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가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60 71.6%
[전주] 용서만이 참된 치유의 길
조회수 | 1,935
작성일 | 05.09.10
요즘 복수극의 진수를 보여준다는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가 「올드보이」에 이어 꽤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여주인공 금자씨가 아이를 유괴해서 살인한 누명으로 13년간 옥살이를 하며 계획한 복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착하게 살던 누군가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용서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복수하는 길입니다.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를 선택합니다. 그녀의 삶의 목표는 이제 원수를 갚는 일이 되어버리고 금자씨는 은밀하고 잔인하게 계획한 복수를 해나갑니다.

사람들은 영화 속에 친절한 금자씨가 복수하는 모습을 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치밀하게 복수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서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서는 복수를 꿈꾸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까요?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이 쉽게 선택하는 것이 복수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고 결국은 자기 자신도 복수의 희생자가 되기 마련입니다.

두 남자가 사막을 걷다가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한 친구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른 친구의 뺨을 때렸습니다. 뺨을 맞은 친구는 말없이 모래 땅위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내 뺨을 때렸다』

두 사람은 오아시스가 나올 때 까지 말없이 걸었습니다. 오아시스에 도착하자 뺨을 맞은 친구가 서둘러서 물에 뛰어들었다가 그만 늪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뺨을 때린 친구가 손을 내밀어 그 친구를 구해주었습니다. 물에서 나온 친구는 이번에는 돌을 하나 구해서 그 위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나의 친구가 내 생명을 구해 주었다』

다른 친구가 왜 뺨을 맞았을 때에는 모래위에 그 사실을 쓰고, 물에서 구해 주었을 때에는 돌에다 새기느냐고 물었습니다.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괴롭혔을 때 우리는 모래에 그 일을 새겨야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지워버릴 수 있도록…. 그러나 누군가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하였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돌에 기록해야 해. 그래야 망각의 바람이 불어와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니까』

우리 속담에도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여서 은혜를 새기든 원수를 새기든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맞는 말인데 돌아보면 우리는 그것을 거꾸로 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받은 소중한 은혜는 물에 새겨 금방 잊어버리고 마음에서 버려야 할 원수는 돌에 새겨 두고두고 기억합니다.

은혜를 마음에 새기고 사는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은 은혜를 나누며 살기 때문에 삶을 기쁘게 꾸며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원수를 새기고 나면 그것은 마음의 상처가 되고 피해의식이 커져서 스스로를 괴롭게 하고 삶을 망가지게 만듭니다. 우리 자신이 상처 받고 쓰라림을 안고 원망하는 사람으로 머물 때, 자신뿐 아니라 나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공동체도 상처로 얼룩지고 우리의 삶은 천박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얼마만큼 용서해야하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한없이 용서해야한다』고 대답하십니다. 한 번의 용서도 어려운데 한없이 용서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버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의 길로 이끄시는 것은 용서만이 우리를 치유하는 참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잘못을 눈감아 준다거나 내가 받은 상처를 망각 속에 던져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용서는 우리 자신이 과거의 상처 속에 머물며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원망하며 망가져 가는 삶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즉 내가 받은 상처를 분명하게 의식하고 더 이상 내 스스로 그 상처의 피해자로 머물지 않겠다는 용감한 결단이며 해방선언입니다.
결국 우리는 용서함으로써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복수심과 미래의 불안으로부터 해방되고 치유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만이 참된 용서의 길을 갑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남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이며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은혜를 새기고 늘 감사하며 살아가는 은총의 삶이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

전주교구 김영수 신부
460 71.6%
[전주]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는데…구원 받고 싶으면 ‘용서’하라.

----------------------------------------------

다소 도발적인 제목으로 강론을 시작해봅니다.

<상처와 용서>라는 책에서
저자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살면서 죄짓지 않는 것’과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일들로 상처를 받고, 종종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기 어려워 속 앓이 하는 체험을 합니다. 죄짓지 않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
이 용서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풀지 못한 숙제처럼 과거의 상처와 고통을 현재 진행형의 문제로 부둥켜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반대로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라고 답하십니다. (또는 일흔 번씩 일곱 번) 세상에나, 일흔일곱 번이라니!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니! 한 번도 용서가 제대로 안되어 끙끙대는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그 일을 그렇게나 여러 번 하라니요.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 정도의 횟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알아듣지는 않습니다. 완전하고 충만한 수의 의미로 사용되어진 완전수 일곱을 두 번이나 연달아 사용한, 한계 없는 무한의 용서를 하라는 주님의 말씀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 속에서 비유 하나를 만납니다.
‘매정한 종의 비유’입니다.

