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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하느님 사랑 감사하고 나누자
조회수 | 2,088
작성일 | 05.10.01
우리 본당에는 ‘막달레나 기도방’이라는 작은 기도방이 있습니다. 이 기도방에는 70평생을 사시다가 늦게서야 하느님을 사랑하게된 막달레나 할머니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할머니는 지난봄에 위암선고를 받고 큰 수술을 하게 되셨습니다. 수술을 앞두고 병문안을 갔을 때 할머니는 제 손을 잡고 말씀 하셨습니다.

“제가 이 나이까지 사는 동안 제일 큰 기쁨은 하느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신분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성당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오순도순 사랑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큰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것을 다 베풀어 주셔서 지금껏 건강하게 살았으니 이제 모든 것을 다시 하느님께 바치고 가고 싶습니다”하시며 통장 두 개를 꺼내 놓으셨습니다.

한 통장에는 돈 500만원이 들어있었고, 또 한 통장은 전세금 700만원을 찾은 돈이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홀로되셔서 사시는 동안 아끼고 모은 할머니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할머니의 통장은 할머니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막달레나 할머니는 이제 그것을 하느님께 모두 바친 것입니다. 나는 할머니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 소중한 봉헌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상의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기도의 집을 짓기로 결정했습니다. 할머니를 위해 반은 남겨두고 나머지 반으로 본당의 빈방에 기도실을 꾸몄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정성을 함께 모아 아름다운 기도방이 완성되었습니다. 수술을 무사히 마치신 할머니를 모시고 기도방을 축복하는 날 할머니는 “하느님이 아니시라면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저 하느님께 감사합니다”하시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단칸 전세방을 떠나 양로원으로 기쁘게 가셨습니다. 막달레나 기도방에는 지금도 새벽부터 한 밤중까지 막달레나 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왔을 때 빈손으로 왔으며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빈손으로 가야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래 비었던 손을 가득 채우는 데에만 급급해 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우리네 인생의 목표가 그렇게 채우는 일로 가득 찬다면, 한없이 내 것을 늘려 나가기 위해 닥치는 대로 움켜쥐고 사는 것이 인생이 되어버린다면 우리의 삶은 추루해집니다.

붙잡고자 하지만 잡히지 않을 때 괴로움은 우리 앞을 큰 힘으로 가로막게 될 것입니다. ‘내것’이라고 움켜잡고 있던 것을 잃어버릴 때 우리의 삶은 괴로움과 전쟁이라도 벌이는 듯 소란스러워집니다. 세상을 내가 소유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내 만족의 수단으로 여기고, 인생을 내 욕망을 채우는 시간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들은 인생의 땅위에 넘어집니다.

사랑이 아닌 소유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자기 스스로도 외로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넘어지게 합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심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밑 빠진 독처럼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탐욕의 진창에 빠지게 합니다. 더 잘되어야 한다는 욕망은 오로지 자신의 보양과 행운에 인생을 탕진하게 합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는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전해주시는 복음입니다.

복된 삶이란 하느님의 것을 내것으로 차지하려고 발버둥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에 감사하며 나누지 못하고 움켜쥐려고 아우성치는 삶으로부터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하느님께서 내 안에 심으신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삶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드려야 몫을 그분에게 드리는 일이 정의며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결실을 맺는 것이 공평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삶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가되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세상을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 헛된 걱정을 하지 않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하느님께 필요한 것을 아뢰는 사람은 인간에게 헤아릴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삶을 감사하며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되 하느님의 몫을 하느님께 드릴 줄 알고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삶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김영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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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까지,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사랑과 믿음의 하느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포도원 주인은 많은 돈을 들여 포도원을 만들었다. 그는 포도즙을 짜는 확을 만들고 망대를 세우는 등 모든 설비를 구비하여 누구나 쉽게 포도원을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포도원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멀리 떠났다. 그 후 포도 수확기가 돌아오자, 포도원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종을 보내어 도지를 받아오도록 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도지를 주지 않기 위해서 종들을 붙잡아 때려주고, 죽이고, 돌로 쳐 죽였다. 주인은 소작인을 철썩 같이 믿고 계속하여 종들을 보내어 도지를 받으려 했지만, 소작인들은 도지를 바치지 않으려고 계속하여 종들을 죽였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어 소작인들에게 도지를 받으려 했지만, 이미 욕심으로 가득한 소작인들은 도지를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포도원을 송두리째 빼앗기 위해서 아들까지도 죽이고 말았다. 소작인들을 믿었던 주인의 믿음은 배신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비유의 결론을 내리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답하기를 주인이 돌아와 그 악한 소작인들을 모조리 벌하고, 다른 이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이라고 말한다.

