 하여, 극에 달할 때 꿈틀거리고 덤비려는 본능밖에 더 남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복음 성서 장면처럼 참고 기다리는 사랑, 그것도 모든 사실을 증언하는 세 사람이나 교회 공동체 사관을 내세워 용서하는 사랑, 대화하는 아량, 풀어놓으려는 줄기찬 어떤 사랑의 표시가 이 땅에서 볼 수는 없는 것입니까? 한 집안 일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자기 자녀들에 대하여 부성애와 진실된 사랑을 앞세우지 않고 훈계한답시고 야단치고 벌주는 것만 일삼는다면, 오히려 반발과 빗나가기가 일쑤라는 것을 우리 일상생활에서 신물이 나도록 되씹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한 개인이고, 한 가정이고, 한 공동체고 한 나라고 간에 인간을 규칙이나 벌이나 처벌로써만 다스릴 수 있는 것이 만만코 아니고, 진실로 용서하는 진정한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움직여 다스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는 충고하거나 바로 잡아주는 개인이나 단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바로 잡은 것이 국민의 여론뿐이었듯이, 우리 국민 각자 스스로 밖에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 작품, ‘장발장’이란 문학 작품 속의 주인공은 굶주린 창자에 빵 한 조각을 훔쳐먹은 죄로 전과자란 누명을 썼기 때문에, 어느 누구 하나 오늘 복음 성서 장면처럼 기다리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이, 그의 현주소는 언제나 감방뿐이었습니다.

자기 형벌을 다 마치고 나와도 살 곳이 없이 성당의 신부님한테 처음으로 인간적인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나 배은망덕으로 은촛대를 갖고 달아나다 경찰에 잡혀 죄인으로 신부님 앞에 끌려 나오게 됩니다. 물론 그 때 신부님은 죄에 대한 벌을 법대로 처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때 신부님은 저 죄 많은 인간은 처벌로서는 더 이상 될 수 없고, 그 인간 영혼을 구하는 길은 사랑의 진실, 진정한 마음과 정신으로 그를 움직이는 용서하는 사랑밖에 없다는 것을 놓치지 않고 깊은 선의로 “그 은촛대는 내가 준 것”이라고 말합니다.

드디어 가슴이 뭉클해 오고, 눈시울이 뜨거워오는 진정한 사랑, 진실에 접한 장발장은 180도로 인간다운 인간으로 돌아서서 시장이 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큰 일을 하였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처벌의 양만 몇 배로 늘인다면 해결할 수 없으리 만큼 현실지경이 극에 이를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정말 인간다운 인간 진정한 정신으로 받아들이는 인간 같은 인간의 용서하는 사랑이 털끝만큼도 없어서, 저 감옥을 메운 수많은 장발장들이 죄와 벌의 악순환 속에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당신들이 땅에서 매어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매인 채로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어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풀린 채로 있을 것입니다.” 복음 성서를 한 마디로 줄인다면, 주님의 자비와 용서하는 사랑으로 우리는 어떻게 인간답게 되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 수 있는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잘못한 일이 있는 형제 자매들이 우리들의 말을 듣지 않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다시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들 중에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합하여 기구하여 청하면 무엇이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들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여서 일치와 화해, 사랑의 공동체가 될 때, 주님과 함께 있는 공동체로서 그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 이렇게 주위 제단에 묘여서 미사 드리고 있는 것도 우리 교우 공동체가 서로 사회적으로 일치와 화해하고 있다는 표시이며 자신의 가슴을 치며 용서하는 사랑으로 서로를 받아들인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세성사 때나 저 고백소에서 천주님께 우리가 범한 무수한 범죄를 탕감 받은 엄청난 빛을 진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들은 남들에게 얼마나 사랑을 베풉니까? 우리 자신의 보속을 주의 기도문, 성모송 몇 번 바치는 것으로 다 기워 갚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생활로 기워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죄악으로 입은 상처를 정말 났게 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서로 용서하는 복음을 실천하는 길뿐입니다. 대화가 진실로 서로 통할 때,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겁도록 용서하는 사랑만이 인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며, 용서 못하는 처벌로서는 빗나가며 반발하는 인간을 만듭니다. 과연

누가 우리를 인간 같지 않은 인간으로 만들었단 말입니까?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분명한 대답을 하시고 돌아가셔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의 가슴이 뭉클하도록 눈시울이 뜨거워질 수 있게 용서하는 사랑의 복음을 전하십니다. 아멘.

