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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잘못은 사랑의 실습시간
조회수 | 2,379
작성일 | 05.09.02
오늘 복음은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마태 18,15)으로 시작해서, 우리 사회에서 숱하게 벌어지는 시시비비(是是非非)를 해결해 나가는 절차를 3단계로 제안합니다. 둘이 만나서 타이르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모든 사실을 밝힌 다음에, 최종 절차로 교회에 알리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권유합니다. 잘못을 저지른 상대방을 처벌하는 데 급급하지 말고, 최대한 배려해서 교회 안의 한 형제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라는 지침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시시비비를 눈여겨 살펴보면,
일방적으로 한쪽이 잘못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분쟁에 휘말린 당사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느 편이나 공감되는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건이 일어난 선후관계와 정황을 감안해 적절한 해결책을 찾는다 해도, 억울하게 피해를 입는 사람이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호소할 방안이 있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런 방안이 일체없는 사람이 마음 속으로 흘리는 눈물과 비통한 심정은 뼛속에 각인됩니다.

교통사고가 나면 보통 ‘쌍방과실’로 처리되어,
누가 얼마만큼 잘못했는지를 따지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나도 잘못했지만, 상대방도 잘못했다는 것이죠.

그런 시각으로 복음서의 첫 구절을 다시 한 번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라.” 무슨 잘못인지는 구체적으로 명기되지 않지만, 당사자가 일단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잘못했다고 상대방을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한 요인은 없는지 자신의 행동부터 돌아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사실 문책이나 비난 일변도의 대화는
오히려 쉽게 정리될 수 있는 분쟁의 불씨를 되살릴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이나 원한은 대화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더 커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건에 휩쓸린 당시에는 제대로 처리했다는 일도 시간이 흐른 뒤에 돌아보면 너무나 미숙한 처리에 가슴앓이 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어찌보면
‘잘못’은 처리되어야 할 사건이 아니라, ‘잘못’에 얽힌 사람들이 더 성숙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하느님의 은총의 시간’입니다. 잘못한 이는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함으로써, 그 상대방은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고 포용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비로운 숨결을 더욱 가까이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사랑의 실습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실습을 성공적으로 반복해 나가는 사람들, 바로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로마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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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우식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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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율법의 완성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마태 18,15).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짓거든 단둘이 만나 타이르고, 그래도 안 되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타이를 것이며, 그래도 안 될 양이면 교회의 도움을, 그래도 안 될 때에 비로소 다른 민족 사람이나 혹은 세리처럼 여기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해 본다면, 남의 죄에 무관심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분명 공동체이고 하느님의 한 자녀이기 때문에, 나 혼자만의 평안이나 나 혼자만의 구원은 결코 우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 ‘명령’은 나 자신만 죄를 피하면 그만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깨우쳐주신다. 아마도 남의 죄에는 무관심하고 오히려 남의 죄를 통해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냈던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안전장치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분명히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죄’에 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지, 결코 나와 의견이 다른 이들을 설득하고 단죄하라는 말씀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나와 이견을 가진 이들의 생각을 ‘나쁜 것’이라고 쉽게 판결내리고 있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만 의견이 다를 뿐인데, 그것을 마치 ‘죄’ 문제로 비화시켜서 단죄하는 것은 결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닐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남의 ‘죄’에 대하여 접근할 때 ‘참견’이 아닌 ‘사랑’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의로움을 더욱 빛내기 위해서 남의 죄에 접근하는 것은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이 일삼던 일일 뿐이다. 진정 그의 구원을 걱정해주지 않는 ‘참견’이라면 오히려 도움보다는 해가 되지 않을까?

뭐니뭐니해도 사랑이 최고다. 모든 것은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도 사랑 때문이 아니었던가? ‘사랑’이 전제되어야만 남의 죄에도 무관심하지 않고, 나 혼자만의 평안도 꿈꾸지 않을 것이며, 남으로 하여금 진정 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나의 ‘희생’도 감수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율법 전문가 바오로 사도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라고 말씀하셨다. 율법으로 남을 단죄하고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던 이들에게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라는 말씀은 굉장히 충격적이지 않았을까?

“형제 여러분,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로마 13,8; 제2독서).

표 창연 (프란치스코) 신부
  |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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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뭉치로 다른 사람의 애를 태우는 사람을 가리켜 ‘애물단지’라고도 합니다. 사고뭉치 애물단지 자녀를 타일러서 바로잡을 수 있다면, 그 부모의 마음은 정말 행복할 것이며, 심지어 눈을 감아도 그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느님께서 애물단지로 살아가는 당신 자녀를 바로잡고자 애쓰시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그 애물단지가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 애물단지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애물단지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라고 하시니, 이 얼마나 애가 타고 간절한 하느님의 표현입니까?

