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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
조회수 | 2,353
작성일 | 05.09.02
"네가 만일 악한 자에게 일러주지 않으면 악한 이의 멸망은 곧 너의 책임이다." 현대의 극단적인 이기주의는 타(他)의 어떤 간섭도 허용치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자는 말씀의 빛으로 심고, 뽑고, 세우고, 무너뜨릴 예언자적 사명을 다함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1.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사는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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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란 다른 말로 하면
전체를 위해 개인은 희생되어도 무방하다는 가치체계에서 각 개인의 존엄성이 크게 신장되는 방향으로의 변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다른 사람의 어떤 간섭이나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한쪽에선 최소한의 생존에 필요한 것마저 갖지 못해 굶주리는데 부유층의 자녀들은 한 달 용돈이 2-3백 만원이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한다. 이들은 "누가 자기들 한데 돈 달라고 했나? 내 돈 내가 쓰는데 괜히 야단이야!" 하는 태도를 보인다.

한마디로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사는데 웬 간섭이냐 !" 는 식이다. 이런 태도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뿐 아니라, 집단이기주의나, 국수주의에서도 나타난다.

오늘 제 1독서의
"네가 그 죄인에게 버릇을 고치라고 일러주지 않았을 경우.....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을 나는 너에게 지우리라"(에제 33,8) 하신 말씀은, 타인과 세상의 악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를 깨우쳐 준다고 하겠다.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 새롭게 변화시키기 위해 먼저 나 스스로 정의와 사랑을 살고, 악을 악이라고 외쳐야 할, 예언자적 사명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2.평신도 사도직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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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백성이다.
그리고 하느님 백성 중 성직자, 수도자 신분에 들지 않는 모든 신자들이 평신도들이다. 공의회 문헌에는 "교회 창립의 목적은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 왕국을 전 세계에 펴고 모든 사람을 구원에 참여케 하며, 또한 그들을 통하여 전 세계를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일이다. 이 목적을 위한 신비체의 활동을 모두 '사도직'이라고 부른다(평신도 교령2항) 라고 교회의 사도직을 설명하고 있다.

교회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 예수와 성령의 파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모든 신자들도 세상에 파견된 자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례와 견진을 통해 평신도 사도직을 부여받았다. 평신도 사도직에는 사제직, 예언직, 왕직의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늘의 말씀은
특별히 우리의 예언직에 대해 일깨워 준다고 하겠다.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백성의 보초로 세운다."(에제33,7) 그렇다. 그리스도 신자는 이 세상을 악의 세력에서 지키고 하느님의 뜻을 전할 파수꾼으로 세워진 자들이다. 교회는 자신의 이 사명을 수행함으로 "현세 질서에 복음정신을 침투시켜 현세 질서를 완성하게 된다"(평신도 교령 5항).

3. 교회의 예언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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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propheta)라는 말의 참뜻은
'미래의 일을 알아맞히는 사람' , 또는 '점쟁이라기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 즉 '하느님의 대변자' 라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마치 손전등을 들고 방 구석구석을 비추어 보면서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는지 살펴 제대로 정돈하듯이, 우리는 세상 사물에 대해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잘 잘못을 가려 어느 것이 하느님의 뜻인지를 밝힐 의무가 있다. 이것이 복음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것이다. 그리하여 '뽑아버리고, 무너뜨리고, 세우고, 심을 것'을 가려서 그 사명을 다해야 한다.

세상의 잘 잘못을 구별하여
세우고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분명히 하는 것이 예언자의 사명이다. 예언자의 길은 수난의 길이며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정치 사회적인 현실 문제에 대해 개입하며 발언하는 것을 월권행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일찍이 독일의 신학자 본 훼프는 "미친 운전사가 차를 몰고 질주 할 때, 그 운전사를 차에서 끄집어내리지 않고 그 차에 치인 사람을 돌보며 치료만 하는 것은 교회가 제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제도적이거나 구조적인 악에 대해 방관할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어떤 젊은이들은 마더 데례사의 구호 활동에 대해 "인도 사회의 구조적인 부조리를 외면한 채 그 부조리한 구조의 희생자들만 돌보는 것은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것인가?" 라고 질문을 하기도 한다. 한번 음미해 볼 말이다.

물론 불의와 부정에 대한 가장 힘있는 항변
그것은 나 스스로 진리 편에 서서 이웃의 아픔을 나누며 온 몸으로 사랑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제2독서) 하신 말씀을 되새기며 불의와 부정과 제도적 부조리를 고발하며 불의를 불의라고 외쳐야 할 우리의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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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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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지은 형제를 얻는다는 것

가끔 본당에서 면담을 요청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문제로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어떤 사람과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대부분 어떤 사람과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다 듣고 난후 질문 하나를 던집니다.

“그럼, 이런 생각들을 그 사람과 대화를 해 보셨나요?” 말씀이 없습니다.
저는 “상대방이 얘기를 받아 주지 않을까 두렵습니까?, 자존심 상합니까?, 아니면 용기를 가지고 먼저 이런 얘기들을 해 보시죠.”라고 말씀드립니다.

그 사람과의 불편한 관계를 회복하기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은 해보지 않고 미움만 키우고 있으면 본인만 힘듭니다. 그냥 그러고 있으면 미움은 굴러가는 눈덩이마냥 점점 커져만 갑니다. 결국 나를 서서히 무너뜨립니다.

