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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그리스도인의 기쁨
조회수 | 2,232
작성일 | 05.10.01
3년간의 공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여러모로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도전을 받습니다. 율법의 핵심이 무엇인지 물어보고(마태 22,34-40), 예수님의 정치적인 성향을 은근히 떠보고(22,15-22), 부활에 대해 질문하고(22,23- 33), 예수님이 자신만만한 이유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습니다(22,41-46). 모두 예수님을 옭아매기 위한 전술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았으니 그들의 잔재주는 일단 성공을 거두는 듯합니다. 그러나 부활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마태 21,33-43)은 그런 과정에서 예수님이 하신 우화(寓話) 한 가지입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들도 많고 농부들에게 소작을 준 것을 보면 상당한 부자였던 모양입니다. 수확철이 되자 주인은 '열매'(소작료)를 받으려고 종들을 여러 차례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어찌된 심산인지 종들을 때리고, 죽이고, 돌로 쳤습니다. 그러더니 급기야 마지막으로 보낸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던져 죽였습니다"(39절). 주인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인의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그 못된 농부들을 가차없이 쫓아내고 포도원 소작을 다른 농부들에게 주기로 작정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깟 소작료가 아깝다고 종들을, 그것도 주인의 아들까지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리고 아들을 죽였다고 해서 순순히 주인의 유산이 농부들의 손에 들어올 수 있을까요? 이해가 안 되는 일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멀리 떼어놓지 말고 우리 몸에 딱 붙이면 그 뜻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선 주인은 하느님이고 종들은 예로부터 하느님이 보냈던 예언자들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언자를 박해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결국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아들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 밖(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그 험한 꼴을 보신 하느님은 이제 유다인에게 베풀었던 은혜를 거두시어 이방인으로 구성된 그리스도교회를 돌보실 것입니다. 이처럼 속 뜻 하나 하나를 현실과 대입할 수 있게 만든 이야기를 우화라고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포도원 주인에, 유다 백성을 일꾼에 견주어 유다 백성의 무능함을 꾸짖습니다. 오늘의 복음과 짜 맞추기라도 한 듯이 들어맞는 내용입니다. 분노하신 하느님은 결국 포도밭에 저주를 내릴 것입니다. 유다 백성이 하느님의  정의를 외면했기 때문입니다(이사 5,1-7). 바오로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라고 합니다. 더불어 순결한 마음을 품고 올바른 행동을 하라고 부탁합니다. 필립비 교회는 바오로의 맘에 쏙 드는 교회였습니다. 올바른 신앙 생활과 품위를 갖춘 교우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바오로는 하느님이 언제나 함께하시리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필립 4,6-9).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언제나 눈동자처럼 지켜 주십니다. 그 생각만으로도 우리 마음에는 기쁨이 넘칩니다. 바오로의 편지에서 우리는 그런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은 '포도원 소작인들의 우화'로 연장됩니다. 이 우화는 우리 처지를, 스스로를 점검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우리는 당당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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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배은망덕과 하느님의 인내

어떤 어머니가 어린 아들에게 심부름 시킬 때마다 돈 백 원씩을 주었습니다. 수고비 덕분에 아이는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는 어린 아이가 너무 돈 맛을 들일까 염려 되어서 한동안 심부름을 시키고도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아들은 어머니에게 쪽지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거기에는 그 동안에 한 심부름 내역과 수고비를 합산한 것이 적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서 잠시 후에 역시 쪽지 하나를 주었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열 달 동안 너를 내 뱃속에서 기르고 낳느라고 고생한 수고비, 너를 키우면서 젖먹이고, 기저귀 갈아 준 수고비, 네가 아팠을 때 밤잠 못자고 마음 졸이고 간호해 준 수고비, 그것이 얼마나 될까?’