오늘 복음은 애물단지로 여겨지는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이며, 잘못한 사람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들과 함께하는 이들에게 정화와 사랑과 교정의 능력을 주셨음을 간접적으로 밝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만약 하느님을 애태우는 애물단지를 우리가 타일러 바로잡아 하느님 아버지께 이끈다면, 하느님은 정말로 기뻐할 것이며, 우리에게 참으로 고마워하실 것입니다. 상상만 해도 기쁘고 신나는 일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그러나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에제 33,8-9)라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얼마나 강한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우리 주변의 사고뭉치 애물단지들을 모른 척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보다 먼저 그들에게 다가서서 그들을 바로잡아주고 고쳐주기를 바라십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법이며, 이 사랑의 법이야말로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바오로 사도를 통해 말씀하십니다(로마 13,8-10). 이는 한편으로 우리 각자에게 그런 능력을 주셨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며, 같은 마음으로 두세 사람이 함께 좋은 뜻을 갖고 바르고 옳은 것을 가르쳐주고 청하면 좋은 효과가 있을 것임을 알려주기 위한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이 나서기 전 마지막 단계로 이웃사랑을 보여주는 곳으로 ‘교회’를 선택하셨음을 보여주시며, ‘교회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교회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에 중요하고 막강한 능력을 주셨음을 각인시켜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교회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때 나에게 맡겨라. 그리고는 둘이나 셋이 모여 마음을 모아 기도하라. 그러면 무엇이나 들어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능력과 한계를 분명히 알고 계시어, 그러한 한계를 어떻게 헤치고 나아가야 할지를 분명히 알려주시는 말씀입니다.

제가 아는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애물단지 그 자체였습니다. 그 친구는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 않았지만, 제 말은 존중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제 말을 듣고 조금씩 변화하기 위해 힘겹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흐뭇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보면서, 그 어머니와 남동생이 세례를 받고 열심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그 친구는 대학생이 되었고, 저에게 자신의 멘토(조언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가 되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친절하지 않게 그 친구의 멘토 역할을 하였지만, 그 친구는 잘 따라주었습니다. 심지어 33권이나 되는 백과사전을 읽어보라는 제 말에, 울어가며 1년 만에 다 읽어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제 말에 잘 따라주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 친구의 아버지가 얼마 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 친구는 지금도 가끔 애물단지 노릇을 합니다. 하지만 차츰 하느님을 멘토로 여기며 참다운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제가 그녀에게 많은 것을 배웁니다. 제가 볼 때도 그렇게 예쁘고 좋아 보이는데, 하느님 보시기엔 얼마나 더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고뭉치 애물단지가 변화되어 꿀단지로 되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행복하고 기뻤습니다. 그러면서 내 주변의 이웃을 너무 쉽게 골칫덩어리 애물단지로 단정 짓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봅니다. 실은 애물단지와 꿀단지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애물단지가 있다면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방식대로 풀어가도록 노력합니다. 기쁨이 솟을 것입니다.

최인각 신부
  |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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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A⋃AC

U=A⋃AC, 전체집합 U는 집합 A와 A의 여집합의 합집합으로 이루어진다.“

사람은 홀로 살 수 없다고 누군가 말해떤가요?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보기 싫은 사람이 하나 둘 늘어만 가는 까닭에 그런 관계들을 모조리 청산하고 싶은 것 또한 우리 마음인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말해봤자 통하지도 않으니 감정만 상할 바에는 아예 모르는 척 피하는 것이 힘도 안들고 상처받지도 않는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을 주위에서 종종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내 마음 속에서 한명씩 지우다보면, 결국 자기 구미에 잘 맞춰진 ‘또 하나의 나’만이 남아 있지 않을까요?

내 구미에 맞는 것들로만 채워나가는 사람은, 약이 입에 쓰기 때문에 무조건 싫다고 떼쓰는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관계의 틀 안에서 ‘나’는 본디 나와 다른 ‘너’가 있기에 존재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신앙 안에서 ‘나’와 ‘너’의 관계와 의미를 성찰하도록 우릴 초대합니다. 바로 ‘하느님 나라의 연대성’이라는 하나의 큰 전체집합(U)안에서 ‘나(A)'의 존재의미와 나와 공통분모라고는 하나도 없어서 전혀 맞는 않는 ’너(AC)‘의 존재 의미를 묶어 줍니다.

제1독서인 에제키엘 예언서는 거리를 두고 피하고 싶을 정도의 악인마저도 우리가 놓아버리지 않길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전합니다. 악인이 죄를 지어 죽음에 이르기보다 선(善)으로 돌아서서 살길 바라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길 희망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정신을 잘살려 나를 비롯하여 나와 연결된 공동체, 사회집단이 보다 성숙하길 다시 강조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이라고 우리가 일상 안에서 자주 겪게 되는 갈등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라고 용서하고 화해하는 하느님 자녀의 모습을 강조하십니다. 서로를 좋은 길로 이끌어주고,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는 데 서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끝없는 노력의 길을 말씀하는 것이지요. 또한, 그 과정 안에 지속적인 멘토링과 기도가 필요함을 강조하십니다.

‘나’와 ‘너’가 만나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이 모든 노력 위에 빼놓지 말아야 할 부분이 한가지 있다면, 바로 ‘자기만족’이 아닌 ‘참사랑’을 입혀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가 정리하려던 엉클어진 관계의 질서가 바로잡힐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우리 안에 하느님 질서를 완성하는 근본적인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박유천 빈첸시오 신부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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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종교와 양심

그리스도는 하늘을 버리고 인간을 위해 대가없는 봉사자 희생자로 나타났습니다. 인간 복귀를 위한 창을 열어제쳤고 그래서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창기나 잔악한 무리를 벗삼았습니다. 인간을 위해 일생을 살았고 인간이 유일한 가치의 기준임을 가르쳤습니다. 부처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찾아 왕사성을 버렸고 그리고 고행을 했습니다. 정각(正覺)을 얻은 뒤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했고 가르쳤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자의 요소는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종교의 설자리가 그래서 있게 됩니다. 그것을 소박하게 표현하자면 양심이라 할 것입니다. 잔인한 강도의 마음속에도 성자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수도자 속에도 강도는 기다리고 있다는 헤르만 헷세의 말은 지당합니다.

