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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혼인잔치의 비유
조회수 | 2,704
작성일 | 05.10.07
혼인잔치의 비유는 두 아들의 비유(마태 21,28-32)와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3-45)의 신학적 주제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복음에서는 스스로 구원에서 제외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하느님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호소와 복음의 요구에 대한 인간의 태도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제1독서: 이사 25,6-10a: 주님께서 잔치를 차려주시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초대하시는 ‘잔치’를 베푸신다. 이 잔치는 기쁜 구원의 잔치이며 ‘메시아적’ 잔치에 대한 사상의 표현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내용이다. 첫째로 무엇보다 초대의 ‘보편성’이 인상적이다. 모든 민족들이 초대되어 시온산을 향해 몰려들고 있다(6-10절). 이제 시온산은 모든 민족들이 와서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중심지가 될 것이다(이사 2,2-6 참조). 바로 모든 이들의 ‘어머니’인 교회가 이사야에 의해 미리 시사되고 있다. 둘째로 그 잔치는 잔치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초대받은 사람들 사이의 친밀한 인식과 우정을 지향하고 있다. “야훼께서 모든 백성들의 얼굴을 가리우던 너울을 찢으시리라. 모든 민족들을 덮었던 보자기를 찢으시리라”(7절). ‘얼굴을 가리우던 너울’은 하느님께 대한 무지 내지는 영적인 눈멀음이다. 이것을 잔치를 통하여 진정한 친교를 통하여 없앤다는 것이다. 또한 그 잔치는 ‘기쁨’과 생명력, 평온과 안정감을 고취시킨다. 즉 ‘죽음’이 영원히 없어질 것이며 모든 ‘눈물’이 닦아질 것이다(8절). 이사야는 이 잔치의 개념으로 모든 민족에게 베푸실 종말론적 ‘구원’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기에 “이분이 야훼시다. 우리가 믿고 기다리던 야훼시다. 기뻐하고 노래하며 즐거워하자”(9절)라고 초대한다.

복음: 마태 22,1-14: 아무나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해 오너라

예수께서도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자비임을 말씀하신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을 당신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하신다. 그러나 복음에서는 더 나아가 임금의 관대한 초대에 대한 초대받은 사람들의 태도를 묘사한다. 즉 임금의 초대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구원을 포기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이 비유는 루가복음(14,16-24)에도 전해지나 차이점이 있다. 루가복음에서는 어떤 사람이 준비한 ‘잔치’에 대해서만 말하지만, 마태오복음은 ‘아들’의 혼인잔치를 마련하는 ‘임금’에 대해 말하고 있다. 루가에는 초대할 때 종들을 한 번만 보내고 있지만 마태오는 두 번 보낸다. 또한 마태오는 자기의 군대를 보내 그 ‘살인자들‘이 살고있던 ’동네‘를 파괴시키는 ’임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동네가 “불길에 휩싸였다면”(7절) 어떻게 “길거리에서”(8절) 한가로운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문맥상으로는 혼란스럽지만 어떤 ’역사적 사실‘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 ’동네‘의 불은 예루살렘 멸망을 암시하며, 그것은 임금의 ’초대‘를 거절하였을 뿐 아니라, 종들을 ’잡아 죽이거나‘ 학대를 가한(6절) 행위에 대한 벌로서 해석한다. 여기서의 ’종들‘은 구약의 예언자들과 예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파견하신 사도들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대되어 첫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자칭 올바르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세리와 창녀들”(마태 21,31)과 특히 이방인들이다.

그러나 초대를 받고 그 잔칫상에 앉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주님의 집의 식탁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복음이 요구하는 ‘행동적’ 요구에도 응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쫓겨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사람은 침묵을 지키고(12절)있다는 것은 자기 잘못을 느낌을 의미한다. 여기서 ‘혼인예복’이란 무슨 의미인가? 이에 대한 답은 잔치의 식탁에 “나쁜 사람 좋은 사람”(10절) 모두 모였다는 데서 발견된다. 그는 나쁜 사람의 부류에 속할 것이며, 이는 좋은 씨앗 가운데서 가라지가 번성하는 교회의 신비를 알려준다. ‘초대받은 것’만으로는 ‘구원받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14절). 이는 신앙에의 ‘불림’이 곧 ‘구원’을 결정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기를 바라시는”(1디모 2,4) 하느님의 은총에 인간은 최대한 협력해야 한다.

