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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랑의 실천인 잘못 타이르기
조회수 | 2,460
작성일 | 05.09.02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주님은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용서 해 주십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주님처럼 사랑이 많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자비롭고 인자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잘못하는 사람을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또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주님께서 저희를 용서 해 달라고 기도를 바치고 삽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자신만만하고 무서운 생각마저 드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수만 평 땅에다 신학교를 건축하는 한 교구가 있었습니다.
공사가 시작되자 이웃에 사는 몇몇 집이 많게는 수십 평, 적게는 몇 평씩 학교 땅을 잠식하고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공사책임을 맡은 신부는 그 땅을 내놓으라고 했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사랑을 가르치고 용서를 부르짖는 교회가 성직자를 양성할 신학교를 건축하면서 왜 사랑을 실천하지 않습니까? 어렵게 사는 이웃을 사랑하기는커녕 몇 평 안돼는 땅을 내놓으라고 합니까?

오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은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라” (마태 18,15)하십니다.

처음부터
남들한테 창피를 주라고 하시지는 않으시고 단둘이 만나서 이야기하라고 하시니 그 사람의 인격을 고려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냥 용서해 주라는 말씀은 하시지 아니 하시는 것입니까?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지 아니하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이야기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이야기하고, 즉 공론에 붙이고 그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고 하십니다.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닙니까?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면 용서와 잘못을 고쳐주는 것은 서로 상반되는 것 아닙니까?
잘못을 그냥 덮어두고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 용서입니까?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겠다고 결심을 할 때
그 이전에 저질러진 일을 더 이상 응징하지 않는 것이 용서입니까?

잘못을 용서 해주는 일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못을 타일러서 고쳐주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잘못이 바로잡아져야 용서받는 사람도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잘못한 형제를 처음부터 “교회에 말하게 하지 않고” 먼저 “단둘이 만나서” 말하게 하십니다. 좋은 마음으로 형제의 잘못을 타이르고 고쳐주는 것도 사랑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냉담자를 권면하고 이웃에 전교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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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황태웅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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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오늘 복음은 교회 공동체 생활에서 이웃이 자기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를 말합니다.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먼저 단둘이 만나서 타일러 주고, 그것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타일러보고, 그래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구약성서 레위서의 말씀을 마태오복음 공동체가 해석한 것입니다. 레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 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 주어야 한다...동족에게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말라”(19,17-18). 비록 자기에게 잘못을 저지른 형제일지라도 미워하지 말고 타일러 주고 보복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마태오복음서를 집필한 공동체는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이웃 사랑의 실천 규범을 유대교 율법서를 참고하여 구체화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그런 노력을 통하여 교회 안에 성령으로 살아 계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그 시대 마태오복음 공동체가 이미 실천하던 바를 요약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오늘 우리를 위한 행동 지침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시대가 다르면 사람들의 행동 방식도 달라집니다.

옛날 사람들은 서로 타일러 주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미덕이고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좋은 약이 입에 쓰고, 좋은 말이 귀에 거슬린다’는 격언이 통용되던 시대입니다. 옛날에는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자들을 데리고 앉아 잘 타일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현상이 사라졌습니다. 현대인은 타이르는 행위를 불필요한 간섭으로 생각하고, 충고를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서로 각별히 신뢰하는 사이가 아니면, 충고는 인간의 자율성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각자 자기의 자유를 소중히 생각하는 오늘입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2000년 전 마태오복음 공동체에서는 사랑의 실천이었던 충고가 오늘은 남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일이 되고, 이웃을 불쾌하게 만드는 몰지각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가 유의해서 들어야 하는 것은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그 시대 사람들의 이웃을 위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비록 자기에게 피해를 준 이웃일지라도, 외면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형제자매와 같이 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말합니다. 이웃이 우리에게 잘못한 경우에 먼저 둘이 만나서 타이르고, 그것으로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타이르고, 그래도 되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라고 말합니다. 공동체에 호소해서 관계회복을 꾀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도들이 다 실패하면,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에게 피해를 준 사람에게도 그가 잘못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고, 그러고도 그 사람이 과거의 좋았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면, 이교도나 세리에게 하듯이, 그를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 이교도나 세리는 말살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한다고 생각해도, 그 용서가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은 자기가 피해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좋은 의도를 가졌다고 항상 좋은 결과가 따라오지 않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입니다. 내가 용서한다고 생각하여도 상대방의 상처가 치유되도록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웃입니다. 이웃 사랑은 먼저 이웃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에 있습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는 말씀도 오늘 복음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합니다. 예수님의 실천이 있는 곳에 예수님은 살아 계신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실천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15,9). 예수님은 병자들, 세리들, 그리고 죄인들과 같은, 유대교 공동체가 버린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셨습니다. 그들에게 병을 낫게 해 주고,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그들이 깨닫도록 노력하셨습니다. 그분은 그 시대 유대인 사회의 관행과는 다르게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도 같은 실천을 합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 고독한 사람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노력 안에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일반 사회단체와 같이 재물을 가진 사람들이 행세하고 갖지 못한 사람들이 위축되는 곳이 아닙니다. 높은 사람이 명령하고 낮은 사람이 순종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자발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도 당신과 같이 섬기면서 살 것을 원하셨습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10,43)고 가르치셨습니다. 자발적 섬김이 지배하는 집단이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으면 섬김이 보입니다.

