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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악한 소작인들의 비유
조회수 | 2,308
작성일 | 05.10.01
오늘의 전례는 ‘포도밭’의 전경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포도밭’은 하느님께서 결실을 풍성히 맺을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로 보살펴주시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고 있다(호세 10,1; 예레 2,21; 5,10; 6,9; 12,10; 에제 15,1-8; 17,3-10). 이 ‘포도밭’이라는 상징적 개념은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에 맺어지는 ‘혼인’의 상징적 개념과도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제1독서: 이사 5,1-7: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다

그런데 제1독서에서는 상처받은 하느님의 사랑이 감동적으로 읊어지고 있다. 우선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각별한 배려를 묘사하고 있다(1-2절). 최고의 수확을 거두기 위해 배려하고, 아주 질이 좋은 포도나무들만 심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들포도가 웬말인가?”(2절). 이것은 이제 하느님의 분노가 ‘심판’의 형태로 나타내시고 있다(3-6절). 비유가 이런 의미이지만, 이사야는 야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기대하셨던 ‘결실’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말한다.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말인가?”(7절). 즉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이 표현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불의를 행하여 그 포도밭이 좋은 포도를 내지 못하고 ‘들포도’를 즉 ‘불의’를 내고 말았음을 개탄하는 것이다.

복음: 마태 21,33-43: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이 ‘포도밭의 노래’의 내용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거듭 강조하신다. 마태오는 이스라엘을 주님의 ‘포도밭’이라는 문학형식으로 구원의 역사의 어떤 단계를 서술하고 있다. 소작인들이 죽여버린 ‘종들’은 예언자들이다. 거기에다가 주인의 아들 즉 하느님의 아들까지 죽여서 포도원 밖에 내버린다. 이 아들을 죽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상속자가 없이 지주가 죽었을 때에는 그 땅은 먼저 점유하고 있는 사람의 소유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여간에 이 때문에 예수께서는 탄식하신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너는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에게 보낸 이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으려 했던가. 그러나 너는 응하지 않았다”(마태 23,27).

여기서 주인의 가장 사랑이 충만한 극적인 구세사의 마지막 여정은 상속권을 갖고있는 당신의 ‘외아들’의 파견이다. 아버지께서는 끝까지 구원을 위해 애쓰신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여버렸던 것이다”(39절). 그래서 모든 것이 헛되이 되고 만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예고로, 그 죽음이 도시의 성 밖에서 이루어지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도 당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히브 13,12). 예수께서는 이렇게 되었을 때 그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듣는 사람들이 이 극적인 사건과 연루되게 하신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과는 무관한 사건으로 생각하면서 “그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제 때에 도조를 바칠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41절)라고 대답한다.

이제 이 구원의 역사는 그리스도 자신을 통해, 그리고 불충실한 이스라엘 대신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말은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42절)라는 시편 118,22-23을 인용하시어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중심에 당신이 계심을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의 계획을 무시하시며, 집짓는 데에 쓸모 없는 돌로서 ‘버려진’ 그리스도를 당신의 새로운 구원의 건축에 쓰일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으신다. 이것으로 그리스도의 죽음 뿐 아니라, 부활의 승리를 예고하며 구원의 역사가 십자가를 통해 여정을 계속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원의 역사는 교회라는 새로운 구원의 공동체를 통하여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잘 들어라.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길 것이며 도조를 잘 내는 백성들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43절). 즉 “회개했다는 증거를 보일”(마태 3,8) 능력을 상실한 옛 계약의 ‘백성’ 대신에 풍성한 결실을 맺을 하느님의 새 ‘백성’이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중단될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도한 교회를 통하여 계속 전진한다. 악한 소작인들은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아들’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시고 그 포도원을 되찾으셔서 새 소작인들에게 주신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실이 하느님의 위대한 승리로 되고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본질적 특성은 행동하는 데 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정통교리는 불충실한 이스라엘과 다를 것이 없다. 하느님의 나라는 올바른 실천적 행위 속에 현존한다... 주님의 교회의 본체에 대한 믿음은 행동적 증거를 떠나 존재할 수 없다...교회 공동체 안에 계시된 구원의 은총은 새로운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풍성한 믿음의 결실을 내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기를 요구한다”(G. Barbaglio, I Vangeli, Assisi 1975, p. 472).

