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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내가 받고 있는 넉넉한 사랑, 용서... 이젠 좀 나눕시다
조회수 | 2,509
작성일 | 05.09.02
아프리카의 한 부족에서는 다음과 같은 전통이 있다고 합니다.
그 부족의 한 사람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모든 부족원들이 그 사람을 가운데 놓고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사람이 그동안 어떤 선행을 했는지, 어떻게 착하게 살아 왔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한사람, 한사람이 모든 부족원들 앞에서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 예식에서 그의 잘못된 행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그 사람의 좋은 점만을 이야기 해야 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예식은
모든 부족원이 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만 끝이 난다고 합니다. 모든 부족원이 이야기를 다 마치고 나면 축제가 벌어지고, 잘못을 저지른 부족원은 다시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러한 전통에 의해서 그 부족에서는 큰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쉽게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올바르게 사는 것보다 잘못을 저지르며 살기가 더욱 쉬운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이렇게 저지르게 된 잘못은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고, 그로인해 서로를 멀어지게 합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로부터 심지어는 나 자신까지도 점점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잘못은 이렇게 서로의 관계를 깨어지게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 속성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이 속했던 공동체로,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회개에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많은 경우 그 용기보다는 두려움이 더욱 크기에 회개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공동체의, 우리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미 주님께로부터 받았고, 그러기에 우리 마음에 담고 있으며, 이제는 나누어야할 사랑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그 사랑에 대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의 잘못을 이해해 주고, 다시 함께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오늘의 2독서에서는 그 배려가 단순한 사랑이 아닌, 하나의 의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살아가야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지워진 의무임을 일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잘못한 이를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용서 역시 적지 않은 용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용서가 힘들 때,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할 때,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역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으며, 이미 많은 이들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 사랑의 의무를 당신의 말씀으로, 그리고 성사라는 크나큰 은총으로 주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미 내가 받은 것입니다.
내 안에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나의 것을 나누는 일에 소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을 받는 이도 나와 함께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에게 이제는 내가 받은 것을 주어야 할 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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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박민우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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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로마 13,8)” 특히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영원한 빚입니다. 아무 자격도 없는 우리를 위해서, 아니 죄 투성이 나를 위해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한들 이 엄청난 사랑을 갚을 길이 있겠습니까?

주님의 사랑은 포기하도록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강구 하도록 촉구하십니다. 단 둘이 만나서 충고도 해 보고, 아니면 구약의 방법, 곧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공동체의 일원이 돌아서도록, 자기의 잘못된 행실에서 돌아설 수 있도록 설득해 보라고 독려하십니다. 그 방법이 성공한다면 그 공동체는 사람 하나를 얻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런 걱정이 앞의 ‘위험을 무릎 쓴 사랑’의 노력을 포기하게 합니다. 정말이지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를 무지 고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 다른 이들도 제게 그럴 수 있습니다. 나도 내 행동을 고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친구의 우정어린 충고도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으니 참견 말라”고 퇴박을 놓으면 머쓱해지고 맙니다. 더구나 “너나 잘 하세요” 하면 무안하기조차 합니다.

그래서 회심도, 자기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도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회심까지도 은총입니다. 우리가 지금 ‘바오로의 해’를 보내는 바로 그 바오로가 은총을 입은 사람입니다. 바오로는 자신은 유대교의 정통이라고, 갈릴리 출신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하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말에서 굴러 떨어진 다음에 그는 조금 전까지와는 전혀 반대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박해하던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 외에는 전부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야말로 엄청난 회심이요 반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일꾼 한 명이 늘어나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교 제2의 창시자가 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노력해야 하지만 회심까지도, 충고까지도 모두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가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마음을 모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청해야” 하겠습니다.

김현배 신부
  |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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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합시다

무엇을 하라고 가르치고 지시하고 있는지 한번 볼까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파수꾼으로 세우시고 하느님을 대신해서 사람들에게 올바로 사는 길을 제시하고 올바르지 않으면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 하도록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고 이 사명을 행하지 않았을 경우 우리에게 그 책임을 묻겠다고 하십니다.

복음에서도 에제키엘을 통해 말씀하신 책임과 의무를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지요. 형제가 죄를 짓거든 둘이 만나 타이르고 듣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다른 민족으로 여기라 하십니다.

우리가 기르는 말이 목마르면 물가로 데려가야 하지요. 허나 물가까지는 데려갈 수 있어도 물을 먹일 수는 없지요. 오늘 성서의 말씀들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잔치상은 펼쳐 놓지만 사람들에게 강제로 먹일 수는 없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잔치상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강제 되어질 수 없습니다. 사랑은 소극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사랑이 무엇이지요? 사도 요한은 편지를 통해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압니다. 하고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요한의 신앙고백을 우리가 듣습니다 그래서 나도 하느님은 사랑이시구나 하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사랑하려고 애를 씁니다. 내가 먼저 인사하려 합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사랑을 청합니다. 내가 먼저 용서를 청하고, 내가 먼저 머리를 숙이고 내가 먼저 다가가려 합니다. 이것이 네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사랑합시다.

