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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부족한 저를 용서 하실래요?
조회수 | 2,355
작성일 | 05.09.10
우리는 남이 실수나 잘못을 하면 “저런”, “왜 저럴까?”하며 마치 자신이 정의의 사도인양 그의 옳고 그름을 따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똑같은 잘못에는 항상 이유가 있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그것을 관대하게 포장하기 바쁜 것이 우리들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에게 손해나 피해를 입혔을 경우 과연 그를 어떻게 대하는지, 반대로 자신이 그러할 때는 얼마나 자비를 바라는지… .

그래서 바로 이러한 우리들에게 오늘 복음 말씀은 조건없는 용서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몇 번이나 형제의 잘못을 용서해주어야 하는가 묻고 일곱 번 용서해주면 되겠느냐며 자신의 관대함(?)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하시면서 용서란 숫자로 따질 문제가 아니라 한없이 해야 함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 한 예로 오늘 복음에서처럼 일만 달란트를 빚진 사람이 임금에게 빚을 탕감 받고도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비유로 들어 용서가 어떠해야 함을 설명하고 계시고 있는 것입니다.

본당신부에게 커다란 세 가지 복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사목회 구성원, 식복사, 사무장에 관한 복이 아닐까 합니다. 그 중에서도 사목회 구성원들을 어떻게 만나는가는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언젠가 모 본당에 발령 받았을 때 만난 사목회의 모습은 그리 반갑지만은 않았습니다. 서로간의 불일치가 눈에 가시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목회의 구성이 요구되었기에 현 사목회에 대한 눈길이 뜸해졌는데 그것이 제 부족함이자 실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사목회 한 분이 약간 술을 드시고 오셨는지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탁자를 치면서 그동안 저의 부족한 모습을 토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양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술이 깬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렇게 돌려보냈지만 마음 한 켠에는 분한 마음이 가실 줄 몰랐습니다. 그분에 대한 미움이 커져만 갔습니다. 그 이후로 화해를 위해 여러 번 술을 함께 했지만, 용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만 이루어졌을 뿐…. 수없이 기도하면서 성찰을 했습니다. 그리고 접한 것이 바로 오늘 제1독서 집회서의 말씀이었습니다. “자기 이웃에 대해서 분노를 품고 있는 자가 어떻게 주님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으랴”

사실 저 자신도 용서받을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나약하기 그지없는 제 자신이 다른 이에게 분노한다는 것은 너무 배부른 처사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늘 빚져 있기에 그 빚은 내 삶을 통해 끊임없이 갚아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바로 인간 한계를 넘어서서 하느님을 닮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초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할 사람, 용서되지 않는 사람,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사람과 피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지만, 하느님의 방식은 피하는 것이 아니라 품에 안는 용서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어쩌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이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받는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누구도 아닌 가장 먼저 자신에게 베푸는 자비요, 상처받은 자신을 사랑하는 치유법일 것입니다. 이제 그분께 다시금 고개 숙여 용서를 청합니다. “부족한 저를 용서하실래요?"

김동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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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 돌로 쳐 죽이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사람들에게 던진 말씀입니다. 정말로 여러분은 00에게 돌을 던질 만큼 떳떳하고 자신 있는 삶을 살아오셨나요?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나요? 만약 이만한 일로 00가 제명 처분된다면 우리들 중 이 자리에 남아 있을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여러분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합니다.”

얼마 전 백성 지도자들의 모임에서 있었던 한 원로의 발언입니다. 무려 복음을 들먹인 그의 호소는 그럴만한 이유로 한 사람의 제명을 논하던 이들을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로, 제명당할 뻔한 이를 불쌍한 여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상황을 보며 예수님께서 무어라 하실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는 저들의 모습에 안타까워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런 경우에 갖다 붙이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니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본래의 뜻을 왜곡시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경우는 적지 않습니다. 사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선포된 복음 말씀인 ‘매정한 종의 비유’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일만 탈렌트라는 셈할 수도 없는 액수를 탕감받은 종이 자기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이라는 비교 자체가 안 되는 적은 액수를 빚진 동료를 만나 빚을 갚으라며 멱살을 잡는 이 어이없는 상황을 바라보며 우리는 누구를 떠올리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이 비유 말씀을 들으면서도 내가 용서해야 될 사람을 떠올리지 못하고, 오히려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을 떠올린다면, 그리하여 “너도 일만 탈렌트 탕감받은 사람인데, 고작 백 데나리온 빚진 나를 용서 못 할 수 있느냐?”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아울러 내가 용서해야 될 사람을 떠올리긴 하지만, 그가 나에게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주인이 된다면, 그래서 그가 하는 말과 행동하나 하나가 만 탈렌트를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을 빚진 종에게 가서 빚을 받아내려 하는 것처럼 괘씸하게 보인다면 그 역시 복음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복음에 대한 왜곡된 해석과 적용은 모두 복음을 나를 위한 도구로 쓰고 있는 데서 비롯됩니다. 내가 복음의 주인이 될 때, 복음은 세상을 향해 휘두르는 나의 칼이 되고, 나의 아집을 지켜주는 방패막이가 되지요. 하지만 우리는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복음은 나의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의 도구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복음에 맞추어야 합니다. 복음이 우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복음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복음에 맞추어 사는 삶, 복음을 따라 사는 삶을 살 때,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일러준 대로,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주님을 위하여 죽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인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속한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병찬 아우구스티노 신부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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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대략 10여년 전, 훈련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젊은 청년들이 각자의 집을 떠나와 처음으로 입어보는 군복과 난생 처음 함께 침상을 사용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훈련소 첫날, 피복을 지급 받고, 다음날 부터 몇 가지의 교육을 받고, 실질적인 훈련에 돌입했습니다.

