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가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60 68.4%
[춘천] 파수꾼
조회수 | 2,458
작성일 | 05.09.02
오늘은 연중 제23주일이며,
순교자 성월인 9월의 첫 주일입니다. 순교자 성월 한 달 동안 순교선열들의 얼을 가슴 깊이 되새기면서 매일을 순교정신으로 살아가도록 다짐합시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특별한 삶을 살아가도록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순간부터 그리스도와 함께 사제직·왕직·예언직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진리와 정의, 사랑의 삶을 위하여 그로부터 오는 모든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살도록 불리움을 받은 것입니다.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보초로 세운다”(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 33장 7절).

그리스도 신앙인은
이 세상을 악의 세력에서 지키고 하느님의 뜻을 세상에 전해야 할 파수꾼으로 세워진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하느님 백성에서 이탈한 죄스런 사람이 하느님 생명의 길로 되돌아 올 수 있도록 우리 신앙인을 주님 사랑을 파수꾼으로 세우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의 이익과 영탈만을 추구함으로써 나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지 못한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언자들처럼 주님 사랑의 외침을 두려움 없이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윤리 질서의 회복을 위하여, 자유·정의·민주사회의 구gus을 위하여 파수꾼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훼퍼는
“미친 운전사가 차를 몰고 질주할 때 그 운전자를 차에서 끄집어 내리지 않고 그 차에 치인 사람을 돌보며 치료만 하는 것은 교회가 제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하였습니다. 제도나 구조악에 대해서도 방관할 수 없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제2독서 : 로마서 13장 8절 참조) 하신 말씀을 되새기며, 불의와 부정과 제도적 부조리를 타파해야 할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지 반성해 봅시다. 어렵고 불가능한 사랑의 실천이지만 주님의 은총으로 가능해 집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오 복음 18장 20절 참조)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어렵고 불가능한 사랑의 의무를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시대와 민족의 파수꾼이 됩시다.

---------------------------------------------------------------

춘천교구 송문식 베드로 신부
460 68.4%
원한과 증오의 사슬을 푸는 법

우리가 죽인 형제들

옥중에서 회개와 속죄의 삶을 살다 46세의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권 베드로’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사형수였던 그에게 냉대가 아닌 끝없는 사랑과 격려, 충고로 함께 하셨던 ‘조 안나’ 할머니 덕분에 그는 회개와 속죄의 삶을 살게 되며 끝내 빛을 향하여 걷게 됩니다. 빛의 세계로 이끈 조 안나 할머니에게 그가 보낸 편지는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어 놓습니다.

“급강하한 기온은 보잘것없는 저 같은 인간에게까지 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저에게 전해주신 참으로 귀한 묵주, 어머님과 함께 기도를 바치는 기분이어서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답니다. 묵주 덕분에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아 큰 위안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총일 테죠? 하느님의 뜻에 감사드립니다.”

“올해에도 이승에서 사순절을 맞으며 부족한 저의 죄 값에 대한 보속을 조금이나마 더 키워 갚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제겐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제 재의 수요일 아침 묵상을 하는 동안 사랑을 배우고 용서를 배워 못다한 지난 날의 삶을 되살려 보자는 묵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사랑의 참된 충고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 15)

한 발 더 나아가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에제 33, 8)

그럼에도 우리는 이웃을 쉽게 단죄하며 마음으로, 입으로 죽이기만 하였지, 그가 다시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영영 그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말기를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참다운 충고에는 반드시 기다림의 인내와 사랑의 관용이 필요합니다. 늘 그의 처지에서 모든 일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셨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늘 묵상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뒤를 따른다고 고백하는 신앙인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죽였던 이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들도 하느님 눈에는 더 없이 귀중한 자녀이고, 그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승리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읍’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역사상 평화로웠던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을 다녀온 분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이스라엘이나 아랍 세계나 한결같이 보수 정통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종교인’일수록 무력 전쟁만이 평화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평화가 왔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피는 반드시 피를 불렀고, 원한은 더 큰 원한을 쌓아 갔습니다. 그것이 증오의 인간 역사였습니다.