김태수 신부
  |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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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나는 화해를 해야 하는가?

살아가다 보면, 상처를 입을 때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상처를 주는 그 누군가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 절친한 벗이라면 그 상처는 더욱 더 아픕니다. 그래서 미움과 증오가 생기고, 관계가 단절되는 상황이 찾아옵니다.

오늘 복음은 이런 단절의 상황을 맞게 되는 경우를 잘 보여줍니다. 형제가 나에게 죄를 지을 때, 단둘이 말해보고, 한둘을 더 데려가 말해보고, 교회 공동체의 이름으로도 말해보고, 그래도 듣지 않거든 다른 민족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위치를 보면, 그 내용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되찾은 양의 비유와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말씀 사이에 놓여있습니다. 화해의 기쁨과 끝없는 용서를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결국 오늘복음은 죄를 짓고 상처를 준 형제를 다시 얻는 방법에 그 무게가 있습니다. 그 방법은 그를 만나 나누는 “대화”와 그를 위해 청하는 “기도”입니다.

우리 인간은 인격체(persona)입니다. 인격체의 신비 중에 하나는, “언어의 표현”을 통해서만 속마음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것을 원하는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그 속마음을 알기위해서는 물어야만 합니다. 또한 인격체는 “변화 가능성”을 가집니다.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해 본다면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몸과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도 그렇습니다. 어제의 죄인이 회개를 하고 변화되어 선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 형제를 버리고 관계를 단절하기 전에, 대화를 나누고 변화되기를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화해와 용서는 우리에게 기쁨이고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고백할 때 장미나 선물을 주곤 합니다. 선물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대방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거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거부하는 것만이 아니라 선물을 주는 상대방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바로 사랑하는 가족들과 이웃들입니다. 우리가 이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느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형제의 잘못만을 바라보고 그들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선택이 놓여있습니다. 하느님을 거부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용서와 화해의 기쁨을 맞이하시겠습니까?

▥ 의정부교구 이현승 다미아노 신부 - 2017년 9월 10일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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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상처 준 이에게 먼저 다가가기

우리는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살아갑니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면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살다보면 뜻하지 않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특별히 아름다운 사랑과 우정을 나누던 사이에서 주고받는 상처는 서로에게 넘지 못 할 커다란 벽으로 다가옵니다.

상처받은 이의 입장에서 보면, 잘못을 저지른 친구가 먼저 다가와 진심어린 사과를 한다면 쉽게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상처를 입힌 입장에 선다면, 먼저 고개를 숙이고 용서를 청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도 주체하기 힘든 죄책감 때문에, 감히 자신의 잘못으로 상처를 받은 친구 앞에 설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상처를 입고 피해를 보았다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친구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 친구를 책망하거나 다그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친구를 짓누르고 있는 죄책감이라는 바위를 치워 예전처럼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친구의 잘못과 허물을 덮어주어 새롭게 함께 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고, 참된 화해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참된 사귐의 길입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신부 - 2017년 9월 10일
  |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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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더불어 사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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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랑,
하느님으로 부터 온 사랑은 하나입니다. 자식 사랑, 부모 사랑, 부부 사랑, 친구 사랑, 자연 사랑이 같은 한 사랑입니다.

오색 등에 불이 들어오면
한 전기에서 오색 빛이 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이 사랑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원죄 이후 하느님과의 단절로 우리는 이 사랑을 잃고 이웃과 화합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관계가 사랑일 때는 조화요 화합이고, 사랑이 아닐 때는 불화가 되고 분리가 됩니다. 이 불화로 관계의 선순환이 악순환으로 바뀌니 세상의 모든 죄악이 그것입니다.

창조계의 모든 것은 관계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람끼리는 물론이고 자연과도 그렇습니다. 깊이 잘 바라보면 모든 사물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관계에 의해 존재하고 또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이란 이 관계성과 관계 활동입니다.

상대의 잘못이나 불행도
나와 연관이 되어있고 나의 행복도 상대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현대에 와서 더욱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근래에 와서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형제가 죄를 지으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에게” 안 되면, “교회에 알려
라”. 지당한 말씀이고 신앙과도 일치하는 말씀입니다. 이를 경제구조나 정치적으로 또는 윤리적으로 해결해보고자 모색하고 있지만, 이는 결국 복음에서처럼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열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불어 사는 사회’는
사람끼리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도 그러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으로 부터 오는 진정한 사랑은 그 어떤 것도 배타하지 않고 포용합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회복할 때 모든 것이 상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 사태도 무난히 극복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즉,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계의 이치입니다. 사랑은 순리이고 불화는 역행입니다.

지옥에 가면
큰 상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고 사람들이 둘러앉아 식사하는데 모두 먹지를 못해 뼈만 앙상하다고 합니다. 젓가락이 너무 길어서 입에 음식을 넣지 못해서입니다.

천국에 가면
똑같은데 긴 젓가락으로 서로 마주 보는 사람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니 모두 행복했다고 합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는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이루는 일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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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송영준 비오 신부
2020년 9월 6일 ‘의정부교구 주보’에서
  |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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