안충석 신부
  | 09.06
460 66.4%
고립정신에서 일치에로,

예수님께서는 자나깨나 노상 사랑의 길을 가르치시고 하느님과 이웃에 관한 애덕 실천의 방도를 제시하십니다. 오늘도 영일 없이 사랑의 여러 가지 방법을 가르치시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어떤 형제가 당신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시오” 하시며, 형제적 권고 혹은 형제적 견책이 애인덕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함을 명시하십니다.

남이야 어떻든 간에 무슨 상관이야 하는 사고방식이나, 남이야 전봇대로 이를 쑤신들 무슨 참견이야 하는 심리 작용은 사랑의 실천과는 거리가 먼 인사일 것입니다. 사사건건 남의 일에 참견하려는 몰상식한 수다쟁이 앞에서나 통하는 말투일지언정 화해와 평화의 길목에서는 영원히 사라져야 할 말버릇일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형제 중 누가 잘못하였을 적에 그저 비웃는 낯으로 방관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는 우리 형제요, 같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그의 잘못은 나의 잘못이며 공동체적인 의식으로 하느님 앞에 연대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고립된 생활에서 나 하나만이 구령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멀리 추방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고 봉사하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선언한 우리는 진실되고 올바르고 의롭고 착한 것을 항상 생각하고 주장해야 되겠습니다.

일보 전진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 서로 사랑함으로써 일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고로 우리 상호 분열되고 질시하고 갈라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형제들이 잘못할 적에는 사랑의 정신과 아껴 주는 마음으로 순순히 타일러 주어야 하겠습니다. 따스한 봄볕에 얼어붙은 얼음이 살살 녹듯이 그 완고하고도 괴팍한 이웃 사람의 마음이 고요함과 평화를 찾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형제 하나를 얻은 것입니다”(마태 18,15).

이 같은 헌신적 봉사, 즉 사랑과 인내의 권면이나 책망은 우리 모두를 한 하느님 아버지의 가족으로 만들며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백성으로 화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과 생활 태도야말로 우리에게서 죄악의 자취를 감추게 하고 이로써 우리는 다시금 서로 하나가 되고 또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야 말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우리가 만일 죄인들이 회두하고 하느님과 화해하도록 타이르지 아니하고 경고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죄인이 되고 벌을 받게 된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성 바오로는 이 점에 대하여 강력히 말씀하셨습니다. “형제 여러분, 아무에게도 빛을 져서는 안되겠지만 서로 사랑해야 할 빛만은 어제나 여러분에게 남아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율법을 다 지킨 것입니다”(로마 13,8) 라는 유명한 말씀을 남겨 놓았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양떼들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문을 닫고 다른 사람들에게 냉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터놓고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며 예수님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과의 화해이며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며 구원인 것입니다.

신자 여러분! 이상의 말씀과 같이 우리 서로 사랑의 마음으로 남을 격려하며 권고하며 형제적 책망을 통하여 이웃 사람과 하나가 되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음을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있어 방해가 되고 암적 존재가 되는 것은 우리의 이기주의이고 배타주의입니다. 인간은 본래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어느 현인이 말하기를 “참된 우정은 지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배” 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불행할 적에 위로해 주고 낙심할 적에 용기를 북돋아 주며 같이 슬퍼하고 같이 기뻐하는 동고동락하는 미풍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고 멋진 인생을 영위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이런 인생의 진의를 잘 알고 계십니다. “당신들 중의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여 청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은 들어주실 것이다. 단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곳에 나는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마태 18,19-20) 하고 말씀하시며 단체적인 경신 행위나 단합적인 신심행사가 얼마나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예수님과 일치한 생활인가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인 기도생활도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보다 바람직한 것은 가정에서도 가족이 함께 조석으로 기도 바치는 습성을 기르고 성당에서의 공동신심 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마음의 자세가 무척 아쉽기만 합니다. 이제 10월에 들어서서는 본당 각 구역 단위의 미사와 성경 공부 등 신심행사의 모임이 있게 됩니다.

