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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사랑을 배경으로 한 형제적 충고
조회수 | 2,174
작성일 | 05.09.02
수감된 형제들,
그리고 소년원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절실히 다가오는 한 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저렇게 정이 많고 마음씨 착한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하는 느낌입니다. '저렇게 순박하고 의리있는 아이들이 과연 무슨 일로…' 하고 의구심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지요. 다들 어찌 그리 단순한지 모릅니다. 다들 어찌 그리 잘 생겼고 또 어찌 그리 마음 씀씀이가 관대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욱'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담장 바깥에 있는 우리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성격적 결함 중 하나가 한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스스로를 잘 조절해 나가다가도 단 한번에 점수를 다 깎아먹습니다. 평소에 그리도 여유있어 보이고 유유자적하던 우리지만 단 한순간에 내적 상태가 돌변하는 체험을 하지요. 딱 1분만 참았어도 되는데 그 순간을 못 넘깁니다.

한번 비위가 상하고 마음이 틀어지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면서 얼굴은 즉시 싸늘한 냉기를 띱니다. 머리 위에서는 연기가 무럭무럭 나는 느낌입니다. 라면이라도 끓일 수 있을 정도로 열을 받습니다.

그런 상태는 분명히 비정상 상태이지요.
그런 상태에서는 지능지수가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무조건 입 꼭 다물고 시간을 버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걸 또 우리는 못합니다. 그리고는 결국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 주워 담지 못할 말을 내뱉게 됩니다. 주변에 누가 있건 없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평소에 따놓은 점수를 완전히 다 까먹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 인간들의 약점을 잘 간파하고 계셨기에 '뚜껑이 왕창 열리는' 긴박한 상황 앞에서도 한 박자를 늦출 것을 요구하십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논리적, 단계적, 이성적으로 접근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나를 핍박하는 사람,
내게 몹쓸 말을 하는 사람, 기본이 안 된 사람, 눈꼴사나운 사람, 덜 되먹은 사람, 한마디로 '싸가지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분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단 목소리부터 가다듬어야겠지요. 심호흡을 몇번 하면서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면 좋습니다. 최대한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대화를 시작하면 좋습니다. 그것도 조용히, 그리고 개인적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차분하게,
그러나 솔직한 마음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 순간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지요. 상황을 피하지 않고 직면할 수 있는 용기, 참으로 소중한 덕입니다.

이웃의 부족함이나 약점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직면하는 노력,
이보다 더 큰 형제애는 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지닌 한계를(특히 스스로 바라보지 못하는 취약점) 정확히 바라볼 수 있도록 지적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형제에게 충고하는 과정에서
미성숙한 대화기법이나 대화 문화로 많은 경우 참담한 결과를 초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성숙한 대화 문화, 바로 예수님의 대화기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논리적이면서도 단계적, 이성적 접근, 진정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경으로 한 형제적 충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공동생활에서 상처는 필연적이라고 보면 정답입니다.
괴로운 것이 상처지만 결국 상처를 통하지 않고서는 서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공동체에서 받는 상처는 상호성장의 장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상처는 상호 성화를 실현하는 장입니다. 성령께서는 상처와 고통을 당신 활동 장소로 선택하십니다.

돈보스코 성인의 당부를 이번 한 주간 묵상거리로 삼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제 우리 혀를 하느님께 봉헌했으니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다치게 하는 말,
형제 가슴에 비수를 던지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말도록 합시다.
우리 혀는 이제 봉헌된 혀이니 매일 주님께 찬미 노래를 드립시다.
앞으로는 우리 혀로 거룩한 말씀만을 선포합시다.
격려와 위로의 말만을 사용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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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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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오늘 말씀전례는 잘못된 형제의 교정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잘못된 세상의 교정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에제키엘은 말합니다.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에제 33,7-8)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타일러라. 단 둘이 만나 타이르고,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증인을 데려가 타이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려라”( 마태 18,15-17 참조)