그러므로 ‘혼인예복’은 하느님 나라의 결실로 제시되었던 삶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구체적인 정의를 뜻하는 것이다. 아무런 결실을 내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처럼 꺾여져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결실’을 내야할 의무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크면 클수록 더 무거울 것이다. 즉 루가복음에서처럼 단순한 잔치가 아니라, ‘예복’까지도 요구하는 “아들의 혼인잔치”(2절)의 초대라는 하느님의 보다 큰 ‘사랑’에 관한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시면서 보여주신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의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2독서: 필립 4,12-14.19-20: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사도 바오로는 필립비인들이 베풀어준 경제적 도움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자신의 사도적 사명이 어떤 외적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한다. 사도직의 결실은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한 신뢰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다른 모든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여러분은 나와 고생을 같이 해주었습니다. 한량없이 풍요하신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12-14.19절).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사랑의 ‘결실’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신자들이 이루는 결실이다. 그들은 그들의 스승을 큰사랑으로 보살펴준다. 또 하나는 바오로 사도가 이루는 결실로 신자들의 사랑에 감사하면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되이 자신을 적응시켜 나감으로써 자신의 사도적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가 하느님의 집에, 그 아들의 잔치에 초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에 합당한 응답으로서 행동적인 결실을 맺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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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삶으로 초대 받는 우리

혼인잔치에의 초대는 하늘나라로의 초대를 의미한다. 한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백성들을 초대한다. 하지만 초대받은 이들은 혼인잔치에 오려고 하지 않는다. 임금이 다시 한 번 종들을 보내지만 그때도 마찬가지로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하러 간다. 그리고 몇몇은 초대하러 간 종들을 죽이기까지 한다. 결국 진노한 임금은 그 살인자들을 처형하고 고을을 불살라 버린다.

“혼인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초대받은 이들은 선택된 이들을 말한다. 즉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알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 그런데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 오히려 하늘나라로의 초대를 거부하고 있다. 하늘나라로의 초대를 거부하는 이들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와 같이, 하느님을 믿지만 내적인 믿음이나 사랑이 없이 외적이고 형식적인 믿음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구원을 바라고 하느님을 찾지만 그 속은 자신의 세속적인 부와 명예 등을 추구한다.

결국 임금은 종에게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 오너라.”하고 명령을 내린다. 그렇게 해서 많은 이들이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지만 또 그들 중 예복을 갖추지 않은 이는 쫓겨나고 만다. 초대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초대에 응하는 것도 중요하고, 또 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도 중요하다.

오늘의 이 말씀은 혼인잔치에만 해당하는 일일까? 우리에게는 먼 일인가?

우리는 매일 초대를 받는다. 새로운 하루, 새로운 삶으로 초대를 받고 있다. 초대해 주시는 분은 누구이신가? 당연히 하느님이시다. 자, 그러면 우리는 그 초대에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응하고 있는가? 아침에 눈을 뜨는 그 순간 우리에게 새로운 삶이 펼쳐진다. 어제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어제 세상을 떠나야 했던 누군가가 간절히 원한 새로운 날이다. 새 날, 새 삶으로 초대를 받은 우리는 먼저 기뻐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초대해 주신 새 날이다.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는가?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는가? 기뻐하고 감사하며 시작하는 하루를 생각해 보자. 행복한 하루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마치 임금의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처럼, 오늘을 맞이한 것이 당연한 듯, 나에게 주어진 어제와 같은 그러한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기쁨은 커녕 감사함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나의 소소한 일상, 그 안에 담겨진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불러주시는 초대이다. 기쁨과 감사로 초대에 응답할 때 더 큰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하고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자.

정지용(베드로) 신부
  |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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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받은 당신

오늘 우리가 듣게 된 복음말씀은 ‘혼인 잔치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마치시면서“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초대-invitation)에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빈부귀천(貧富貴賤), 남녀노소(男女老少)를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사랑과 ‘희망 가득한 마음’으로 부르십니다.
둘째는 억지로가 아닌 자유롭게 응답하도록 ‘기다림’으로 부르십니다.
셋째는 의무적으로나 강제로 무엇인가를 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풍성한 은총과 기쁨을 받아 누리도록 ‘손수 마련하심’으로 부르십니다.

