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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조회수 | 2,472
작성일 | 05.10.08
며칠 전 학교에서 성직자 전형 수시면접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신부님들이 추천해 준 학생들이다 싶어서 ‘십계명 정도는 알겠지’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제대로 대답하는 학생이 한명도 없었다는 겁니다. 아니 십계명 중에서 한계명이라도 대답하는 학생이 겨우 두, 세 명이었다고 하는 것이 더 실감이 나겠죠. 입시준비 때문에 바쁜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래도 초등학교 3학년이면 외우는 것을 기억 못하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 글을 보고 계시는 형제님들과 자매님들은 십계명 정도는 간단하게 외울 줄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럼 혹시 ‘봉헌의 기도’나 ‘반성의 기도’도 외울 줄 아십니까? 가톨릭 신자가 믿어야 할 ‘4대 교리’나 ‘12사도의 이름’은 기억하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혼인 잔치에 먼저 초청받은 사람들처럼 너희들도 선택된 민족이라고 안심하고 있다가는 큰 코 다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된 새롭게 초대받은 우리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되물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신앙은 기도문이나 교리를 외우는 것 보다는 삶으로 증언하는 것이 아니냐고’, ‘주일미사는 빠져도 내가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음, 글쎄요. 10년, 20년이 넘게 신앙생활을 해오시면서 가톨릭 신자가 믿어야할 4대 교리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신다면 도대체 무엇을 믿고 계시는 것인지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웃에게 봉사하거나 피해를 주지 않고 서로서로 잘 지내려고 노력하는 것도, 적어도 자기 가족들은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것도, 꼭 신앙인이 아닌 일반인들도 깨닫고 실천하는 일이 아닙니까? 도대체 가톨릭 신자로서 내가 비신자분들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에서는 새롭게 초대받은 손님들 중에 특별한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혼인잔치에 초대 받아 왔으면서도 아무런 예복도 준비하지 않고 온 이 사람에 대해 임금은 하인들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 내 쫓아라.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부디 부르심을 받는데 만족하지 마시고, 뽑히는 사람이 되시길 당부 드립니다. 물론 오늘도 혼인잔치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하고 우리들에게 당부 하십니다. 하지만 얼떨결에 초청을 받은 우리라고 해서 ‘그저 주일만 지키면 되겠지’하는 아무나가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가톨릭 신앙인으로서의 열정과 신념을 다시 한번 볼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최광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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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같이… 변함없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다양한 성격과 성향의 사람들을 대하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란, 사람 때문에 울고 동시에 사람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쌓이면서 우리들은 자신도 모르게 사람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시선을 갖게 됩니다.

이러한 눈길 속에서 우리들은 ‘이 사람은 저렇다’ 혹은 ‘저 사람은 이렇다’ 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구분 짓고 다르게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은 결국 될 수 있으면 상처를 받지 않고, 어떡하든지 피해를 입지 않으려는 자연스런 모습일 것입니다.

일례로 흔히 사람들은 변덕스럽고 이기적이며 자신의 이익과 편리함을 위해 모습을 바꾸는 사람을 꺼리게 됩니다. 반대로 언제나 한결같으며 변함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반기며 좋게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들 자신의 삶은 과연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자기 자신에게만은 이중적인 잣대를 갖고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마다 ‘그럴 수도 있지’ 혹은 ‘어쩔 수가 없잖아’ 하면서 자신들의 생각과 행동을 아주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합리화시켜 버리지는 않습니까?

오늘 복음 안에서 우리들은 임금의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일이 급하다고 하며 외면하는 이들의 모습, 나아가 폭력을 행사하고 대화하려 하지도 않는 모습을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임금의 초대장을 받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인정받고 있음에 뿌듯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초대장을 받지 못한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들이라 우쭐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작 해야 할 때에 자신의 것에 눈에 어두워 외면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며 자신을 언제나 우선시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행동은 너무나 당연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언제나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변명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행동과 삶에 대해서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변함없는 신앙생활 속에서 다른 이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삶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지표인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삶은 가장 먼저 우리의 가까운 이들 앞에서 드러나야만 합니다. 다른 이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청하기에 앞서, 우리들 자신이 먼저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하고 변함없는 삶으로 보담아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로의 초대장은 우리들 누구나가 다 갖고 있습니다. 주님은 모든 이들을 사랑하시고 품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하느냐 마느냐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 우리의 마음과 삶으로 대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병권 요한 신부
  |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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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아들의 혼인을 위해 어떻게든 손님들을 불러 모으고자 하는 한 임금의 이야기입니다. 잔칫상도 차렸고 황소와 살진 짐승도 잡고해서 모든 준비는 끝이 났지만, 손님들이 여간해서 잘 오지 않습니다. 밭으로 가고 장사하러가고 다들 혼인잔치보다는 자신의 삶을 가꾸는데 더 열심인 듯합니다.

‘초대받은 이들’이라 표현된 이들을 저는 ‘불리움을 받은 사람들’이라 새로이 고쳐 부를까 합니다.(그리스 동사의 일차적 뜻은 불리움을 받은 이들입니다.) 혼인잔치에 불리움을 받았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전혀 엉뚱한 곳에 이릅니다. 부름의 목적은 혼인잔치이나 그들의 움직임은 밭이나 장사 터로 향해갑니다. 아니 더 읽어봅시다. 그들은 밭을 넘어, 장사 터를 넘어, 죽음의 장소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죽음의 행위자요, 그들이 죽음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잔치에 오라고 부르러간 종들을 때려죽이고, 그 죽임에 대한 값을 임금의 군대가 톡톡히 되돌려 받기 때문입니다. 불리움을 받았으나 초대받은 이들의 자리는 사라지고 맙니다. 불길에 휩싸여 삶의 터전이 완전히 사라져버립니다.

