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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4+1"의 의무
조회수 | 2,372
작성일 | 05.09.02
얼마 전에 TV에서 축구를 보다가 정말 재미있는 장면을 하나 봤습니다.
운동을 하다보면 가끔 이런저런 다툼이 일어나곤 합니다. 선수들이 상대편 선수들과 싸울 때도 있고, 응원하던 관중들끼리 서로 싸울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사소한 말다툼으로 끝날 때도 있는가 하면 어떤 때는 과격한 주먹다짐까지 일어나기도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사람이 죽는 일까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날은
상대편 선수나 관중과의 싸움이 아니라 같은 편 선수들끼리 서로 싸우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다른 나라와 축구 경기를 하다말고 자기 나라 선수와 싸움이 붙어서 서로 따귀를 때리고 얼굴에 침을 뱉고 발길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자기만 잘 할려고 다른 선수들을 무시하면서 경기를 하다가,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이러쿵저러쿵 잔소리를 하다 그만 싸움이 붙은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그 장면은 전파를 타고 전 세계로 전해졌고,
그 나라는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연히 경기는 졌고, 그 선수들은 자기 나라에서 엄청난 벌칙을 받았습니다. 같은 편 선수들이 서로 이야기를 잘 나누면서 조화롭게 움직이지 못하면 경기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떤 형제가 잘못한 일이 있거든 그의 잘못을 잘 타일러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제1독서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비슷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한 죄인에게 '너는 사형이다.'라고 유죄 판결을 내렸는데, 네가 그 죄인에게 버릇을 고치라고 타일러주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죄인은 자기 죄값으로 죽겠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을 나는 너에게 지우리라."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웃들과 지내면서
서로가 가진 단점 때문에 이런 저런 갈등을 겪게 됩니다. 나의 단점을 다른 사람이 지적해 줄 때, 혹은 내가 다른 사람의 어떤 단점을 지적할 때 서로가 서로의 좋은 마음을 잘 받아드리고, 감사해하고, 자기의 단점을 고쳐가도록 노력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기가 도무지 쉽지만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한다면
왠지 내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그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까 하는 걱정 때문에 지레 겁을 먹기 일쑤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 생각은 옳은 것 같고 상대편은 자기 눈의 대들보는 못 보면서 다른 사람의 티끌만 보는 사람, 앞뒤가 꽉 막힌 요지부동 불고집 같은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좋은 게 좋지'라면서 그 상황을 회피하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가서 타일러 주어라!" '누군가가 잘못하는 것이 있는데도 네가 그 사람에게 잘못된 버릇을 고치라고 이야기를 해 주지 않으면, 그래서 그 사람이 벌을 받게 된다면, 나는 그 책임을 너에게 지우리라!'

이 말씀을 바오로 사도는
"남에게 해야할 의무를 다하십시오."라는 말로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의무는 "사랑의 의무", 곧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저 이웃이 필요로 하는 것만 채워주고, 그 사람들의 입맛만 잘 맞춰준다는 것은 아닙니다.

당장은 듣기에 거북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정말 그 사람에게 필요한 이야기는 꼭 해주는 것이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길입니다. 내가 내 스트레스를 풀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의 속을 긁어 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올바른 삶을 살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는 데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진정한 사랑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혹 다른 어떤 사람이 그렇게 나에게 다가온다면 그 사람의 마음 곧 사랑의 마음을 잘 받아들이고 고마워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런 사랑의 마음이 함께
모여있는 곳에 예수님, 당신께서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서로가 서로를 주고 받으며 사랑으로 잘 어울어져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 거기에 당신께서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바로 그런 사랑의 마음을 모아 구하는 것이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고, 당신 친히 그 열매를 맺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네 가지 있습니다.
군대가는 일, 세금 내는 일, 공부하는 일, 그리고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거기에 우리 신앙인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또 다른 의무를 한가지 더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의 의무"입니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라는 예수님 말씀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이웃 사랑의 의무를 실천합니다. 이웃!, 나의 구원은 그들에게 달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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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김종길 제오르지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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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가 잘못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듯이 우리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기를 바라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형제의 잘못을 충고해주고, 또 다른 형제의 충고를 고마운 마음으로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큰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은 잘 보면서도 자신의 잘못은 잘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통하여 자신의 잘못을 깨닫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거든, 그들을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메면 하늘에서도 메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우리 가족 중에 누가 잘 되면 그것은 가족 모두의 기쁨이고 자랑입니다. 반대로 가족 중 누가 잘못되면 그것은 가족 모두의 슬픔이고 아픔입니다. 이와 같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운명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공동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는 신비스러운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 구성원 중 누군가가 잘못을 저질렀거나 그릇된 길을 가고 있다면 형제적인 사랑으로 충고하고 도와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잘못한 이를 보고 뒤에서 흉을 보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사실 충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칫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미움을 살 수도 있고 또 그것 때문에 불편한 관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 말씀은 남의 잘못을 사랑으로 충고하고 깨우쳐 주라고 가르칩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주위에는 이러한 모습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는 무관심과 극도의 이기주의의 결과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지도자와 백성들의 잘못을 깨우쳐 주고 고쳐주는 일을 목숨을 걸고 수행하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의 멸망에 대해 책임을 져야한다고 경고합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너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된다”(에제키엘 33, 7).

