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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조회수 | 2,260
작성일 | 05.09.02
우리 본당에도 홈페이지가 있습니다.
인터넷시대에 맞추어 신자들의 의견과 본당의 소식들을 나누는 공간이 마련되어서 여러 가지로 편리한 점이 많습니다. 교회의 활동이 인터넷이라는 공간으로 확장된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더 좋은 일들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문명의 혜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익명의 개인들이 이루는 거대한 인터넷 공간의 무한한 정보의 세계가 놀랍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자신외의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상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도피처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어느 곳에 문제가 발생하면 즉시 항의 글이 뜨고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내용의 글들로 도배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가끔 일어납니다.
공동체 안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될 때 서로 만나서 대화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자신의 흔적은 숨긴 채 대뜸 홈페이지에 비난의 글을 띄우고 그 일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매도합니다. 익명이라는 커튼 뒤에 숨어서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상처를 주고 공동체를 흔들어 놓는 미성숙하고 고약한 사람들의 놀이터가 된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합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로마서 13, 8).

바오로 사도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사랑의 의무에 관한 말씀은 서로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삶의 대원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는 문제도 있고 갈등도 있고 상처도 있게 마련입니다.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고 다양한 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생긴 상처들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구체적인 상황을 상정하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인지를 제시해 줍니다. 공동체 안에서 누가 (나에게) 잘못을 하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형제가 죄를 지을 경우에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인가?

복음은
잘못한 사람을 죄인으로 단정하기 이전에 '형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먼저 강조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형제가 잘못한 것을 알게 될 경우 사랑으로 그 형제를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 의무를 지니기 때문에 먼저 불필요하게 명예를 훼손당하는 일 없이 형제가 잘못을 깨닫고 회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단둘이 만나는 일에서부터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는 일은 잘못한 사람의 죄를 공개적으로 따지는 최종적 단계를 가능하면 유보시키면서 그 사람의 회개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모든 노력에도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그때 가서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공동체에 알리고 공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고 이러한 노력마저 실패로 돌아갈 경우에는 그를 「다른 민족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조치마저도 죄인을 단죄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 잘못한 사람의 회개를 위해 개인적으로든, 공동체적으로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는 것을 전제로, 잘못한 사람은 스스로 공동체의 사랑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를 주님께 맡겨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지닌 '맺고 푸는 권한'은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잘못을 범한 사람을 공동체 밖에 매어두는 권한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조건이 채워지면 항상 풀어주어야 할 의무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곧 죄인이 돌아오기를 항상 기다리는 것이 공동체가 끝까지 해야 할 노력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교회)의 사명은 죄를 찾아내어 죄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죄인들을 회개시켜 그들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형제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 자기의 개인적인 판단이 아니라 형제들의 기도를 통한 식별에 근거해야 하며,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와 이웃 사랑을 추구하는 기도를 바칠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기도하는 이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당신의 아드님 그리스도를 보시고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는 일은 서로가 사랑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지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믿음의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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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김영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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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깨우쳐준다는 것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는 존재입니다(Errare humanum est).
전혀 잘못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일 것입니다.
너도 나도 잘못을 저지르고 삽니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잘 보면서도
자신의 잘못은 보기가 어렵습니다.
두 사람이 굴속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합시다.
한 사람의 얼굴에는 검댕이 묻고 다른 사람의 얼굴은 깨끗하다면
얼굴에 손을 갖다 대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아마도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 먼저 얼굴에 손을 댈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에 검댕이 묻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잘못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서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잘못을 깨우쳐주는 것은 큰 사랑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여왔습니다.
남이 듣기 싫어한다고 해서,
또는 나 자신이 더 많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흔히 말하는 대로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 하면서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서도 못 본 척하였습니다.
사실 남의 잘못을 지적한다는 것은 귀찮은 일입니다.
그것은 또한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잘못을 지적받은 그가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멀리하기 십상입니다.
내 앞에서는 고맙다고 말하면서
혼자서는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이 귀찮고 위험한 “사랑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남의 잘못을 깨우쳐주는
“사랑의 의무”를 다하라고 가르칩니다.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보초로 세운다.
너는 나에게서 경고하는 말을 받거든 그대로 일러주어라.
내가 한 죄인에게 ‘너는 사형이다.’라고 유죄판결을 내렸는데,
네가 그 죄인에게 버릇을 고치라고 타일러주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죄인은 자기 죗값으로 죽겠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을 나는 너에게 지우리라.
그러나 네가 그 죄인에게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라고 타일러주었는데도
그가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면
그는 자기 죗값으로 죽겠지만, 너는 죽지 아니하리라.”