이 때마다 20명 내지 30명 가량의 열심한 우리 신자들이 모이곤 하지만 때로는 대여섯 명이 모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 이상 모인 곳에 우리와 같이 계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누구보다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아멘.

김정진 신부
  | 09.06
460 66.4%
믿는 우리가 먼저

오늘 복음은 신자 공동체의 현실을 지적함과 동시에 이상적인 공동체의 틀을 제시하고 있다. 복음의 전반부는 형제가 죄를 짓거든 고쳐주라는 말씀이고(마태 18,15-18) 후반부는 함께 청하면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말씀이다(19-20절).

1. 형제적 충고

형제적 충고는 옛 이스라엘 백성이 실천해 온 율법규정이다. 레위기는 “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벗는다”(19,17) 라고 가르친다. 에수께서도 이 전통을 이어받아 공동체 내에서 어느 형제가 잘못을 하면 형제적 충고를 하라고 권고하신다. 그래도 듣지 않거든 두세 사람을 증인으로 세워 사실을 밝혀 잘못을 교정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과거 이스라엘에서 재판 때에 증인 두 사람을 채택한 선례를 따른 것이다(신명 19,15 참조). 이런 노력도 수포로 돌아갈 경우에는 공동체 전체 의견에 맡겨야 한다. 만일 끝까지 공동체의 충고를 듣지 않거든 공동체에서 쫓아내라는 말씀이시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마태 11,19)이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근본의도를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죄나 고발이라기 보다 형제가 잘못을 깨닫고 다시금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한 마지막 호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도 바울로의 말처럼 “주님의 날에 그의 영혼이 구원을 받도록 하려는 것”(1고린 5,5)이 오늘 예수님 말씀의 취지이다.

2. 함께 모여 기도하면

잘못한 형제를 교정할 때 두세 사람의 힘을 빌리라고 했듯이 합심해서 기도하면 하느님께서는 다 들어주신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려고 모인 곳에는 부활하신 예수님도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함께 간구하므로 하느님께서 더욱 잘 들어주실 것이 분명하다. 야훼 하느님께서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듯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도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곳에 함께 계신다. 더욱이 같은 믿음과 사랑의 결합속에서 기도할 때에는 오죽하시겠는가?

3. 교회란

교회란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해 모인 하느님의 백성이자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인 각 개인은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처지에 맞게 활동한다. 그러나 각각 독자적인 주체가 아니고 합쳐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숙명적인 유기체이다. 공동체의 한 부분이 아프면 나도 아파하고, 즐거우면 나도 즐거워 하는 것이 각 지체의 도리이다. 하느님께서는 잃은 양들을 다시 찾기 바라신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제자된 우리 또한 나를 괴롭힌 형제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우쳐 친교의 공동체로 돌아오기를 바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이다. 신앙으로 한집안이 된 우리 “믿는 식구들”(갈라 6,10)이 먼저 형제애를 실천하려고 애를 써야겠다. 이렇게 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교회공동체의 형제관계 속으로 이끌어야 할 것이다.