이는 우리가 곧 교회가 잘못된 형제들과 혹은 잘못된 세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책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규칙서(4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잘못한 형제를 고쳐주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살인행위와 같다. 왜냐하면, 잘못한 형제는 마치 독 있는 뱀에 물린 상태와 같은데, 그 독을 빼내어주지 않고 그대로 나두는 것은 잔인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도 <복음의 기쁨>에서 하셨습니다. ‘진리와 사랑 앞에서 몸을 숨기는 것은 자살행위다’(272항 참조)

이는 모두 타인과 세계와 우리 자신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깊은 유대와 긴밀한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형제의 잘못에 내가 책임이 있으며, 세상의 잘못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형제의 잘못과 세상의 불의에 눈감게 되면 자살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로마 13,10)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형제를 교정하면서 그 방법과 절차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혼자 단독으로 조용히 타이르는 교정이요, <둘째>는 두세 사람이 함께 하는 교정이요, <셋째>는 교회를 통한 교정하는 것이요, <넷째>는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을 통한 교정입니다.

이와 같은 형제의 교정문제를 사부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에서는 23장-30장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복음>이나 <규칙서>에서 다 같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단지 잘못한 형제에 대한 형식적인 교정방법과 절차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스며있는 사랑과 배려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타인을 남이라 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지체라는 사실에서 옵니다. 그러기에, 잘못된 것의 교정이 우선적으로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극한 형제적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또 한편으로, 우리가 교정 받을 때는 한갓 잔소리쯤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형제적 사랑으로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어떤 형제가 잘못했을 때는, 먼저 그의 잘못을 앞세우기에 앞서 그가 바로 내 ‘형제’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비록 그가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는 죄인이기 이전에, 바로 내 ‘형제’요, 나는 그의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죄를 찾아내어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회개시켜 그들과 함께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일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 18,18)

교회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권한, 곧 ‘풀기와 매기’의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매는 권한은 최종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매는 조건이 풀어지면, 교회는 항상 풀어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죄인이 돌아오기를 항상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

그러니, 이 세상에서 함께 마음을 모으는 일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이루는 것은 모인 사람의 수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사랑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을 모으는 바로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다.”(마태 18,20). 아멘.

▥ 파주 올리베따노회 이영근 신부 - 2017년 9월 10일
  |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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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예수 살이 공동체

-지상에서 천국처럼-

오늘 강론 제목은 ‘예수살이공동체-지상에서 천국처럼-’으로 정했습니다. 정기적으로 받는 예수살이공동체의 소식지입니다. 참으로 신선한 공동체 운동을 시도하는 분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는 소식지로 마치 사막같은 세상에 오아시스와도 같은 소식들입니다.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공동체는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하늘나라를 앞당겨 살아가는 지상에서 천국처럼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물론이고 지금 여기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부터 하늘나라 공동체로 만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어라’ 하지 않고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처럼 살 때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보라,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가,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시편133,1).

마침 소식지 전면에 성서 구절도 잘 어울렸습니다. 최고의 예술작품이 예수살이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말그대로 선물이자 숙제입니다.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자 동시에 공동체 형제들의 노력을 요하는 숙제입니다.

예수살이공동체의 완성은 없습니다. 끊임없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그러나 문제를 안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니 문제있는 공동체가 살아있는 건강한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예수살이공동체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섬김의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듯 서로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섬김의 중심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서로 섬기는 예수살이공동체의 건설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오늘 독서와 복음이 답을 줍니다. 세 측면에 걸쳐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기도하라!”입니다.

주님의 명령입니다. 기도로 섬길 때 비로소 공동체입니다. 함께 모였다고 공동체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중심이 있어야 공동체입니다. 서로 좋아서, 마음이 맞아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바라보는 중심이 같아서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예수살이공동체’란 이름이 바로 예수님이 공동체의 살아있는 중심임을 말해 줍니다.