이 같은 원한과 증오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용서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를 당신의 온 몸을 내어던져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카인의 자손인 인류는 끊임없는 전쟁을 저질렀고, 그 추악한 전쟁 중 끔찍한 전쟁은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는 모든 종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나와 생각이, 사상이, 이념이, 신앙이 다르다고 단죄했던 증오의 사슬을 이제는 풀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많은 증오의 사슬을 묶었던 그리스도인들이 지난 과오를 뉘우치고 사랑이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분명 사랑이 승리했던 역사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프로이센의 젊은 왕 ‘프리드리히 2세’(1712~1786)는 왕의 자리 등극 후 많은 청원서와 진정서들을 처리하는 과정에 가톨릭 교회와 관련된 청원서를 진정 화해와 관용과 용서로 풀었다고 합니다. 가톨릭을 반대하는 프로테스탄트 신봉 대신들은 프로이센에서 로마 가톨릭 학교를 폐쇄시키자고 청원합니다. 프로이센은 프로테스탄트를 신봉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젊은 왕은 청원문의 여백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종교는 모두에게 허용되어야 하고, 감독관은 어떤 종교가 다른 종교에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하는데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구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원한과 증오의 사슬을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에서도 풀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완성된 신약의 율법 사랑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 10).

배광하 신부
  | 09.05
460 68.4%
용서만이 살 길

1991년, 김용제(당시 2 1세) 씨가 사회에 대한 불만을 품고 승용차로 여의도 한복판을 질주한 일이 있었다. 당시 많은 어린이들이 차에 치여 비참하게 죽었다. 그때 서윤범할머니는 여섯 살 난 손자를 잃었다. 할머니는 손자를 잃은 슬픔을 달랠 길이 없어서 며칠을 수도원에 들어가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해도 해도 너무하십니다.” 할머니의 기도는 원망을 넘어 청년에 대한 분노로 폭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할머니의 마음속에 뚜렷한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용서하라.’그 음성은 거역할 수 없을 만큼 크게 거듭해서 들렸다고 한다. 할머니는 김씨가 사형 선고를 받던 날 검사실에서 김씨를 만났다. 할머니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김씨가 불우한 환경에 시각장애로 취직도 한번 제대로 못했던 사정을 알게 되면서 할머니는 김씨의 선처를 탄원했다.

그 뒤 남편과 며느리가 세상을 뜨는 불행이 겹쳐 하루에도 몇 번씩 용서와 분노 사이를 오갔지만 김씨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용서만이 살길임을 깨달았다. 결국 할머니는 김씨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아침마다 그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비록 1997년 12월에 김씨의 사형이 집행되었지만 죽기 직전에 할머니의 용서와 사랑을 받고 세례까지 받았다고 한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용서는 유일한 살길이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분노와 미움이 독이 되어 본인을 해치기 때문이다. 미움의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용서이다. 그러므로 용서를 통해서‘치유’받는 최초의, 유일한 사람은 바로‘용서하는 자’이다. 또한 용서는 죄의 악순환을 끊는 길이며 서로가 살 수 있는 상생의 길이다. 용서만이 복수와 원한의 사슬을 끊고 모두가 함께 살 수 있게 해준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의 복음을 알아들어야 한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

정비오 신부
  | 09.05
460 68.4%
따끔한 매와 따끔한 충고

오늘 제 2 독서를 보면, "우리가 아무리 다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바로 사랑" 이라고 강조하면서,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내용 역시, 이웃과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잘못한 형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를 단죄하기 위해서는,
첫번째로, 단 둘이 만나서 잘못을 타일러 주어라.
둘째, 그래도 안되면, 몇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충고해 주거라.
셋째, 그래도 안된다면, 이제 전체 교회가 나서서 해결하라.
넷째, 그래도 안되면, 그때에 비로소 이방인처럼 대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형제적 충고를 아끼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이토록 세심한 배려와, 형제적 사랑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방금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웃에게 어떤 잘못이 있을 때, 올바로 깨우쳐주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 대 1의 대화를 하십시오. 그런데 그것도 안되면, 두 세 사람과의 대화, 또 그것마저 안된다면, 교회 공동체에 알리고, 그것도 안되면 그때에 가서,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간주해도 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이런 경우라 할지라도, 공동체는 그를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욕하고 비난하기는, 참으로 쉽습니다. 반대로, 남을 위해서 기도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지만 서로 기도해 주는 것이, 바로 형제애인 것입니다. 함께 슬퍼해야 할 일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고, 함께 기뻐해야 할 일이 있으면, 함께 웃어주고, 함께 기뻐해야 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모든 신자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동병상련의 하느님 백성의 모임인 것입니다. "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 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처럼 따끔한 매와 따끔한 충고는, 한 인간을 성숙시키는 데 없어서는 안될 요소입니다.