복음에서 첫 번째로 초대 받은 이들은 초대는 받았지만 ‘나쯤이야 안 가도 되겠지, 나는 그런 자격이 없어, 내겐 그 모든 것이 귀찮고 싫어’하면서 초대한 친구의 사랑과 희망과 기다림과 기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참된 은총과 기쁨을 포기한 것이지요. 두 번째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잔치라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앗싸!’하며 당장 응답하여 가긴 갔지만,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준비와 앎이 없었기에 막상 도착하고 나서는 당황하게 되고 부끄럽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오늘 하루, 일주일, 한달, 그리고 한평생을 두고 늘 부르십니다. 사랑과 희망과 기다림과 기쁨으로 말이죠. 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초대는 바로 미사, 가정과 그 밖의 모든 일상생활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 외에 우리에 관한 다른 조건 없이 우정과 사랑으로 우리를 당신의 기쁨에 초대하셨다는 감사와 설레임으로 한 주간 미사와 가족모임과 일상을 잘 준비하여 맞이해봅시다. 그러면 우리도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 12-13)”

강희재 신부
  |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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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어릴 적 행복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열두 번째 생일을 얼마 앞두고 있을 때, 어머니께서는 제 생일잔치를 해 주시겠다고 친구들을 초대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생일은 윤달이기에, 평생 몇 번 못 찾아 먹을 테니, 올해 윤달 생일을 챙겨주마. 그러니 친구들을 데려와 놀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친구들을 불러 생일잔치를 해 준다는 것은 그 당시 저희 동네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처음이었기에 친구들 역시 낯설어했습니다. 누이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제가 1남5녀의 외아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친구들을 어떻게 초대할 것이며, 어떻게 나의 생일을 멋지게 맞을 수 있을까?’ 어머니께도 기쁨을 드리고, 친구들에게 한턱내며 내 체면도 살리고, 위세도 떨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척이나 고민스러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임금은 아들의 혼인 잔치를 성대하게 준비해 놓고 종들로 하여금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합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이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입니다. 이때 임금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버리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종들은 거리로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가리지 않고 데려와,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찹니다. 이러한 모습을 둘러보던 임금은 혼인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라고 묻습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임금은 하인들에게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마치시며,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큰 잔치를 우리에게 마련해주실 것인지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늘나라의 혼인 잔치 비유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를 위한 비유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아들)이기에,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는 바로 ‘내 혼인을 위한 잔치’라는 것을 묵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부인 나의 배우자는 누구란 말인가?

그 순간 무릎을 치면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배우자’가 되어주신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당신의 배우자로 삼으셨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당신의 배우자로 삼으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교회를 당신의 배우자로 삼으신 것처럼, 나를 당신의 배우자로 삼으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뒤로 넘어질 뻔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나를 당신의 배우자로 삼으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며 엄청난 잔치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아주 상세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잔치입니다. 먹고 마시는 잔치뿐만 아니라, 묶인 영혼을 해방시켜 기쁨의 도가니로 만들어버리는 잔치! 모든 이들을 살리는 잔치! 이 세상에서 누구도 맛보지 못한 잔치!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의 배우자로 삼으시고 베풀어주시는 향연의 선물!

이제 나의 신분은 달라진다는 것, 하느님의 배우자로서 더 잘 살아야 한다는 것, 갈라지지 않은 일편단심으로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분과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그분이 원하는 자녀를 수없이 낳고 길러 내야 하는 것 등이 내가 입어야 할 예복임을 묵상합니다. 이 묵상은 끝없이 깊어만 갑니다. 마냥 행복하기만 합니다. 이는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당신의 배우자로 삼고자 하는 의지이며, 잔치임을 깨닫습니다. 그 행복의 한가운데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함께 기뻐합시다.

최인각 신부
  |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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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선택하는 사람

많은 사람이 잔치에 초대받았지만,초대에 응답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을 핑계삼아 밭으로 갔고, 어떤 사람은 장사를 하러갔습니다. 하느님의 초대보다 자신의 일과 자신의 뜻을 앞세운 것입니다. 당연히 잔치의 기쁨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잔치의 기쁨은 하느님의 초대를 1순위로 생각하면서 응답하는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가끔 우리 도할일이 많다는 핑계를 대면서 하느님의 초대를 뒤로 미룰때가 있습니다.‘거부한 것이 아니라 잠시 뒤로 미뤄둔 것뿐’이라며 합리화하고, 급한 일을 끝내면 하느님의 초대에 꼭 응답하겠다고 다짐합니다. 하지만 그 다짐은 대부분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정해진 기도 시간을 놓치거나 계획된 미사 참례시간을 미루면 기도나 미사참례가 몇배나 어렵게 느껴지고 심지어 거르는 경우도 생기는 것을 체험합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초대를 뒤로 미루는 것이 습관이 되면 우리는 점차 하느님과 멀어지고 신앙생활은 메말라 갑니다.‘주님을 따르는 이에게는 좋은것뿐(화답송) ’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하는 사람이 가장 좋은 것을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현실에서 그 사실을 자주 잊습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예수님보다 더 좋아 보이는 것도 많고,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수 없이‘예수님’과‘예수님 보다 더 좋아 보이는 것’사이에서 고민과 갈등을 합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합니까? ‘예수님’입니까? 아니면‘예수님보다 더 좋아 보이는것’입니까?

