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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예수 그리스도'란 새 예복
조회수 | 2,748
작성일 | 05.10.07
언젠가 수백 명이나 되는 신부님들이
공동으로 집전하는 미사에 참례한 적이 있었습니다. 공문에 분명히 '영대 색깔은 백색'이라고 적혀 있었기에 나름대로 신경 쓴다고 썼지요. 그런데 정작 제가 준비해간 가방을 열어보니 자색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를 어쩌나' 하다가 '나 말고도 나 같은 사람,
분명히 몇 사람 있을 거야'하며 입장했는데, 웬걸 그날따라 다들 얼마나 신경을 썼던지 저 혼자만 자색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남보다 튀는 걸 죽어도 싫어했던 저였기에 '나만 혼자 자색'이라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미사 시간 내내 안절부절 못하며 보냈습니다. 자색 영대로 제가 받았던 스트레스는 참으로 컸습니다. 모든 사람들 시선이 온통 제게로만 쏠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일을 떠올리며
장소에 맞는 옷을 적절하게 입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게 됐습니다. 특히 장례식이나 결혼식 같은 중대사에 참석할 때 장소에 어울리는 복장을 갖추려는 노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주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예절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 체험입니다.
며칠 전 무작정 상경했다가 죽을 고생을 다했던 한 친구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귀가조치'시키는 것이 가장 상책이다 싶어 아이를 승용차에 태워 가까운 국철역으로 향했습니다.

노숙생활을 한 지 꽤 됐던지 냄새가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역까지 길어봐야 10분밖에 안 걸리는 시간이었음에도 저는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씻지 않았는지 '냄새'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너무 지독해서 차창을 있는 대로 다 열었습니다. 그래도 못 참아 손수건으로 코를 막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방독면 생각이 간절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차에서 냄새가 빠져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방향제를 뿌린다, 향수를 뿌린다, 갖은 방법을 동원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합니다. 혼인은 인생의 여러 단계 가운데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무엇보다도 기쁨의 잔치입니다. 축복의 잔치입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에 잔치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신경을 써야 하는 자리인 것입니다.

혼인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당연히 외모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평소 잘 안 입던 예복도 꺼내 손질해야 합니다. 머리 모양새도 한번 점검해봐야지요.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반바지에 멜빵에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장례식에 참석한다면 분명히 '몰상식한'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을 것입니다. 결혼식 하객으로 참석한 사람이 동네 공원 산책 나온 사람처럼 운동복을 입고 왔다면 분명 '약간 맛이 간' 사람으로 눈총을 받을 것입니다.

제대로 씻지도 않아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고,
머리는 봉두난발인 채 혼인잔치에 참석한다면 잔치 주인공 기분이 '팍' 상할 것입니다.

이런 논리는 하느님 나라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석하려면 반드시 잔치에 어울리는 예복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잔치를 위한 예복은 결혼식이나 장례식 때 입는 예복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에 가장 어울리는 예복은 바로 '이웃 사랑의 실천'이란 예복입니다.
'희생'이란 예복입니다. '겸손', '자선', '기도'란 예복입니다. '고통의 적극적 수용', '십자가를 기꺼이 수락함'이란 예복입니다. 또한 예복은 다른 무엇에 앞서 '성령 안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 믿음입니다.

그 모든 예복 중에서도 가장 값진 예복,
예복 중에 예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란 예복입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세상이란 낡은 옷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란 새로운 예복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 잔치를 위해 가장 아름다운 예복,
가장 값진 예복을 입었던 사람이 한 분 계신데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그분은 온 몸을 온통 오직 예수 그리스도란 예복으로 치장한 분이었습니다. 예복 중에 가장 빛나는 예복, 구원의 빛나는 겉옷인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온 생애를 단장한 왕후가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세속에 찌든 낡은 예복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예복으로 갈아입을 수 있도록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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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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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축제祝祭다.”

-축제인생을 삽시다-

오늘 화답송 후렴과 시편이 은혜로웠습니다. ‘오래오래 주님 궁에 살으오리다.’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나라 주님 궁에서 살기 시작한 우리들입니다. 하늘과 땅은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미 천상축제의 삶을 앞당겨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제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고해인생이 아니 축제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축제의 계절, 가을도 중턱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로 가득한 가을 세상임을 깨닫습니다.