오늘의 교회, 교회 공동체의 일원인 우리 모두는 이 예언직의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남의 잘못을 충고해 주는 것은 비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비난하거나 화를 내는 것과도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충고해 주는 것 못지않게 남이 나의 잘못을 충고할 때 고마운 마음으로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면 충고해 주라고 하시며 그 인격과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도록 충분히 배려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가 말을 잘 듣지 않으면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교회도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이므로 언제나 죄를 짓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사실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형제적 사랑으로 잘못한 사람을 위해 용서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죄인의 회개를 위한 기도는 공동체의 의무입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 16).

김상진 아오스딩 신부
  | 09.05
460 76%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인간은 함께 살아가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좋든 나쁘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잘 되면 그것은 우리 가족 모두의 기쁨이고 영광입니다. 반면에 우리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잘못되면 그것은 우리 가족 모두의 슬픔이고 아픔입니다. 이와 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운명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공동체라고 합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Ⅰ코린 13,26) 교회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는 신비체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로 되어있습니다.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고 할 수 없고 또 머리가 두 발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습니다. 몸의 지체 가운데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우리는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특별히 소중하게 감쌉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Ⅰ코린 12,14-27 참조)

오늘 복음은 교회 공동체 구성원 중 누군가가 죄를 짓고 그릇된 길로 갈 때 형제적 사랑으로 충고하고 도와주라는 가르침입니다. ‘매를 아끼면 자식을 망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따끔한 매와 충고는 사람을 인간답게 이끌어 주는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적 사랑이 담긴 충고의 의무와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형제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먼저 단둘이 만나 잘못을 타일러 주라고 하십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그와 잘 통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가서 타일러 주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며 교회에 알리라고 하십니다. 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형제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되면 그의 회개를 위해 함께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타일러 준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고 어려운 일입니다. 형제의 잘못을 충고해 주는 것이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잘못되면 큰 오해와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모르는 척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형제적 사랑이 담긴 충고는 ‘사랑의 의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잘못한 형제에게 충고할 뿐 아니라 다른 형제의 충고도 고마운 마음으로 겸손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형제를 통해, 특히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형제들 곧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로마13,8)

김상진 신부
  | 09.03
460 76%
[안동]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로마 13,10)

