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가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0 40.8%
[부산]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까?
조회수 | 2,323
작성일 | 05.10.08
하늘나라는 어떤 곳일까? 이 질문에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마 유명한 신학자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우리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 가서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활을 하시는 중에 하늘나라는 어떤 곳인가에 대해 제자들과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서 설명을 했다. 예를 들면 '겨자씨의 비유'와 '가라지의 비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밭에 묻힌 보물에 대한 비유'등으로 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운 세상의 일들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설명해 주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이 성서에 쓰여 있는 예수님의 비유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하느님이시고 아들은 예수님을 의미한다.

흔히 이 비유에 나오는 초대 받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나라의 잔치에 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하느님은 제1독서에서 말씀하신 대로 모든 민족을 하늘나라에 초대하셨다. 이와 같이 하늘나라의 잔치는 특정한 어떤 사람이나 민족만이 참석하는 곳이 아니라 누구든지 참석할 수 곳이다. 세속의 임금님 아들의 잔치에 초대를 받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물며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는 것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느님은 우리들에게 누구든지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은총을 주셨다. 이제 이 성대한 하늘나라 잔치에 참석하고 안 하고는 우리들에게 달려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예수님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뜻은 누구나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도록 초청을 받았지만 준비가 잘 된 사람만이 들어 갈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준비란 바로 가톨릭 신자의 의무인 수계 생활을 잘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훔숭하며,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염봉덕 신부
450 40.8%
세상에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세상에 일어난 일들 중 지극히 적은 부분을 알고 또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 이야기에서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의 삶도 지극히 적은 일부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대상이 되어 남지만, 우리가 겪은 대부분의 일은 시간과 더불어 사라집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산 이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이야기에 담아서 다른 이들과 나눕니다. 그 이야기가 사람들의 공감을 받는 그만큼, 그 이야기에는 인간 삶을 위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어떤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모두 그분은 참다운 스승이었다고 공감하고 감탄한다면, 그분은 스승의 진리를 실천한 인물입니다. 그분에 대한 이야기는 스승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줍니다. 그 이야기는 역사 안에 새로운 스승의 모습들이 나타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팔레스티나에 사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셨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하느님의 생명을 이 세상에서 살아 보이셨다고 믿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 안에 과연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고, 그분의 삶에서 하느님의 일을 배울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 신앙인이고 그들이 모여 교회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 공동체들 중 몇 개는 그분에 대한 회상들을 담아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문서로 엮었습니다. 그 문서들 중에서 신약성서 안에 편집되어 우리에게 전달된 것을 우리는 복음서라고 부릅니다. 이 복음서들은 2000년 동안 인류역사 안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존속시켰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이며,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듣고, 그것을 배워 실천하면서, 그들도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이 남기신 이야기하나를 들었습니다. 임금이 잔칫상을 차려놓고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초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임금의 뜻을 전하러 온 종들을 때려주기도 하고 더러는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노하여 그들을 벌하고 다른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초기 신앙 공동체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임금의 잔치 초대에 응하지 않고, 임금이 보낸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불손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한 그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것은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복음서를 집필한 공동체는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유대 민족의 비극적 운명에 관심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은 ‘임금이 진노하여 자기 군대들을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고 말합니다. 이 복음서가 집필되기 불과 10여 년 전에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거슬려 전쟁을 일으켰다가 참패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비롯한 많은 고을이 불타고 참담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바로 그 비극이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고, 하느님이 보내신 예언자들을 죽이기까지 한 유대인들의 소행에 대한 하느님의 응징이었다고 말합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그 패전을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징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나라를 잔치에다 비유하신 것은 하느님이 베푸시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잔치는 베푸는 사람이 있어야 열립니다. 초대된 사람들은 그 베풀어진 것을 함께 나누면서 기뻐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잔치에 초대된 그리스도 교회라고 믿었던 것은 복음이 그들에게 베풀어졌고, 그것을 형제자매들과 나누면서 함께 기뻐하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은 베푸시는 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을 집필한 공동체는 하느님이 베푸신 잔치라면, 우리에게는 그 잔치에 합당한 준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에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들어온 사람이 쫓겨나는 이야기를 만들어 넣었습니다. 초대에 합당하게 준비하여 참여해야 하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그들의 믿음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인인 것은 그 이야기들 안에서 하느님을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들이 알려 주는 이야기들에서 하느님의 일을 이해하고 그것에 준한 삶을 살아서, 우리 안에도 하느님의 일이 실현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불행만 알아들으면, 우리 자신을 위한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우리를 위한 새로운 실천을 생각해야 합니다. 옛날 예수님 안에 일하신 하느님은 오늘 우리 안에도 일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대상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결국은 그분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그들이 권위를 가진 그 사회의 기득권자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얻은 신분과 권위 때문에 살맛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동료 인간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짓밟으면서 자기들의 위대함을 과시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았습니다. 병든 사람이 그 고통에서 해방되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이 용서의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일들 안에 선하신 하느님이 일하고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은 고치고 살리고 용서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생명이 주어졌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잔치입니다. 그 은혜로움을 이웃과 함께 나누면서 살아야 합니다. 재물이나 권위에 집착하는 것은 초대된 잔치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은 혼자 욕심내고, 혼자 권한을 가졌다고 설치지 않습니다. 잔치는 모두에게 같은 양을 나누어주는 교도소의 급식이 아닙니다. 좀 더 많이 누리는 생명이 있고, 적게 누리는 삶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깊이 공감하는 바는 은혜로움입니다. 신앙인은 이웃과 함께 그 은혜로움을 나누면서 이웃도 은혜로움을 체험하게 합니다.