서울주보
  | 09.06
460 66.4%
작은 어항 속에 금붕어 두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둘은 서로를 너무 미워하여 툭하면 싸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서로 폭력을 휘두르며 크게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한 금붕어가 크게 다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금붕어는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살아남은 다른 금붕어는 이제 혼자서 편안히 살 수 있을 것이라며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며칠 뒤 그 금붕어도 죽고 말았습니다. 죽은 금붕어의 몸이 썩기 시작하면서 물 역시 악취를 풍기며 썩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 특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듯이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지내기에 그 사람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가가 삶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가정에서 가족들과, 직장에서 동료들과, 지역에서 이웃들과 어떻게 지내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기쁘고 즐거울 수도, 아니면 슬프고 버거운 인생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공동체 생활을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주고 계십니다. 먼저, 다른 이가 나에게 잘못한 일이 있을 때 그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가서 그가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 화해하도록 타일러 주라고 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생각을 한다면 잘못한 사람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타인이 나에게 잘못을 하였을 때 잘못을 하지 않은 내가 잘못한 사람에게 가서 먼저 화해를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잘못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면서 그 잘못 속에 주저앉아 체면과 고집, 불안 속에서 일어서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비록 내가 잘못하지는 않았지만 먼저 능동적으로 화해와 용서를 청하는 것이 바로 형제를 얻는 방법이요, 믿는 이의 자세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활하는 우리들은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크게나 작게나 실수를 범하고 다른 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도 하고 자신도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표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상처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끄러움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이 아름다운 존재인 것은 상처가 없는 온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처가 깊고 부끄러움이 있지만 그것을 진주로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부끄러운 순간이 있었지만 그것을 주님의 품 안에서 이웃과 함께 용서를 청하고 화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인 우리들,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더욱 배려해 주는 그리스도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고준석 신부
  | 09.03
460 66.4%
서품을 받은 지 40년이 훌쩍 넘은 저는, 네 곳에서 20년간 본당 신부로 지냈습니다. 그곳에서 지금 저의 모습이 형성되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형성된 모습이 주님이 보시기에 좋은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본당은 저를 사목자로서, 신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성장시킨 훈련의장이었습니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니,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그때의 그 시간은 대부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간혹 달갑지 않은 기억이 문득 나를 멈추게 합니다. 그중 하나는 어느 신자와 사목자인 저와 관계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이를 되새기며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던 중, 순간 뒤통수를 쾅 얻어맞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 느낌은 ‘사목자인 나의 잘못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이 깨달음은 오늘 복음 말씀 안에서 한 형제를 진실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공동체 전체가 애를 쓰는 참 된 모습이 저의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늘 본당 공동체의 중심에 우뚝 서 있어야 하는 사목자인 저는, 어떤 이유든 공동체가 위축되거나 분열되는 상황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얼마나 몸과 마음을 다했느냐고 주님께서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더듬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순간 내가 이렇게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내 의식으로만 된 것이 아닙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어떤 움직임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는 누군가 ‘저’를 위해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기도를 통해 지금 저는 그 누구와 소통이 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들려주는 다음의 말씀은 희망,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희망이 이미 실현되고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지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마음을 모아 같은 원의와 소망을 품고, 주님을 향한 믿음과 기도 안에서 소통하는 공동체, 이 안에서는 무엇인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청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주님이 함께하는 공동체,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교회의 신비 안에서 무한한 가능성이 내 앞에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동안 끊겨진 관계로 우울했던 마음속에 희망의 빛이 떠오릅니다. 나의 가족들 안에서 혹은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보입니다. 누군가와 마음을 모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주님의 약속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에! 나는 요사이 그 누구와 마음을 모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 서울대교구 홍성만 미카엘 신부 - 2017년 9월 10일
  | 09.09
460 66.4%
[서울] ‘나와 너’의 친밀함, ‘영원한 나’의 현존

---------------------------------------------

학적인 통설에 의하면
10만 년 전 이 지구상에는 최소 6종류의 인간 종(種)이 살고 있었는데(예컨대 네안데르탈인, 호모에렉투스, 크로마뇽 등) 그중 현재의 인간종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만이 살아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그 생존의 이유 중 하나로 호모 사피엔스는 ‘뒷담화 문화’가 있어서, 뒷담화를 통해 서로 협력하고 연대해 자기들의 생존력과 생존 영역을 넓히고 발전시켜 왔다고 진단합니다.(「사피엔스」 42~60쪽)

여러분은 뒷담화 하기를 좋아하십니까?
뒷담화란 앞에서는 아무 말 못 하면서 나중에 뒤에서 비판하고 욕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수다를 의미하는데, 부정적인 행동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뒷담화 문화 안에도 소통, 친교, 대화라는 창의적이고 긍정적인 순기능이 있음을 지적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당신 제자들의 삶의 모습에서도 소통과 대화가 강조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그들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마태오 복음 18장 15절-17절)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대화의 하느님이십니다.
대화의 하느님이심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나와 너의 친밀한 관계로 대해 주심을 말합니다.

