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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서의 이유
조회수 | 2,254
작성일 | 05.09.10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옛날 어느 섬에 아주 엄격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부녀자가 외간 남자와 부정한 관계를 갖게 되면 그 여인을 벼랑으로 끌고 가서 떨어뜨려서 죽이는 관습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한 여인이 잘못을 범했습니다. 마을 원로 회의는 다음 날 새벽에 그 여인을 처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여인의 남편은 그 결정이 내려지자 사라져서 처형시간까지 나타나지 않았고, 형은 예정대로 집행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오후에 보니 죽었어야 할 여인이 남편과 함께 집에 있었습니다. 어찌된 연유일까요? 처형 전날에 남편은 밤새도록 배에서 그물을 가져다가 벼랑 중간에 쳐놓았고, 이 덕분에 부인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남편의 정성에 감탄해서 더 이상 여인의 죄를 묻지 않았답니다.

용서는 한 사람을 죽음의 나락에 빠지지 않게 해 주는 그물과 같습니다. 하지만 용서를 실천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더구나 거듭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용서하기란 너무도 힘겨운 일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어려움을 감안해서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놀랍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 즉 무한대로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거의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요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거듭 용서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비유로 설명해 주십니다. 어떤 종이 왕에게 일만 달란트나 되는 빚을 졌다가 탕감을 받습니다. 한 달란트는 노동자가 대략 20년은 일해야 벌 수 있는 액수인데, 일 만 달란트라면 헤아릴 수 없이 큰 액수입니다. 그런데 이 종이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이는 일만 달란트의 50만분의 일정도- 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그를 닦달해서 빚을 다 받아냅니다. 바꾸어 말하면, 헤아릴 수 없이 큰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 형제의 작은 허물을 용서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종을 불러다가 야단을 칩니다. “이 몹쓸 종아,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이어서 왕은 그 종이 자신의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둬 두라고 명령합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큰 용서를 받고 있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인간들은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무자비한 종처럼 이웃에게 용서를 거절한다면, 이미 받은 용서마저도 무효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1독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남을 동정할 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자기 죄에 대한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는가?”(집회 28,4)

예수님은 죄 없는 분이지만, 우리 죄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은 분입니다. 신앙인은 이런 예수님과 하나 된 사람들(제2독서)로서 용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크나큰 “주님의 자비를 깨닫고”(본기도), 이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 역시 자비를 베푸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꾸준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손희송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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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를 하는 것만큼 용서를 구하는 것도 큰 용기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흔들리지 않고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반의 바늘”이 없듯이 흔들리지 않는 삶은 없습니다. 다만 바람을 탓하지 않는 꽃처럼 지구의 자전을 탓하지 않는 나침반의 바늘처럼 아무리 세상이 우리 마음을 흔들어도 끝내 길을 잃지 않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흔들림 없는 믿음이 아니라 그 흔들림조차 딛고 일어선 이 땅의 순교 성인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속에서 예수님은 “죄를 지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 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이 과한 듯싶지만 되짚어 보면 미움이라는 것이 일회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용서 또한 끝없이 되새김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살다 보면 사랑만큼이나 미움은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어도 파고드는 바람과 같이 초대하지 않아도 슬며시 자리 잡는 불청객입니다. 초대한 것도 아닌데 한 번 마음에 들어오면 도통 나갈 줄 모르기에 용서 또한 그렇게 모질게 마음에 되새겨 넣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미움은 초대장 없이 들어오는 불청객이지만 용서는 끊임없이 초대해도 쉬이 자리 잡으려 하지 않는 낯선 손님이라는 점이겠지만 말입니다.

예전에 본당 일에 반대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나쁜 뜻은 아니었겠지만 기분이 좋았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일은 잘 되었고 많은 이들은 그분의 선택에 보이지 않는 질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문안을 가게 되었을 때, 그분은 신부님께 죄송하다고 참 미안했다고 몇 번이나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동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용서하는 것만큼 용서를 구하는 마음 또한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임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은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구하는 것이 당연하고 용서해 주는 것은 커다란 용기라고 말들 합니다. 하지만 용서를 구하는 것도 용서해 주는 것도 마음을 거슬러 흘러야 하는 것이고 보면 꼭 그렇다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덕분에 그 이후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미움보다는 쉬이 미움을떨쳐 버리지 못하는 옹졸함에 대해 더 많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잘못하고도 시인하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용서를 구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잘못에 돌을 던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을 감싸안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세상의 정의가 행한 만큼에 매여 있는 이유이겠지만 하느님의 정의가 참회하는 만큼에 매여 있음을 안다면, 우리가 굳이 세상의 정의를 하느님의 정의보다 앞세워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꽃이 없듯이 흔들리기에 사람이고, 떨리지 않는 나침반은 더 이상 나침반일 수 없는 것처럼 미움과 용서 사이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삶이지만 끝내 길을 잃지 않았던 순교 성인들의 후예답게 오늘도 일흔일곱 번 흔들려도 일흔일곱 번 딛고 일어서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권철호 다니엘 신부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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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계속 용서하는 것이 이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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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오 복음 18장 21절)