사실 현실세계를 살고 그 세계에 소속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때가 묻기 마련이고 그래서 죄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빈곤과 질병에 의한 불행을 우리는 자신의 일만큼 절박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거지 아이가 양단치마를 붙잡고 위협하는 것을 보면 괘씸도 하나 실상은 저 자신들이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시켜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 아이들에게 교양과 도덕을 요구할 양심과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저 짓밟히는 인생 앞에 깊은 참회가 필요합니다.

서울역 앞에는 거지 아이들이 우글대고 종로와 명동에는 뉴모드의 멋쟁이들이 우글댑니다. 이 남루한 소년들에게서 받는 피해와 불쾌를 저 호화한 무리들의 그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거지를 불쌍히 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헐벗고 굶주리는 것 때문만이 아닙니다. 만고에 한 번 태어난 인생이 그 인격을 무시당하는 데에 있습니다.

부화기에서 시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병아리 떼는 오늘의 인간상의 상징입니다. 봄볕 아래 새끼를 품는 어미 닭과 어미를 따르는 병아리를 보면 바로 사랑의 극치이며 미의 극치입니다. 어미 없는 병아리 떼, 부모 없는 후레자식들의 홍수시대(부모들이 부모 노릇을 안해서 생긴 후레자식의 홍수시대), 이 후레자식들에 의해서 오늘의 모든 비극은 벌어집니다.

인간생활의 현실에서는 선의보다도 악의가 백배나 더 강하게 작용합니다. 넘어뜨리고 짓밟고 속이고 앞지르고... 그래야만 성공이 있고, 그래야만 행복이 있다고 합니다. 인생의 경기장에서는 선의란 지극히 무력합니다. 주먹질이 오고가지 않고는 살수가 없는 시대, 속임수나 에누리 아니고는 장사가 옳게 안 된다는 사회, 행길가에서 다방에서 버스간에서 하루에도 몇 차례 화통이 터지고 목에 핏대를 올려야 하는 우리의 오늘날의 이 생활에서 선의란 말을 입에 담는 것부터가 얼마나 쑥스러운 노릇이며 얼빠진 것일까요?

오늘날의 이 사회에서는 한갓 치렛감밖에 되지 않는 선이, 갖가지 불미부정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자행되고 있어도 이를 타파할 용기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크게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때묻게 하고 공범자라는 죄의식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기도와 설교의 소리는 충천하지만 그 설교 그 기도문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입니까?

인간의 인간다운 면목은 참회하는 마음이고 올바로 행동하는 자세에 있습니다. 양심의 소리에 따라 뉘우치고 자기 본분에 성실하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인들이 가르친 교리이고 윤리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인의 의미를 바르게 살자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인 아닌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양심의 거울에 먹칠을 하고 살기를 자처할 사람은 없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심은 편견이 아니어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나의 종교관은 자명해집니다. 양심을 강조하는 노력이 종교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편견이 없는 양심입니다. 자기 집착이 없는 양심입니다. 양심에 부끄러움 없는 일을 할 때 하늘을 향해서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천국은 찾아지고 신이 있다면 신과도 만나는 것이 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유진선 신부
  |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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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웃과 형제를 마주하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태도에 관하여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악한 길을 걷는 형제에게는 엄중한 경고를, 이웃에 대해서는 진심어린 타이름을 통해서 결국 그를 더 사랑하고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이웃과 형제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입니다.

옳고 그름, 내 것 네 것을 따지는 것에 더 익숙해진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지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래 초대교회 때부터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다른 이들이 칭찬하고 호감을 가질만큼 참 따뜻하고 정겨운 공동체였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하느님을 찬미하며 자기 소유를 형제들과 함께 나누며 살았습니다’(사도 2,47;4,32 참조).

물론 당시 신자들의 공동체에 갈등과 불목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유다인과 이방인, 파벌과 소유, 개개인의 다른 카리스마 때문에 공동체가 소란스러워지고 상처를 받는 일도 잦았습니다(1코린 1,10-13 참조). 그때마다 사도들은 같은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고 한 형제가 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며, 사랑이 모든 것의 으뜸이라는 것을 신자들의 마음에 새겨주었습니다(1코린 12,13;13,1-3 참조). 그렇게 함으로써 공동체가 와해되고 주님의 자녀요 우리의 형제를 잃는 불행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지금 우리 가정과 본당도 따뜻하고 정겨운 공동체의 모습과 더불어 다양한 이유의 갈등과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입니다.그래서 보이는 곳에서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함께 모여 복된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지만, 시시비비를 따지며 어느 형제에 대해서 비난과 험담을 하는 자리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오늘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을 먼저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로마 13,9). 옳고 그름의 식별은 분명 필요하고, 그래서 누군가의 잘못에 대한 경고와 타이름이 필요하다면 그 유일한 목적은 ‘그를 내 형제요 이웃으로 품어 사랑하기 위함임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결정하는 것이 진정 예수님이 가르쳐주시고 보여주신 사랑인지를 먼저 식별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식별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로마 13,10). 그리고 그 사랑의 결과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그렇습니다. 참사랑은 진심 어린 표현을 통해 형제나 이웃의 그릇됨을 바로 잡고 구원하여 마침내 그를 더 깊고 친밀한 내 형제요 이웃이 되게 합니다. 하느님은 오늘 우리에게 바로 그 사랑을 간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 수원교구 강희재 요셉 신부 - 2017년 9월 10일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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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확실히 승리하는 총파업

존스홉킨스 대학의 행동학자 존 B. 왓슨(John B. Watson)은 1919년 우연히 개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공포감을 느끼는 한 아이를 목격하게 됩니다.