인간은 너무도 자주 자신이 받은 은덕을 잊어버립니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도 하느님이 베풀어 주신 많은 은혜를 잊고 불충과 배반을 거듭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저지른 배은망덕을 일깨워 주고자 하십니다. 포도원은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즐겨 가리키는 상징이며,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을 지칭합니다(제1독서). 하느님은 온갖 정성을 들여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포도원을 가꾸셨습니다. 그리고 포도원을 소작인들에게 임대하셨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 즉 이 비유를 듣는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같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주인의 명령으로 도조를 받으러간 종들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보내셨던 예언자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당신 백성의 크나큰 불충에 대해 다시 한 번 크나큰 인내로 대하십니다. 하나뿐인 당신 아들을 그들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하지만 비유에 나타난 소작인들은 주인의 외아들마저 죽여 버리고, 그 결과로 도조를 제때에 바칠 충직한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빼앗기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당신을 배척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악한 소작인들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것을 경고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결국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선택하고 돌보시는 하느님을 거듭 배반하다가 마침내 그분의 외아들마저 배척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 활동을 중단하지 않고 지속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내친 당신의 외아들을 부활시켜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머릿돌로 삼으신 것입니다. 교회는 과거의 이스라엘처럼 배은망덕한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은총의 하느님께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제2독서), 그분께 대한 굳건한 신뢰를 갖고 간구하면서 그분의 평화 속에 머무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손희송 베네딕토 신부
  |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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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부르는 욕심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는 끔찍한 폭력과 죽음이 이어집니다. 포도밭 임자가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소작인들로부터 소출을 받기 위해 종들을 보냅니다. 소작인들은 소출을 내기는커녕 종들을 붙잡아 매질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에 주인은 더 많은 종들을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합니다. 주인은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아들을 보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포도밭을 차지하기 위해, 상속자인 아들마저 죽입니다.

비유에서 포도밭을 차지하려는 소작인들의 욕심은 주인의 종들과 아들을 죽이게 합니다. 욕심이 죽음을 불러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에게도 소작인들의 욕심이 있었습니다. 뱀의 유혹에 빠져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게 된 것도 그들의 욕심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영원히 살 수 있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그들에게 죽음이 찾아옵니다. 하느님처럼 되고자 했던 그들의 욕심이 인류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하고 죽음의 운명에 처하게 합니다.

창세기에 이어 나오는 카인의 이야기도 욕심이 불러온 비극입니다. 자신의 제물은 외면당하고 동생 아벨의 제물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지자, 카인은 아벨을 죽입니다. 카인의 시기와 욕심이 죽음을 불렀습니다. 아담과 하와, 그리고 카인의 이야기는 인간이 지닌 욕심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인류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그들의 피가 우리에게도 흐릅니다.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면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을 배반하게 되고, 카인처럼 자신의 가장 가까운 혈육마저도 죽이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비유에 나오는 포도밭을 내가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 묵상해 봅니다. 많은 사람이 나의 포도밭에, 곧 나의 삶 안에 들어옵니다. 피로 맺어진 가족, 가까운 이웃, 성당의 형제자매, 직장 동료, 그리고 내가 발길을 옮기는 삶의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빌리자면, 주인이 포도밭에 보낸 사람들입니다. 주인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시고, 종들은 하느님께서 나의 삶의 터전에 보낸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포도밭 소작인들처럼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들을 폭력과 죽음으로 맞아들이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삶의 포도밭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환대하기보다는 그들을 배척하기도 합니다. 때때로 그들을 사랑하기보다 미워하고, 칭찬하기보다 헐뜯고, 인정하기보다 시기하고, 자랑으로 삼기보다 무시하기도 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거절하고 내치는 많은 경우는 나 자신만의 포도밭을 차지하려는 욕심과 욕망에 사로잡힐 때입니다. 그리하여 포도밭에 침범하는 사람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무장된 욕망의 칼을 휘둘러 상처를 입히고, 또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죽음과 같은 상황으로 몰고 갑니다.

비유에서처럼 하느님께서는 나의 삶의 포도밭에 당신의 종들과 아들을 보내십니다. 소작인들은 포도밭을 자신들이 차지하려는 욕심에 눈이 멀어, 포도밭을 찾아온 이들을 죽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나의 삶을 나 자신의 사리사욕으로 채우려 하면, 나의 삶의 터전에서 만나는 이들을 해치게 됩니다. 내 인생의 터전에 찾아오는 이들을 나의 욕심에 사로잡혀 배척하면 나의 삶이 처참해지지만,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으로 환대하여 맞아들이면 나의 삶이 구원으로 이끌어집니다.