구약의 예언자들은 지도자와 백성의 잘못을 타일러 고쳐주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그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그들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그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하나도 없다.”고 외친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말 그대로입니다.
박해받는 예언자 없이 일어난 파국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파국을 막으려고 예언자들을 보내셨으며
예언자들의 말을 들었으면 파국은 면하였을 텐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잘못을 저지른 것도 불행이지만
그 잘못을 깨우쳐주는 예언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더 큰 불행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왕들의 잘못은 그 개인의 불행에 그치지 않고
민족 전체의 불행과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이 예언직을 맡았습니다.
지도자들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목숨을 걸고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잘못을 타일러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주어라.
그가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 하나를 얻는 셈이다.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그리하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을 들어 확정하라.’는 말씀대로
모든 사실을 밝혀라.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있을 것이다.”

잘못하는 일을 보고 뒤에서 흉을 보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단둘이 만나 앞에서 잘못을 타일러주어야 합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그와 잘 통하는 사람,
그의 말이라면 잘 들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가서 타일러주어야 합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려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형제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면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로 돌아올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마디로 뒤에서 말하지 말고 앞에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뒤에서 한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만,
앞에서 한 말은 얼마 동안 불편한 관계이더라도
언젠가는 이해하고 화해할 기회를 가져옵니다.

잘못을 타일러준다는 것은 비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비난하거나 화를 내는 것과도 다릅니다.
우월감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타이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잘못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윤리적 잘못을 말합니다.
그런 잘못이 아닌 잘못은 상대의 자유에 전적으로 맡길 일입니다.
잘못을 타일러주는 것은 간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남이 나의 잘못을 지적할 때에
나는 어떠한 마음 자세를 지녀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에는 겸손하게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누구나 느끼는 것이지만,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는 그 어려운 일, 귀찮고 위험한 일을 나를 위해서 기꺼이 한 것입니다.
잘못을 지적할 때에는 누구나 그 잘못을 가능하면 부드럽게 만듭니다.
쓴 약을 먹기 좋게 하려고 당의정으로 만드는 셈이지요.
그러니 내 잘못의 심각성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사랑의 의무”이지만
다른 사람의 지적을 잘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정승현 신부
  |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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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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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마태오 복음 18장 15절)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서 ‘함께’라는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죄를 짓는 것도, 내가 누군가에게 죄를 짓는 것도 모두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시작하는 가정 공동체, 같은 신앙을 가진 신앙 공동체, 지구라는 공동의 집을 사용하는 지구촌 공동체, 그리고 목적이나 취지에 따라 학교나 직장 등 인간은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늘 타인과 함께 사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해야 합니다. 결코 나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파수꾼의 사명은 주변을 경계하고 지키며, 공동체를 위해 위험을 경고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경고의 말을 이스라엘에게 경고하는 책임을 받은 것입니다. 가령 그 사람이 악인이라는 이유로 파수꾼이 경고를 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는 악인이 죽은 책임을 파수꾼에게 묻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악인은 결국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파수꾼은 위험을 경고하는 자신의 역할을 다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무에게 빚을 지는 것은 허락하지 않지만, 서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주거나 받는 것은 예외라는 것입니다. ‘나는 너에게 받은 것이 없으니, 줄 것도 없다.’하고 말하는 관계에서 어떻게 ‘사랑’이 싹틀 수 있겠습니까. 사랑의 마음은 하나 줄 것을 하나 더 얹어주는 마음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죄를 지은 형제를 타이르는 것은 그 형제를 위한 길이고, 우리 자신에게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곳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며, 바로 교회입니다. 부족하다고 해서, 성격이 비뚤어졌다고 해서, 한 번 말했는데 안 들었다고 해서 포기하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 아래에 모인 죄인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서로의 상처를 돌보아주며 함께 걸어가는 모임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정말 큰 기쁨이 됩니다.

