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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용서와 자비의 하느님
조회수 | 2,246
작성일 | 05.09.10
오늘 복음 말씀의 주제는 ‘용서’와 ‘자비’입니다. 용서와 자비는 인간에 대한 연민(憐憫)의 마음을 전제로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애제자인 베드로와 대화 중에 “얼마나 자주 또 많이 죄를 지었든 간에 무한정 용서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즉 용서는 일회성이 아니라 용서의 끝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온갖 유혹으로부터 벗어나기 쉽지 않은 나약한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연민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하신 용서와 자비의 마음은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의미는 자명 합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상과 인간을 위해 하느님 스스로 끝없는 용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끝없는 용서를 받은 사람은 이웃의 작은 허물을 마땅히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은 싸움, 화해, 미움, 사랑, 약탈, 쟁취, 꾀를 부리고, 노동을 하고, 절망도 하고, 비겁해지기도 하고, 관용도 하고, 잔인하게도 되어 사는 이 부조리한 현실 속에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은 무너진 탄광 속에 갇힌 광부와도 같은 처지입니다. 어둡고, 깊은 지하에서 출구를 잃고, 손톱과 발톱이 닳아지고 기진해서도 그 안에 고인 물을 수건에 적시어 코에 대면서 숨을 이어가는 광부가 연상되는 처지입니다. 이 절망과 단절의 처지에서 단 하나의 탈출구는 “믿음” 그것 하나 뿐인 것입니다.

오늘 날 현대인은 탄광 속에 갇힌 광부와도 같은 고독한 존재입니다. 물질의 발달로 풍족해졌지만, 정신적 가치는 이미 오래 전에 탄광 속에 묻혀 버렸습니다. 탄광 속에 갇힌 광부의 구원을 위해서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연민의 마음을 통해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현실 속에서 실천해야만 합니다. 이 모순덩어리 현실 사회 안에서 탄광 속에 갇힌 광부가 절망과 좌절 속에 구원을 포기하지 않게끔 용서와 자비로 상징되는 희망과 구원의 손길을 형제적 사랑으로 ‘내가 먼저’ 내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아름다운 ‘주의 기도문’ 중의 한 구절을 바치며, 오늘의 말씀을 갈무리 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 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 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하용달 안드레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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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유대교가 율법과 제사의례를 사람들에게 강요한데 반해, 예수님은 그런 것이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마르 2,27).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율법준수와 신앙생활을 동일시하여 율법에 얽매여 살던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는 신앙을 거부하는 말로 들렸습니다. 예수님에게 율법과 제사는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 함께 계심을 사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이지, 인간을 맹목적으로 지키고 바치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사는 우리의 삶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현세에도 내세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존경하고 소중히 생각하는 분이 함께 계시면, 우리는 그분을 의식하고 행동하여 그 함께 계심을 삽니다. 우리는 우리의 욕심과 취향을 내세우지 않고 그분의 마음과 그분의 취향을 우리의 것으로 삼고 행동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소중해서 그분의 마음과 취향을 의식하고 실천하도록 하는 지침이 율법이었습니다.

제물 봉헌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그분의 시선으로 자기 노동의 대가를 보고 처리하겠다는 마음다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동으로 얻은 것은 우리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사람은 자기 노동으로 얻은 것을 하느님 앞에 가져와 바치면서 하느님의 시선이 그 위에 내려오게 하여, 그 시선으로 그것을 봅니다. 제물을 봉헌하는 것은 하느님이 그것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이기심의 한계를 넘어서 하느님의 시선으로 우리 노동의 대가를 보고 처리하겠다는 마음다짐이 담긴 의례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과 제사의 의미를 왜곡하였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율사들은 율법을 삶의 목적과 같이 만들었습니다.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들은 하느님이 제물을 탐하시는 것 같이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왜곡을 거슬러서 하느님을 가르치신 분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 자를 벌하시려고 기다리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바치는 제물을 기다리는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율법과 제물 봉헌이 왜곡되어 발생하는 예속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서 삶의 현장으로 나오게 하신 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잘못한 이웃에게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먼저 베드로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면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느냐는 물음입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은 너무 많다는 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번은 어렵게 용서하지만, 두 번까지 하지는 않습니다. 한 번은 속지만 두 번 속으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일곱 번은 무척 많은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하시는 대답은 대단히 비현실적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하라는 말씀입니다. 한없이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용서는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한없이 실천하여 하느님이 자기의 삶 안에 함께 살아 계시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하나를 말씀하십니다. 일만 탈란트의 빚을 용서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다가, 일만 탈란트의 용서가 취소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일 탈란트는 육천 데나리온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일만 탈란트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빚을 용서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이라는 푼돈의 빚을 용서하지 않아서 불행해졌다는 말씀입니다.