연병장에서 여러가지 제식 동작을 익히는데, 때때로 마음과 몸이 함께 따라주지 않는 경우들도 있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한 명의 병사가 올바르게 자신의 행동을 다른 사람과 일치시키지 못하면 단체로 기합을 받게 된다는 것이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럴 수 있지라는 생각으로 무던하게 넘어갔었는데, 매번 훈련 때마다, 그 병사의 잘못으로 함께 기합을 받게 되자, 내무실 분위기는 참으로 험악하게 되기 시작했습니다.

신학생이였고, 일흔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알고는 있었지만, 처음으로 마음이 많이 상했던 기억이 납니다. 때아니게, 그 친구가 미워서 다른 동료들과 뒤에서 험담도 했었던 기억도 납니다.

시간이 흘러 훈련소의 하이라이트인 40킬로 행군이 찾아왔습니다. 다른 동료들과 나눴던 대화의 내용이 기억납니다. "이제 저 녀석으로 인해 기합받을 일은 없겠다."라고.

행군이 시작이 되었고, 한참을 걷다가, 지쳐서 쉬고 있을 때, 늘 실수를 하던 그 병사가 저에게 와서 물을 권했습니다. 그리고, 짧았지만, 그의 한 마디 말에 무척이나 가슴이 아프고, 슬펐던 기억이 납니다.

그는 저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사님이 계셔서 참으로 많은 힘을 얻었어요"라고. 할 말을 잊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지금도 그 때를 기억하면 마음이 아파옵니다.

용서의 마음이라는 것. 어찌보면 무서우리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 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정말 은총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은 은총을 던져버리고, 우리는 저주의 말을 합니다.

"절대 용서할 수 없어!!!"라고.

다시 시간을 돌린다면, 그에게 용서를 청하고 싶습니다. 다시 시간을 돌린다면, 그와 함께 더 잘 지내고 싶습니다. 다시 시간을 돌린다면, 그의 잘못으로 인한 벌을 달게 받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신자 여러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은총입니다. 진실된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용서의 특권을 잊지않고, 잃지 않기를 청해봅니다.

참된 사랑의 마음으로 오늘도 사제로 살아가는 저에게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들아, 나는 너를 용서했단다"

주님. 저희 모두가 당신의 사랑을, 용서를 닮게 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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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민경덕 신부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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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필요한 ‘사랑의 감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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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성모병원의
관리부장과 시니어타운 마리스텔라의 원장을 겸임하던 2015년 5월, 저는 대한민국을 강타한 메르스(MERS) 감염병 위기를 경험한 바 있습니다.

원내 감염을 막기 위해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수백 번씩 손 소독을 수행하며 전 교직원이 3개월간 사투를 벌인 끝에 병원과 마리스텔라는 비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상황을 겪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건만, 그로부터 불과 5년 밖에지나지 않은 2020년, 저는 교구 내 또 다른 병원인 인천성모병원에서 코로나19(COVID19)라는 훨씬 심각한 감염병 위기 상황을 겪어내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감염병 중 하나인 1918년 스페인 독감에 비길 만한,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한 재앙으로 역사책에 기록될지 모를 이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에 수많은 환자가 발생하고 생명을 잃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의료기관 종사자로서 커다란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감염병이 더욱 공포스러운 이유는, 이것이 단순히 인간 육체에 대한 공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의 약한 고리를 집요하게 공략하여 분열을 촉발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창궐한 이후,
평시에는 사회 저변에 가라앉아 있던 분노, 혐오, 이기주의, 편견, 차별 등이 떠올라 갖가지 악의 형태로 체화(體和)하여 인간 사회를 분열시킵니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 미지의 적 코로나 바이러스와 싸워 이기기 위해 그어느 때보다 인간 상호 간의 협력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분열된 사회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때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가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신 하느님의 모습은 당신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앙심을 품고 보복하는 폭력적이고 변덕스러운 하느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연민의 마음을 인간이 본받지 못했을 때, 우리 인간이 어떤 상황에 처할지에 대한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 속 주인은
오직 사랑과 연민의 마음에서 자기 종의 막대한 빚을 조건 없이 탕감해주었습니다. 이것은 그 종도 당신처럼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라는 사랑의 선순환에로의 초대입니다.

만약
주인의 커다란 사랑을 체험한 그 종이 자신에게 아주 작은 빚을 진 동료의 빚을 탕감해주었다면, 주인의 사랑이 또 다른 사랑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선순환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종은 주인의 조건 없는 사랑을 체험하고도 그 사랑을 본받아 실천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동료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기로 하는 이기적인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사랑의 단절이 발생하고 죄악의 악순환이 시작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전쟁이나 천재지변,
혹은 현재와 같은 감염병 대유행 등의 재난 상황에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분열하게 하고 갈등을 부추기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 마음속을 파고드는 이기심은, 감염병과 유사하게 전파되어 인간 공동체를 좀먹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러한 재난 시기에 오히려 더 사랑하고, 희생하고, 봉사하며, 갈등을 치유하고, 인간 사회를 일치하게 하는 이들 또한 존재해왔습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우리 천주교 신자들만큼은 사랑의 선순환을 일으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얼마 전 교황청에서 발간한 책, 『친교와 희망(Comunione e speranza)』의서문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활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희망, 믿음, 용기를 주었고, 연대와 형제애 안에서 우리를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위험을 통해 우리는 다른 형태의 감염, 곧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사랑의 감염’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 ‘사랑의 감염’이 이루어져,
많은 이들이 고통 중에서도 희망의 빛을 보고, 하느님께서 사랑이시라는 것을 깨달으며, 함께 힘을 모아 이 코로나 위기의 시기를 잘 극복해 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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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고동현 노엘 신부
2020년 9월 13일
  |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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