‘공포는 선천적인 것일까, 학습되는 것일까?’

왓슨은 당시 재직 중이던 존스 홉킨스(Johns Hopkins) 대학에서 일련의 실험을 계획하고 실시하는데 이게 바로 후세에 두고두고 논란이 되는 “아기 알버트 (Little Albert)” 실험입니다.

이 실험은 ‘파블로프의 개’ 실험을 인간에게 적용시킨 것입니다. 파블로프 실험은 1900년 초반 러시아 학자가 연구를 통해 얻은 결과인데요, 개에게 종을 울리며 밥을 주는 일을 여러 번 반복하면 나중에 밥을 주지 않고 종만 울려도 개는 침을 흘린다는 실험입니다. 현실이 아닌 것에도 현실처럼 반응할 수 있도록 몸이 학습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기 알버트는 흰 쥐나 다른 종류의 동물들에 호기심을 느끼고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동물을 만지거나 볼 때 뒤에서 쇠붙이와 망치를 부딪쳐 소리를 냈습니다. 알버트는 겁을 먹었고 이런 일을 반복하자 망치 소리를 내지 않는데도 알버트는 털이 있는 모든 짐승들이나 가죽 옷, 심지어는 솜뭉치만 보아도 겁에 질리는 행동을 했습니다. 심지어 사람이 얼굴에 털 가면을 쓰고 다가가도 겁을 먹었습니다.

이 비 윤리적인 실험은 비극으로 끝나게 되는데 알버트는 6살에 ‘뇌수종’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뇌수종은 스트레스로 발생할 수 있다고 하는데, 어른들의 호기심의 희생양이 된 것입니다.

