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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용서가 바로 축복임을 깨닫자.
조회수 | 2,224
작성일 | 05.09.10
누구에게도 용서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완전한 사람은 없다. 많은 경우,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 용서하면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참 용서가 없으면 참 평화도 없다. 용서, 그것이 바로 축복임을 깨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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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두 용서받고 용서해야 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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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면서 용서받을 필요가 전혀 없을 만큼 완전하게 사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용서를 청해야 할 죄와 허물을 지니고 살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심하게 받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 억울함과 분노가 한(恨)이 되고, 한이 오래되면 병이 되는 수도 더러 있다. 무심코 뱉은 말 한마디, 때로는 참지 못하고 터트린 분노가 엄청난 상처를 주기도 한다. 십계명 중에 제5계명은 단순히 육체적인 가해나 위해 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까지도 포함되는 것이다. "칼에 맞아 죽은 사람이 많지만, 혀에 맞아죽은 사람은 더 많다. 혀의 공격을 당하지 않는 사람, 그 광분을 격지 않는 사람, 혀의 멍에를 지지 않고 그 사슬에 묶이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집회28,18-19)는 말도 있다. 그래서 세상살이엔 한도 많고, 맺힌 것도 많고 그것이 병이 되어 멸망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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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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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가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해 주어야 합니까?"(마태 18,21)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이 깜짝 놀랄 대답을 하셨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마태 18,22). 이스라엘 사람들의 숫자 개념으로는 일곱이란 많은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은 바로 '무한히 용서하라.'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라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이 당연시되던 그 당시에 예수님은 엄청난 요구를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무자비한 종의 비유'로 인해 더욱 설득력을 갖게 된다. 일만 탈란트의 빚이란 엄청난 돈이다. 탈란트는 그 당시 통용되던 화폐 중 최 고액권이었고, 데나리온은 가장 작은 화폐 단위였다. 우리나라의 만 원짜리와 일원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만 탈란트와 2백 데나리온은 1억원과 2백원 정도의 큰 차이가 난다. 일만 탈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가, 자기에게 2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조금 기다려 주지 못하고 감옥에 가둔 처사는 너무나 비인간적이다. 예수님의 이 비유 말씀은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하실 것이다"(마태 18,35) 하신 말씀으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 진다.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하심에 비해 우리들은 얼마나 용서하기에 인색한가를 깨닫게 해준다.

만일 하느님께서, '머리카락에 홈을 파듯이' 일일이 따지며 용서에 인색한 우리들처럼 우리에게 셈 바치기를 요구하신다면 우리는 얼마나 크게 낭패를 당할 것인가? 예수님은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면 조건 없이 용서하셨다. 바리사이파 집에서의 죄녀(루가 7,36-50), 간음하다 잡힌 여인(요한 8,1-11), 예리고의 세관장 자케오(루가 19,1-9),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루가 23,34), 함께 못 박힌 오른쪽 강도(루가 23,40-43) 등을 모두 관대히 용서하셨다. 예수님은 용서의 모범을 보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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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용서하려 해도 안 되는데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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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용서하고 싶고, 또 용서하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럴 때에는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십사"고 하느님께 간절히 청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용서가 되지 않는다 기 보다 용서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거기엔, "지금 내가 용서해 주면 나만 손해본다"는 계산이 스며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내게 잘못한 만큼 나도 꼭 갚아주겠다." "그 사람은 좀더 벌을 받아야 한다."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다. 진정으로 용서해주지 못하는 한, 벌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에도 화창한 날씨 같은 맑은 평화가 없고, 찌푸린 날씨처럼 항상 무엇에 눌린 것 같은 부담을 지고 살게 마련이다. 그런 상태에서는 제대로 기도할 수 없고, 만나는 사람들을 활짝 갠 마음으로 대할 수도 없고, 마음에 주름과 얼룩이 있기에 사물을 재대로 보고 판단할 수도 없다. 한마디로 자기 스스로 진정한 내적 자유를 체험할 수 없는 것이다. 용서해 주지 않고 벌준다고 생각하지만 , 사실은 자신도 그 증오의 사슬에 얽매여 있는 것이다. "형제들을 진정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말은 바로 이런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영과 육이 결합된 존재이다. 증오가 쌓여 한(恨)이 되고 한이 깊으면 병이 된다. 용서를 거부하고 증오를 불태우며 한(恨)을 키우는 것은, 바로 자신에게 독을 불어넣는 것임을 깨달으면 남을 용서하는 힘을 주십사고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용서만이 참된 자유와 평화와 기쁨을 준다. 용서와 축복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용서가 바로 축복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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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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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위대한 사랑”

올 여름 엄청난 비로 인해 많은 분들이 수해를 입었습니다. 군인들은 줄 곧 대민지원을 나가 수해복구를 위해 구슬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수고하는 군인들을 보면서 군종신부로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이곳에서 초코파이의 위력은 대단합니다. 하지만 더 풍족하게 병사들을 위문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아쉬움도 늘 함께 합니다. 비록 병사시절을 보냈지만 다시금 군종 신부로서 바라볼 때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동안 살아온 삶이 다르니 이곳에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일 때가 많고 인생에 있어 좋은 자양분을 얻어가길 바라며 격려하지만 여전히 힘들어 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몸이 힘들다보니 마음도 약해지고 사소한 것에도 예민해지는 이들이 요즘 제가 만나는 친구들입니다.