우리 수도공동체역시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라 명명합니다. 모든 믿는 이들의 공동체의 중심 역시 예수님이십니다. 분명히 정의하자면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입니다. 하여 예수살이공동체가 우선적으로 할 일은 기도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예수님이 공동체의 중심이심을 늘 새롭게 환기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가 모두입니다. 서로 소통하며 살기위해서 기도는 필수입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끊임없는 회개를 이뤄줍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분도수도회의 모토 그대로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나는 기도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함께 기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공동체의 중심에 늘 함께 계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와 격려도 없습니다. 우리만의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마음을 모아 청하는 것이기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내 마음대로가 아닌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되어 공동체가 바치는 기도입니다.

둘째, “사랑하라!”입니다.

이 또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예수살이공동체입니다. 기도에서 끊임없는 사랑이 나옵니다. 기도는 사랑의 샘입니다. 하여 ‘기도하라!’ 다음의 주님 명령이 ‘사랑하라!’입니다. 좋아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살기위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 역시 끊임없는 노력의 수행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끊임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늘 초보자의 정신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들인 우리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간곡한 권고도 사랑입니다. 통째로 전부 인용합니다.

“아무에게도 빚을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된다. 살인해서는 안된다. 도둑질해서는 안된다. 탐내서는 안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부연설명이 필요없는 단순명쾌한 사랑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의 영원한 빚쟁이들입니다. 하느님을, 이웃을 아무리 사랑해도 여전히 갚아야 할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삶 자체가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마치 태양이 존재자체로 사랑의 빛과 열을 발생하여 모두를 살리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기도가 답이듯 사랑이 답입니다. 기도가 모두이듯 사랑이 모두입니다. 평생 현역의 ‘사랑의 전사戰士’로, 평생 사랑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사랑의 학인學人’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셋째, “충고하라!”입니다.

이 또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충고 또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충고로서 섬기는 예수살이공동체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 내용입니다. 우리 형제가 죄을 지을 때 단계적 절차를 밟으며 충고하여 깨닫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형제의 회심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는 것이며 최종적으로 공동체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으면 그때는 그를 다른 민족처럼, 세리처럼 여기라 하십니다. 땅에서 최선을 다한 공동체의 결정은 그대로 하늘의 결정으로 직결됨을 봅니다. 공동체의 결정은 그대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다음 복음의 예수님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새삼 하늘과 직결된 땅위에서의 예수살이공동체의 결정임을 깨닫습니다. 교정이 없는 공동체는 약한 공동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충고를 받아들여 시정할 때 서로간의 신뢰도 깊어져 건강하고 견고한 공동체의 건설입니다. 적절한 충고는 공동체형제들의 의무요 책임입니다. 에제키엘서 말씀처럼 우리는 공동체의 파수꾼과 같습니다.

예언직의 사명은 바로 파수꾼의 사명입니다. 깨어 형제들을 사랑으로 충고하는 파수꾼입니다. 주님을 대신하여 충고하고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책임을 면할 수 있습니다. 다음 에제키엘 예언자의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 그러나 네가 그에게 자기 길에서 돌아서라고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고, 너는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새삼 사랑의 충고는 우리의 마땅한 의무요 책임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충고의 책임과 의무를 얼마나 소홀히 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칭찬하고 격려하기는 쉬워도 조언과 충고, 질책하기는 힘듭니다. 정작 예수살이공동체에서 필요한 것은 파수꾼으로서 잘못한 형제들에 대한 적절한 조언과 충고임을 깨닫습니다.

지상에서 천국처럼 살아야 합니다. 사막같은 세상에 오아시스공동체를 건설해야 합니다. 언젠가가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예수살이 하늘나라 공동체를 살아야 합니다. 길은, 답은, 구원의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늘나라 예수살이 섬김의 공동체를 살아갈 수 있습니까?

1.기도하십시오.
2.사랑하십시오.
3.충고하십시오.