성경의 위경 중 ‘벤 시라’의 지혜서를 보면,
이웃이 범죄 했을 때는 두 번의 기회만 주라는 대목이 있고, 랍비들은 이웃의 범죄는 세 번까지만 용서하라고 가르친 것에 비하면 베드로는 아주 넉넉하게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상 밖의 답변을 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2절)

사실 베드로는
유다인들의 율법적 용서 개념을 훨씬 넘어서는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으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관대함을 훨씬 뛰어넘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끝없는 용서’,
‘제한이 없는 사랑’을 가르치시며
이에 대해 구체적인 예화를 말씀하셨다.

“임금이 셈을 시작하자
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끌려왔다”(24절)라는 말씀으로 하느님의 심판을 드러내신다. 한 달란트가 금 34kg 정도이기에 만 달란트는 340톤이나 되므로 이것은 결국 평생을 노예로 살아도 그 빚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양의 돈이다. 그런데 이 종이 그 빚을 절대로 값을 수 없다는 것을 안 주인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다.

그리고 그 탕감 문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여러분은 잘못을 저지르고 육의 할례를 받지 않아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골로새서 2장 13절-14절).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무한한 사랑으로 서명된 빚과 죄의 탕감 문서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용서는 우리가 상대방에게 무엇이라도 받으려고 하면 절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그냥 또 하나의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그러기에 용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과 그에 대한 자비의 사랑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회개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성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인간적이고 율법적인 의미에서의 용서가 아니라 더 차원이 높은 자비와 사랑을 통한 무조건적인 용서를 우리에게 요청하신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소서 4장 32절)라는 말로 우리가 용서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미 용서받은 것처럼 남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당부하고 있다.

우리는 남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
비록 자비나 사랑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우리도 용서받았으니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고, 남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면 나도 용서받을 수 없으니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코,
갚을 길 없는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우리가 일상의 작은 것, 달랑 백 데나리온의 잘못도 용서하지 못해서 우리 빚의 탕감이 무효가 되는 어리석음은 피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선 자기 자신의 더 큰 죄, 더 큰 빚을 탕감받기 위해서 계속 용서하라는 것이다. 남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불쌍히 여겨야 우리 자신이 사랑받고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비하심 안에 영원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마르코 복음 11장 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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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임상만 신부
2020년 9월 13일 ‘카톨릭평화신문’에서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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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참으로 건강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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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해 전례 없는 ‘팬데믹’ 상황을
맞이한 요즘이라 다른 어느 때보다도 건강에 관한 관심이 큰 것 같습니
다. 그래서 건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름대로 생각해 봤는데, 일단 건강에는 두 가지 영역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어느 한 영역에 문제가 생겨도 우리 건강에 이상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육’적인 영역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몸이 건강해야 건강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몸이 건강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살펴보니,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잘 먹고, 잘 자고, 잘 살면 됩니다. 이를 조금 더 그럴듯하게 표현하자면 ‘조화로운 생활 습관’을 갖고 살면 신체적으로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으로 ‘영’적인 영역이 있는데요,
정신과 마음이 건강하기 위해서 전제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오늘 복음 말
씀을 통해 예수님이 잘 지적해 주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 우리는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마태 18,35) 하며 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경험상 잘 알고 있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머리로는 용서하고 화해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막
상 실제로 용서하고 화해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거의 매일 같이 경험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용서와 화해가 조금 더 쉬워질까요?

저도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매일매일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기 위해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저 자신과 싸워야 하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쩌다가 용서하는 데 성공했을 때의 ‘해방감’과 ‘기쁨’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용서에는
강력한 힘이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무엇보다도 용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과거가 현재를 가두는 감옥이어서는 안 된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과거의 아픈 기억을 해소할 길을 찾아보아야 한다. 용서는, 과거를 받아들이면서도 미래를 향해 움직일 수 있도록, 감옥 문의 열쇠를 우리 손에 쥐여준다. 용서하고 나면, 두려워할 일이 적어진다.”(프레드 러스킨, 『용서』)

그와 반대로 용서하지 못하면
우리 영혼은 해방감과 기쁨이 아닌 ‘미움’과 ‘분노’로 가득하다는 것을 우리 경험은 가르쳐 줍니다. 이런 ‘미움’과 ‘분노’ 같은 감정은 우리 건강을 실제로 위협합니다. 이것 역시 우리가 경험상 압니다.

심한 경우에는
잘 먹지도, 잘 자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강조해봅니다. 참으로 건강하기 위해서는 꼭 “죽기 전에 자신을 용서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도 용서하라.” (미치 앨봄,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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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신현준 루도비코 신부
2020년 9월 13일 ‘서울대교구 주보’에서
  |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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