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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조회수 | 2,600
작성일 | 05.09.10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동태 복수법’에 대하여 우리는 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동태 복수가 아니라‘따불’이나‘따따불’로 복수해야 시원한 것 아닌가?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악한가를 드러내주는 이야기가 있다.
지독한 앙숙인 두 사람이 있었는데,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 하느님께서 천사를 내려 보내시어 소원하는 것의 두 배를 상대편에게 해 주겠다고 제안하셨다. 한 쪽에서 자기 축복을 하면 상대편은 곱으로 축복을 받게 되고 또 상대편이 자기 축복을 빌면 자기도 곱으로 축복받을 판이었다. 그러나 천사의 이 제안에 한 사람은“나를 망하게 해 주십시오”하고, 또 다른 사람은 곰곰이 생각하다가“제 눈을 찔러 애꾸눈으로 만들어 주십시오”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애꾸눈이 되면 상대편은 소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산다 할지라도,
신앙인인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하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오래된 이야기가 하나 있다. 옛날 여의도 광장에서 인생을 비관한 어떤 젊은이가 자동차를 몰고 아이들이 뛰노는 광장으로 돌진했다. 그 사고로 많은 이가 희생되었는데, 그 중 며느리와 손자를 잃어버린 로사리아 할머니는 그 젊은이를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아 극진하게 옥바라지를 하였다. 그도 감명을 받아 그 할머니를 어머니처럼 따랐고 회개하였다는 일화이다.

이렇게 자비와 용서는 굳어진 마음을 풀어주는 힘이 있다.
‘주님의 기도’를 외워보자.“…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이 말을 뒤집으면,“저희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저희 죄를 용서하시지 마십시오”라는 말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도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없다.

우리가 남을 용서할 권한이 있나?
인간은 처음부터 범죄하여 하느님의 용서에 의지하여 비로소 존립하는 허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나는 너를 용서한다’가 아니라 ‘서로서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존재이다. 우리 사이에 누가 누구를 단죄하거나 판단하거나 거기에 대하여 용서를 베풀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은 없다. 착각해선 안된다.

악을 악으로 갚는다면 또다른 악을 불러온다.
복수는 또다른 복수를 불러올 뿐이다. 악을 선으로 갚을 때 비로소 악의 고리를 끊어 악이 되풀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악의 고리를 끊고 선의 고리, 사랑의 고리를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하고 하지 않고 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새기자.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마태오 복음 18장 2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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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오상현 요한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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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하고 베푸는 것’모두가 용서다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는 일과 베푸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 중 하나이다.
더러 앞서 사신 분들이 겸허하게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모습을 대할지라면, 참으로 멋이 있고 진실하시어 존경스럽다. 그래서 이분들이 나를 회개할 수 있도록 이끄시는 삶의 은인이요, 예수님이 되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높으신 분이 보잘것없이, 낮은 곳으로 찾아 오셔서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 아니신가. 예수님은 용서를 구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 값 또한 치르시기 위해서도 돌아가셨다. 아픔을 겪고 자비를 베푸신 것이다. 그러기에 용서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것이다. 용서를 청하는 것은 아름다움이요, 베푸는 것이 자비와 사랑이라면 이 둘의 차이가 구태여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달라이 라마는 용서란 “단지 자기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를 향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에서 스스로를 놓아 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자기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이자 사랑이다” 라고 했다. 얼마나 좋으신 말씀인가. 용서는 그 누구를 위한 용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용서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분노와 화를 품고서 어떻게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으며,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집회 27,3-4).

따라서 이 세상에 치유와 해방, 자비와 사랑이 가득하기를 바라며 매번 용서를 해야겠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용서를 청할 것은 꽤나 있는데 용서를 해주어야 할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누구나 너그럽게 용서받길 원하지만 앙금있어 돌아서고, 서둘러서 용서받길 원하지만 억울해서 멀어지고, 대가 없이 용서받길 원하지만 손해봐서 닫혀진다. 이런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윤헌식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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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진정한 용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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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 도달하는 과정은 우리 영혼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묻은 무엇을 덜어내는 것이다.” (마에스트 엑카르트)

예전에 이 글을 보고 한동안 멍하니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주변에서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말이고 여러 번 접해봤을 이 말이 그날따라 새삼스럽게 제 삶을 사로잡았습니다.

왜 이제야 이 말이 내게 전해졌지? 진
작 알지 못한 후회스러운 마음과 더불어서 말입니다.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 우리에게는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말을 들었는데 어떤 한 마디가 온통 나를 점령하는... 그리고 왜 진작 알아듣지 못했지? 하는 후회가 밀려오는 경험.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한 번도 힘든 용서를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실천하기에 너무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으신가요? 해 보려고 했는데도 잘 안돼서 하느님께 등을 보이고 돌아서 본 적은 없으신지요?

오늘 복음 말씀은 쉬울 수도 있지만 매우 어려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럼,
하느님께서 언제나 크신 자비와 용서를 한없이 내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을 알고는 있는지 한번 각자의 삶을 들여다보십시오. 이 과정을 통해 신자로서 살면서 매 순간 내 삶 속에서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죄까지도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을 느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삶 속에 용서를 통해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 말씀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진작 알아듣지 못했던 예수님의 사랑에 점령당하는 시작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저는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용서는 영혼에 묻은 것을 덜어내는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과정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용서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깨달은 사람만이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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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용영일 F.하비에르 신부
2020년 9월 13일 ‘춘천교구 주보’에서
  |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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