구약 성경은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실 때, 늘 “나 야훼가 너 이스라엘에게 말한다!”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너’라고 말씀하실 때, 이는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인 ‘너’를 통하여 구체적인 개인인 ‘나’에게 말씀을 전하시길 원하신다는 뜻이겠습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18장 20절)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나와 그것이 아니라 나와 너라는 친밀함이 있을 때 그 뒤에는 ‘영원한 나’가 현존한다”고 통찰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대화의 하느님이심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외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사랑으로 내어 주심으로 우리 각자를 ‘나와 너’의 관계로 만드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인 우리가
성숙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나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웃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언제든 어떤 처지에서든 대화의 문을 열어 놓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죄까지 범한 사람까지도 마음으로 증오하지 않고,
관계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
이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구요비 주교
2020년 9월 6일 ‘서울대교구 주보’에서
  | 09.05
460 66.4%
9월의 첫 주일입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달입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보내는 시간만큼, 내가 원하는 것들을 위해서 쓰는 시간만큼 나는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들을 나눌 수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작년에 호주는 6개월간 극심한 가뭄이 있었습니다.
그 여파로 산불이 발생하였고 많은 생명이 불에 타버렸습니다.
중국에는 엄청난 비가 내렸고,
한국에도 비가 내렸습니다.
중국은 이재민만 5,00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한국도 홍수로 인한 피해가 많았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피해도 계속되고 있는데
기상 이변에 의한 피해까지 겹치고 있습니다.

기상은 크게 날씨와 기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날씨는 수시로 변해야 합니다.
밝은 날이 되면 좋지만 계속되면 폭염이 되고,
몇 개월씩 이어지면 가뭄이 됩니다.
비 오는 날이 하루면 좋지만 계속되면 장마가 되고,
몇 개월씩 이어지면 홍수가 됩니다.
그러기에 날씨는 자주 변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기후는 일정한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온대기후, 열대기후,
한대기후, 사막기후, 몬순기후와 같이 일정한 틀이 있습니다.
인류의 문화는 그런 기후에 맞게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 왔습니다.
기후가 바뀌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습니다.
기후가 바뀌면 생활에도 큰 영향을 받습니다.
열대기후가 한대기후로 바뀌면 생활하기 어렵습니다.
건축양식도 기후에 맞도록 발전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기후는 바뀌지 말아야 합니다.
기후의 변화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일어난다면 이는 준비하고 적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후의 변화가
인간의 영향(지나친 자연개발과 탄소배출)으로 갑자기 다가온다면
이는 상상 할 수 없는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지구의 평균기온이 1도 올랐다고 합니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사람의 체온으로 비유하면 큰 문제일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이 1도 올라가면 피로감이 오고, 활동에 영향을 줍니다. 우리 몸이 2도 올라가면 생사의 갈림길에 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구의 온도도 1도가 올라가면
날씨와 기후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만일 지구의 온도가 2도 올라가면 지구는 날씨와 기후에 대한 복원력을 상실 할 수 있고, 이는 지구의 생태계에 커다란 혼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당연히 인류가 지금가지 쌓아온 문화와 문명도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날씨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토착화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각 나라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고 그 나라의 전통과 신앙을 수용해야 합니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미신으로 여기고 금지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원주민들의 전통과 문화를 비이성적이라고 무시하는 것도 복음을 전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지만 결실을 맺는 분은 하느님이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시간을 가지고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방의 문화를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 다른 문화와 접목이 되어서 신앙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선교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변화된 상황에 맞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기후와 같은 것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에서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면서 다른 문화와 전통을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타인에게도 강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타인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내용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절망 앞에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 희망의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합리적인 이성을 뛰어넘는 생명까지도 내어주는 믿음입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우리가 함께 연대하지 않으면,
우리가 함께 나누지 않으면 산적한 지구촌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습니다. 환경문제, 난민에 대한 보호, 전쟁의 종식, 종교에 대한 적대감, 감염병에 대한 예방과 치료는 한 국가만의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손을 잡고 나가야 합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힘이 있는 국가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연못이 썩으면 물고기는 살 수 없습니다.
지구가 황폐해지면 강대국도 살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우리가 묶어야 할 것은 연대와 협력, 나눔과 화해입니다. 우리가 풀어야 할 것은 시기와 질투, 교만과 욕망입니다. 우리가 함께 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이 함께 해야 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것이고,
이웃의 걱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고,
형제의 허물과 잘못을 진실한 사랑으로 품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 “보초”를 서야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경고를 슬기롭게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것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요란한 괭가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온갖 신비를 환히 꿰뚫어 보고 모든 지식을 가졌다 하더라도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을 위해서 불 속에 뛰어 든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0년 9월 6일
  | 09.06
460 66.4%
[서울] 모든 갈등의 원천은

