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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조회수 | 2,400
작성일 | 05.10.15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시오.
그러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드리시오.'

세상의 정권이 하는 일과 종교가 하는 일이 다르다는
의미로 알아듣지 말아야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헤로데파 사람들과 의논하여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씌울 계획이었다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유대아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예수님이 만일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면, 예수님은 조국과 동족을 배반하는 반역자로 비난받을 것입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말씀하면,
예수님은 로마 정권의 식민지 통치에 저항할 것을 선동하는 정치범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모호한 말씀으로 이 함정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의 지혜로움만 본다면,
예수님은 탁월한 지혜를 가져서 유대인들이 만든 함정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지극히 지혜로운 분이고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과 무관한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은 당신이 살아남기 위해 지혜롭게 처신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평가하는 말도 소개합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진실하신 분으로서...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고, 아무도 꺼리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참되게 가르치시는 줄을 압니다.’

예수님은 지혜롭고 영특한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에 열중하셨던 분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모아 자기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도 않았고, 일신의 영광을 위해 권력을 지향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제사 의례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 질곡(桎梏)에서 해방시켜, 하느님 자녀의 삶을 살도록 하는 일에 열중하셨습니다.

“수고하고 짐을 진 여러분은 모두 내게로 오시오.
그러면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마태오 복음 11장 28절).
그분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듯이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치는 행위로서만 만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 안에 살아계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가르치고 실천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의 지혜로움에만 시선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한 질문은 하느님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말이 나올 여지가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세금을 내라 혹은 내지 말라는 두 개의 답 중 하나를 유도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질문 앞에서도 하느님을 말씀하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그러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여건에서도 하느님을 가까이 의식하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꿋꿋이’(디모테오 2서 4장 2절)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에 대해 가르친 분이었습니다.

마르코복음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느 날 길에서 ‘선하신 선생님’이라 부르면서 접근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왜 나를 선하다고 합니까?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습니다’(마르코 복음 10장 16절-17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선함은 하느님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고 믿고 계셨습니다. 율법과 성전이라는 좁은 종교적 실천과 의례를 넘어 인간의 선함이라는 넓은 삶의 이야기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계십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모습에도 하느님에 대한 의식은 강하게 살아 있습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절망적 순간에도 예수님은 당신이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이라는 절망의 ‘깊은 구렁 속에서’(시편 130,1) 하느님을 부르면서 생명을 잃으셨습니다.

예수님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계셔야 한다고 믿고 계십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려면, 우리 자신을 채우고 있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이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고 그분은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굶주리는 사람이 행복하다. 우는 사람이 행복하다.’

예수님의 이 행복 선언은
재물에 대한 욕심에서 해방된 우리의 마음, 먹고 마실 것의 욕심에서 자유로워진 우리의 마음, 기쁨과 쾌락의 추구에서 벗어난 우리의 마음에 하느님이 계실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일을 부족하게 누리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재물이 나쁘지 않고,
먹고 마시는 일이 죄스럽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사실 먹고 마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하느님이 주신 생명이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자기 스스로를 채워버리지 말고, 배불리 먹고 마시고 기쁘고 즐거운 것을 최대의 보람으로 삼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일에 자유로워서 선하신 하느님을 의식하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실천 안에서만 체험되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헌신적 봉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자기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이웃을 위해 나누고 봉사하는 우리의 실천 안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런 나눔과 봉사가 삶의 보람으로 느껴질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이웃을 위해 기쁨이 되고 도움이 되겠다는 마음과 실천 안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헌신할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드리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사랑과 헌신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믿을 교리와 지킬 계명 그리고 성당의 전례 안에만 하느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일상생활은
하느님과 무관하여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 먹고 마시는 일과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대우 받는 일로 채워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데에 있습니다.