김영춘 베드로 신부
  |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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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열매

흔히 인생을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표현합니다.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좀 다릅니다. 빈손이 아니라 풍요로운 결실을 맺어 하느님께 드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특히 신앙인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사망했다는 말보다는 '돌아가셨다'는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하는데 이는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할 뿐 아니라 풍요로운 결실을 맺어야 할 의무도 함께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하며 더불어 풍요로운 결실을 내는 삶을 추구해야 함을 배은망덕한 소작인과 성실한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2독서 필리피서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감사드리는 사람에게는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내릴 것이라고 전하고 있지요. 감사는 신앙의 기초입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살게 하신 창조주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부족하지만 성실한 삶으로 응답해야 함을 망각하고 배은망덕하기만 한다면 오늘 제1독서와 복음에서 엄벌을 받은 소작인들과 같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주보를 보면 감사헌금 난을 눈여겨봅니다. 감사가 신앙의 기초가 되고 감사하는 신자가 성당의 기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몇 달간 감사헌금 난을 유심히 보면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나왔던 이름이 또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감사하는 사람이 또 다시 감사한다는 것이지요. 감사드리는 사람은 감사를 드릴수록 하느님의 더 큰 은총을 체험하기 때문에 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사하면 자꾸 감사할 일이 생기는 법이지요.
 
그런데 감사드릴 줄 모르는 사람은 그 어떤 것을 받아도 감사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서 일이 잘 되고나면 자기 스스로가 잘 해서 그리 됐다고 더 교만해지고 점점 더 하느님을 몰라보는 어리석음에 빠지고 맙니다. 감사할 줄 모르면 교만하게 되고, 교만이 쌓이면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의 핵심입니다.
 
서대문구 충정로에 '종근당'이라는 제약회사가 있습니다. 이 회사는 이름도 '종근당'일뿐 아니라 상징물도 종(鍾)입니다. 옛날 서대문 영천 시장에는 콩나물 장수 아주머니들이 많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신앙심 깊은 한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새벽마다 콩나물 통을 머리에 이고 시장에 나가는 길에 꼭 교회에 들러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하느님, 아들들을 축복하시고 가정이 복되게 하옵소서. 오늘 하루도 이 콩나물 장사가 잘 되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며 아들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시켰는데, 그 아들 중 하나가 큰 제약회사 사장이 됐습니다. 사장이 된 아들은 자기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옛날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를 상징하는 종을 자기 회사의 상징물로 정하고 회사 이름도 종근당으로 한 것입니다. 종근당은 그의 어머니가 거둔 새벽기도의 결실이었습니다. ('새벽기도를 상징하는 종', 「좋은 글」 중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에 대한 감사의 결실은 '나누는 마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열매를 맺는 길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정성껏 봉헌하고, 진심으로 이웃과 나누는 생활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25장에는 최후의 심판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최후의 심판장에는 빛나는 열매가 딱 하나 있다고 합니다. 오로지 그 열매만이 빛난다고 하는데 그것은 살아 있는 동안 가난한 이웃에게 얼마나 베풀었는가, 즉 나눔의 생활을 얼마나 실천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감사하는 삶, 나누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소출을 내지 못하는 배은망덕한 소작인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기양 신부
  |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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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 조그만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우거진 야자수와 맑은 샘물이 있어서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좋은 쉼터가 되었습니다. 노인은 야자수 그늘에서 목마른 나그네들에게 시원한 샘물을 떠주는 것으로 기쁨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그네들이 물을 마시고 나서 몇 푼의 동전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극구 사양을 했지만, 동전이 쌓여가면서 욕심이 생겨 나중에는 동전을 안 주는 사람들에게는 당당하게 동전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물을 더 많이 나오게 해 더 많은 사람에게 제공하고 더많은 돈을 벌기 위해 샘터를 최신 시설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샘물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주변의 야자수가 샘물을 빨아들인다고 생각하고 야자수를 모두 베어버렸습니다. 얼마 후에 야자수 그늘도 없어졌고 샘물은 말라 버렸습니다. 노인은 뜨거운 햇볕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욕심이 화를 부른 결과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이러한 욕심이 나옵니다. 주인은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우는 등 포도 수확을 잘할 수 있는 모든 시설을 다 갖추고는 소작인들에게 기꺼이 내주었습니다. 이제 추수 때가 되어 소출을 받아오라고 종들을 보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주인이 멀리 있어 못 돌아올 줄 알고 그 밭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종들을 매질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주인은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한 가닥 희망을 품고 마지막으로 종이 아니라 자신의 소중한 외아들을 보냅니다. 하지만 소작인들은 그 아들마저 잡아 죽입니다. 주인의 아들을 죽여야 자신들이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소작인들은 자신이 주인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일구는 포도밭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욕심이 화를 부른 결과입니다.주님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못된 소작인의 모습과 위의 예화인 욕심 많은 노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준비하셨고, 이를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실상 나에게 주어진 것들, 가족, 재산, 친구, 지금의 모습 등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것들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에게 없는 것들만 생각하기에 불평과 불만을 지니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서양 속담에 “행복은 언제나 감사의 문으로 들어오고, 불평의 문으로 나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듯이 감사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감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주신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불평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금 주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것을 생각해 보고 감사의 기도를 바쳐야 하겠습니다.