오늘 우리 모두를 각자의 자리에서
‘파수꾼’이요 ‘사랑의 전파자’로 불러주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코로나19의 현실 속에서
서로 원망하는 요즈음이지만,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서 8장 39절)라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에 따라 공동체 안에서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다 같이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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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윤대성 세례자 요한 신부
2020년 9월 6일 ‘전주교구 주보’에서
  |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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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형제가 죄를 지으면 깨우쳐 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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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여라(요한 복음 13장 34절).”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좋아하라는 뜻도 아니고, 무조건 서로 잘해 주기만 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구원과 선의 실현을 위해서 함께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형제가 죄를 짓는 것을 보았다면(알고 있다면),
그 죄를 막아야 합니다. 무관심과 방관은 ‘사랑 없는’ 태도입니다. 사랑은 적극적으로 죄와 악을 막고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오 복음 5장 44절).”라는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계명은, “원수를 좋아하여라.”가 아니라,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그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에는, 용서와 자비도 있고, 원수가 어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도와주는 것도 있고, 그를 꾸짖거나 타이르는 것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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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오 복음 18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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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이라는 말씀에서, ‘너에게’라는 말은 삭제해야 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의견입니다. 이 말은, 아마도 필사 과정에서 잘못 들어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개인 사이에 사적으로 잘못한 일이 생긴 상황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께’ 죄를 지었을 때의 상황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단둘이 만나...”라는 말씀을 먼저 하신 것은,
죄를 지은 사람이 아직 회개하고 보속할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도 처음부터 그 죄를 공동체 전체에게 공개해 버리면, 그가 회개하기는커녕 더 나쁜 쪽으로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타일러라.’라는 말은,
“그것은 죄다.”라고 깨우쳐 주는 일과“ 그 죄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회개하여라.”라고 권고하는 일을 모두 포함합니다.

(부드럽게 타일러야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강하게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죄를 지은 형제를 타이르는 일은 그의 구원을 위한 ‘사랑 실천’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사랑뿐입니다. 형제에게 사랑을 실천하려고 가서 사랑은 주지 않고 상처만 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형제를 타이를 때,
산상 설교에 있는 “남을 심판하지 마라(마태오 복음 7장 1절).”라는 말씀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7장 5절).”라는 말씀과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마태오 복음 7장 12절).”라는 말씀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내가’ 죄 없는 의인이라서
죄인인 그를 꾸짖고 타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죄인이지만, 그가 나의 형제이기 때문에, 같은 처지에 있는 죄인의 처지에서 구원의 길로 함께 가자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은 “그가 네 말을 듣고 회개하면”입니다.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라는 말씀은, “잃었던 형제를 되찾은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죄를 짓는 것은 하느님을 등지고 돌아서는 것과 같고,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죄를 지은 형제를 회개시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일이고, 잃은 형제를 되찾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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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18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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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지은 사람이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도 있고, 아니면, 죄를 지었음을 인정하면서도 회개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남의 일에 참견 말고 너나 잘해라.” 같은 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공동체 전체의 사랑으로 그를 타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다수의 힘으로 개인을 압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공동체는 한 몸이고, 한 지체가 병이 들면 몸 전체가 병든 것과 같기 때문에 공동체가 나서는 것입니다. (죄는 영혼의 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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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오 복음 18장 17절-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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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알려라.”라는 말씀은,
교회 직권자에게 고자질하거나 밀고하라는 뜻이 아니라, 교회의 공적인 처분에 맡기라는 뜻입니다. (이미 두 번째 단계에서, 죄를 지은 사람의 상황을 공동체가 모두 알게 됩니다. 그러니 그때부터 공동체의 문제가 됩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은
“죄를 지은 그 사람이 교회의 공적인 회개 권고도 거부하면”입니다.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는
“그를 파문하여라.”입니다. (‘파문’은 영구 추방이 아니라, 회개할 때까지 신자 자격을 정지시키는 일입니다. 회개하면 다시 받아 줍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땅의 결정을 하늘이 따른다는 뜻이 아니라, 하늘의 결정이 땅에서 실현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결정이 다 마찬가지이지만, 파문과 같은 중대한 일은 더욱더 기도하면서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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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18장 19절-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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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을 앞의 말씀들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이 말씀은, 죄 지은 형제를 회개시키는 일은 공동체 전체를 위한 일이라는 것, 또 예수님께서는 공동체 전체가 한 마음으로 그 일을 함께하기를 바라신다는 것, 등을 나타냅니다. 공동체가 한 마음으로 노력하고, 또 죄 지은 사람 자신이 회개하고,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면,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입니다(마태오 복음 18장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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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0년 9월 6일
  |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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