교회는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용서와 사랑을 배워서 자발적으로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섬김을 주축으로 구성되고 조직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서열이 있다면, 그것은 섬김의 실천으로 말미암은 서열입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10,44)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교회에는 섬김이 아닌 다른 것으로 사람의 우열을 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군림하지 않으셨습니다. 용서와 사랑과 섬김이 있을 때 교회가 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역사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가 있습니다.

서공석 신부
  |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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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죄

우리 신앙인은 죄를 범한 사람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복음의 주제이다. 세 단계가 제시되고 있다. 첫 단계는 , 단 둘이 만나서 타이르는 것이다. 이는 구약성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레위기 19장,17절-18절). 구약성서에서는 꾸짖는 사람이 혈연과 동족이라는 유대 관계에 있는 사람이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형제이다. 일차적인 단계는 개별적으로 타이름으로써 죄스런 행위로 명예가 손상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

여기서 성공하면 최선의 일이다. 상대가 잘 들어주고 받아들이면 만사가 형통되는 것이다. 만일 잘못을 범한 사람이 말을 듣지 않으면 두 번째 방법을 취해야 한다.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는 것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증언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에 의하여 확인될 때에야 법적으로 유효하다. “어떤 사람이 저지르는 모든 잘못과 관련하여, 그의 어떤 죄나 잘못이든지, 증인 한 사람만으로는 그 증언이 성립되지 못하고 증인 둘이나 셋의 증인이 있어야 유죄가 성립 된다”(신명기 19장,15절). 만일 이러한 시도마저 실패한다면 이 문제는 교회 앞에 제시되어야 한다. 이 경우에도 잘못을 범한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 이후의 상태는 복음말씀대로 결정된다.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죄와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주제는 용서이다. 사람이 그의 동료에게 베푸는 용서와 그가 하느님께 청하여 얻는 용서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

예수께서는 용서하지 아니하는 자에게 하느님께서는 용서를 베푸시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기를 원하는 자는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신다. 무자비한 종에 대한 비유는 이러한 진리를 강력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다(마태오 18장,23절-35절).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용서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용서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주님의 모범을 따라 스테파노는 그를 돌로 친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죽었다(사도행전7장,60절). 스테파노와 예수님처럼 그리스도인은 항상 용서해야 하고,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최성철 베드로 신부
  |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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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용서

순교자 성월, 9월입니다. 올해 9월은 추석이 있어서 더욱 풍성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좋은 계절 가을은 하느님을 사랑하기에도 참 좋고, 이웃을 사랑하기에도 더 좋게 여겨집니다. 좋은 계절 가을을 더욱 풍요롭게 살아가라고 하느님께서는 오늘 말씀의 전례를 통해 사랑과 용서의 구체적인 방법을 들려주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는 것이다”(마태18, 15). 그런데 현실에서 과연 이 말씀대로 하면 반응이 어떻게 나오겠습니까?