눈물로 씨뿌리던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단 거두는 영적 수확의 계절 가을입니다. 나이에 불문하고 가을에는 우리 인생 가을을 묵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준비도 염두에 둬보는 계절입니다. 죽음은 무無에로의 환원還元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歸家입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자 ‘독서의 계절’이요 ‘기도의 계절’입니다. 더욱 하느님 말씀에 맛들이는 성경독서에 힘쓰고 끊임없이 기도함으로 영적 풍요를 누려야 하는 축복의 계절 가을입니다. 하여 교회 전례력도 9월 순교자 성월에 이어 10월 묵주기도 성월, 11월 위령성월로 더욱 기도생활에 정진할 것을 권합니다.

삶은 축제입니다. 축제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축제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첫째, 늘 하늘나라 체험 은총을 추구하십시오.

하느님 체험이 천상체험은총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은지 맛보고 깨닫기 위해 이 거룩한 미사 천상잔치에 초대받아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저는 미래와 희망이 없다고 비관하는 자들에게 단호하게 ‘하느님이 바로 미래이며 희망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궁극의 미래요 희망입니다. 하느님을 항구히 희망하고 믿고 사랑하는 자들은 원망은 물론이고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절망할래야 절망할 수 없습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제가 여기 30여년을 살면서도 가끔 답답하거나 막막한 때는 있었지만 원망하거나 절망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답답하거나 막막할 때마다 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을 바라보며 노래한 시편이 바로 121장 1-2절입니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어데서 구원이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땅 만드신 그 님한테서.”

하느님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희망이자 비전이요 꿈입니다. 바로 우리 영성생활이 추구하는 목표도 이런 살아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영원한 삶을 사는데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골로3,1-2).

이렇게 살 때 우리들에게 선사되는 하늘나라, 하느님의 체험입니다. 바로 제1독서에서 이사야가 보여주는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자 비전이 바로 하늘나라 잔치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은연중 앞당겨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웠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주시리라.”

주님 친히 무지의 너울과 탐욕과 교만의 덮개를 없애 주실 때 환히 보이는 주님의 얼굴입니다. 우리의 죽음을 없애시고 우리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는 위로와 치유의 주님을 미리 체험하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시간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천상미사잔치에 초대해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사야 말씀대로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을 고백합시다.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둘째, 참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십시오.

천상체험은총이, 미사은총이,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이 샘솟는 믿음, 희망, 사랑의 ‘신망애信望愛의 샘’입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구속하거나 좌절시킬 수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이런 것입니다. 궁극의 희망이신 주님과 만나 하나되었기에 이런 용기와 자유자재한 삶입니다. 바오로의 고백은 바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자랑이 아니라 모두 이렇게 살라는 초대입니다. 이렇게 살 때 진정 내적자유를 누리는 영적부자의 삶입니다. 바로 영원하신 주님을 체험할 때 이런 자유와 영적풍요로움입니다. 바로 불가의 다음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수주작처 입처개진 隨處作主 立處皆眞’,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들어서는 곳마다 진리가 되라, 얼마나 당당하고 자유롭게 하는 말씀인지요.

셋째,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 베푸시는 ‘삶의 축제’의 초대에 자발적 기쁨으로 참여하십시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된 하늘 나라 잔치입니다. 이런 천상체험이 없었기에, 이로 인한 내적자유와 영적풍요로움의 맛을 몰랐기에 복음의 초대받은 이들은 하늘나라 잔치 초대를 거부했고 실패인생을 살았습니다.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이 상징하는바 우리 주님이십니다.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잔치에 오시오.”

우리 하느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는 하늘나라 잔치이기에 초대받은 이들 모두가 참석하기를 학수고대하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처럼 천상잔치의 기쁨을 미리 맛보지 못했기에 복음의 사람들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아침 성무일도 때 즈카르야 노래 후렴이 생각납니다.

“준비가 다 되었으니 잔치에 오라고 초대받은 사람들에게 전하여라.”

바로 여러분은 주님의 초대에 응답하여 이 거룩한 하늘나라 잔치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행복은 선택입니다. 오늘 복음의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하늘나라 잔치의 행복을 선택하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을 선택했습니다.

아, 이게 인간 무지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들은 초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가고, 또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입니다. 여전히 반복되는 무지와 탐욕, 악행의 인류역사입니다. 참으로 영적 삶의 부재를 말해 줍니다.