서공석 신부
  | 10.08
450 40.8%
혼인 잔치에 들어가려면

옛날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란 광고가 히트를 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으로 보면 찰나와 같은 인간의 한 생이 영생을 좌우한다고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 한순간 한순간이 그만큼 중요하며, 그 순간들이 모여서 영생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오늘 2독서의 앞장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1독서와 복음은 잔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잔치는 하느님의 다스림이라는 종말론적 구원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쓰이는 용어입니다. 1독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풍성히 베푸시는 기쁜 구원의 잔치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으며, 복음에서는 이스라엘의 거부로 그 구원의 축복이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구원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그리고 이 초대는 복음에서 보듯 우리의 노력이나 업적이 아닌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 은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신앙에의 초대가 곧 구원을 결정적으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자가 쫒겨 났듯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채운 자만이 선택된 이들의 대열에 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장, 21절).”

그리고 이런 구원에 대한 희망은 절대적인 것이기에 다른 모든 것은 그 앞에서 상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오로가 오늘 2독서에서 “…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이유입니다.

이 확신과 자신감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약속을 지금 실현할 수 있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드러나게 해줍니다.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아멘.

유영일 아우구스티노 신부
  | 10.11
450 40.8%
[부산] 초대장을 받고서...

교포사목을 했던 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연말에 한인여성회에서 주최한 자선기금 마련 파티 행사에 초대를 받고 자리에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참석했던 분들의 복장과 머리 손질이 여간 정성스럽지 않았습니다. 참석한 분들에게는 그 자리가 마치 거룩한 부활 성야 미사에 참석하는 것처럼 매우 중요하고 소중한 자리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는 분의 결혼식에 가게 될 때 가장 고민하는 것이 아마도 무슨 옷을 입을까하는 것이 아닐까요? 저도 아는 분의 결혼식에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마침 그날 오전에 운동을 나갔다가 결혼식 시간이 다 되어서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식장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니 모두들 신경을 꽤나 쓴 모습이었습니다. 그 순간 이런 복장으로 결혼을 축하하러 간 제 모습이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복장도 괜찮고 참석만 하면 된다는 유혹에 제가 넘어간 것이었습니다. 결국 결혼식에는 참석 못했습니다. 중요하고 소중한 자리를 무시한 저의 잘못을 시인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초대장을 수없이 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초대장을 받고서 행사에 꼭 참석하겠다고 생각을 굳히게 되는 선택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금 초대해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자기의 일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임금의 초대가 소중하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갈 필요성을 못 느낀 것입니다.

초대장을 받으면 바로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혹은 가지고 있다가 버리거나, 그리고 참석을 안 하는 것은 그 초대장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없는 핑계거리까지 만들어서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합니다. 우리들의 수첩과 스마트폰, 달력 일정표에 빼곡히 적혀있는 일정들을 보면서 우리는 늘 바쁘게 살아간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정들 가운데에서 덜 중요한 것들을 하나씩 삭제해 보십시오. 그러면 남아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하늘나라의 혼인잔치인 미사 전례에 참여하는 일정이 우리 신앙인들의 첫 번째 중요한 일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미사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하느님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신 하느님의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미사를 마치고 삶속에서, 혼인잔치에 참여한 우리들의 준비된 복장과 잔치 뒤의 기쁨을, 잔치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줬으면 합니다.

오늘은 군인 주일입니다. 군인 신자들이 소중한 주일미사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하느님의 도움으로 맡은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드립시다.

▬ 부산교구 이성주 프란치스코 신부 - 2017년 10월 15일
  | 10.13
450 40.8%
[부산] 모든 이 초대받은 혼인 잔치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주님의 날을 혼인 잔치에 비유합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이사 25,6) 이렇게 주님의 날은 기쁨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내시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영원히 없애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날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보라, 이 분은 우리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이사 25,9)