유대교의 율사와 제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니까, 하느님을 용서하지 않으시는 분,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 복수하시는 분, 사람들의 재물을 탐하시는 분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인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시는 분이라고 우리가 믿고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베푸시는 분, 은혜로우신 분이라고 우리가 믿고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면, 우리도 이웃에게 용서하고 베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있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없어도 되는 우리의 생명인데 그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사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이 용서하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가 흐르고 흘러서 세상이 있고, 생명이 있고, 우리의 삶이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흐르는 자비를 차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일만 탈란트를 용서받은 사람은 그 용서를 자기 선에서 차단해버렸습니다. 자기가 받은 용서는 자기 주변으로 흐르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비로운 실천을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자비를 실천할 때 희열과 행복을 맛봅니다. 대단히 제한되고 단편적일지라도, 우리는 그런 희열과 행복을 삶 안에서 가끔 체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중히 생각한 나머지, 우리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우리가 많이 가지고 많이 누릴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사랑도 자비도 외면해 버립니다. 그러면서 미움과 복수가 지배하는 공간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도 우리와 같이 미워하고 복수하시는 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 자신이 소중해서 우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날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배웠고, 그 흐름 안에 내 생명도 합류해야 하겠다고 깨달으면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나를 통해서 내 이웃으로 흘러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그것을 해야 합니다. 율사와 제관이 시키는 대로, 혹은 오늘의 교회 성직자들이 요구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유를 배워야 합니다.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자유를 배워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 우리의 실천 안에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속박하시지 않고, 우리가 자유롭게, 참으로 보람 있고 행복하게 살 것을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서공석 신부
  |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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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그것은 세상에서 하기 가장 어려운 일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름 내내 지루한 장마가 우리를 힘들게 했는데, 뒤늦게 늦더위가 기승을 부립니다. 비록 햇살이 따갑지만, 그동안 힘겹게 버텨오던 곡식이며 과일들이 조금은 힘을 내는 듯해서, 마냥 싫고 힘들지만은 않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무자비한 종의 비유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왜, 그리고 무엇이 무자비한가 하니, 자기는 이해받고 용서받길 바라면서, 남의 잘못은 보고 넘기지 못하는 어리석고 못된 우리의 모습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무자비하다고 하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무자비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못나고 이기적인 모습이 우리의 현실일까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청하면서, 우리 스스로는 결코 너그러워질 수 없는 것일까요?

‘용서,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어려운 이유가 외부로부터 기인하는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저 자신을 보더라도, 화가 나고 짜증나고, 이해와 용서가 힘들 때는, 외부의 문제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그 까닭을 느낄 때가 더 많습니다. 기분 좋으면 마음도 넓어지고 훨씬 부드럽고 여유가 있고 너그러워지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일이 잘 안 풀리거나 피곤하고 스트레스에 쌓여 있을 때는 예민해지고 참지 못하며 못된 속을 다 보이고 맙니다. 그로 인해 부정적이고 외골수로 변해가는 자신을 보며, 나아질 것을 포기하고, 그렇게 된 이유와 책임을 세상과 이웃에서 찾고 원망합니다. 용서가 어려운 만큼 친구는 점점 사라지고, 같은 삶을 살아도 외롭고 무미건조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용서 그 먼 길 끝에 당신이 있습니까?’라는 영상물에서는 말합니다. 살기 위해 용서하는 자와 분노의 힘으로 살아가는 자! 사람은 용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에, 결국 이 두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되고, 다시 행복하기 위해 우리는 용서하는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께 많은 빚을 지고 사는 사람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주님의 은총과 자비를 체험하면서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때 주님께 빚진 우리도 주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용서는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하느님은 용서하길 바라십니다. 나 자신을 위하여, 다시 행복하기 위하여! 무자비한 우리의 모습을 버리고, 자비로울 줄 아는 하느님의 자녀로 나아갑니다. 선하신 하느님을 닮은 오늘 하루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종엽 바르나바 신부
  |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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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그리스도인 삶의 원칙,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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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청량한 하늘을 오래 올려다보았습니다.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푸른 하늘에서 우수수… 천국 이야기가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습니다.

이 좋은 계절 9월에,
우리는 순교자 성월을 기념합니다. 온 교회가 한국의 순교자들께 마음 모아 경하 드리고 그분들의 삶을 본받아 살고자 다짐하며 하늘의 은총을 청합니다. 그래서 더욱 오늘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진중히 다가오는데요. 발등에 떨어진 문제에 몰입하느라 하늘 한번 올려다보지 못하고 지내는 우리를 채근하는 듯 읽힙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과 하느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전혀 다르며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일깨우려 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잡다한 것에 마음이 묶이면 주님을 잊을 것이고 주님을 잃은 마음은 결국 주님의 뜻을 미루고 미루는 어리석음을 살게 될 것이란 경고로 들렸으니까요.