간단명료합니다. 이렇게 본질적 공동체 삶에 충실할 때 주님은 친히 필요한 모든 것을 보완해 주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예수살이공동체를 성공적으로 이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95,7ㄹ과8ㄴ).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2017년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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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전례는 잘못된 형제의 교정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잘못된 세상의 교정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에제키엘은 말합니다.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에제키엘 예언서 33장 7절-8절)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타일러라. 단 둘이 만나 타이르고, 말을 듣지 않으면 다른 증인을 데려가 타이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려라.”(마태오 복음 18장 15절-17절 참조)

이는 우리가 곧 교회가 잘못된 형제들과 혹은 잘못된 세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책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규칙서(4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잘못한 형제를 고쳐주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살인행위와 같다. 왜냐하면, 잘못한 형제는 마치 독 있는 뱀에 물린 상태와 같은데, 그 독을 빼내어 주지 않고 그대로 놔두는 것은 잔인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교종 프란치스코께서도 <복음의 기쁨>에서 하셨습니다.

‘진리와 사랑 앞에서 몸을 숨기는 것은 자살행위다.’(272항 참조)

이는 모두 타인과 세계와 우리 자신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깊은 유대와 긴밀한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형제의 잘못에 내가 책임이 있으며, 세상의 잘못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형제의 잘못과 세상의 불의에 눈감게 되면 자살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로마서 13장 10절)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형제를 교정하면서 그 방법과 절차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혼자 단독으로 조용히 타이르는 교정이요,
<둘째>는 두세 사람이 함께 하는 교정이요,
<셋째>는 교회를 통한 교정하는 것이요,
<넷째>는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는 것을 통한 교정입니다.

<복음>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단지 잘못한 형제에 대한 형식적인 교정방법과 절차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스며있는 사랑과 배려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타인을 남이라 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의 지체라는 사실에서 옵니다. 그러기에, 잘못된 것의 교정이 우선적으로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극한 형제적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또 한편으로,
우리가 교정 받을 때는 한갓 잔소리쯤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형제적 사랑으로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어떤 형제가 잘못했을 때는, 먼저 그의 잘못을 앞세우기에 앞서 그가 바로 내 ‘형제’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비록 그가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는 죄인이기 이전에, 바로 내 ‘형제’요, 나는 그의 ‘형제’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죄를 찾아내어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회개시켜 그들과 함께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일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려 있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18장 18절)

교회에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권한, 곧 ‘풀기와 매기’의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매는 권한은 최종적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매는 조건이 풀어지면, 교회는 항상 풀어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죄인이 돌아오기를 항상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 주실 것이다.”(마태오 복음 18장 19절)

그러니, 이 세상에서 함께 마음을 모으는 일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이루는 것은 모인 사람의 수가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사랑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을 모으는 바로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십니다.

“둘이나 셋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거기 그들 가운데 나도 있다.”(마태오 복음 18장 20절).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마태오 복음 18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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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형제의 잘못을 앞세우기에 앞서,
그가 내 형제임을 알게 하소서!

형제가 잘 되기를 위해,
기도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의 잘못이 드러나거든,
그에게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함을 알게 하소서.

힘을 모아 사랑하게 하소서!
그를 돕는 길은 죄를 찾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데 있음을 알게 하소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우리의 사랑만으로는 안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이신 당신께 의탁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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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20년 9월 6일
  |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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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마태오 복음 18장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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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가는 길은 언제나 두렵고 떨리는 길입니다.

넘어지고 일어서는 관계 맺음의 길을 되풀이하며 우리는 걸어갑니다. 무기력한 우리에게 정직한 나눔은 언제나 힘겨운 도전입니다.

수도회 안에서조차 형제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형제 하나 받아들이는 것 또한 마음만으로는 결코 되지 않음을 아프게 고백합니다. 형제와 형제사이의 간격이 진심어린 믿음으로 채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뉘우쳐야 할 대상은 언제나 제 자신부터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이 없기에 형제도 없는 것입니다. 언어적 폭력이 아닌 진심어린 사랑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안쓰러운 형제적 관계를 위해 기도드립니다. 받아 주는 형제 부족함을 인정하는 형제 ‘미안하다’라고 말할 줄 아는 형제를 통해 공동체는 유지되고 성장합니다.