이 비유를 듣고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세상에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세상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재물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친척이나 형제자매, 심지어 부모나 자식까지도 죽이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재물에 눈이 멀면 부모나 자식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눈이 뒤집혀지고 눈에 콩깍지가 씌워지면 사람의 이성도, 판단력이나 분별력까지도 온통 마비되어 버린다. 사람이 탐욕의 노예가 되면 주변 사람들의 아우성이나 원성도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러한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사람은 그렇다.

소작인들은 처음에 주인을 대단히 고마워했다. 자신들을 그처럼 신임해주는 주인은 은인이라고 생각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신들을 소작인으로 불러주었을 뿐만 아니라, 포도원에 모든 설비를 완비해놓고 자신들은 관리만 하면 되었으니, 돈이 들어갈 것도 없다. 정말 이처럼 고마운 주인이 어디에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들은 주인의 고마움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열심히 포도원을 관리했고, 드디어 많은 포도를 수확했다. 그때까지 그들은 주인에게 소작료를 충분히 드리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포도를 수확하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필요한 것들이 너무나 많았을 것이다.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해야 하고, 어쩌면 부모를 봉양하기도 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주인에게 바쳐야 할 몫까지도 자신들이 다 써버렸는지 모른다. 그렇게 된 후에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진다.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시작한다. 주인은 부자이며 자신들은 가난한 사람이고, 주인은 포도가 아니라도 먹고 살기 충분한 재력이 있지만 자신들은 그렇지 못하고, 어쩌면 주인이 포도가 아직 수확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잊어버릴 수도 있고… 등등의 생각을 하게 된다.

생각이 달라지면 세상이 달라진다. 이제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이 정성을 드린 그 만큼 포도가 많이 열렸고, 그렇게 열린 포도는 자신들의 수고와 정성의 산물이며, 주인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까지도 하게 된다. 자신들의 수고와 정성의 대가를 주인에게 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생각까지도 하게 된다. 더욱이 주인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가? 그런데 주인이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주인의 종들이 와서 도조를 달라고 했을 때, 그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려주고, 죽이고, 심지어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였다. 사실, 그들은 종들에게 사정해야 마땅했다. 자신들이 너무 가난하고, 너무 필요해서 소작료를 바칠 것까지 다 써버렸노라고, 정말 죄송하고 잘못되었노라고 사정하면서 주인에게 자신들의 불쌍함을 여쭈어달라고 부탁해야 마땅했다. 그러면 주인은 너그러이 용서했을 수도 있다. 그들을 위해 포도원 설비를 완벽하게 할 만큼 그들을 배려하는 주인이었기 때문에, 주인은 그들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불쌍히 여겨 몇 년 동안 소작료를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한 번 생각이 달라진 그들은 정반대의 길을 걸어간다. 주인이 보낸 종을 처음에는 때리다가, 다음에는 죽이고, 그 다음에는 우상 숭배자를 처형하는 것처럼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그들이 얼마나 더 간악해져 갔는가? 시작은 미미하지만 그 끝은 창대하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 작은 죄가 걷잡을 수 없이 큰 죄가 된다.