예상 반응 1. 너나 잘하세요! 2. 네가 뭔가를 잘못 알고 있다.(자기 방어, 자기 변명) 3. 충고하는 그 사람을 오히려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동네방네 나쁜 소문을 퍼뜨림.

물론 충고를 잘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마도 이런 경험이 한 두 번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괜히 남의 일에 끼어 들지 말자. 본인이 알아서 잘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끝맺음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최선일까요?

오늘 말씀들을 묵상해보면, 성숙의 아픔을 맛보더라도 형제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을 택하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이웃에게 충고할 때는 언제나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로마13, 9)는 정신에 입각해서 충고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부작용이 생깁니다.

또한 오늘 복음 말씀의 가르침대로 조용히 단둘이 만나 형제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래도 형제가 듣지 않을 땐 우격다짐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두세 사람이 함께 하여 이성적인 방법으로 객관성을 확보하여 대화를 하라고 합니다. 형제를 죄에서 구하고 형제를 얻는 것은 결코 큰 목소리나 팔뚝의 힘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형제를 얻는 데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랑과 인내는 언제나 좋은 짝꿍입니다.

사랑과 용서 그리고 마음을 모아 기도를 올리는 곳에는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사랑과 용서가 있는 곳은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넉넉한 가을 들녘처럼 풍요롭습니다. 여러분이 있는 곳 여러분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하느님 사랑의 풍요로움을 맛보길 바랍니다. 가을입니다. 많이 사랑하고 많이 사랑 받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참 좋은 하느님의 사람을 많이 얻기 바랍니다.

박성태 신부
  |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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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형제가 죄를 지으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요약해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단둘이 만나 타일러라.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그들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다른 민족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성가시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부분이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복잡한 단계를 말씀하시는 이유는 쉽게 속단하고 결론을 내어버리려는 우리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복음 말씀 앞에 나오는 마태오 18장 10∼14절의 내용과 연결해서 보면 주님의 뜻이 더 뚜렷이 나타납니다.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는 내용을 말씀하시고,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되찾은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한다는 이야기에 이어지는 것이 오늘의 복음 내용입니다. 미움이 아니라‘사람을 살리려는 마음’으로 하는 데까지 해 보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또 오늘 제1독서의 말씀,“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에제 33, 7)는 말씀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면, 사람을 살리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이런 태도를 우리가 실천하며 신앙이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야 하는 파수꾼의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지막 단계,“다른 민족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말씀은‘너는 이제 상관하지 마라. 더 이상 네 책임이 아니다.’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단죄가 아니라‘마음을 모아 청하면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 부산교구 박경빈 알렉시오 신부 - 2017년 9월 10일
  |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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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참된 예언자의 소명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에게 예언자로서의 소명이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예언자는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 곧 이스라엘 집안에 하느님의 뜻을 전함으로써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이끌어 주어야 할 소명을 지니고 있습니다.(에제 33,7) 이러한 소명 때문에 예언자는 언제나 하느님을 대신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만약 예언자가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지 않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면, 악인의 파멸에 대한 책임은 예언자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악인이 계속 악한 길에 머문다면 파멸의 책임은 악인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악을 저지르는 형제들을 타일러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마태 18,15-16) 이렇게 보니 제자들은 모두 에제키엘 예언자처럼 “공동체의 파수꾼”으로서의 소명,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악을 저지르는 형제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만약 악한 형제가 형제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타일러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려 공동체가 그를 타일러야 합니다. 만약 공동체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을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길 것인데, 그 탓은 모두 악한 사람 스스로가 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형제가 죄를 짓는 데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그냥 못 본 척 지나쳐 버린다면 그 형제의 파멸에 대한 책임은 파수꾼으로서의 소명, 곧 예언자적 소명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 이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제자들이 이끌어 주어야 할 삶, 곧 예언자적 소명으로 제자들이 인도해 주어야 할 하느님의 길이 무엇인지 잘 알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삶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지켜야 할 계명이 있지만, 그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그리고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며, 율법의 완성입니다. 제자들은 이 사랑의 계명을 지키도록 불림을 받은 이들이고, 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악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며 악을 저지르는 이들을 내버려 두지 않고, 권고하여 다시금 사랑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우리 모든 예수님의 제자들이 수행해야 할 예언자적 소명입니다.