분명 ‘말씀공부와 끊임없는 기도’라는 영적수행에 문외한인 육적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세상에는 생각없이, 영혼없이 하느님을 잊고 살아가는 영적 식물인간植物人間도 참 많을 것입니다. 삶은 선물이자 숙제입니다. 은총의 선물인생을 성공적으로 살려면 끊임없는 영적수행의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래야 살아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마침내 하늘나라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찼다 합니다.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온갖 부류의 사람들로 가득했다하니 바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뜻합니다. 바로 교회의 모습입니다.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하늘나라 잔칫방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잔칫방에 참석했다 하여, 교회에 몸담았다 하여 무조건 구원은 아닙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습니다. 결코 값싼 구원은총은 없습니다. 마치 원하는 대학에 모두가 입학하지만 졸업하기는 힘들다는 독일의 대학제도와 흡사합니다. 바로 혼인예복을 마련했느냐가 핵심사항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임금은 혼인예복을 입지 않은 이를 가차없이 추방합니다. 하늘나라 잔치에 참석했다 하여 저절로 구원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하늘나라 잔치에 맞는 예복을 입지 않으면 모두 추방입니다. 과연 혼인예복이 상징하는 바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의 초대는 무료입니다. 그러나 초대를 받은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바로 혼례복은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아버지의 뜻을, 의로움을, 사랑의 이중계명을, 자비를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단 한 번에 마련되는 혼례복이 아니라 평생 말씀을 듣고 지키는 수행생활을 통해 마련되는 천상잔치 예복입니다.

과연 이런 예복을 입고 미사잔치에 참석하고 있습니까? ‘주님, 주님 부른다고 구원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구원의 예복을 입은 이가 구원입니다. 바로 어제 주님의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평생, 항구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 행복한 삶의 첩경입니다. 하늘나라 잔치 예복 준비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과연 하늘나라 미사 잔치에 초대한 여러분의 예복은 어떻습니까? 말씀을 듣고 실천함으로 찬미와 감사, 기쁨과 평화, 온유와 겸손으로 빛나는 예복입니까?

늦지 않았습니다. 깨달아 시작하면 언제든 늦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늘나라 잔치에 입을 예복을 잘 준비할 수 있도록 수행생활에 충실하고 항구할 수 있는 은총을 주십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오늘 명령하신 말씀을 실행함으로 지금 여기서부터 축제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1.늘 하늘나라 체험 은총을 추구하십시오.
2.참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십시오.
3.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 베푸시는 ‘삶의 축제’의 초대에 자발적 기쁨으로 참여하십시오.

이렇게 살아야 허무한 고해인생이 아니라 충만한 축제인생입니다. 이 모두를 이뤄주는 비결은 단 하나, 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수행생활입니다. 그러면 우리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2017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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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 주일입니다.
우리는 전 주일에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그 전 주일에는 ‘두 아들의 비유’를, 오늘은 ‘혼인잔치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세 비유의 배경은 모두 동일합니다. 곧 이 비유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을 정화하시자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권위에 대해 따져 추궁하자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수석사제와 백성의 원로들에게 들려주는 비유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잔치’에 대한 말씀입니다.
‘잔치’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더구나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혼인잔치’는 성경에서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기쁘고 결정적인 일치의 상징으로 쓰이며(마태오 복음 15장 1절-12절), 구원과 그 기쁨을 의미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벌리시는 이 ‘혼인잔치’에 신랑은
그리스도이시며, 신부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교회입니다. 이 잔치에 차려진 메뉴는 평화와 자비, 사랑과 기쁨, 봉사와 순명, 정의와 진리 등으로 차고 넘쳐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주님께서 특별히 마련하시는 잔치와 그 풍성함을 드러내줍니다. 곧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벌어지는 이 잔치는 음식과 술이 풍성할 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들의 너울이 벗겨지고, 죽음은 영원히 사라지고, 모든 사람에게서 눈물과 수치가 치워지는 잔치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 풍요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필리피서 4장 19절)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이상하게도 이 천상의 잔치에 초대받고도 응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심부름꾼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사실 그들은 하느님을 믿는 충실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던 종교지도자들이었으며 유대백성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크게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초대에 응답한 이들과 응답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응답하지 않은 이들에는 또 다시 두부류가 있으니,
자신들의 생업을 핑계 삼아 응답하지 않은 이들과 심
부름꾼들을 붙잡아 때리거나 죽이기까지 하는 박해자들입니다.

이들 모두는 먼저 하느님께 초대를 초대받았으나
응답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선택받았으나, 세속적인 탐욕과 진리에 대한 곡해로 하느님의 초대를 거부하고 박해하였습니다.

