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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시련과 용서
조회수 | 2,324
작성일 | 05.09.10
흐르는 냇물에 오줌을 누는 놈들은 얼마든지 있다.
누가 그 물에 오줌을 눈다 하여
흐르는 물을 멈추지 마라.
한두 놈 오줌을 찌끄린다 하여
그 물이 지리지는 않는다.

눈이 온다하여 슬퍼하지 마라.
봄이 오면 눈은 녹고 감추어졌던 길은
드러나기 마련인 것을...

보리자루가 이리 뒤틀리고
저리 뒤틀리며 흔들리는 것은
더 많은 보리를 담아내기 위한 것,
흔들리지 않는 보리자루엔
많은 보리가 들어갈 수 없음이니라.
삶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시련을 겪는 것은
더 많은 은총을 담아내기 위한 것,
하느님께서 시련을 통해
그 사람을 더 큰 그릇으로 쓰시려 하심이니라.

P는 열심한 가톨릭 신자로서 이웃을 향한 희생과 봉사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신문과 방송에 자신을 모함하는 기사가 실리면서 하루 아침에 공금을 횡령한 파렴치한 범죄인으로 기소당했다.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백방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일단 혐의를 받고 있는 와중에서 그의 하소연은 실추된 명예를 되찾기에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는 한 때 자살을 통해 결백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유혹을 수없이 이겨내야만 했다. 이처럼 삶이 절망적일 때 그에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 했던 힘은 바로 김수환 추기경님과 법정스님께서 해주신 위의 말씀들이었다. 그는 이 말씀들을 하루에도 수 백, 수 천 번 기도를 외우듯 되씹고 되씹었다 한다.

그는 결국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누명을 벗어버린 후 다시 재생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신의 결백이 드러난 후 사람들은 그 가해자를 명예훼손죄와 무고죄로 다시 고발해야 한다고 충고했지만 그는 자신의 원수를 고발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한다고 했다. 자신이 받은 모든 고통의 순간을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생각할 수 있었기에 자신을 음모한 그 사람을 용서한다고 했다.

그는 단죄하는 마음이나 복수의 행동이 결코 자신의 깊은 상처를 치유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용서를 통해서만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치유의 은사가 얻어질 수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절망적인 시련과 역경을 통해 이미 하느님께서 써 주실 큰 그릇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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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박현민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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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

오늘 독서와 복음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용서’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합니다. 용서(容恕)라는 한자의 형태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다른 이의 ‘꼴’(容)을 담아내라는 뜻이 담겨 있음을 찾아낼 수 있고, 또 같아지는(如) 마음(心)을 지니라는 뜻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내 안에 다른 이를 잘 담아내고 그와 같아지려는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언어 속 지혜를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금 깨우칩니다.

제1독서에서 집회서 저자는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집회 28,4)”라고 말하며, 자신에게는 관대하지만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도록 권고합니다. 내게 적용되길 원하는 기준이나 잣대를 상대방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에서 예수님은 용서의 실천에 대해 묻는 베드로에게 자비로운 임금의 입을 빌려 중요한 점을 깨우쳐 주고자 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용서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정도나 횟수 또는 인내의 차원이 아니라 나 역시 용서를 구해야 할 똑같은 처지의 인간이라는 점을 먼저 기억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겸허히 상대방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우리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간에 하루에도 수없이 하느님 앞에 용서받아야 할 크고 작은 죄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자비로움과 관대함은 우리에게 ‘하루’라는 시간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비유에서 자비로운 임금이 빚을 탕감해 준 종에게 바란 것은 단 한가지 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받은 것을 다른 이와 나부는 삶이었습니다.

