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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용서의 체험을 통해서 서로 용서할 수 있다
조회수 | 2,294
작성일 | 05.09.10
오늘 복음(마태 18,21-35)의 주제는 '용서'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용서하고 또 용서받으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마태오 복음을 통해서 다시 한번 하느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도 베드로는 예수께 잘못한 형제를 일곱 번 정도 용서해주면 되느냐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22절)고 말씀하셨다. 즉 잘못한 형제가 회개하면 끝없이 용서해주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무제한적 용서'의 가르침을 현실에서 실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끝없는 용서는 고사하고 일곱 번, 아니 단 한 번의 용서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나의 인격을 모독하고 상처 주고 재산 손해를 끼친 사람들을 어떻게 무제한으로 용서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우리들에게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특례비유(特例比喩)를 말씀하셨다. 왕은 자기에게 엄청난 빚을 진 종의 처지를 가엾게 여겨 모든 빚을 탕감해주었다. 그런데 자유롭게 된 종은 자기에게 몇 푼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호통치고 감옥에 가두었다. 이 사실을 안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33절)라며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형리에게 넘겼다. 우리가 서로 용서해야 하는 까닭은 하느님으로부터 엄청난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다(과거). 그처럼 큰 용서를 이미 받았으니 이제 교우들과 이웃의 작은 허물을 마땅히 용서해주어야 한다(현재). 만일 교우들이 서로 용서해주지 않으면 장차 종말에 엄청난 심판을 받을 것이다(미래).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실생활에서 서로 용서하며 살 수 있을까? 그런 삶을 가꾸기 위해서는 먼저 개개인이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를 깊이 체험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끊임없이 우리를 용서해주신다. 만일 우리가 잘못했을 때마다 하느님께서 심판하셨다면 그 누구도 생명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용서가 끝없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오늘날에도 이 같은 하느님의 용서는 교회 안에서, 특별히 고해성사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용서란 잘못이나 죄를 꾸짖거나 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용서한다는 것에는 훨씬 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다시 당신의 소중한 자녀로 받아주심을 뜻한다. 우리가 용서한다는 것은 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지은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를 다시 나의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용서는 사랑의 한 표현이며, 서로간의 용서를 통해서 가정과 교회, 사회와 세상의 모습은 사랑 가득한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 될 것이다.

류충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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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며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그때마다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주님께 청합니다. 그와 동시에 이웃의 잘못도 용서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용서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용서 못한다", "무릎 꿇고 싹싹 빌기 전에는 용서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타인의 죄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주님의 은총 역시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형제의 죄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고 하십니다. 한 번도 용서하기 힘든데 끝없이 용서하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끝없이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매정한 종'(마태 18,23-35)에 비유해서 설명하십니다. 이야기 속 임금은 자신에게 1만 탈란트(현재 가치 수 백억 원)를 빚진 신하의 빚을 탕감해주고 그의 죄마저 용서합니다. 하지만 그 신하는 자기에게 몇 푼 안 되는 돈을 빚진 동료에게 "빚을 갚아라" 이야기하며 그를 감옥에 가둡니다.
 
한 잡지에 이런 재미난 질문이 실렸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지구에 살며 자연을 이용해 의식주를 해결하는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임대료를 받으면 얼마나 될까?"
임대료와 자연 사용료를 우리네 계산법으로 산출하면 약 3000조 원을 넘는 큰 액수가 나온다고 합니다. 정말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연 사용료 3000조 원을 청구하신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1만 탈란트를 빚진 신하가 되겠죠.
 
하지만 하느님은 비유 속 임금처럼 해마다 우리의 빚을 탕감해주시고 햇빛과 공기와 물 등 자연을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내려주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빚뿐 아니라 우리가 지은 죄마저 끊임없이 용서하십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수도 없이 잘못을 저질렀지만 하느님은 그때마다 우리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의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에게 빚진 이웃을 용서하기는커녕 무섭게 달려들어 단죄하려 듭니다. 비유 속 무자비한 신하는 알고 보면 '우리 자신'입니다.
 
사실 신부인 저 역시 용서하기 힘든 이들이 있습니다. 특히 해외에서 사목을 할 때 마음의 상처를 준 그야말로 원수 같은 사람이 몇 명 있습니다. 그 당시를 회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하지만 그들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면 또다시 용서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용서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그들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회개해서 예뻐졌거나, 그들을 미워한 제가 회개해서 그들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바로 제 자신을 위해서 용서합니다. 그들을 용서해야 제 죄도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있고 그들을 용서해야 제 마음이 편해지고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제가 하느님께 지은 큰 죄를 이미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앞으로 자신이 지을 죄를 하느님께 용서받기 위함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자신이 지을 죄를 어떻게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모든 이들을 용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이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용서합니다. 만일 제가 그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들도 앞으로 저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 세상의 이치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동안 수없이 용서 받았고 앞으로도 용서받을 일이 많을 것입니다. 주님 앞에 죄가 없는 사람은 이웃을 용서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 삶의 죄를 용서받아 마음의 평화를 누리려면,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이웃의 잘못을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합니다.(「예수님 따라 하기」 일부 발췌)

박용식 신부
  |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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