베유에서 임금은 말합니다.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는 흔히 하느님을 임금으로 말합니다.

“혼인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이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마태오 복음 22장 8절-9절)

이는 하느님의 초대에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아무런 차별이 없으며, 누구든지 응하기만 하면 잔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구원은 인간적인 기준으로서의 선악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혜와 그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선물이요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설령 초대에 응답했다 하더라도, 그에 합당한 예복을 갖춰 입지 않으면 잔치에서 쫓겨난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잔치를 베풀 때 반드시 대문에다 예복을 미리 준비해두었고, 이렇게 손님들이 예복을 입고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주인에 대한 각별한 예의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감은 주인을 모독하는 태도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초대에 응했다 하더라도 예복을 갖추어 입지 않으면, 다시 쫓겨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초대받은 자가 입고 들어가야 하는 예복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오 복음 7장 21절)

그러니 ‘아버지 뜻의 실천’이라는 예복입니다.
그것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거룩한 덕행의 예복이요,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말씀의 실현’이라는 예복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나라는 먼 훗날의 나라가 아니며, 하늘나라에로의 초대 역시 먼 훗날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초대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의 잔치 역시
먼 훗날의 벌어지는 잔치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말씀의 잔치인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말씀의 옷을 입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오늘의 삶 한가운데서 말씀의 실현이라는 이 잔치가 구체화되고 실현되고 증거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우리는 낡은 인간을 벗어버리고 새 인간의 예복을 갈아입고 이 은혜로운 잔치에 참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어서 혼인잔치에 오시오.”(마태오 복음 22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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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의 초대에 합당한 자 되게 하소서.
타인의 아픔과 상처를 양팔 벌려 보듬게 하소서!
시대의 질곡과 고통을 기꺼이 온 몸에 걸치게 하소서!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는 빛나는 예복을 차려 입게 하소서!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당장 예복을 차려 입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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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20년 10월 11일
  |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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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오 복음 22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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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 열매의 잔치가 있기까지 많은 여정을 거친다. 우리가 원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뭇 다르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쪽으로가고 있는지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된다. 하느님께로 갈 때 더욱 빛나는 우리들 삶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삶은 그야말로 잔치가 된다.

잔치에 걸맞는 삶이란 기쁨과 행복이다. 하늘 나라의 잔치는 우리의 가면과 거짓의 예복을 벗겨준다. 부르심과 선택, 초대와 응답이 모든 간격이 너무도 크다. 하늘 나라는 잔치의 중심이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가르쳐준다. 자기중심에 빠져 잔치마저 반기지 않는 우리들이다. 마지막까지충실하길 기도한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마침내 하늘 나라의 잔치가 되게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너무나 불충실했던 지난 시간을 진심으로 반성하는 잔치의 주일이다. 선택과 충실이라는 십자가의 잔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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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0년 10월 11일
  |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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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6   [청주] 주인을 바라보는 눈  103
785   [군종] 내가 가진 작은 것에서 부터  [1] 2176
784   [인천] 주님께서 주신 탈렌트  [2] 2294
783   [마산] 나의 달란트 어떻게 쓸까?  2266
782   [춘천] 착하고 성실한 종  [1] 2236
781   [수원] 결실을 맺는 활동적인 신앙생활  [3] 2353
780   [광주] 착하고 성실한 종, 악하고 게으른 종  79
779   [원주] 시든 꽃과 같이  2284
778   [서울] 하느님의 구원 계획  [5] 2573
777   [전주] "묻어둔 달란트를 적극 활용하자”  [1] 2445
776   [의정부] 받은 탈란트를 이웃을 위해  [1] 1715
775   [대구] 자비·겸손·찬미·평화·사랑  [1] 2200
774   [대전]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88
773   [제주] 탈란트의 가치  97
772   [부산] 받은 것을 베풀고 나누고 살자  [1] 2385
771   [안동] 모든 이에게 주신 선물  2009
770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탈렌트talent의 비유)  [4] 1837
769   [수도회] 일상에 대한 진지한 접근  [1] 2546
768   [전주] ‘즉시 그리고 기쁘게’ 나누는 삶  2627
767   [서울]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3] 2863
766   [인천]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  [1] 1431
765   [수원] 깨어 있음의 중요성  [4] 3026
764   [의정부] 슬기로운 처녀들이 준비한‘기름’은 ‘구윈에 대한 확신  [1] 1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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