‘조’ 단위의 빚진 종을 보면서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건만 ‘몇 백만 원’ 정도의 빚을 진 동료를 감옥에 가두는 옹졸함을 보이는 매정한 종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나요? 해피엔딩이 아닙니다.

‘이 악한 종아
내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는 주인의 꾸중과 함께 고문형리에게 넘겨집니다.

이 종의 모습은 누구의 모습일까요?

오늘 전례는
우리에게 용서와 자비에 대한 가르침을 줍니다. 자신은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자비롭지 않은 신앙인!! 주님을 닮고 그분 뜻에 일치하여 살아가는 모습은 분명 아닙니다.

미움으로 얻어진 것은
결코 오래가지 못하고 미움이나 분노를 통해서는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천양희’ 시인은 ‘사람의 일’이라는 시에서
사람 때문에 하루는 살 만하고 사람 때문에 하루는 막막하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하루를 사는 일이 사람의 일이고 사람과 만나는 일 그것 또한 사람의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그 ‘사람의 일’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합니다.

예수님은 왜
용서해 주기를 거절한 매정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셨을까요? 잘못을 용서해 주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시려 하심이 아닐까요?

----------------------------------------

전주교구 이동 아우구스티노 신부
2020년 9월 13일 ‘전주교구 주보’에서
  | 09.11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801   [수도회] 사랑하기  [3] 581
800   [원주] 최고의 계명 ‘사랑’  [2] 710
799   [부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5] 2936
798   [청주]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습니다.  [1] 703
797   [전주] 주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을  [2] 94
796   [의정부] 법대로가 아닌 사랑으로  [2] 2349
795   [인천] 반성문 -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6] 2705
794   [수원] 하느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  [4] 2471
793   [서울] 가장 큰 계명  [7] 3491
792   [군종]서로 사랑하여라.  [1] 565
791   [대구] 사랑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라  [2] 2230
790   [안동] 애주애인(愛主愛人)  [3] 2611
789   [광주] 사랑의 계명  [2] 738
788   [대전] 이웃 사랑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  [2] 2863
787   [마산] 가장 큰 계명 - 참사랑  [2] 2699
786   [춘천] 이웃 사랑  [4] 2711
785   (녹) 연중 제30주일 독서와 복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5] 2260
784   [수도회] 신앙의 핵심은 오직 예수님  2074
783   [전주]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2139
782   [청주] 내 생명, 내 재산, 내 모든 것의 주인은 하느님  1273
781   [대구] 하느님께 바쳐야 할 몫은 내 안에서부터!  [1] 2263
780   [춘천]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1] 2228
779   [원주] 거지신앙과 순교신앙  1030
778   [수원]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로”  [1] 2156
777   [군종] ‘너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1114
776   [대전] 지금은 놀부시대  1184
775   [서울] 하느님께 바쳐야 할 ‘세금’  [1] 2154
774   [의정부] 하늘가는 길  1204
773   [안동] 하느님 것은 하느님께  [1] 2158
772   [부산]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2] 2396
771   [마산]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1100
770   (녹) 연중 제29주일 독서와 복음 (카이사르의 것은, 하느님의 것은---)  [2] 1941
769   [청주] 하느님 나라의 드레스 코드  [1] 115
768   [수원] 혼인잔치의 비유  [6] 3578
767   [수도회] '예수 그리스도'란 새 예복  [3] 2740
766   [서울]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  [8] 3092
765   [인천] 하느님 나라의 예복  [4] 2544
764   [대전] 초대 받은자의 예복은?  [3] 2915
763   [전주] 구원의 잔치에 초대합니다.  [3] 2538
762   [의정부] 예복은 미리 준비해야 필요할 때 입을 수 있습니다  [3] 2686
1 [2][3][4][5][6][7][8][9][10]..[21]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20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