신앙은 먼저 진실한 사람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공동체와 무덤 가족과 하숙집 사이에 있는 관계의 현주소입니다. 우리의 무책임한 잘못으로 떠나간 형제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사랑은 서로를 배려하며 만나는 것이며 만남은 갇혀있는 서로에게 먼저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다시 공동체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기도하는 요즈음입니다. 공동체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것이며 소중한 나눔의 자리임을 되새겨봅니다. 살아 있는 공동체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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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0년 9월 6일
  | 09.06
460 68.4%
더불어 여정중의 공동체 생활

-사랑, 기도,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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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기적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축복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은총은 선물이 무엇일까요?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일까요?
가장 큰 예술작품은 무엇일까요?

바로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내가 속하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말 그대로 은총의 선물 공동체입니다. 내가 택한 것 같지만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생활에서 쉬운 것에서 어려운 순서로 다섯을 생각해 봤습니다.

첫째. 판단하거나 비난하는 것입니다.

하여 가장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것이고 가장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일이라 했습니다. 사실 첫눈에 발견되는 이웃의 결점들입니다.

둘째, 칭찬하는 것입니다.

칭찬하기는 쉽고 서로의 관계에도 도움이 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값싼 칭찬은 금물입니다.

셋째. 감사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까맣게 감사를 잊고 지내는 지요. 하여 진정성이 담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말마디의 표현은 참으로 필요합니다. 어느 분이 만날 때 마다 했다는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라는 인사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넷째, 사과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앙금을 일거에 해소해 주는 사과입니다. 참으로 힘든 게 사과이지만 ‘감사합니다’나 ‘고맙습니다’보다 백번 고마운 것이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라는 깨끗한 사과입니다.

다섯째, 교정입니다.

형제들의 잘못이나 죄에 대한 충고요 교정입니다. 정말 가장 힘든 것이, 또 상처주기 쉬운 것이 잘못이나 죄에 대한 지적이요 충고요 교정일 것입니다.

판단하기도 쉽고 칭찬도 감사도 사과도 비교적 쉬운 편이지만 충고나 교정은 정말 어렵습니다. ‘상호 교정이 없는 공동체는 약한 공동체이다’ 예전 장상의 언급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더불어 여정 중의 공동체 생활’입니다.

‘더불어(together)’ 말마디가 중요합니다.

삶은 여정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하느님을 향한 홀로와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더불어 안에서의 홀로입니다. 제가 가정공동체 삶이든 수도공동체 삶이든 늘 강조하는 말이 있습니다.

“함께 사는 자체가 가장 힘들고 중요한 수행이자 수도이다. 잘살았든 못살았든 끝까지 함께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다. 부부도 함께 구원받는다. 부부 점수 합하여 평균 낸 후 둘로 나눠 평균 60점 넘어야 둘다 함께 구원이다. 혼자서는 아무리 잘 살아도 구원받지 못한다. 참으로 중요한 평생 공동체 생활의 원리가 홀로와 더불어의 균형과 조화이다.”

과한 표현 같지만 사실입니다.

어제는 틈틈이 ‘홀로와 더불어’-시인 추모 구상 문집-을 읽었습니다. 다양한 문인들의 글이라 글이 쉽고 아름답고 깊고 향기로워 배우는 마음, 공부하는 마음으로 참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이렇게 깊이 글에 빠지기는 처음입니다.

‘홀로와 더불어’라는 구상 시인의 시가 좋았습니다. 구상 시인 친히 홀로와 더불어 삶의 대가요 달인이었습니다.