-------------------------------------

+찬미예수님
사제로써 생활하다 보면
소위 말해 싫은 소리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어떤 공동체가 잘못되었을 때, 부모님 혹은 아이들이 신앙 안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을 때 어쩔 수 없이 잔소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고 용서와 자비를 강조해야 하는 입장에서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꼭 필요한 말인지,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인지 고민해야 하며 개인의 기분에 좌지우지되는 것은 아닌지 거듭 되물어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저는 항상 스스로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에 사랑과 애정이 담겨 있는가?”

이 질문은
싫은 소리를 할지 말지 결정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타인에게로부터 싫은 소리를 듣게 되는 순간도 있습니다. 언제나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이상, 저 역시 싫은 소리 보다는 좋은 소리만을 듣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역시 저는 생각합니다.

“상대가 하는 말에 사랑과 애정이 담겨 있는가?”

만약 사랑과 애정이 담겨 있다면
저는 얼마든지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되고, 무엇보다 상했던 마음이 금방 가라앉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 말을 듣고 부족한 부분을 고칠 때 저에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안도감 마저 듭니다.

-------------------------------------

<리로이드 존 오길비>라는 영성가는 그의 저서 <하느님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어느 날 이비인후과 의사를 찾아갔을 때, 그는 진찰하기 위하여 먼저 나의 귓속을 청소해 주었다. 그는 강력한 펌프를 사용하여 오랫동안 쌓였던 내 귓속의 귓밥을 빼내 주었다.

나는 의사에게 물었다.

“이렇게 많은 귓밥을 담고서 듣는데 별지장이 없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군요."

그랬더니 의사는 나에게 멋진 말을 해주었다.

“귓밥이 조금씩 쌓이고 떡이 되면, 그때에 청력장애가 옵니다. 그렇게 되면 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신앙인처럼 귀머거리가 됩니다."

-----------------------------------------------

이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영적인 측면에서만 볼 때 우리는 한순간의 일이나 사고로 귀가 머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으면,
특히 하느님의 가르침을 명심하지 않으면 서서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장애에 이르게 됩니다. 문제는 앞서 말씀드렸듯 누구나 싫은 소리 보다는 좋은 소리만을 듣기를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타인에게 쉽게 악과 미움이 담겨 있는 소리를 함부로 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충고와 경청에 대한 지혜를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이 말씀을 들으면 나에게 죄를 지은 누군가 혹은 충고를 듣지 않는 타인이 생각나기 쉽상입니다.

