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주일강론 (가해)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50 40.8%
[춘천] 눈물을 닦아 주실 이 누구신가?
조회수 | 2,517
작성일 | 05.10.08
그리스도를위해내 작은자유를포기한다고
그것이 구원의 감격에 비할쏘냐.
몸과 마음 정화 시켜 깨끗한 예복으로 갈아입고
주님의 잔치에 초대받아갈 수 만 있다면…
내 눈물을 닦아 주실 이 누구신가?

요즈음 신문과 방송을 보면 온통 어두운 기사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신문과 뉴스를 보지 않는다고도 한다. 왜 요즈음 사회는 어두운 면이 이다지도 많은가? 생활이 힘들다고 자살하는 사람, 돈 때문에 아내와 자식을 죽이는 무서운 사람, 또 남편을 죽이는 아내, 강도, 살인, 등등….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은 살기가 힘들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렇다. 세상 살기는 결코 쉽지 않다. 쉽게 생각하고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이 잘못된 것이다. 성서에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창세 3,17)고 하셨다. 그러니 세상을 쉽게 살려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이렇게 가혹한 저주만 내리셨는가? 아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 제1독서에서는“주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이사 25,8)고 하였고,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한량없이 풍요하신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필립 4,19)라고 말하고 있다. 또 복음은 임금님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받는 사람들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구원으로 초대하셨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렇다. 구약에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고통과 죽음의 세계에 던져졌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창조물인 인간을 그 어둠의 세계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기쁨과 희망과 구원의 세계로 다시 우리를 초대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을 저버리고 세상의 쓸데없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스스로 어두움의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기에 세상은 우리를 힘들고 어렵게 하는 것이다. 세상의 쓸데없는 탐욕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비천하게 살 줄도 알며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어느 경우에도 감사드리며 살 수 있습니다”(필립 4,12-14)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이시다. 그분만이 이 세상의 어두운 질곡에서 시달리며 흘리는 우리의 눈물을 씻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우리를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주님이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뻐하고 노래하고 즐거워하며 주님께서 몸소 이 산을 지켜 주신다고 용약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잔치는 즐겁고 유쾌한 인생의 축복이며, 우리 신앙인은 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잔치의 흥겨움과 기쁨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 초대를 거절하며 세상의 다른 탐욕에 빠져들 때 행복과 축복에서 거부당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나의 눈물을 씻어주시고, 행복의 잔치에 초대하시는 하느님께만 의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직 주님만 바라고 기뻐하고 노래하며 즐거워하는 참 신앙인의 삶의 길을 함께 가지 않겠는가?

내 눈물을 닦아 주실 이 누구신가?

정귀철 신부
450 40.8%
초대합니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아이들의 웃음소리 가득한 '가을 한마당 축제'를 개최하오니, 바쁘시더라도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두 사람 따뜻함과 감사함으로 함께한 날들이 모여 부부의 연을 맺게되었습니다. 이런 뜻 깊은 날에 평소 두 가정을 지켜봐 주신 여러 어른과 친지분들을 모시고자 하오니 부디 참석 하시어 바른 뜻과 건강한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격려해 주시고 축복으로 빛내 주시면 큰 기쁨 으로 간직하겠습니다."

초대장이 넘쳐나는 계절입니다.

어린이 운동회 초대장에서 동네 체육대회, 알지도 못하는 이름의 청첩장, 학술발표회, 새 성전 봉헌, 음악회, 출판기념회, 회갑 초대, 칠순 초대, 심지어는 개업식 초대까지…. 정말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일까 생각해 봅니다. 진정으로‘나의 참석을 바라고 있을까’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빈 손으로 가도 반가워 할까? 빈손으로 왔다고 나중에 욕이라도 하지 않을까? 초대장을 받고 기뻐할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날짜와 시간을 놓고 불평없이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일을 미룰 사람은 몇이나 될까?

많은 초대장을 놓고 고민합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두고 고민하는 신자들을 생각해 봅니다. 고민하는 사람들이야 그래도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예 무시하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 이번 주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여!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초대장을 놓고 새로운 고민을 합니다.

초대받고 온 사람들에 대해 얼마나 정성을 다했는지. 초대하는 사람들도 참석한 사람들에게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가진 것이 많고, 지위가 높고, 반가운 사람만이 아니라 가진 것이 없고, 깨끗하지 못해도,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눈에 띄지 않아도 따뜻하게 맞이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오늘 새로운 마음으로 초대장을 씁니다. "초대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 오신 여러분을 주님의 마음으로 맞이하지 못한 것을 속죄하며 용서를 구합니다. 부디 저로인해 주님을 멀리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저를 보지 마시고 주님을 보시옵소서. 오셔서 부족함이 많은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용영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 10.10
450 40.8%
삶은 주님께서 주신 풍요로운 잔치

풍요로움의 신앙

“둘이서 마시노라니 산에는 꽃이 피네/한 잔 먹세, 또 한 잔 먹세 그려/나는 취해 이만 자려니, 자네는 갔다가/내일 술 생각나면 거문고 품고 찾아오게”