오늘 복음에는 형제가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알려줍니다. 단 둘이 타일러 주고, 그래도 안 되면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데리고 가고,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알리고, 그래도 안 되면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기다림과 대화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면 교회와 인연을 끊으라고 합니다. 즉, 파문을 뜻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죄는 문맥상 사람과 사람의 1대 1의 관계에서 발생한 죄보다 교회 가르침에 반하는 죄를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방인과 세리들에게 친절을 베푸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배울 수 있도록 우리에게 몸으로 일깨워 주신 것이 아닐까요? 주님!, 주님! 말만 한다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형제적 충고는 일방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용서받아야 하는 죄인임을, 나 역시 충고를 받을 수 있는 죄인 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교회 전체의 책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담긴 용기 있는 충고, 용기 있는 받아들임, 서로에게 이러한 실천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안 된다고 방관하고 포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길 포기하는 것입니다.

용서도 작은 기적이라고 들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러한 작은 기적들을 이루어 보시길 바랍니다. 죄지은 형제를 얻는다는 것, 결국 나의 잘못일 수 있구나 라는 마음에서 시작 됩니다.

최동환 신부
  |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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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신 경험이 있으신가요?”

사제로 살면서 고해성사를 주다가 보면, 많은 교우들이 주일미사에 참여하지 못한 잘못을 고백하는 경우를 경험합니다. 여러 가지 사정과 이유로 주일미사에 참여하지 못해 고해성사를 보는 교우들의 착한 마음에 제 가슴이 찡해지기도 합니다.

그런 교우들에게 전 곧잘 이런 질문을 하곤 합니다.

“학교 다닐 적에 매번 학교에 가고 싶으셨어요?” 이렇게 물으면, 많은 교우 분들이 “아니요!” 하고 답합니다.

“학교 가고 싶지 않은 때도 많았지만 학교는 매일 가셨지요?” 그러면 또 거의 대부분의 교우 분이 “네!”라고 답합니다. “그럼 왜 가고 싶지 않았는데도 매일 학교는 가셨어요?” 그러면 십중팔구의 교우 분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가야 하니까요!”

전 바로 그 순간을 노려, “신앙인의 삶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학교 다닐 때, 매일 가고 싶지 않아도 학교를 갔던 것처럼, 신앙생활도 그와 같다고 생각하면 쉬워집니다.”라고 훈계하면 공감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용서가 실생활에서는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용서해야 하는 줄도 알고,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지만, 마음으로 용서가 힘들게 느껴지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때 해결책으로 예수님은 기도를 제시하십니다. 그 가운데서도 둘이나 셋 이상 모여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사실 우리는 기도를 떠올리면, 대부분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용서의 해결책으로 주님은 두 사람 이상이 모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두 사람 이상이 모인 곳에서 나 자신만의 기도를 바치기는 어렵습니다. 자연히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를 떠올리게 됩니다.

나를 위한 기도보다 남을 위한 기도를 하다 보면, 그것이 쌓여 덕이 되고, 용서도 자연스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학교 가고 싶지 않은 때도 많았지만, 그때를 넘기고 나면 자연스럽게 졸업이란 결과를 낳듯이 말입니다.

용서를 힘들어하시는 교우 분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 용기를 내어 다른 사람과 함께 그 미워하는 교우를 위해 기도해 보면 어떨까요? 자꾸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용서의 달인이 될지도 모릅니다.

복된 한 주간 잘 보내시길…

▥ 마산교구 이창섭 아우구스티노 신부 - 2017년 9월 10일
  |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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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이방인과 세리도 사랑의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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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오 복음 18장 15절-17절)

나를 반대하거나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은 참 쉬운 일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타인의 실수나 잘못에 대해 대단히 재빠르고 날카롭게 반응합니다. 그가 동료나 친형제다 하더라도 그러기가 쉽습니다. 더구나 상대방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지는 경우라면 혐오와 적대감으로 그를 대하기가 십상입니다.

상대방을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바라보면서 나의 올바름과 우월감을 맛보려는 바리사이의 삐뚤어진 마음보입니다.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조차도 혐오와 적대감의 대상은 아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고 회개로 초대받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는 말씀도 결국은 그들을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잃어버린 양으로 보아야 한다는 가르침과 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오 복음 5장 44절)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오 복음 18장 22절)는 말씀들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는 말씀은
그들이 볼 눈이 없고 들을 귀가 없어서 막히고 닫혀있기에 그들을 변화시키려고 굳이 더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지 그들을 혐오와 적대감으로 대하라는 뜻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자기 안에 갇혀 막히고 닫힌 사람은
그냥 그렇게 둘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들조차 아끼고 사랑하신다니 주님 사랑의 거울 앞에서 참으로 난감하고 부담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한 말씀 덧붙입니다.
오늘날엔 교우들이 교회-교도권의 말도 잘 듣지 않는 경향이 조금씩 짙어지는 듯 보입니다. 세상의 다양한 전공 분야에 대한 것이라면 교우 각자의 선택과 판단이 우선일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적 가르침이나 거룩한 전승을 통한 선택과 판단이라면 교회와 사목자의 말을 우선적으로 들어야 할 이유가 있음을 우리 교우들이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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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상원 베네딕토 신부
2020년 9월 6일 ‘마산교구 주보’에서
  |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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