신앙인은 언제나 꿋꿋하게‘예수님’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무수히 많은 초대에 앞서 하느님의 초대를 1순위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자다’라는 글귀가 생각납니다. 우리 모두가 다른 많은 좋은 것들에 앞서 예수님을 선택하면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마음의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호재(베네딕토) 신부
  |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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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사랑의 예복

인류 구원의 역사에서, 하느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러 번 당신의 백성을 부르셨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마침내 모든 이를 부르시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시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혼인 잔치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친밀한 우정을 맺으시기를 얼마나바라고 계시는지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혼인 잔치에 모든 민족, 모든 형태의 사람들이 기꺼이 다 초대를 받습니다. 교회의 가르침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모든 이가 구원에로 불림 받았다고 가르칩니다. 다만 먼저 초대받은 이들은 초대에 응할 만한 의향도 없었고 그럴만한 자격도 없었기에,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세대를 이어 초대될 것이라고 전하지요.

이제 이렇게 모든 이에게 초대의 문이 활짝 열렸음에도, 오늘 복음에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기에 쫓겨난 사람의 이야기가 덧붙여집니다. 이에 대해 성 그레고리오 대 교황은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오직 마태오 복음서에만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오는데, 그 많은 사람 가운데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게 되고, 그 사람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지게 되는데, 왜 그렇게 되었는지 묻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떤 종류의 예복을 입어야 했습니까? 교회에 모인 모든 이가 세례의 새 옷을 받았고, 그렇지 않았다면 교회 안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입니까? 이 밖에 어떤 혼인 예복을 더 갖추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교황께서는 이에 대해 정답은 ‘사랑의 옷’이라고 대답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 자체로 우리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혼인 예복, 곧 사랑을 입지 않고서 어떻게 하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세례 받은 우리는 주일을 지키고, 죄를 피하고, 때로는 선행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안에 사랑이 들어 있는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하겠지요. 예를 들어, 남에게 보이기 위한 선행은 아닌지, 아니면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이웃을 사랑하기에 하는 선행인지 자신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랑을 깨뜨리고, 사랑을 파괴하는 말과 행동을 하면서 하늘 나라의 혼인 잔치에 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인 ‘인류의 빛(lumen gentium)’ 14항에서도 이 점에 대해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교회에 결합되어 있을지라도 사랑에 항구하지 못하여 교회의 품 안에 ‘몸’으로만 머물러 있고, ‘마음’으로는 머물러 있지 않은 사람은 구원될 수 없다.”

몸으로만 교회의 품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혼인 예복을 갖추어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내 마음 안에 그 사랑이 늘 가득하다면, 나는 늘 하늘 나라 혼인잔치의 그 기쁨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수원교구 김영삼 요셉 신부 - 2017년 10월 15일
  |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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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7   [부산]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까?  [4] 2323
696   [마산] 우리의 구원에는 예복이 꼭 필요합니다.  [3] 2261
695   [대구]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4] 2473
694   (녹) 연중 제28주일 독서와 복음  [3] 1713
693   [서울] 그리스도인의 기쁨  [5] 2232
692   [수도회] 예수님 편에 선 사람들  [2] 1927
691   [전주] 하느님 사랑 감사하고 나누자  [1] 2088
690   [의정부] 소출을 바라시는 하느님  [2] 2003
689   [춘천] 탐스러운 열매를 풍성히 맺으리라  [3] 2024
688   [인천] 시간이라는 밭에 무엇을 자라고 있는가?  [4] 2094
687   [원주] 지금 우리도 착각 속에 살지 않습니까?  147
686   [수원] 악한 소작인들의 비유  [2]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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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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