신앙은
출가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행(苦行) 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자기 힘이 닿는 대로 자기 이웃을 위해 열린 마음으로 살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열린 마음으로, 이웃을 이해하고 봉사하는 마음 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 사실을 알고 그런 실천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에게 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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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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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것 - 위대한 리더십

오늘 복음의 내용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예수님 사이에 지도자의 리더십에 대한 헤게모니(주도권)의 논쟁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즉 주도권은 누가 더 지도자로서의 위대한 리더십을 가지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바리사이파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을 때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자신의 리더십을 발휘합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는 예수님의 말씀안에서, 그 분의 리더십은 세속적인 것과 분명히 다른 하느님의 것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말은 세상의 절대자는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며 세상의 어떤 가치도 하느님처럼 절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 “무엇이 카이사르에게 속하고, 무엇이 하느님께 속하는지”를 살펴서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에게도 주어진 소명입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정교(政敎)의 권위주의적 기득권에 안주하여 자신의 리더십 부재를 남의 흠집으로 돌리고 자신의 맘에 드는 코드인사에 올인하는 지도자의 안일한 자기도취에 빠져 있습니다. 이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도 온갖 세속적인 정치판에서 자행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지도자의 리더십에 위선자라고 불렀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는 세속의 지도자와는 다릅니다.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것은 권위주의적인 고정관념에 머물러 있지 않고 시대의 징표에 따라 패러다임의 전환(고정관념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하는 지도자의 리더십입니다. 이러한 리더십은 예수님의 가르침-율법의 근본정신, 참된 행복의 길, 삶의 지혜, 영생의 길 등의 궁극적인 삶의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비전으로 드려냅니다.

오늘날 교회의 제도권안에 예수님처럼 시대에 맞는 패러다임의 전환에 입각한 지도자의 리더십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결국 자신의 리더십 부재를 코드인사에 치우치는 자신의 안일함에 안주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카이사르의 것과 하느님의 것과의 구별을 할 줄 모르는 자기 독선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본당과 교구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목적 관계의 불목과 갈등도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고, 화해와 일치를 위한 치유의 손길은 사목적 지도자의 책임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계기가 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오늘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들려주는 복음적 메세지입니다.

조옥진 신부
  |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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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것

로마의 속국이었던 이스라엘이, 로마에 세금을 낼 것이냐 말 것이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특히 세금은 신에게 내는 것으로 인식하던 이들에게, 이 문제는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을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와 직결되기에 아주 신중하고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들이, 당연히 세금을 내야하는 헤로데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 앞에 나섭니다. ‘세금을 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내용은 다르지만, 우리도 현실에서 자주 만나고 자주 괴리감에 빠지게 하는 불편한 상황입니다. ‘신앙이 우선인가? 일이 우선인가?’ 특히 오늘 바리사이들의 질문 안에는 단순히 세금을 내고 내지 않고의 문제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까지도 내포하고 있기에 더욱 불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아,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마태 22, 18)고 바리사이들을 질책하시며 세금으로 내는 돈을 보여라고 하십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돈이 바리사이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바리사이들의 갈등이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이런 갈등은 우리 안에 참 자주 그리고 많이 일어납니다. 믿는다고는 하면서도 삶으로 믿지 못하는 갈등 말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있는 잘못된 관점을 전환시켜 주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우리들의 인간적인 관점을 하느님의 관점으로 전환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렇게 갈등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황제(사람)의 것은 황제(사람)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이 세상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진리 앞에, 그렇지 않다고 반론할 수 있는 신앙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인간은 사람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구분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주님께서 소중하게 맡겨주신 것인데도 자신의 것인 양 오해하며, 집착해서 마음대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이것도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이런 우상을 숭배하기 때문에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을 합리화시키려고 예수님께 감히 올가미를 씌울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빠져들 수 있는 우상입니다.

‘해 뜨는 곳에서도 해 지는 곳에서도 나밖에 없음을,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음을’ 알게 하시려는 주님 마음을 기억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더는 갈등하지 말고,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임을 고백할 줄 아는 우리 모두였으면 합니다.

곽길섭 베드로 신부
  |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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