오늘 복음 역시 주님의 날을 혼인 잔치에 비유합니다. 마태오는 이사야가 예언한 주님의 날, 곧 혼인 잔치가 이미 준비되었다고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를 준비하신 뒤 사람들을 초대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혼인 잔치의 신랑은 예수님이고, 그 신부는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입니다. 교회는 새 계약으로 탄생한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아먹게 하고, 풍성한 포도주를 마시도록 해 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임금이신 하느님은 종들을 보내어 처음 초대받았던 이들을 불러오게 하십니다. 그들에게 보내어진 종들은 이사야와 같은 예언자들이고, 초대받은 이들은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로 대표되는 유다인들입니다. 그들에게 임금의 초대가 전해지지만 그들은 종들이 전하는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두 번째로 다른 종들을 보내어서 그들을 초대합니다. 이번에도 그들은 임금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으며, 어떤 이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이미지에서 우리는 주님의 날을 선포하던 예언자들, 더 나아가 하느님의 아들마저도 거부하고 죽이던 유다인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결국, 임금은 진노를 터트리고 맙니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살인자들을 없애고 고을을 불살라 버립니다. 그들을 위해 마련된 축제의 날, 구원의 날이 진노의 날로 돌변하는 순간입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임금은 종들에게 말합니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에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종들은 임금의 명에 따라 길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데려옵니다. 그렇게 해서 잔칫방은 손님으로 가득 찹니다. 이제 유다인들을 대신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로 불리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초대받는 데에는 어떤 조건도 없습니다. 악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누구나 하느님의 초대를 받게 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임금은 손님들을 둘러보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만나자마자 그를 질책합니다. 그리고는 하인들을 시켜 그의 손과 발을 묶어 바깥 어둠 속으로 던지라고 명령합니다. 누구든 잔치에 초대받을 수 있지만, 악인이든 선인이든 준비를 갖추어 잔치에 나아가지 않는다면 잔칫상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지만 유다인들과 같이 올바른 예복을 갖추어 입지 않는다면 혼인 잔칫상에서 결코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서 올바른 예복을 갖추어 입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이 알려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 복음도 이런 식으로 얼마 남지 않은 주님의 날을 잘 준비하라고 권고합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같이 주님의 혼인 잔치를 미리 맛보는 미사성제를 통하여 주님의 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매일의 미사성제를 거행하면서 영원한 혼인 잔치에 맞갖은 혼인 예복을 갖추어 입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오가 이야기하듯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되는 이들은 적을 것입니다.(마태 22,14) 그러니 각자 혼인 예복을 잘 갖추어 입어 하느님의 영원한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항상 깨어 준비하도록 합시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7년 10월 15일
  | 10.13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725   [청주]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습니다.  176
724   [의정부] 법대로가 아닌 사랑으로  [1] 1946
723   [인천] 반성문 -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5] 2287
722   [수원] 하느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  [3] 2070
721   [서울] 가장 큰 계명  [4] 2871
720   [군종]서로 사랑하여라.  90
719   [대구] 사랑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라  [1] 1876
718   [부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4] 2429
717   [안동] 애주애인(愛主愛人)  [2] 2189
716   [춘천] 이웃 사랑  [3] 2284
715   [원주] 최고의 계명 ‘사랑’  [2] 135
714   [광주] 사랑의 계명  [1] 120
713   [대전] 이웃 사랑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1] 2404
712   [마산] 가장 큰 계명 - 참사랑  [1] 2282
711   [수도회] 사랑하기  137
710   (녹) 연중 제30주일 독서와 복음  [4] 1816
709   [수도회] '예수 그리스도'란 새 예복  [1] 2210
708   [전주] 구원의 잔치에 초대합니다.  [1] 2212
707   [수원] 혼인잔치의 비유  [5] 2705
706   [서울]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  [5] 2539
705   [원주] 우린,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2024
704   [인천] 하느님 나라의 예복  [2] 2124
703   [대전] 초대 받은자의 예복은?  [2] 2121
702   [의정부] 예복은 미리 준비해야 필요할 때 입을 수 있습니다  [2] 2338
701   [광주] 예복을 단정하게 입자  [1] 2051
700   [군종] 잔치에 초대받은 당신  [1] 2125
699   [춘천] 눈물을 닦아 주실 이 누구신가?  [4] 2518
698   [안동] 본당 어르신은 조약돌  [1] 2280
  [부산]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까?  [4] 2323
696   [마산] 우리의 구원에는 예복이 꼭 필요합니다.  [3] 2261
695   [대구]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4] 2473
694   (녹) 연중 제28주일 독서와 복음  [3] 1713
693   [서울] 그리스도인의 기쁨  [5] 2232
692   [수도회] 예수님 편에 선 사람들  [2] 1927
691   [전주] 하느님 사랑 감사하고 나누자  [1] 2088
690   [의정부] 소출을 바라시는 하느님  [2] 2003
689   [춘천] 탐스러운 열매를 풍성히 맺으리라  [3] 2024
688   [인천] 시간이라는 밭에 무엇을 자라고 있는가?  [4] 2094
687   [원주] 지금 우리도 착각 속에 살지 않습니까?  147
686   [수원] 악한 소작인들의 비유  [2] 2308
1 [2][3][4][5][6][7][8][9][10]..[19]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7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