지난 1년동안 우리나라는 격랑의 시기였습니다. 많은 비정상들 속에 정상을 외치는 촛불이 있었습니다. 잘못을 바로 잡기 위한 외침이었습니다. 불의를 타파하신 예수님처럼 정의롭지 못한 세력, 구조들을 바로 세우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제자들마저 하늘나라를 잘못 이해하고 불칼을 말하고 과격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지난 대규모 집회들은 그야말로 비폭력, 평화 자체였습니다. 억울함에 앙심으로 맞서지 않았습니다. 연일 터져 나왔던 충격적인 일들에도 폭력으로 맞서지 않았습니다. 국민들 각자가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지만, 평화로운 집회를 보면서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TV를 보면서 육두문자를 쉽게 자주 꺼내기도 했습니다. 우리 교구민이 살고 있는 지역 대부분이, 특정 정치세력의 깃발만 꼽으면 당선이 되는 곳이지만, 국정농단사태는 그 아성을 무너뜨릴 수 있음을 순박한 시골사람의 반응을 통해 보았습니다. 할머니 몇 분이 ‘TV를 보면서 욕을 하도 많이 해서 죄를 지었다.’고 했을 때, 여러 마음이 교차되었고, 희망과 변화의 열망을 보았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18,19-20) 수백만 명의 ‘변화에 대한 하나 된 염원’으로 세상이 바뀌었고, 좀 더 정의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듯합니다. 하느님은 개인의 청원보다 공동의 청원을 더 잘 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미사하고, 같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같이 성시간을 보내고, 같이 레지오하고, 같이 성당의 여러 전례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나 혼자만의 신앙으로 구원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공동체인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 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공동체 안에서 같이 성화되어 간다면 구원은 더욱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함께 살다보면, 여러 문제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툼, 미움, 모함 등 종종 공동체의 일치를 해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잘못된 선택을 해서 공동체에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마태18,15) 교회와 공동체에 죄를 지은 경우에 형제적 충고(레위19,17-18)를 하라는 말씀이지만, ‘너무 경솔하지 마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말하기 좋아하고 여기저기 잘못된 소문을 퍼트려서 쉽게 해결될 일을 크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공동체 안에서 조심해야합니다.

공동체의 일치와 화합은 겸손과 봉사와 사랑에 있습니다. 보상과 댓가를 바라지 말고 낮은 마음으로 열심히 봉사하고, 사랑하며 삽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로마 13,10) 악과 앙심이 없는 착한 마음으로 한 주간을 기쁘게 살아갑시다.

▥ 안동교구 허춘도 토마스 신부 - 2017년 9월 10일
  | 09.07
460 76%
[안동]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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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흔히 ‘포스트코로나’라고 말합니다.

지난 2월 설 연휴 이후에 전반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대중이 밀집하는 곳은 피하며, 부득이하게 모이는 경우 개인 방역을 철저히 하도록 요구합니다. 자연스레 코로나19 확산 이후에 우리 신앙인들의 미사참여와 신심활동도 크게 위축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시대가 변화하며 신앙인구가 감소하는 추세인데, 코로나의 영향으로 그것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음은 매우 걱정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걱정과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기보다는 지금의신앙 실태와 신자들의 의식을 면밀히 바라보며, 이 어려움을 타개해 나갈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 안에서 그 단초를 제공받습니다.

바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는 이 표현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아주 현실적인 수치입니다. 요즘 대다수 가정이 부부만 있거나, 자녀를 두어도 1~2명인 경우가 많습니다. 거리두기로 인하여 재택근무가 늘고 사회활동보다는 가정중심의 삶으로 변화되고 있기에 둘이나 셋을 기본으로 하여, 가족이 있는 그 보금자리가 자기 신앙의 밑바탕을 이루는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교회가 오래전부터 추구해 온 가정복음화입니다.

각 학교들이 수업일수를 줄이고, 등교가 예전 같지 않아서 본당 주일학교 활동도 사실상 힘들어진 요즘입니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은 가정에서 아이와 함께 복음서를 읽고, 주일학생용 ‘못자리’나 ‘두레판’을 이용하여 함께 작업하며 신앙의 끈을 이어가야합니다. 또 부부는 아침이나 저녁에 함께 기도를 바치며 짧은 시간이라도 할애하여 꾸준히 성경통독이나 성경 필사를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다행히 미사는
개인 간격을 두고서 공동으로 참여가 가능하기에 매 주일 참례하도록 하며, 본당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이 어려운 시기를 잘 살아나가도록 주님께 도우심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둘이나 셋은 결코 적은 것도 아니며,
소홀히 할 수 없는 공동체의 기본단위입니다.

개인의 내적인 신앙과
더불어 둘 이상의 가족이 마음을 모으고, 또 나아가 그 가정이 함께 지역의 본당에 나아가 미사 안에서 다른 이들과 더불어 정성을 모아 간청하면 반드시 하느님께서 그 간절한 기도를 귀여겨 들어주시며, 우리가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더욱더 성숙한 신앙인, 내적으로 더 강건한 본당 공동체로 거듭날 것입니다.

박해시대에도
교우들은 함께 신앙의 맥을 이어왔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듯이 우리도 소중한 신앙의 끈을 계속해서 이어나가 훗날 다음 세대에게 모범적인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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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구 이동명 사도 요한 신부
2020년 9월 6일 ‘안동교구 주보’에서
  |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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