이런 마음에 스치듯
성녀 카타리나의 고백이 떠올랐습니다.
“시간을 기다리지 마세요.
시간은 당신을 기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떻게 용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푸념하는 우리,
무조건 양보하고 용서하기엔 억울하다며 머뭇대는 못난 마음을 얼른 치우지 않으면 용서의 때를 놓칠 수도 있다는 엄한 가르침을 단단히 새겨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씀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너무도 자주 스스로 증오심에 묶여
원망을 쏟아내며 지내기도 합니다. 매사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며 결국 절망하여 삶의 문제에 얽혀서 믿음인의 정체성을 잃고 상황에 이끌려 대충대충 살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의 요점은 주님께서 이르신 용서가 그저 속이 끓어오르고 분통이 터지는데도 억지로 참으라는 뜻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하리라 싶습니다.

주님께서 이르신 용서를 살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큰 자비를 입은 자의 기쁨과 감사를 표출하는 것임을 일깨우고 계시니까요. 복잡하게 뒤틀려서 뒤숭숭한 마음을 말끔하게 정리 정돈할 수 있는 해결책은 오직 ‘용서’뿐임을 분명히 알려 주시니까요.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라는 엄중한 경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 안에 자리한 나쁜 것, 흉한 것,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들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는 상대를 판단하는 오만의 우를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우리 모두의 죄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에 민감하여 오직 감사드리며 지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들보 같은 내 죄에 비해서 티끌 같은 상대의 허물의 하잘것없음을 새기며 마음에 옹이를 남기지 않는 가벼움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지금 이 순간,
이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가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 덕분임을 고백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임을 잊지 맙시다.

따져보면
잘못한 상대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을 용서하겠다는 각오를 살아내기만 한다면 상대의 어떤 잘못도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 어떤 상황도 너그러이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그걸 누가 모르냐 싶으십니까?”
“좋은 주님의 말씀, 좋고 좋은 주님의 뜻을 누군들 실천하고 싶지 않아서 이러겠느냐?” 되물으십니까?

맞습니다.
백번 옳은 항변입니다. 틀림없이 상대가 당신께 잘못을 저질렀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당신은 그로 인해서 손해를 입었고 무시를 당했는데 그는 자신의 허물을 도대체 인정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 마음을 주님께서 이미 알고 계신답니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아주 간단한 용서의 방법을 일러주십니다.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

우리의
지난 잘못을 전혀 기억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당부가 이리 따뜻한데, 어찌 토를 달겠습니까? 다만 상대의 허물에 눈을 감으라고만 하시니 말입니다. 그저 상대의 잘못을 찾아내려 애쓰지 말고, 더 세세히 밝히려 들지 말고, 확실하게 확인하려는 생각을 삼가라고만 하시니 말입니다.

뿐인가요?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로마서 12장 19절)고
단단한 약속까지 해주시니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의 요지는
용서야말로 그리스도인 삶의 원칙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용서를 살아내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불변의 법칙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랑과 용서는 하느님의 변치 않는 뜻이기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실천 사항이며 의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진리는 따지고 검증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을 들여다볼 줄 알게 해주셨으며 또 반성할 줄도 아는 존재로 빚어주셨습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마음만 먹으며 얼마든지 도덕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질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께로부터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는 복음의 약을 공급받은 곳입니다. 교회인 우리에게는 세상의 모자람을 채워주며 끊임없이 보듬어 돌볼 수 있는 지혜의 명약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께서 쏟아주신 사랑을 아끼지 말고 나누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너끈히,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도 거푸 용서하는 고귀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주간,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하느님의 원칙임을 깊이 새기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해주신 맑고 푸른 세상을 형편없는 생각과 지저분한 행색으로 덕지덕지 때를 묻힌 허물을 참회하기 바랍니다.

정말 순수하게 이웃을 사랑한 적이 있는지
곰곰이 되돌아보며 혼과 영과 몸을 정갈하게 가꾸면 참 좋겠습니다. 그렇게 주님께 받은 사랑을 축내지 않고 고스란히 전하는 정직한 믿음의 증표로 살게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하여 저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이 되는 순교자적 삶을 살아내는 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끝까지 사랑하고 일흔일곱 번을 용서하는 너그러움으로 하느님 나라의 불변의 원칙에 충실하시길, 기도드립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성인이여!
저희 한국교회의 모든 교우의 삶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 기쁨이 되도록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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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2020년 9월 13일 ‘가톨릭신문’에서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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