내가 충고를 했는데, 상대방이 그 충고를 받아들인다면, 서로간에 막혔던 벽은 무너질 것입니다. 사랑의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충고합니다. 하지만 아내도 남편에게, 자식도 부모에게 충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도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치원에 다니고 있는 어린 딸이 아빠에게, "아빠, 술 조금만 드세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하나의 작은 충고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작은 충고를 무시한다면, 소홀히 하다 보면, 계속해서 충고를 싫어하게 됩니다. 내 이웃을 잘못된 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될 사회적 책임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요청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중에 어떤 형제가 잘못을 했을 때, 그를 꾸짖고 비난하기에 열중하지 않았는지,나 자신만 옳고 남은 그릇되었다고, 스스로 편견에 떨어지는 잘못은 범하지 않았는지, 깊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유영구 신부
  | 09.05
460 68.4%
비겁한 사람이 되지 않기

흔히들 우리는 교회를 신앙 공동체라 부르며, 서로 형제^자매라고 부르며 지낸다. ‘나’라는 말보다 ‘우리’라는 말을 더 많이 하며 함께 서로를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 방법 중 하나가 오늘의 말씀에 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이지만 실천하기란 녹록지 않다. 나에게 죄를 짓는 이에게, 나에게 잘못한 이에게 단둘이 말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의 죄나 잘못보다는 내 일방적인 생각이나, 그에 대한 미움으로 화풀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 한구석에 비겁함이 숨어 있다. “쓸데없는 참견, 너나 잘해.” 하고 되돌아 올 비난, “나도 별 잘하는 게 없는데….”하는 자괴감. 그 속에 숨어버리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을 이미 맛보았기 때문에 선뜻 나서기는 쉽지 않다. 비겁함은 단순히 개인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비겁함은 생활에서 어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도 나의 일이 아니니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도와주지 않고, 불의에 침묵하고 굴종하며 외면해 버리기 때문이다. 누군가 ‘옳다는 것을 알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은 대단히 비겁한 짓’이라고 말했다. 비겁한 사람이 되기 않기 위해 꼭 기억하자.

“내가 악인에게 ‘악인아,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할 때,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에제 33,8).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까. 그 죽음에 대하여 주님 앞에서 분명히 대답해야 할 것이다. 무엇을 했는지…. 우리는 그와 함께 죄에도, 용서에도 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땅에서 풀지 않으면 결코 하늘에서도 풀리지 않고 그대로 책임 추궁을 당할 수 밖에.

그러나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시길.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게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이영주 신부
  | 09.03
460 68.4%
[춘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기도합시다”

얼마 전 7080 콘서트을 보게 되었습니다. 가수 남궁옥분의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노래가 시작되자 열기는 뜨거웠고, 방청객들 모두가 하나 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렇게 신나고 좋아할 수 있을까? 하나같은 모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 시간을 오래전부터 기대하고 준비했고, 콘서트 내내 세상 복잡한 마음을 날려버린 탓이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주님의 날 공동체의 집회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모든 만남과 모임에 기대와 준비, 세상을 이긴 예수님의 현존을 기억한다면 이전까지 형제들에게 가졌던 모습이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교회 공동체 생활에서 이웃이 자기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를 말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타일러 주고, 네 말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고, 그래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생각하라’ 는 말씀입니다. 사람 살아가는 데는 항상 다툼과 잘못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잘못도 있지만 대부분 양방의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서로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상대방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감정을 조절하고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야 할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서로 각별히 신뢰하는 사이가 아니 면 자칫 어리석은 충고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오늘 복음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잘못’ 을 인정하게끔 만들고 처리되어야 할 것으로 보아 형제를 잃을 수도 있는 뉘앙스를 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잘못’ 은 그것 을 보는 우리 모두를 더욱 성숙하고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기회로 이끌어주는 ‘은혜의 시간’ 이 되어야겠습니다. 한사람의 잘못이 비단 그 사람만의 몫이겠습니까.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았듯이 한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는다.” 는(로마 5,18)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께서는 우리들에게 지불해야 할 빚으로 “다 갚음” 이 없는 영원 한 부채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사랑의 빚입니다. 더 크고 깊은 사랑이 부족한 나의 삶 속에 실현될 수 있도록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기도합시다.

▥ 춘천교구 윤헌식 F.하비에르 신부 - 2017년 9월 10일
  | 09.08
460 68.4%
[춘천] 너나 잘하세요.

-----------------------------------------------

전 세계 크리스천의 수는 얼마나 될까?
여러 형태와 방법을 막론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의 숫자는 전 세계 인구의 거의 4분의 1은 족히 될 것이다. 그 수많은 사람이 그리스도교의 정신인 ‘사랑’ 을 실천하며 선하게 산다면... 어쩌면 세상은 오래전에 천국이 되었어야 맞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신자인 우리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 참 슬픈 일이겠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분명하다.
‘인류의 행복’ , 그리고 ‘서로 돕고 사랑하며 사는 것’ 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에 필요한 모든 능력과 은총을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셨다. 하지만 하느님을 원망하는 이들은 ‘절대 권능의 창조주 하느님이 계시는데 세상이 왜 이렇게 엉망이냐?’ 라고 말하곤 한다.