하지만 이에 앞서,
나 역시 죄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다른 이의 충고를 얼마나 잘 듣고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다른 이의 형제가 되는 것이 가능하며 더욱 더 발전적인 신앙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이 아닌 인간으로써 창조되었기에 여러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름답고 즐거운 것만 찾아서는 발전이 없음을 기억하며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유용한 것들은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언제나 우리의 부족함을 겸손하게 인정하며,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전해 받는 싫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소리들에 사랑과 애정이 담겨져 있다면 거기에는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하느님의 도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다른 이에게 충고를 보낼 때는 반드시 애정과 사랑을 담아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분명 죄를 지은 형제를 “지적하고 꾸중해라”라고 하지 않으시고 “타일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을 담지 않고 미움을 배제한 채
상대방을 진심으로 타이르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더욱 더 많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좋은 방법입니다.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 하듯,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으며 그것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충고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반드시 그것을 수행해야 합니다.

오늘 1독서는 다음과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즉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하여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하여 다른 이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책임과 의무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싫은 소리를 하고 듣는 일은 분명 마음이 불편한 일입니다. 불필요한 갈등을 야기할 것 같고 상대방의 반응이 걱정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모든 갈등은 뒷담화에서
시작되며 말 안에 악과 미움이 있을 때에 생겨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사랑”으로 시작되어 “사랑”으로 끝난다면 지혜로운 하느님께서 우리의 말에 권위를 세워주실 것이며 세상은 한결 아름답게 변해갈 것입니다.

결국 오늘 독서와 복음을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오로는 오늘 독서에서 이 사랑을 이토록 강조하나 봅니다.

“형제 여러분,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아멘.

---------------------------------------------

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
2020년 9월 6일
  | 09.06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   [수도회] 내려가는 길, 예수님의 길  [1]
!   [의정부] 낮추인 마음 
!   [수원] 겸손하게 하소서  [1]
!   [인천] 진정 아름다운 모습이란  [2]
!   [서울] 어리석은 나귀와 충직한 나귀  [1]
!   [대전] 자신을 낮추어 높아지게 하라 
!   [전주] 위선자에 대한 책망 : “자기를 낮추고 남을 섬겨라” 
!   [군종] 나는 좁쌀 한 알 입니다  [1]
!   [춘천] 너희는 서로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 
!   [원주] 당신의 마음안에 주님의 말씀은 숨 쉬고 계십니까? 
!   [마산] 참된 신앙의 시작  [1]
!   [부산]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2]
!   [안동] 먼저 더 사랑하라  [1]
787   [대구] 겸손한 마음  [1] 2159
786   (녹) 연중 제31주일 독서와 복음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1] 1674
785   [수도회] 사랑하기  [3] 581
784   [원주] 최고의 계명 ‘사랑’  [2] 710
783   [부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5] 2936
782   [청주]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습니다.  [1] 703
781   [전주] 주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2] 95
780   [의정부] 법대로가 아닌 사랑으로  [2] 2349
779   [인천] 반성문 -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6] 2705
778   [수원] 하느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  [4] 2471
777   [서울] 가장 큰 계명  [7] 3491
776   [군종]서로 사랑하여라.  [1] 565
775   [대구] 사랑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라  [2] 2230
774   [안동] 애주애인(愛主愛人)  [3] 2611
773   [광주] 사랑의 계명  [2] 738
772   [대전] 이웃 사랑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  [2] 2863
771   [마산] 가장 큰 계명 - 참사랑  [2] 2699
770   [춘천] 이웃 사랑  [4] 2711
769   (녹) 연중 제30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5] 2261
768   [수도회] 신앙의 핵심은 오직 예수님  2074
767   [전주]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2139
766   [청주] 내 생명, 내 재산, 내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  1273
765   [대구] 하느님께 바쳐야 할 몫은 내 안에서부터!  [1] 2263
764   [춘천]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1] 2228
763   [원주] 거지신앙과 순교신앙  1030
762   [수원]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로”  [1] 2156
761   [군종] ‘너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1114
1 [2][3][4][5][6][7][8][9][10]..[20]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0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