그렇게 소작인들이 종들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소작인들에 대한 주인의 믿음은 변함이 없었다. 혹시 종들이 길을 가던 중에 사고가 나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종들이 소작인들에게 혹시 행패를 부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주인은 더 많은 종들을 다시 보냈다. 길을 가다가 변을 당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종들을 보냈고, 소작인들에게 행패를 부리지 못하도록 서로 감시하라고 더 많은 종을 보냈다. 주인은 그처럼 믿음이 깊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주인이 다시 종들을 보냈다는 것은 주인에게 용서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용서하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다시 종들을 보낼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소작인들은 주인이 그만큼 자신들을 믿어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인의 마음을 헤아려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소작인들은 전에 종들에게 했던 것처럼 다시 종들을 죽였다. 이미 탐욕에 눈이 멀고 눈이 뒤집힌 그들에게는 주인의 깊은 배려와 신뢰까지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돌같이 굳어진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주인은 그들의 변심을 알아채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처럼 간악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를 보내도 죽여 없앨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려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주인은 그들이 종들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죽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작인들이 자신의 아들은 알아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들을 보냈다.

세상에! 어찌 그럴 수가!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고 우매할 수가 있는가!

정말 땅을 치고 통곡할 정도로 어리석은 주인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우매한 주인이므로 종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들까지도 죽임을 당하도록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을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비유란 점을 생각해야 한다. 주인이 그처럼 어리석고 무지몽매한 까닭은 주인 역시 눈이 멀었고 뒤집혀 있기 때문이다. 주인은 믿음에 눈이 멀었다. 사랑에 눈이 뒤집혀져 있었다. 그랬기에 소작인들이 자신의 모든 종들을 죽여 없애도 그렇지 않다고 믿을 만큼 주인은 그들을 믿고 사랑했던 것이다. 주인의 지극한 믿음과 사랑은 자신의 소중한 아들까지도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소작인들은 주인의 아들을 보자 그가 상속자이므로 자신들이 포도원을 가로채기 위해서 아들을 죽이면 된다고 생각하고, 아들을 죽여 버렸다. 그들에게는 이성도, 판단력이나 분별력은 고사하고 손톱만큼의 양심의 가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주인에게 그처럼 고마워하던 소작인들이 그렇게 악한 사람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그렇다. 사람은 그처럼 믿을 수가 없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신을 당하는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지 않는가! 사랑에 배신당하고, 재물에 배신당하고, 사람은 그렇게 변하고, 배신할 수밖에 없는 간악한 존재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그 점을 가르쳐주고자 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을 믿지 말라고, 사람은 상황이 변하면 그처럼 변절하는 것이 사람이라고, 역으로 악한 사람도 상황이 변하면 선한 사람이 된다고, 사람은 그처럼 변하는 존재라는 점을 가르쳐주고자 하신다.

역으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가르쳐주신다. 사람이 그처럼 배반하고 변절해도 끝까지 믿어주시고, 참아주시고, 견디어주시면서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심을 가르쳐주신다. 하느님의 믿음과 사랑은 끝이 없으며 영원하시다는 점을 가르쳐주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결론을 내리지 않으셨다. 사람들에게 “그렇게 했으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고 사람들이 결론을 내리도록 하셨다.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와 믿음과 용서가 끝이 없는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들을 벌하신다는 결론을 예수님께서 맺으실 수 없었던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결론을 맺지 않으심으로써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용서가 끝없음을 알려주고자 하신 것이다. 과연 우리가 그 사랑과 자비, 용서와 믿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 날까지, 그래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때까지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와 용서로 기다리신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끝까지 참고 견디시면서 우리를 믿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자신을 알자. 우리가 얼마나 간악하게 변할 수 있는 존재인가를 알자! 그래서 결코 자신을 믿지 말자! 그리고 사랑과 자비와 믿음으로 우리를 기다리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믿자. 당신의 소중한 외아들까지 죽여도 마지막 날까지 기다리시는 하느님,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을 때까지 끝까지 - 영원히 - 참고 기다리시는 자비와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자.

경규봉 신부
  |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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