어쨌든 이 비극적인 실험으로 알 수 있게 된 것은 인간이 필요이상의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면 그 사회에서 적응하며 살아갈 수 없게 된다는 당연한 사실입니다. 사람은 그 속한 사회에서 각 개인에게 요구되는 합당한 역할을 수행해야 되는데 두려움은 그 역할수행을 방해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어떤 공동체에 속하도록 강요받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파업’과 같은 경우입니다. 이쪽 아니면 저쪽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지금 MBC와 KBS가 총파업에 들어간 지 며칠이 흘렀습니다. 이명박 대통령 때 임명되었던 사장들이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여 방송다운 방송을 할 수 없었다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파업을 하는 공동체에 섞이게 된다면 큰 위험을 감수해야합니다. 만약 파업이 성공적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커다란 피해를 감수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파업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위험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장이 물러났을 때 분명히 같은 비난을 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파업도 몇 명의 겁 없는 사람들에 의해 시작됩니다. MBC 파업도 김민식 PD가 올린 동영상이 큰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2012년 170일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5년 동안 드라마 연출은 할 수 없게 됐고 작은 골방에서 하루 종일 TV만 보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MBC의 왜곡된 뉴스를 1년 반 이상 보면 울화가 치밀어 처음엔 아주 작은 소리로 “김장겸은 물라나라!”를 외치다가 결국엔 사내에서 크게 “김장겸은 물러나라!”를 외친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5월 말이었습니다. 결국 회사에도 나오지 못하여 자택대기발령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투쟁을 계속 하였고 그것이 불씨가 되어 다시 MBC는 물론 KBS까지 총파업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김민식 PD가 2012년 파업 때부터 받아오는 피해에도 불구하고 다시 혼자 일어서게 된 이유는 그의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2012년 파업 당시 그는 회유파로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강경파였던 동료 이용마 기자는 퇴사할 수밖에 없었고 그가 아프다는 소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현재 상영되고 있는 ‘공범자들’이란 언론장악의 실상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 시사회에서 그가 울면서 자신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투쟁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때 그가 끝까지 함께 버텼다면 사태는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단체에 속하든 이런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있어야합니다. 두려움이 없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공동체를 알고 있습니다. 바로 ‘교회’입니다. 그 배를 타고 있으면 영원한 생명을 따 놓은 당상입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에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실 때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지금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는 가톨릭교회 단 하나밖에 없고 죄의 용서를 위한 권한이 교회에서 행사되고 있습니다. 이 단체에 머문다면 죄로 쫓겨난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는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런데 파업하는 위험천만한 단체에 머물 용기는 아니더라도 교회에 머물기 위해서도 위험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바로 ‘복음전파’ 소명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게 만드는 사람을 회개시켜야 합니다. 이 소명은 예수님께서 교회를 파견하실 때 교회에게 준 사명입니다. 따라서 교회에 머물려면 선교하고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나에게 죄를 짓게 하면 그 형제에게 먼저 개인적으로 타이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두세 사람을 더 데려가서 타일러보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고 그의 말마저 듣지 않는다면 이방인 취급을 하라고 하십니다. 언제나 교회 중심이어야 합니다. 나중에 교회가 약속된 영광을 받게 될 때는 그 복음전파 소명을 얼마나 충실히 수행했는지에 따라서 각자가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차범근씨가 [차범근의 따뜻한 축구]라는 칼럼에 “나도 많이 비겁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습니다. 세월호 비극이 터졌을 때 국수집 할머니가 국수집을 닫고 세월호 푯말을 들고 집회에 나가는 것을 보며 “저 국수집 주인은 괜찮을까?”라고 세월호 가족의 아픔보다는 국수집 주인이 먼저 걱정이 됐다고 합니다. 이것이 너무 미안하여 세월호 변호사인 박주민 의원이 총선에 출마했을 때 그를 조금이나마 돕고 싶었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하기 두려워 결국 자신이나 아내의 이름이 아닌 친구 아내의 이름으로 기부를 했다고 합니다. 촛불 집회 때도 얼굴이 나갈까봐 당당하지 못하게 자신을 숨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청와대를 지날 때는 집에 간다고 하면 되는데도 거짓으로 둘러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뀐 지금 느끼는 것은 승리의 기쁨보다는 “나도 많이 비겁했다!”는 마음입니다. 김민식 PD도 상영정지가처분 신청을 뚫고 상영하게 된 ‘공범자들’ 영화 앞에서 감격의 기쁨도 있었지만 “내가 이 영화에서 과연 저항세력이 맞는가?”라는 생각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교회에 속해있다고는 하지만 작은 두려움들 속에서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습니다. 교회가 영광을 받을 때 저 역시 “저는 비겁했던 사람입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편을 명확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십니다. 두세 사람이라도 당신 이름으로 모이면 당신도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이라는 뜻은 편을 만들라는 뜻입니다. 당신 편과 아닌 편. 그리고 당신의 편에게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거나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권한을 주십니다. 그러나 두려움이란 것이 이쪽 편에도 저쪽 편에도 서지 않고 중립을 지키게 만듭니다. 미지근하게 만듭니다. 하느님은 차갑거나 뜨겁거나 선택을 해야지 미지근하면 뱉어버리겠다고 합니다. 파업을 할 때 두려움으로 이쪽에도 저쪽에도 끼지 못하는 사람이 제일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편에 확실히 서야합니다. 그러려면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제가 첫 보좌신부를 할 때 저에게 선교하셨던 할머니가 생각이 납니다. 제가 부임한지 약 반 년이 지났지만 신자들은 여전히 저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워낙 큰 본당이었고 미사 후에도 고해성사를 주어야 해서 인사할 시간도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후에 짬이 나서 뒷산에 올라갔는데 묵주를 드신 할머니가 다가오시더니 대뜸 “총각, 성당 다녀!”라고 하신 것입니다. 저는 성당을 다닌다고 했더니 어느 성당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밑에 있는 성당이라고 했더니 당신도 다니시는데 매일 미사에 나오신다고 했습니다. 저도 매일 미사 나간다고 했더니 그때서야 저를 알아보셨습니다. 요즘 그 할머니가 그립습니다. 그 할머니는 확실히 교회를 선택한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싸워 이기셨고 또 교회를 파견하시며 세상과 싸워 이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승리의 확신을 주셨습니다. 이 총파업으로 세상을 이기고 하느님께 영광을 받을 때 고개를 함께 들고 기쁨을 함께 나눌 일원들이 되기 위해 두려움 없이 이 싸움에 열렬히 참여하는 구성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확실히 승리할 총파업에 두려움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 2017년 9월 10일
  | 09.10
460 76%
수원] 이해와 용서의 능력

오늘 복음은 ‘교회론적’ 담화(마태 18,1-35)의 일부를 전하고 있다. 이 담화는 신자 공동체의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내적 생활의 ‘이상적인’ 틀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이해하는 마음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끌어나가는 유일한 ‘규범’이어야 할 사랑의 두 가지 관점에 불과하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 교회에도 필요한 것이다.

복음: 마태 18,15-20: 용서하고 화해하라

오늘 복음은 다른 사람들을 죄짓게 하거나, 또 공동체인 교회에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5-17절). 여기서는 형제가 잘못을 하더라도 그 형제를 다시 ‘얻기 위해’일련의 판단절차에 따르라는 권고를 하고 있다. ‘얻다’는 것은 공동체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은 그 방법이 세심하고 우애적이어야 한다.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15절). 이것은 형제의 자존심을 상하거나 분노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더 멀어질 수 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어떤 애정의 공감대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했는데도 되지 않으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16절)라고 한다.

이 말씀은 모세법의 소송절차이다(신명 19,15 참조). 그러나 여기서는 사실을 명확히 밝혀 화해를 촉구하는 것이며, 그 결과로 ‘형제를 얻는 것’(16절)이다. 이렇게 했는데도 해결되지 않으면 “교회에 알려라”(17절)고 하신다. 이것은 공동체 전체에 맡기는 것이다. 이것 역시 그가 잘못을 깨닫고 공동체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는 호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마지막 시도까지 실패할 때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7절)고 하신다. 이때에 교회로부터 이탈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교회의 특별한 ‘권한’을 말씀하신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절). 이 말씀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다(16,19). 이는 베드로의 권한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자기 규제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교회의 모습은 구성원 각자가 모두의 선익에 공동책임을 지는 완전한 공동사회의 형태를 말하고 있다.