종들이 새로이 찾아 나섭니다. 손님을 어떻게든 채우려하는 임금의 지시 때문입니다. 우리네 성경은 아무나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고 표현되어 있지만, 원뜻은 종들이 ‘찾은’이들을 데려왔다가 더 정확합니다. 종들이 찾은 이들은 종들에 의해 불리움을 받은 자이고, 임금이 어떻게든 만나고픈 혼인잔치의 손님들입니다. 자, 이제 불리움 받은 자들이 새롭게 형성됩니다.

임금이 둘러보니 그리 달갑지 않은 한 친구가 있습니다. 옷을 제대로 입지 않았네요. 혼인잔치에 걸맞은 예복하나 걸치지 못했으니, 임금에게 흡족한 손님은 되질 못합니다. 쫓겨난 자리는 어둠이요, 안타까움이며 통곡의 장소입니다. 혼인잔치에 불리움을 받았으나 평상복인지 잔치예복인지 분간 못하는 그 친구는 ‘선택’의 순간에 쫓겨납니다.

하늘나라는 단순히 ‘주어져 있는’것이 아닙니다. 불리움에 대한 마땅한 우리의 응답이 만나는 자리에서 하늘나라는 이해되어야 합니다. 내 삶에 갇혀 새롭게 부르는 주님의 목소리를 외면한다면, 내 습관에 얽매여 늘상 같은 나만을 고집한다면 불리어질 수는 있으나, 선택은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나를 떠나 너를 볼 줄 알고 보듬을 줄 아는데서 출발합니다. 지금 내가 버리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매여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얽매임 때문에 행여 지금 이 순간 하늘나라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염려됩니다.

박병규 신부
  |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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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는 대로 누구든지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종종 어떤 사물에 비유하셨다. “겨자씨와 같다. 또 누룩과 같고 그물이나 밭에 묻힌 보물과 같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하늘나라를 사람에도 비유하셨다. “씨뿌리는 사람과 같고, 빚진 종들과 셈을 하는 어떤 임금과 같고, 아침 일찍 길거리에 나가 일꾼들을 찾는 포도원주인과 같다. 혹은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 하늘나라를 어떤 장소로 소개하신 것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사물들(겨자씨, 누룩, 보물 등등)이나, 이런 저런 사람들이 ‘이러저러하게 존재해 있는 모습’ 내지는 ‘이러저러하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소개하신 것이다. 결국, 하늘나라는 ‘여기 또는 저기’(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가운데”(루카17:21) 내지는 우리의 생활 속에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로써 이미 내가 있는 그곳이 하늘나라가 되거나 혹은 아니거나 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참으로 맞는 말씀이다.

하늘나라는 어떤 임금과 같고, 혹은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고, 또는 어떤 씨 뿌리는 농부나 어떤 장사꾼, 혹은 어떤 여인과 같다. 비유에 나오는 이 주인공들은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지금도 세상 어느 곳에서나 각자 자기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 또한 그 비유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각자 자신이 하고 있는 그 일을 통하여 하느님을 더 잘 알기 위해 노력하고, 또 그렇게 해서 하느님을 더 사랑하게 됨으로써 자기 영혼 육신의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산다면, 그 자체로써 이미 여기서부터 하늘나라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그 예복 역시 그분의 초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하늘나라를 인격체(사람, 즉 여인, 임금, 주인 등)에 비유하셨으니, 예복이란 하느님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여 그분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께 우리도 우리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다.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모두 다 하늘나라에 불러주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혹여 우리가 대죄 중에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인자한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실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다시 말해 자기 스스로 자신을 단죄해버릴 때 하늘나라는 영영 나에게서 멀어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를 단죄하고, 더불어 이웃도 단죄한다. 그래서 하느님과 우리 사이, 그리고 우리들 서로의 사이를 벌려놓는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그분이 원하시는 예복일 것이다.

김상조 대건안드레아 신부
  |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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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대구] 기꺼이--

우리에게 혼인 잔치는 놀라운 일로 기억됩니다. 예수님의 첫 기적이 혼인 잔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혼인 잔치는 아름다운 일로 기억됩니다. 성모님의 마음 씀씀이로 마지막까지 기쁘게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혼인 잔치는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받은 이들은 오기 싫어하고 잔치에 들어온 이들 중에서 쫓겨나는 이도 있습니다. 기쁨의 잔치가 아니라 두려움의 잔치가 되어 버렸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모두가 “하고 싶어” 합니다. 신랑, 신부는 사람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싶어 하고, 성모님은 술이 떨어진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고, 종들은 시키는 일을 하고 싶어 하고, 손님들은 술맛을 보고 기꺼이 칭찬을 하고 싶어 합니다. 모두가 “하고 싶어” 애달파하니 예수님께서도 때를 바꾸어서라도 “하게 되”었습니다.

임금의 혼인 잔치에서는 임금님 혼자만 “하고 싶어” 애달파하고 사람들은 “하기 싫어”합니다. 초대받은 사람은 가기 싫어하고, 얼떨결에 잔치에 온 사람은 옷차림을 싫어합니다.

“정승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이보다 더 맞을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도 사람들을 억지로 웃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매주일 하느님 혼자 애달파봐야 매주일 번거로운 일이 될 뿐입니다.

“ 기쁘다”와 비슷한 말이 “기껍다”입니다. 신앙의 “기쁨”도 신앙생활을 “기꺼이 하고 싶어” 애달파하는 이에게 주어집니다. “기꺼이 주고 싶어” 애달파 하시는 분께서 먼저 주실 것입니다.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필리 4,19)

그리고 마지막 날에 우리의 신앙생활은 놀라운 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 대구대교구 이병훈 요한 신부 - 2017년 10월 15일
  |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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