사실, 악한 형제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그가 죄에서 돌아서도록 권고하는 이야말로 진정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악인 스스로 공동체를 떠나 파멸에 이르기를 바라고, 그래야 비로소 모든 정의가 바로 설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오늘 독서와 복음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악한 형제를 보았을 때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떠올려, 그가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목숨을 걸고 그에게 권고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권고하는 사람만이 진정 사랑의 계명을 올바로 실천하는 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사랑 가득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악한 형제가 마지막까지 악한 길을 걷는다면, 그 책임은 그 악한 형제가 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형제가 악한 길에 빠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악한 형제가 회심의 길로 접어들도록 이끈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특히, 그 형제가 나에게 잘못한 일을 저질렀다면 그를 용서하고 다시금 회심의 길에 접어들도록 만드는 일은 더욱 어렵습니다. 이런 우리들이기에 예수님께서는 함께 모여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들의 회심을 청하고, 그들과 함께 다시금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파수꾼이 되라고 권고하십니다. 이처럼 서로 사랑하며 용서하고 화해의 삶을 추구하며 다른 이들에게도 그런 삶을 살도록 권고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수행해야 할 교회의 참된 파수꾼, 곧 참된 예언자로서의 소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7년 9월 10일
  |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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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타이름과 고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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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의 사고, 생각을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누구 하나 잘못되기를 원하시지 않는 분께서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살아가야 하기에, 주님과 우리의 차이점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우선적으로 중요합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오 복음 18장 15절~18절)

우리는 형제가 나에게 잘못하면,
미안해할까 봐 또는 심한 반발로 큰 싸움이 일까 봐 그냥 조용히 넘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형제를 포기해 버립니다.

두세 사람과 교회에 알리면 괜히 고자질한 것 같고,
그 형제의 반응은 "조용히 말해 주면 들었을 것을 왜 고자질하느냐?"고 말하고 기분 나빠합니다.

교회의 원로나 성직자들에게도
"당신들이 무슨 권한으로, 상관하지 말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냥 내 방식대로 살면서 '하느님 나라에 가기를 원합니다. 불가능한 일이지요.

형제 여러분, 하느님은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한 사람이라도 그 사랑에서 멀어진다면 하느님은 슬퍼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신 다음,
오늘 복음 이후에 '용서'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용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서 꼭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형제의 잘못을 깨닫도록 타일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제는 '사랑의 충고'를 '고자질'로 받아들이지 말고 진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인 것'을 풀려고 노력해야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며,
하느님 앞에서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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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우종선 라우렌시오 신부
2020년 9월 6일 ‘부산교구 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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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6   [춘천] 이웃 사랑  [4] 2711
785   (녹) 연중 제30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5] 2260
784   [수도회] 신앙의 핵심은 오직 예수님  2074
783   [전주]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2139
782   [청주] 내 생명, 내 재산, 내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  1273
781   [대구] 하느님께 바쳐야 할 몫은 내 안에서부터!  [1] 2263
780   [춘천]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1] 2228
779   [원주] 거지신앙과 순교신앙  1030
778   [수원]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로”  [1] 2156
777   [군종] ‘너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1114
776   [대전] 지금은 놀부시대  1184
775   [서울] 하느님께 바쳐야 할 ‘세금’  [1] 2154
774   [의정부] 하늘가는 길  1204
773   [안동] 하느님 것은 하느님께  [1] 2158
772   [부산]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2] 2396
771   [마산]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1100
770   (녹) 연중 제29주일 독서와 복음 (카이사르의 것은, 하느님의 것은---)  [2] 1941
769   [청주] 하느님 나라의 드레스 코드  [1] 115
768   [수원] 혼인잔치의 비유  [6] 3578
767   [수도회] '예수 그리스도'란 새 예복  [3] 2740
766   [서울]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  [8] 3092
765   [인천] 하느님 나라의 예복  [4] 2544
764   [대전] 초대 받은자의 예복은?  [3] 2915
763   [전주] 구원의 잔치에 초대합니다.  [3] 2538
762   [의정부] 예복은 미리 준비해야 필요할 때 입을 수 있습니다  [3] 2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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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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