제2독서: 필립 4,6-9: 배운 것, 들은 것, 본 것을 실행하시오

바오로 사도께서도 이 믿음의 ‘행동적’ 차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신자들은 ‘본성적으로’ 진실된 것, 올바른 것, 고상한 것들을 실행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들을 평가할 수 있는 사고능력을 가져야 하며, 이는 ‘기도’로부터 얻을 수 있다(6-7절).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행동적’ 신앙은 금욕주의 사상이나 순전히 인간주의적 사상이나 순전한 실천주의적 사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세상의 구원을 위한 행동적 신앙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수많은 형제들과 더불어 인간 공동생활의 삶의 공통적인 가치와 요구를 실현시켜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면서 이 구원의 사업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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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과 용심

형제들이 있는 집안은 대개 그렇듯이 형이나 언니가 입던 옷이나 학용품 장난감을
동생이 물려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려 입고 물려받는 것이 어른의 눈으로 보면
경제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어린아이의 눈에는 불공정하고 때론 서러운
감정이 들기까지 할 때가 있습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똑같이 어여쁜 자녀이지만
동생들은 좋은 것이 있으면 자신은 다음 차례라는 것이 못내 서럽기도 합니다.

저 역시 막내입니다. 형님으로부터 옷이며 장난감을 다 물려받았지요. 그래서 인지
형이 더 많은 것을 가졌다는 생각 때문에 형이 미웠고 심술을 부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순 우리말로 용심이라고 합니다. 물론 지금은 형에게 용심을 품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면 나도 모르게
용심이 들곤 합니다. 그리고 이 용심은 결국 인간의 내적 평화를 깨트리는 ‘죄’를
낳습니다. 종교인의 일생 과제는 수심(修心)과 또 다른 의미의 용심(用心)을
갖추는 것입니다. 수심이란 마음을 바로 닦는 것이요, 용심(用心)은 마음을 바로
쓰는 것입니다.

욕심이 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수심과 용심(用心)입니다.
그리고 그런 수행을 위해 선행될 조건이 바로 ‘버리기’입니다. 더 좋은 것을 갖고,
더 많은 칭찬과 더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이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는
우리의 오그라든 손을 펼 때 용심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떠날 것입니다. 모든
인간적인 부러움(용심)을 놓아버리고 모욕과 고통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던
그리스도의 수심과 용심(用心)이 부럽습니다.

최영균 신부
  |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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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기름진 포도밭에 땅을 일구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고 가꾸었는데, 왜 결국은 들포도를 맺었을까요? 왜 포도밭 소작인들은 주인이 맡겨놓은 포도밭을 신의를 가지고 돌보려하지 않고, 종들을 죽이고 주인의 아들마저 살해하게 되었을까요? 설레고 기쁜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면 하기 싫은 업무가 되고, 마지못해서 해야 하는 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일 안에서 기쁨을 찾아내지 못하고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고 지겨운 마음만 더해가다 보면, 마침내 너무나 싫은 굴레가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과의 관계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과 맺은 계약인 신의와 사랑의 관계는 애써 가꾸고 돌보아야 하는 ‘수고’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중한 관계를 돌보기는커녕 싫은 짐처럼 함부로 여기기 시작하면, 마음이 무디어지고, 그래서 점점 더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사랑에 무각감 해지고, 당연한 것으로만 여기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하느님마저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인간의 자아가 온통 주인이 되기 시작합니다.

신앙이 마지못해 지켜야 하는 ‘짐’밖에 못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든 것은 결국 나 자신이겠지요? 지겹고 마지못해서하는 포도밭에서의 일을 누가 하고 싶겠습니까? 기쁨과 설렘, 풍요로움이 가득한 포도밭에서 일하고 싶은 것은 누구나 원하는 바입니다. 그러려면, 더는 나 자신만을 중심으로 여기는 그 삶의 반복에서 나와야겠지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참 기쁨과 평화가 나를 충만케 해주는 저 아름다운 포도밭으로 내 마음이 옮겨 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포도원 주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했던 이들은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까지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하느님을 향한 그 거룩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물론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사랑과 자비가 가득하신하느님이시지만, 그러나 내 마음을 신앙 안에서 잘 가꾸어 가고자 원한다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진정 잃지 않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심을 절대 잊지 않고 살아야만 할 것입니다.그분에 대한 그 놀라운 경외심을 매일 매일 새롭게 하는 삶을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수원교구 김영삼 요셉 신부 - 2017년 10월 8일
  |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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