복음은 ‘너’라고 하면서 교회의 의미를 단수로 표현함으로써, 각자가 공동체를 대신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공동체는 각자 개인과 따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으며, 공동체의 아픔은 바로 나의 아픔이며, 또 그 잘못은 나의 잘못인 것이다. 공동체이기 때문에 공동 책임이 있다. 이제 교회는 자신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알아들으려 노력하면서 ‘맺고’ ‘풀어나가는’ 충만한 삶이 된다면 정말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이다.

이 공동체의 의미는 복음에서 더 내면화하고 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19-20절). 두세 사람은 공동체의 최소한의 숫자이다. 공동체는 군중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결합하여 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진정 교회의 힘은 주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에 결합되어 있음을 깨달으면서 바치는 ‘기도’의 능력에 있다. 사목의 실천 방향이 이렇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으로 교회가 생겨날 수 있는 뿌리를 말씀하신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20절). 우리는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행하면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현존을 이룰 수 있을 때, 교회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외적인 실체가 아니라, 내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신비’라고 하는 것이다.

제1독서: 에제 33,7-9: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보초로 세운다

제1독서에서는 야훼께서 예언자의 책임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만약 예언자가 타일러주지 않아 죄인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그러나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에제 33,8-9). 예언자는 공동체를 위한 봉사를 위해 있는 존재이다. 그의 책임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다. 이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책임은 이제 각 개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봉사한 만큼 공동책임도 커지는 것이다.

제2독서: 로마 13,8-10: 남에게 해야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제2독서에서는 교회 내보다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사랑이어야 함을 상기시키고 있다. 목숨을 다해서도 다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의무라고 한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8-10절). 교회는 사목자들이건 신자들이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사랑이라는 법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는 말씀이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공동체가 하느님 앞에 완전한 사랑의 공동체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공동체를 위한 각 구성원의 사랑의 마음이며, 또한 이러한 삶으로 그 안에 그리스도를 현존시키는 삶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정 안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청하면서 기도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2017년 9월 10일
  | 09.10
460 76%
[수원] 사랑과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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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사랑의 빚’에 대해서 말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느님께 사랑의 빚을 진 것일까요?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을 닮은 영적 존재로서 생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더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 스스로 하느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당신 전부를 우리에게 사랑으로 내어주십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모시는 성체성사는 이러한 사랑의 진리와 그 은총을 증거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을 닮게 창조되었고 또한 닮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사랑의 빚입니다. 우리가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그러나 참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그 상환의 의무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대체해 주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으로 말씀하신 하느님 사랑과 같은 사랑으로, ‘이웃 사랑’을 되새겨 줍니다.

그리고 이 사랑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웃에게 선을 베풀지 않고, 악을 저지르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모든 죄는
결국 하느님 사랑에서 어긋난 행위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죄는 ‘목적에서 이탈된 삶, 어긋난 관계’를 뜻합니다. 하느님을 불신하고 부정하는 죄인들은 하느님보다 피조물을, 세상을 더 사랑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그릇된 사랑을 ‘우상숭배’라고 단죄했습니다. 하느님보다 돈과 권력과 명예를 더 사랑하는 행위, 하느님보다 가족이나 심지어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행위가 바로 우상숭배이고 죄입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우상숭배자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웃에게 선을 베풀지 않고 악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파수꾼의 자격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우상숭배를 단죄하며 동족을 위해 서로 경고하라.’고 외칩니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만 인간답게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각자는 사회가 우상숭배적인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지 경계하며, 나와 이웃이 우상숭배에 물들지 않도록 파수꾼처럼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 있는 신앙인들은 에제키엘 예언자처럼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복음에서
죄 중에 있는 형제를 위한 사랑의 실천을 배우게 됩니다. 하느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죄인’들을 보게 되면, 이웃에게 사랑의 채무를 갚지 않는 ‘죄인’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과 화해할 수 있도록 성사의 은총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굳게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사랑 실천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바치는 기도는 죄악과 죽음을 이기신 사랑의 승리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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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한영 야고보 신부
2020년 9월 6일 ‘수원교구 주보’에서
  | 09.05
460 76%
[수원]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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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교회란 무엇인가?’를 명확히 알려줍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도 작은 교회라 하고,
소공동체도 작은 교회라 합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주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면 교회이기 때문에 굳이 가톨릭교회에 속해있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모이면 그것이 교회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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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1993)는 실존 인물 ‘제리 콘론’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먼저,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970년 당시 잉글랜드는 400년이 넘게 아일랜드를 점령하고 심한 차별대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민간인과 영국군의 충돌이 계속되었습니다.

무직자인 제리 콘론은 지붕을 뜯어내 파는 좀도둑이었습니다. 그런데 총으로 영국군을 저격했다는 오해를 받습니다. 또 도망가는 중에 독립 시위를 하는 틈에 끼여 폭동 주동자 혐의까지 받았습니다. 이렇게 아들에게 골치 아픈 일이 계속 일어나자 아버지는 아들을 잉글랜드에 있는 작은어머니 집에 보냅니다. 아버지에게 제리는 나이 먹고도 철없는 어린애 같고, 제리 입장에서 아버지는 잔소리와 억압을 하는 존재입니다.