중국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이 지은 <산중대작>이란 시입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은자들이나 개벽을 꿈꾸고 이상사회의 건설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불태웠던 이들은 한결같이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속 영욕에 대한 집착이나 권력에 빌붙어 자신의 자유를 버리는 비굴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하늘이 지붕이었고 땅이 누울 거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시대에서 그릇된 권력이나 모순된 사상에 저항했던 자유인들과 신앙의 참된 믿음 안에 삶의 모습을 바꾼 이들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끝내 실망하고 포기하는 삶이 아닌 승리의 확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상이 실현되지 않자, 낙향하여 세상으로 나오기를 거부하며 끝내 은둔의 삶으로 생을 마치거나, 혹은 정처없이 떠돌며 술로 인생을 망치거나 하지 않고 이미 이 세상에서 승리하였다는 뚜렷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때문에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 12~13)

사실 세상을 이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승리와 넘치는 기쁨의 자유가 자신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 은총의 힘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을 살았으며 눈으로 본 듯한 확신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집, 그 천상의 잔치를 즐길 줄 알았습니다. 이는 그 같은 삶을 지상에서 먼저 사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신앙의 연장이었던 것입니다.

‘르낭’이라는 신학자는 자유인 예수님을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갈릴래아를 두루 돌아다니셨다. 그런데 수세기에 걸쳐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주 이 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무엇에 얽매임 없는 자유와 축제를 사셨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의 자유와 축제의 삶을 보고 경직된 당시대의 사람들이 비아냥거림으로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루카 7, 34)라고 비난했겠습니까? 진정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은총 안에 이 세상에서부터 풍요를 살 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민족들을 위한 잔치

술에 대한 예찬론자이며 지극히 애주가였던 이백은 평생 은둔하고 싶은 욕망과 출세하고 싶은 욕망의 극단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객사합니다. 그러나 장차 오게 될 하느님 나라의 천상 잔치에 대하여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예언합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이사 25, 6)

그날, 장차 오게 될 하느님 나라에서의 흥겨운 잔치의 주된 내용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잔치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개인과 민족의 편협된 이기주의와 국수주의를 떠나 보편된 희망의 구원을, 그 축제의 잔치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적인 음식으로는 인간적인 흥겨운 술과 살지고 기름진 음식이지만,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덮개를 없애시어 눈물과 죽음을 치워주신다는 영적인 선물도 아울러 약속하고 계십니다.

너무도 인간적인 이기심에서 허우적거렸던 우리들, 세상이 이끄는 욕망에 사로잡혀 진리의 빛을 가렸던 너울과 덮개가 사라져, 비로소 우리가 꿈꾸어야 할 참된 희망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에는 세상 미련과 집착으로 인하여 흘렸던 모든 눈물들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 같은 확신에 찬 희망이 있었기에 모든 신앙인들은 세상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더욱 확신에 찬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 13)

이 같은 희망 때문에 우리가 이 지상에서부터 치르는 잔치인 성찬례는 보편 구원에 대한 감사의 잔치이며, 하느님 친히 인간의 죄에 대한 용서의 손길을 뻗치신 거룩한 친교를 모범으로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하는 형제적 친교의 잔치이며, 구원된 자유인이 누리는 지상에서부터의 기쁨의 잔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분명 이 같은 잔치에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그분 초대에 응답하는 희망의 삶을 우리가 오늘 살아야 합니다.

배광하 신부
  | 10.10
450 40.8%
무엇을 가지고 갈까요?

만남은 설레임입니다. 만남은 어색함입니다. 만남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만남은 이해입니다. 만남은 용기입니다. 만남은 초대입니다. 만남은 시작입니다. 만남은 약속입니다. 만남은 뒤돌아 보는 것입니다. 만남은 다리입니다. 만남은 미소입니다. 만남은 그저 만남입니다. 만남은 아픔입니다. 만남은 행복입니다. 만남은 기쁨입니다. 만남은 인내입니다. 만남은 절제입니다. 만남은 슬픔입니다. 만남은 단절입니다. 만남은 교집합니다. 만남은 내가 아닌 너입니다.

이와 같은 만남의 절정이 바로 ‘혼인’입니다. 혼인은 서로 다른 세계가 충돌하는 것입니다. 이 충돌은 대치상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가는 디딤돌입니다. 혼인 잔치는 많은 사람들이 혼인이라는 단 한 가지 사건 때문에 모여서 당사자를 축하해 주는 자리입니다. 또한 그 두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이유가 갑자기 의미를 갖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만큼은 우주만물이 숨을 죽이며 두 사람에게 수렴됩니다. 그런 후 그 둘의 관계가 세상을 향해서 선포됩니다. 이제 이들은 항상 함께 기억되어야 함을 말입니다.