군대에는 영창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군인 신분에 어긋난 경우 이곳에서 일정기간 머물면서 교육을 받습니다. 개성이 강한 친구들은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고 사건사고를 일으키는 경우들이 있는데 주로 단체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미워하는 마음이 그 원인입니다. 영창 위문을 간 날, 한 친구가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해왔습니다. 괴롭혔던 상대방이 용서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밉고 이젠 사람이 싫다고 했습니다. 함께 기도하고 사랑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고 돌아왔지만 앞으로의 삶이 걱정되는 친구였습니다. 사람에 대한 불신이 너무나도 컸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를 만나면서 용서는 기도를 통해 준비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나를 돌아보고 마음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비를 베풀고 용서를 해주는 것은 단순히 잊어버리거나, 상처를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지극한 사랑을 기억하며, 그 사랑의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또한 나와 너, 우리 모두가 약하고 죄 많은 인간임을 겸손하게 인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용서하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바로 그 마음을 가상히 여기실 것이고 그러는 가운데 형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와 용기가 생겨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간청하는 까닭에 우리를 거듭거듭 용서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이가 우리의 감정을 손상시켰거나, 약간 낮춰 대하였거나 또는 자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해서 날을 세워 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본성의 나약함의 표시가 아닙니다. 많은 경우 고의적인 것이고 감정이 상했거나 교만이 손상되었다고 느낀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행동이 우리 영혼의 구원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참 사랑은 용서에서 옵니다. 진정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있다면 아직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한다면 실상 내가 복음에 등장하는 악한 종입니다. 그동안 하느님께 빚을 진 큰 죄의 수효를 헤아려 보다면 몇 백만원이 아니라 몇 억 그 시상이 될 것입니다.

용서는 위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과의 영원한 사랑의 일치를 위한 조건임을 알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치유되기를 원한다면, 용서하는 태도가 계속 발전되기를 원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어김없이 우리를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분 안에서 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최승호 메다르도 신부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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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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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수많은 존재와 생명 중에 제일 무서운 것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우스갯소리로는 제정신이 아닌 미친 사람.
보이는 게 없는 앞 못 보는 사람. 물불 안 가리는 소방관이라 하고 여기에 덧붙여 마누라 혹은 남편이라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단 한 권의 책도 안 읽은 무지한 자나,
수많은 책을 접한 박식한 자가 아닌 단 한 권의 책만을 읽고 이를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인 자가 제일 무서운 자라 했으며, 또 어떤 이는 잃을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코로나의 여파로
그 어느 때보다 힘없고 가난한 서민들의 삶이 갈수록 피폐해져 가는 이때에 빚쟁이 역시 가장 무서운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부류의 빚진 이가 등장합니다.
한 명은 지금 시세로라면 조 단위에 해당하는 천문학적인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이와 일용직 석달치 정도의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이입니다.

그리고 또한 두 빚쟁이가 등장합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이에게 너무도 쉽게 자비롭게 모든 것을 탕감해 주신다는 선한 빚쟁이와 그 많은 빚을 탕감받고도 고작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빌린 이를 용서하지 못한 무자비한 빚진 빚쟁이입니다.

복음의 정신을 떠나
우리는 현실 속에서 일만 달란트를 빚지고도 쉽게 탕감받거나 배째라고 나오거나 더 빌려달라고 후안무치하게 나오는 이들을 봅니다.

이른바
옥스퍼드 어학사전에도 등장한다는 chaebol(재벌)이나 금융기관과 방만한 공기업들입니다. 그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엄청난 빚을 탕감받거나 유예받고서도 고작 백 데나리온조차 갚기에 버거워 힘들어하며 무릎을 꿇고 사정사정하는 노동자들과 자영업자들과 같은 영세 채무자들을 법이 허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쥐어짜내려 합니다. 그러니 없는 이들에게, 빚진 이들에게 빚쟁이는 가장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말합니다.
정말 무서운 사람은 용서받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용서받고도 용서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그저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용서받고도 용서할 줄 모르는 무자비한 사람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되어버리고, 그로 말미암아 동시에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모두 빚진 이들이며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받을 것이 있는 빚쟁이입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우리의 가장 큰 빚쟁이는 자비로운 주님이시기에 그분은 우리의 잘못이 일만 달란트라도 기꺼이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에게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가족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주시고, 나의 실수와 욕심과 교만과 시기로 이웃에게 빚진 백 데나리온은 화해와 겸손과 정직과 성실의 이자로 갚아 나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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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정진국 바오로 신부
2020년 9월 13일 ‘마산교구 주보’에서
  |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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