제리는 배에서 폴이라는 친구와 마주칩니다. 제리는 작은어머니 집에 가지 않고 폴과 돌아다닙니다. 그러다가 히피족들과 어울려서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히피들조차 아일랜드인에 대해 차별을 하고 있어서 마땅히 머물 곳이 없었습니다. 다시 런던 시내를 방황하던 제리는 길에서 우연히 화류계 여자의 집 열쇠를 줍고, 그 집에 몰래 들어가 돈을 훔칩니다.

그런데 이때 런던 길포트 테러 사건이 발생합니다. 제리는 훔친 돈으로 옷을 사 입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의 친구 폴이 경찰에 잡혀갔고, 영국 경찰이 제리의 집에도 들이닥쳤습니다. 영국 경찰은 아버지를 쏴버리겠다는 협박과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공범으로 몰려 온 가족이 감옥에 갇힙니다. 사형제가 폐지되었기에 종신형을 받고 제리는 아버지와 함께 수감생활을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종교의 힘으로 아들을 위로합니다.

그렇게 14년이 흐릅니다. 그러던 중 새로운 죄수가 들어오는데, 그가 15년 전 런던 길포드 식당 폭탄 테러 사건을 저질렀다고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지고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이 일로 제리는 지금까지 포기했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일어서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제리는 변호사 가레스에게 사건을 처음부터 다시 검토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동안의 모든 일을 녹음해서 보내고, 변호사도 애초에 사건 수사 자체에 문제가 있었음을 밝혀냅니다. 가레스는 끈질기게 진실을 파헤쳤고, 결국 1976년에 항소심에서 제리와 가족, 그리고 친구들은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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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콘론은 한 마디로 동네 양아치였습니다.
물론 억울하기는 하였으나 밖에서 사나 감옥에서 사나 그에게는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죽음으로 그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자신은 괜찮으나 죽은 아버지가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히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아버지의 이름으로’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자신이 무죄를 받아내야 아버지도 무죄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산다는 말은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명예가 곧 아버지의 명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군가의 ‘이름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을 잘못 해석하였습니다. 교회를 그냥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말은
그분의 명예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명예란 ‘하느님’으로서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은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이 권한으로 살라는 것은 곧 당신으로 살라는 말과 같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예수님의 권한을 행사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명예가 교회를 통해 회복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하여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라고 하십니다.

교회가 당신 권한을 행사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예수님의 권한을 행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예수님과 하나입니다. 제리 콘론의 노력을 통해 아버지의 무죄가 증명되었듯,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권위가 증명되어야 합니다. 이름은 본성이고 권한입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신 죄를 사하는 권한을 부정하였고, 교회를 통해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한 것까지 부정하였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그런 권한을 부여하셨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는 교회의 사제였을 때부터
죄를 자신의 고행으로 용서받으려고 했지 교회에 부여한 그리스도의 권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이 빠진 교회라는 것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땅에서 맺고 푸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교회에 주시고 그것을 통해 죄를 사해 주도록 하셨습니다. 이 권한이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로는 가족이나 소공동체 등을 작은 교회라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없습니다. 죄 사함의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가톨릭교회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의 열쇠는 베드로에게만 주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참다운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그분의 명예와 권한을 행사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보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되어야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그분의 명예이고 권한이고 본성입니다.

죄를 사할 권한이 없다면
하느님이 아닌 것처럼, 마찬가지로 죄를 사할 권한이 없다면 교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는 그리스도와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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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2020년 9월 6일
  | 09.06
460 76%
[수원] 이해와 용서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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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교회론적’ 담화(마태 18,1-35)의 일부를 전하고 있다. 이 담화는 신자 공동체의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내적 생활의 ‘이상적인’ 틀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이해하는 마음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끌어나가는 유일한 ‘규범’이어야 할 사랑의 두 가지 관점에 불과하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 교회에도 필요한 것이다.

복음: 마태 18,15-20: 용서하고 화해하라

오늘 복음은 다른 사람들을 죄짓게 하거나, 또 공동체인 교회에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경우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5-17절). 여기서는 형제가 잘못을 하더라도 그 형제를 다시 ‘얻기 위해’일련의 판단절차에 따르라는 권고를 하고 있다. ‘얻다’는 것은 공동체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선은 그 방법이 세심하고 우애적이어야 한다.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15절). 이것은 형제의 자존심을 상하거나 분노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더 멀어질 수 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어떤 애정의 공감대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했는데도 되지 않으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16절)라고 한다.

이 말씀은 모세법의 소송절차이다(신명 19,15 참조). 그러나 여기서는 사실을 명확히 밝혀 화해를 촉구하는 것이며, 그 결과로 ‘형제를 얻는 것’(16절)이다. 이렇게 했는데도 해결되지 않으면 “교회에 알려라”(17절)고 하신다. 이것은 공동체 전체에 맡기는 것이다. 이것 역시 그가 잘못을 깨닫고 공동체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는 호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마지막 시도까지 실패할 때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7절)고 하신다. 이때에 교회로부터 이탈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교회의 특별한 ‘권한’을 말씀하신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절). 이 말씀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다(16,19). 이는 베드로의 권한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자기 규제의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교회의 모습은 구성원 각자가 모두의 선익에 공동책임을 지는 완전한 공동사회의 형태를 말하고 있다.