어떤 임금이 아들의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였습니다. 청첩장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의 글이 쓰여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서 주 재료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료가 아직 음식을 만들기에 그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 수 있도록 하객 여러분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먼저, 좀 다듬어야 되겠지요. 어디를 어떻게 어느 정도 다듬어야 할 지 그 방법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양념을 넣어야 되는데, 어떤 양념이 얼만큼 필요한지, 항상 같은 양념만 넣어야 되는지, 숙성은 어느 정도 시켜야 제 맛을 낼 수 있는지, 혹시 음식 맛이 제대로 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 세심한 가르침이 있어야 될 듯 싶습니다. 오셔서 첫 걸음을 시작하는 신랑 신부에게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삶의 지혜로 축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은 청첩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혼인 잔치에 가려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잔치에 모인 사람들 역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였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는 무엇을 가지고 혼인을 축하해 줄 것인가? 내 삶이 새 신랑 새 신부가 필요로 하는 삶의 지혜를 담고 있을까?

오늘 말씀을 떠올리면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과 선택된 이들 목록에 내 이름이 등재되어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이상철 신부
  | 10.08
450 40.8%
[춘천] 혼인 잔치와 예복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어떤 임금이 차린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에 비유하십니다. 임금은 성대하게 잔치를 준비하여 초대받은 이들을 부르러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초대받은 자들은 자신의 일을 하러 가거나, 종들을 때리거나, 죽여 버렸습니다. 진노한 임금은 군대를 보내어 살인자들을 처형하고 마을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닥치는 대로 데려와 잔칫상을 채우도록 하였습니다. 임금이 잔칫방에 들어 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견하고 그의 손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뽑으시어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하늘나라의 잔치에 초대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충직한 종들, 예언자들을 보내시어 하늘나라에 올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모욕하였습니다. 심지어 때리고 죽여 버렸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시대에 오신 하느님 아버지의 외아들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았고 그분의 제자들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이처럼 구약의 예언자들과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벌을 받게 됩니다. 서기 70 년 로마 군대의 공격으로 예루살렘이 완전히 초토화되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나라를 잃고 이천년 동안 세상을 떠돌게 됩니다. 이처럼 처음에 초대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 하늘나라의 잔칫상 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면 누구나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초대장을 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았다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요.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에 인간의 겸손하고 성실한 협력이 따라야 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가진 것을, 그것이 필요한 이웃과 나누며 살아갑시다. 이렇게 사랑의 마음을 담은 예복을 차근차근 준비합시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오로지 사랑으로 만나 뵈올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며 하늘나라의 잔치에 모두 함께 나아가도록 합시다.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 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이사 25,9) 아멘!

▬ 춘천교구 강동금 베드로 신부 - 2017년 10월 15일
  | 10.13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725   [청주]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습니다.  176
724   [의정부] 법대로가 아닌 사랑으로  [1] 1946
723   [인천] 반성문 -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5] 2287
722   [수원] 하느님과 함께, 이웃과 함께  [3] 2070
721   [서울] 가장 큰 계명  [4] 2871
720   [군종]서로 사랑하여라.  90
719   [대구] 사랑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라  [1] 1876
718   [부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4] 2429
717   [안동] 애주애인(愛主愛人)  [2] 2189
716   [춘천] 이웃 사랑  [3] 2284
715   [원주] 최고의 계명 ‘사랑’  [2] 135
714   [광주] 사랑의 계명  [1] 120
713   [대전] 이웃 사랑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1] 2404
712   [마산] 가장 큰 계명 - 참사랑  [1] 2282
711   [수도회] 사랑하기  137
710   (녹) 연중 제30주일 독서와 복음  [4] 1816
709   [수도회] '예수 그리스도'란 새 예복  [1] 2210
708   [전주] 구원의 잔치에 초대합니다.  [1] 2212
707   [수원] 혼인잔치의 비유  [5] 2704
706   [서울]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  [5] 2539
705   [원주] 우린,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2024
704   [인천] 하느님 나라의 예복  [2] 2124
703   [대전] 초대 받은자의 예복은?  [2] 2121
702   [의정부] 예복은 미리 준비해야 필요할 때 입을 수 있습니다  [2] 2338
701   [광주] 예복을 단정하게 입자  [1] 2051
700   [군종] 잔치에 초대받은 당신  [1] 2125
  [춘천] 눈물을 닦아 주실 이 누구신가?  [4] 2517
698   [안동] 본당 어르신은 조약돌  [1] 2280
697   [부산]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까?  [4] 2323
696   [마산] 우리의 구원에는 예복이 꼭 필요합니다.  [3] 2261
695   [대구]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4] 2473
694   (녹) 연중 제28주일 독서와 복음  [3] 1713
693   [서울] 그리스도인의 기쁨  [5] 2232
692   [수도회] 예수님 편에 선 사람들  [2] 1927
691   [전주] 하느님 사랑 감사하고 나누자  [1] 2088
690   [의정부] 소출을 바라시는 하느님  [2] 2003
689   [춘천] 탐스러운 열매를 풍성히 맺으리라  [3] 2024
688   [인천] 시간이라는 밭에 무엇을 자라고 있는가?  [4] 2094
687   [원주] 지금 우리도 착각 속에 살지 않습니까?  147
686   [수원] 악한 소작인들의 비유  [2] 2308
1 [2][3][4][5][6][7][8][9][10]..[19]  다음
 

 

주일강론

가   해

나   해

다   해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17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