“나는 홀로다
너와는 넘지 못할 담벽이 있고
너와는 건너지 못할 강이 있고
너와는 헤아릴 바 없는 거리가 있다

나는 더불어다
나의 옷에 너희의 일손이 담겨 있고
나의 먹이에 너희의 땀이 배어 있고
나의 거처에 너희의 정성이 스며 있다

이렇듯 나는 홀로서
또한 더불어서 산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의 삶에
그 평형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구구절절 공감이 가는 시입니다. 어떻게 하면 ‘홀로와 더불어’ 균형과 조화속에 공존의 평화를 누리며 잘 살 수 있을까요. 더불어 여정중의 공동체 생활을성공적으로 살아 낼 수 있을까요. 판단이나 비난하지 않고 적절한 칭찬과 감사를 표하면서 즉시 잘못은 사과하면서 그 어렵다는 충고와 교정도 하면서 더불어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답은 셋입니다.

사랑과 기도, 교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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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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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사랑할 때 비난이나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칭찬, 사랑의 감사, 사랑의 사과, 사랑의 교정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답이 없습니다. 사랑은 만민의 공통 보편 언어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마음은 모두에게 통합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서 사람입니다. 사랑-삶-사람이 한뿌리임을 말해 줍니다.

누구나 선물처럼 주어진,
하느님 친히 심어주신 사랑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이웃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말그대로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서로 살기위하여’
사랑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통째로 인용합니다. 서로 사랑을 통해 검증되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아무에게고 빚을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된다, 살인해서는 안된다, 도둑질을 해서는 안된다, 탐내서는 안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여기에 무엇을 더 붙일 수 있겠습니까?

오늘은 성녀 마더 데레사의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성녀야 말로 사랑의 대가, 사랑의 달인이었습니다. 평생 ‘사랑의 학교’ 배움터에서 평생학인이 되어 배우고 공부해야 할 수행이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늘 초보자인 우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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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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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기도는 함께 갑니다.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의 광신이 되기 쉽고, 기도가 없는 삶은 공허하고 허무합니다. 사는 대로 기도하고 기도하는 대로 삽니다. 나중 남는 얼굴도 기도한 얼굴인가 기도하지 않은 얼굴인가 둘중 하나입니다. 기도는 테크닉, 기술이나 기교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기도할 때 사랑하게 되고 기도할 때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와 사랑 역시 함께 갑니다.

기도는 사랑의 샘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사랑의 기적, 기도의 기적입니다. 홀로의 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함께의 공동기도입니다. 함께 기도하지 않으면 공동생활은 물론 공동체의 다양성 속의 일치도 불가능합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자 목표요 방향인
주님을 확인하고 강화하는 공동기도 시간입니다. 땅과 하늘, 하느님과 인간을 하나로 소통시키는 기도의 은총입니다. 우리 모두 공동기도의 중요성을 확인시키는 주님이십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저 하늘에 계신 주님이 아니라
지금 여기 더불어의 공동체가 주님의 거처입니다. 민심이 천심이요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우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입니다. 바로 매고 푸는 결정적 역할이 공동체 기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도와 사랑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풀고 사는 용서와 화해가 얼마나 중요하고 본질적인 일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은 함께 한 마음으로 평생, 매일,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 수행을 통해 땅에서 서로 매인 것을, 맺힌 것을 풀어 하늘과 하나로 소통케 하심으로 우리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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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교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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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애의 표현이 교정입니다.
참으로 기도할 때 주님은 형제애적 교정의 지혜도 주실 것입니다. 교정의 목적은 벌이 아니라 화해와 치유입니다. 참으로 사랑으로 충고해야 하고 사랑의 귀로 들어야 합니다. 참으로 말 잘하는 것도 중요하고 잘 들어 순종하고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서 말씀은
사랑의 충고와 교정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자 의무임을 깨닫게 합니다. 다음 사람의 아들은 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우리 각자를 뜻합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나는 너를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너는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경고의 의무를 다했을 때
책임을 묻지 않겠지만 경고의 의무를 하지 않아 형제가 죄로 인해 죽게 되었았을 때 책임을 묻겠다는 참으로 엄중한 말씀입니다. 문득 창세기에서 아벨을 죽인 카인에 대한 주님의 추궁이 생각납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카인이 아니라도 우리에게 묻는 주님 말씀처럼 생각됩니다. 함께 사는 형제들을 서로 지켜 줘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형제의 교정에 대한 구체적 처방이 주어집니다. 끝까지 순리에 따른 절차에 따라 형제애적 교정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이제 해결의 열쇠는 주님께 넘겨졌고 주님께서 알아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좌우간 인내와 사랑을 다해 끝까지 화해와 치유를 위해 노력하는 형제애적 교정이 참으로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형제애적 교정에 앞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할 성규 92장중,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라는 대목도 생각이 납니다.