복음은 ‘너’라고 하면서 교회의 의미를 단수로 표현함으로써, 각자가 공동체를 대신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공동체는 각자 개인과 따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으며, 공동체의 아픔은 바로 나의 아픔이며, 또 그 잘못은 나의 잘못인 것이다. 공동체이기 때문에 공동 책임이 있다. 이제 교회는 자신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알아들으려 노력하면서 ‘맺고’ ‘풀어나가는’ 충만한 삶이 된다면 정말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이다.

이 공동체의 의미는 복음에서 더 내면화하고 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19-20절). 두세 사람은 공동체의 최소한의 숫자이다. 공동체는 군중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결합하여 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진정 교회의 힘은 주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에 결합되어 있음을 깨달으면서 바치는 ‘기도’의 능력에 있다. 사목의 실천 방향이 이렇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으로 교회가 생겨날 수 있는 뿌리를 말씀하신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20절). 우리는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행하면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현존을 이룰 수 있을 때, 교회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외적인 실체가 아니라, 내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신비’라고 하는 것이다.

제1독서: 에제 33,7-9: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보초로 세운다

제1독서에서는 야훼께서 예언자의 책임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만약 예언자가 타일러주지 않아 죄인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그러나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에제 33,8-9). 예언자는 공동체를 위한 봉사를 위해 있는 존재이다. 그의 책임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다. 이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책임은 이제 각 개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봉사한 만큼 공동책임도 커지는 것이다.

제2독서: 로마 13,8-10: 남에게 해야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제2독서에서는 교회 내보다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사랑이어야 함을 상기시키고 있다. 목숨을 다해서도 다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의무라고 한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8-10절). 교회는 사목자들이건 신자들이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사랑이라는 법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는 말씀이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공동체가 하느님 앞에 완전한 사랑의 공동체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공동체를 위한 각 구성원의 사랑의 마음이며, 또한 이러한 삶으로 그 안에 그리스도를 현존시키는 삶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정 안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을 청하면서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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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17년 9월 10일
  |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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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신자 공동체의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내적 생활의 ‘이상적인’ 틀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이해하는 마음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끌어나가는 유일한 ‘규범’이어야 할 사랑의 두 가지 관점으로 오늘의 우리 교회에도 필요한 것이다.

복음 : 마태 18,15-20 : 용서하고 화해하라

오늘 복음은 다른 사람들에게나,
또 공동체인 교회에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5-17절).

여기서는 형제가 잘못하더라도
그 형제를 다시 ‘얻기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선은 그 방법이 세심하여야 한다.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15절). 이것은 형제의 자존심을 상하거나 분노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더 멀어질 수 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어떤 공감대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했는데도 되지 않으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16절) 라고 한다.

이 말씀은 사실을 명확히 밝혀 화해를 촉구하는 것이며,
그 결과로 ‘형제를 얻는 것’(16절)이다. 이렇게 했는데도 해결되지 않으면 “교회에 알려라”(17절) 고 하신다. 이것은 공동체 전체에 맡기는 것이다. 이것 역시 그가 잘못을 깨닫고 공동체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는 호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마지막 시도까지 실패할 때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7절) 고 하신다. 이때 교회로부터 이탈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교회의 특별한 ‘권한’을 말씀하신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절). 이 말씀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다(16,19). 여기서 교회의 모습은 구성원 각자가 모두의 선익에 공동 책임을 지는 완전한 공동사회의 형태를 말하고 있다.

복음은 ‘너’라고 하면서 교회의 의미를 단수로 표현함으로써,
각자가 공동체를 대신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공동체는 각자 개인과 따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으며, 공동체의 아픔은 바로 나의 아픔이며, 또 그 잘못은 나의 잘못인 것이다. 공동체이기 때문에 공동 책임이 있다. 이제 교회는 자신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알아들으려 노력하면서 ‘맺고’ ‘풀어나가는’ 충만한 삶이 된다면 정말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이다.

이 공동체의 의미는 복음에서 더 내면화하고 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19-20절).

두세 사람은 공동체의 최소한의 숫자이다.
공동체는 군중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결합하여서 한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진정 교회의 힘은
주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에 결합하여 있음을 깨달으면서 바치는 ‘기도’의 능력에 있다. 사목의 실천 방향이 이렇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지막으로 교회가 생겨날 수 있는 뿌리를 말씀하신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20절). 우리는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행하면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현존을 이룰 수 있을 때, 교회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외적인 실체가 아니라, 내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신비’라고 하는 것이다.

제1독서에서는
야훼께서 예언자의 책임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예언자는 공동체를 위한 봉사를 위해 있는 존재이다. 그의 책임은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백성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인도하는 것이다. 이제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책임은 이제 각 개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제2독서에서는
교회 내보다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사랑이어야 함을 상기시키고 있다. 목숨을 다해서도 다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의 의무라고 한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8-10절).
교회는 사목자들이건 신자들이건 모든 사람을 위해 사랑이라는 법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20)라는 말씀이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공동체가 하느님 앞에
완전한 사랑의 공동체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공동체를 위한 각 구성원의 사랑의 마음이며, 이러한 삶으로 그 안에 그리스도를 현존시키는 삶이 따라야 한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정 안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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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20년 9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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