매 순간 우리가 다시금 노력하고 기억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스스로 자신의 노력을 격려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우리보다 먼저 신앙의 삶을 살아간 이들이 했던 확신에 찬 고백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박유현 빈첸시오 신부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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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노력해도 용서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 사무치는 한을 맺게 한 원수, 철천지원수(徹天之怨 )가 그렇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 레지오 활동을 하면서 환자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40대 남성이었는데, 급성간암으로 얼마 못 살 것이라 했습니다. 참으로 착해 보이는 분이었습니다.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며, 병을 얻게 된 동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잠을 자다가 우연히 눈을 떴는데, 자신의 집에 세 들어 살던 사람이 자신의 방에 들어와 텔레비전을 훔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 눈길이 너무 무서웠다고 합니다. 너무 놀라고 화가 났지만, 무서운 마음에 말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며, 그 사람을 신고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만 깊은 병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하는 그 순간까지도 용서되지 않아 그분의 얼굴은 일그러질 때가 잦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그가 용서의 시간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아, 함께 기도하자고 하면서, 그분께 들었던 내용과 전개된 과정을 재정리하며 하나하나 용서의 기도를 바쳤습니다. 용서의 기도를 바친 다음, 물건을 훔쳐간 이를 위한 축복의 기도도 했습니다. 놀랍게도 눈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던 그의 얼굴이 서서히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저를 붙들고 ‘고맙습니다. 이제 살 것 같습니다’며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자신의 마음속 응어리를 다 털어놓았고, 그를 용서했으며, 이제는 그가 잘 되기를 바랄 수 있어 행복하다고, 더욱이 자신이 그 사람에게 텔레비전을 선물했다고 생각하니, 정말 행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몸이 나아지는 느낌이 든다며, 다시 눈물범벅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오래전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철천지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용서 못할 사람을 용서하고 축복할 때, 최종적으로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사람은 본인 자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죄지은 형제를 조건 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을 하시고, 그 비유로 만 탈렌트(60,000,000일간의 노동자 일당)를 빚진 매정한 종에 대해 이야기 해 주십니다. 만 탈렌트의 빚을 진 사람에게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자,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 종의 모든 부채를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100일간의 노동자 일당) 빚진 동료를 만나게 되자, 그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하며, 그의 청을 들어주지도 않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둡니다. 이 일을 지켜본 동료들이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이릅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불러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매정한 사람의 말로(末路)가 어떻게 되는지 분명히 보여주시며,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상처받은 사람, 즉 용서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 용서하지 않으면, 매정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용서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 어느 곳에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고,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용서 받았거나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임에도, 남을 용서하는 일에 매정하다면, 그 잘못은 본인에게 돌아갑니다. 그러면 이중으로 손해보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분노와 복수심을 자극하는 그 사람과 그 사건을 마음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는 힘과 축복할 수 있는 힘을 십자가상 예수님께 청하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여러분의 상처와 화와 분노가 사르르 녹으며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힘을 얻어 정말 어려운 용서와 축복을 실행한다면, 예수님은 기뻐하시며 ‘너는 정말 자비로운 사람이다. 고맙다. 너는 너 자신과 너의 원수를 정말 사랑하였다. 너는 착하고 귀한 사람이니, 너에게는 복이 있다’라고 하시리라 믿습니다. 용서를 통해 복을 받고 치유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저도 이번 주간을 용서의 주간으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최인각 신부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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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원하십니까?
‘기쁨’을 원하십니까?
‘사랑’을 원하십니까?
‘행복’을 원하십니까?
진정 ‘영원한 생명’을 원하고 ‘하느님 나라’를 원하십니까?

간절히 원하신다면 ‘용서’하십시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용서하는 그 순간
그토록 원하던 이 모든 것들이 내 안에 충만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용서’가 열쇠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했을 때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잘 실천합니다. 그런데 잘못의 정도가 너무 심하면 조금 다릅니다. 받은 상처와 충격이 너무 큰데 어쩔 수 없이 용서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수없이 외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왜?’

그럼에도
‘용서해야 한다.’면서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여전히 힘겹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도 마찬가지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기도를 간절히 바쳐도
용서할 힘이 생기기는 커녕 오히려 미움과 분노와 원망만 점점 커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또 기도할 때는 모든 것을 용서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현실 앞에서 또다시 무너지는 자신의 모습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간이 지속되면 우리의 영혼과 육신은 병들고, 삶이 망가지고 깨져버립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미움과 원망, 분노와 증오가 쌓여 한이 되고 한이 깊어지면 병이 됩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에 무엇이 간직되어 있습니까?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 행복, 사랑, 기쁨, 평화가 있습니까?
아니면 미움, 원망, 분노로 힘들어하지는 않습니까?

용서는
인간 한계를 넘어서서 하느님을 닮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상처받아 힘들어하는 자신을 사랑으로 변화시키는 치유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용서할 힘과 지혜의 은총을 허락해 주십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

이는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끊임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용서하기 어렵다면 내가 먼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라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임금에게 만 탈렌트(1탈렌트=금34Kg[현시세:1Kg=8천6백만 원])라는 엄청난 액수를 탕감받은 종이 자기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100일 품삯) 이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적은 액수를 빚진 동료를 만나 빚을 갚으라며 멱살을 잡고 감옥에까지 보내는 어이없는 상황을 이야기하십니다.

내 힘만으로 용서하기 어려울 때,
주님의 한 없으신 자비와 나를 먼저 용서해 주신 분들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용서는 내 힘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실 때 가능하게 합니다. 주님께 은총을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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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용기 안드레아 신부
2020년 9월 13일 ‘수원교구 주보’에서
  |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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