참으로 이런 인내의 사랑은
너그럽고 자비로운 주님을 닮아갈 때 가능할 것입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홀로와 더불어의 공존과 상생이, 균형과 조화가 절실한 공동체 현실입니다. 더불어 여정중의 공동체 생활은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

다만 하루하루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로
사랑과 기도, 형제애적 교정에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 뿐입니다.

참 좋으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오늘 화답송이 고맙게도 오늘 말씀을 요약합니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시편 95,7ㄹ과 8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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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0년 9월 6일
  | 09.06
460 68.4%
남편과 아내, 아들, 이렇게 셋만 모여 있어도,
그곳에 예수님께서 현존하시며,
그곳은 곧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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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엄중한 시기에도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여서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코로나 사태에도 예배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정부는 교회가 드리는 현장 예배를 어떠한 경우에도 막아서는 안됩니다. 예배는 기독교의 핵심이자 생명으로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기독교인의 임무입니다.”

백번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생떼를 부리고 있는 사람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주님께서 오늘 우리 모두에게 건네시는 말씀을 귀여겨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것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오 복음 18장 19~20절)

그토록 큰 위험성을 무릅쓰고 현장 예배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교회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까마득한 높이의 첨탑과 초대형 공간, 신도들로 꽉 찬 건물만이 교회인가요?

손에 손에 깃발을 들고 큰 광장에 대규모로 운집해서, 양손을 높이 쳐들고 아멘 아멘!, 알렐루야를 외쳐야만 하느님 백성인가요? 그런데 백번 생각해도 이해하지 못할 일 한 가지! 대체 남의 나라 국기 성조기는 왜 흔들고 다니는가요? 대한민국을 미국의 한 연방 주로 여긴다는 의미인가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님의 육화 강생으로 인해 그분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그분의 복음 말씀을 사는 개별 그리스도인 각자가 새로운 개별 교회입니다. 천명, 만명의 신자들이 모인 곳만 교회가 아니라, 세명이나 두명,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단 한명이라도 올바른 지향으로 간절히 기도하면 그곳이 곧 교회입니다.

이번 기회에 부디 생각을 바꾸기 바랍니다. 교회 건물 안에서만 대규모로 함께 모여 바치는 현장 예배만이 진정한 예배라는 생각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생각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장소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고,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간절히 기도하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참된 예배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토록 엄중한 시기 굳이 현장 예배만을 강조하는 사람들, 이 위험한 순간, 끝까지 대면 예배를 포기할 수 없다고 생떼를 쓰는 사람들에게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정말 한번 하느님 앞에 진지하게 그 이유를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께서도 같은 맥락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교회로 만드십시오.”

‘현장 예배만이 살길이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외치는 사람들, 오늘은 진지하게 여러분들 가정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굳이 현장으로 나오지 마시고 여러분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여러분의 가정을 교회로 만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을 작은 교회로 여기고, 가정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고, 가족들과 오붓하게 둘러앉아, 지금 이 고통스런 현실이 조속히 종료되기를 간절히 청하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무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거짓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굳이 현장 예배에 가지 않으셔도, 여러분 가족 구성원들만 둘러 앉아 기도 바치는 순간, 남편과 아내, 아들, 이렇게 셋만 모여 있어도, 그곳에 예수님께서 자리하고 계시며 그곳은 곧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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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2020년 9월 6일
  |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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