지금 지구(세상)의 시간이 1분 전 12시라는
이야기를 대부분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실 일이지 우리가 하느님께 따질 문제가 전혀 아니다. 하느님은 애당초 그 대책으로 우리를 만드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좀 더 자주 기억하면 좋겠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관심” 이라는 병이지 싶다.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평소와는 정반대로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는 역설적인 표현이 자연스러워진 요즘 그 병이 더 깊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어른들은 자녀나 아이들에게 ‘괜히 쓸데없이 남 일에 참견하지 말라’ 며 그 병을 더 깊게 키워나간다. 요즘 어린 학생들마저 주변 친구들에게 끔찍한 짓을 서슴없이 한다는 뉴스를 접할 땐 놀라움을 넘어 두렵기까지 하다.

오늘 복음 말씀은
진정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형제적 충고”에 대해서 말한다.

“어떤 형제가 죄를짓거든, 어떻게든 타일러서 고쳐라.”

이유는 명확하다.
‘형제적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헌데 ‘충고’는 매우 어렵다.
여러 해 전, 당시 딸을 결혼시킨 친구와 통화를 하게 된 일이 있었다.

‘딸은 시집가서 잘 지내지?’라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변이 ‘너나 잘살아라’ 였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어쭙잖은 충고라도 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충고는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참 어렵다. 또 해봐야 사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

아무리 진심이라도 타이름을 당한다는 건 불쾌한 일이다. 어쩌면 충고하란 말씀은 나 자신부터 더 열심히 살라는… ‘나에 대한’ 또 다른 충고가 아닌가 싶다. 사회생활도 신앙생활도 하느님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게 가장 효과적인 충고가 된다. 이것이 바로 세례 때 받는 ‘예언직’ 의 소명이다. 이 직분에 많은 이들이 충실할 때 하느님의 나라는 그만큼 앞당겨질 것이다.

악인이 자기 죄 때문에 죽을 수 있겠지만 그 죽음을 강 건너 불 보듯 지켜만 본다면 그 책임은 바로 ‘너’ 에게 있다. (제1독서 참고)

----------------------------------------------

춘천교구 김현신 요셉 신부
2020년 9월 6일 ‘춘천교구 주보’에서
  | 09.05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   [마산] 참된 신앙의 시작  [1]
!   [부산]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2]
!   [안동] 먼저 더 사랑하라  [1]
!   [대구] 겸손한 마음  [1]
797   [수도회] 사랑하기  [3] 581
796   [원주] 최고의 계명 ‘사랑’  [2] 710
795   [부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5] 2936
794   [청주]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습니다.  [1] 703
793   [전주] 주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2] 95
792   [의정부] 법대로가 아닌 사랑으로  [2] 2349
791   [인천] 반성문 -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6] 2705
790   [수원] 하느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  [4] 2471
789   [서울] 가장 큰 계명  [7] 3491
788   [군종]서로 사랑하여라.  [1] 565
787   [대구] 사랑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라  [2] 2230
786   [안동] 애주애인(愛主愛人)  [3] 2611
785   [광주] 사랑의 계명  [2] 738
784   [대전] 이웃 사랑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  [2] 2863
783   [마산] 가장 큰 계명 - 참사랑  [2] 2699
782   [춘천] 이웃 사랑  [4] 2711
781   (녹) 연중 제30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5] 2261
780   [수도회] 신앙의 핵심은 오직 예수님  2074
779   [전주]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2139
778   [청주] 내 생명, 내 재산, 내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  1273
777   [대구] 하느님께 바쳐야 할 몫은 내 안에서부터!  [1] 2263
776   [춘천]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1] 2228
775   [원주] 거지신앙과 순교신앙  1030
774   [수원]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로”  [1] 2156
773   [군종] ‘너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1114
772   [대전] 지금은 놀부시대  1184
771   [서울] 하느님께 바쳐야 할 ‘세금’  [1] 2154
770   [의정부] 하늘가는 길  1204
769   [안동] 하느님 것은 하느님께  [1] 2158
768   [부산]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2] 2396
767   [마산]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1100
766   (녹) 연중 제29주일 독서와 복음 (카이사르의 것은, 하느님의 것은---)  [2] 1941
765   [청주] 하느님 나라의 드레스 코드  [1] 115
764   [수원] 혼인잔치의 비유  [6] 3578
763   [수도회] '예수 그리스도'란 새 예복  [3] 2740
762   [서울]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  [8] 3092
1 [2][3][4][5][6][7][8][9][10]..[21]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0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