고준석 신부
  |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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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에 북한산엘 다녀왔습니다. 신설동에서 북한산까지 가는 경전철이 개통되어서 편하게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산행은 도선사, 백운대, 대동문, 보국문, 정릉까지 5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도선사에서 인수봉까지는 계속 오르막이라 힘이 들었지만 백운대부터는 능선이라 조금 여유가 있었습니다. 산행은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좋은 경치를 볼 수 있습니다. 늦게 오는 동료들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30분 정도 산행을 하면 잠시 쉬는 것도 필요합니다. 산행을 위해서는 약간의 물과 간식도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소에 꾸준한 운동으로 체력을 유지해야 합니다. 가을입니다. 가까운 곳으로 산행을 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예전에 ‘건강한 남자와 부실한 남자’라는 텔레비전 프로를 본 적이 있습니다. 건강한 남자는 평소에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술자리에서도 적당히 먹다가 들어옵니다. 자신의 교양을 위해서 서점에 자주가고, 책도 즐겨 읽습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계획을 세우고,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최선을 다합니다. 미래를 위해서 수입의 일부분은 적금을 들고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운동을 꾸준히 합니다. 하루의 일과를 기록하면서 잘된 것은 마음에 새기고, 잘못된 점들은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부실한 남자는 늘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삽니다. 술자리는 끝까지 지키며 3차까지 가려고 합니다. 집에 들어오면 컴퓨터 게임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속이 좋지 않은데도 입에 좋은 라면을 즐겨 먹습니다. 취직을 해도 오래 가지 못합니다. 지각을 자주하기 때문입니다. 돈은 있는 대로 다 쓰기 때문에 늘 형편이 어렵습니다. 운동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평소에 건강했던 부실한 남자는 몸도 마음도 약해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건강한 신앙과 부실한 신앙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건강한 신앙은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우리의 소망을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는 것입니다. 교회로부터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바를 명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는 것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부실한 신앙은 말과 행동이 다른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 때문에 마음이 밝지 못하고,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가득해서 남의 행복과 성공을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짓말과 이간질을 자주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부실한 신앙의 뿌리를 ‘칠죄종’이라고 하였습니다. “교만, 인색, 시기, 분노, 음욕, 탐욕, 나태”입니다. 이런 것들에 물들어 있으면 건강한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건강검진의 과정 중에 ‘문진’이 있습니다. 평소에 건강한 삶을 살고 있는지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우울증과 관련된 문진도 있습니다. 스트레스와 관련된 문진도 있습니다. 문진에 대해서 정성껏 대답을 하면 건강검진의 결과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평소의 삶이 건강한 사람은 건강검진도 좋은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평소의 삶이 무절제한 삶인 사람은 건강검진도 좋은 결과를 예상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문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문진의 가장 큰 줄기는 ‘십계명’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사람, 이웃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사람, 교회의 재정과 행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신앙의 문진에도 좋은 결과를 맺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많은 일들이 주어집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선물로 받아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십자가와 짐으로 받아들입니다. 결과는 무척 다를 것입니다. 저에게 주어진 일들이 있습니다. ‘성소국의 일, 복음화 학교의 일, 엠이, 꾸르실료, 강의, 교구청 회의’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십자가와 짐으로 여긴다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로 받아들인다면 제가 하는 일을 통해서 많은 결실들이 주어질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일들을 무엇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2017년 10월 8일
  |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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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5   [대구]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4] 2473
694   (녹) 연중 제28주일 독서와 복음  [3] 1713
  [서울] 그리스도인의 기쁨  [5] 2232
692   [수도회] 예수님 편에 선 사람들  [2] 1928
691   [전주] 하느님 사랑 감사하고 나누자  [1] 2089
690   [의정부] 소출을 바라시는 하느님  [2] 2004
689   [춘천] 탐스러운 열매를 풍성히 맺으리라  [3] 2025
688   [인천] 시간이라는 밭에 무엇을 자라고 있는가?  [4] 2094
687   [원주] 지금 우리도 착각 속에 살지 않습니까?  148
686   [수원] 악한 소작인들의 비유  [2]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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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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