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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가장 큰 계명
조회수 | 3,501
작성일 | 05.10.21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종교 지도자들이 까다로운 질문들을 던집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의 복음입니다.

어느 율법학자가 묻습니다.
"선생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는 사실 예수님에게만 주어졌던 질문은 아닙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율법 계명들을 요약하는 일을 곧잘 했습니다. 말하자면, 더 큰 계명 안에 더 작은 계명들을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얼마나 통찰력 있는 율법학자인지 가려낼 수 있었고, 이름도 날리게 됩니다.

예수 시대의 큰 율법학자였던 <힐렐>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어느 이방인이
당시 힐렐과 쌍벽을 이루던 율법학자인 샴마이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에 율법을 가르쳐 주신다면 저를 개종자(改宗者)로 삼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샴마이는 그를 괘씸하게 여긴 나머지 막대기를 들고 쫓아냈습니다.
그 이방인이 이번에는 힐렐에게 가서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화를 내기는커녕 "당신이 당하기 싫은 일을 당신 이웃에게 하지 마시오.
이것이 율법의 전부요,
나머지는 모두 풀이입니다.
가서 이것을 익히시오" 라고 답변했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의 질문에 두 가지 계명으로 답합니다.
그 유명한 사랑의 이중 계명입니다.

몸과 정신과 생각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보여주는 구절(37절)은 신명기 6장 5절에서 왔고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구절(39절)은 레위기 19장 18절에서 끌어왔습니다.

율법학자의 교묘한 질문에
구약성서 구절을 들어 적절하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 두 계명을 중첩시켰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하느님과 인간을 완전히 별개의 존재로 간주했습니다.

인간이란
그저 하느님에게 잘 보여야 하기에 그분이 주신 율법을 충실하게 지켜야 구원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도 인간을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이 종종 등장합니다.

제1독서인 출애굽기 22장 20절- 26절에는
하느님이 보잘것없는 과부와 고아를 돌보시는 분으로 나옵니다. 그분은 과부와 고아들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들의 기도를 절대로 외면하지 못합니다.

데살로니카 1서 1장 5ㄷ절-10절에서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교우들의 믿음을 칭찬합니다.
그들은 참으로 모범적인 신앙인들이라 주님의 가르침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안에서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가졌기에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사실 하느님이야 우리가 아무리 떠받든다 한들 조금도 달라지실 분이 아닙니다. 충분히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관심도 인간에게 쏠려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 중
누구도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느님과 사람을 보는 그들의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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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크고 첫째가는

인생의 경륜이 쌓이면서 제가 대답하기 싫어하는 종류의 질문이 있습니다. '가장' 또는 '최고'와 같은 수식어가 붙는 질문들입니다. 예를 들어, '신부님은 어떤 음식을 가장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곤란해집니다. 어떤 때는 한식이 좋지만, 어떤 때는 중식이, 어떤 때는 일식이, 어떤 때는 양식이 좋기도 합니다. 음식은 골고루 먹어야 건강한 것인데, 딱히 특정 음식을 집어내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매운 음식 빼고는 다 좋아합니다'라고 두루뭉술하게 답변을 합니다.

본당에서 사목하시는 모 신부님은 몇몇 신자에게 자신이 최고로 좋아하는 음식을 솔직히 말했다가 후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구역반 모임에 갈 때마다 자신의 수저 앞에는 늘 그 음식이 올라와 곤혹스러웠다고 합니다. 실제로 '가장' 또는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는 질문은 즉각적으로 응해서는 안 되고, 시간적 여유를 갖고 신중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또한 답변을 할 때도 가급적이면 '가장'이나 '최고'라는 단정적 표현을 떼어내는 것이 현명합니다. 오직 한 가지만이 '가장'이나 '최고'가 될 수 있기에, 본의 아니게 그것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위험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질문을 받습니다.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는 표현대로, 그는 예수님의 답변에 시비를 걸기 위해 질문을 던집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율법의 계명들이 613가지에 이르렀고, 바리사이들에게도 어떤 계명들이 보다 중요한가에 대한 일치된 견해가 없었습니다. 율법 교사는 그 많은 계명 가운데 예수님이 한 가지를 선택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저 없이 답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분명하게 덧붙이십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저는 이 표현에서 예수님의 강렬함을 느낍니다. 율법 교사는 시비를 걸려고 '가장 큰' 계명이라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가장 크고'에 덧붙여 '첫째가는' 계명이라고 단정적으로 답변하십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은 당시 율법의 613가지 계명에는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둘째로 꼽으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 교사의 함정을 파놓은 질문에 빗대어, 시비 거리를 전혀 제공하지 않으면서도, 당시의 수많은 계명은 모두 제쳐 놓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훨씬 중요하고 큰 계명임을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더 나아가서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는 예수님의 표현은 사랑이 모든 계명과 가르침의 근본임을 극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최상급의 표현은 사랑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자 정체임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큰', '가장 우선적인', 그리고 '최상의' 계명으로 꼽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우리들 자신의 삶에서도 '가장 큰', '가장 우선적인', '최상의' 실천으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반성해 봅니다.

김영춘 베드로 신부
  |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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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습니다.

대놓고 얘기하진 않더라도 명절 같은 때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있다고 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끼리 끝까지 즐겁게 지내려면 ‘정치 얘기는 절대 금지’라는 함구 규칙이 암암리에 가족들을 지배한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요즘 교회 내에서도 사회적 문제를 바라보는 견해 차이로 서로 생각이 엇갈리면서 찬성(지지)과 반대(비난)로 나뉘어, 서로가 서로를 몹시 불편해하는 가슴 아픈 모습을 가끔 보게 됩니다. 나와 생각이 ‘다름’은 생각의 ‘차이’일 뿐 ‘틀림’은 아니라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의 현실은 별로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사랑 - 이웃 사랑’ 말씀이 나옵니다. 이 두 가지 계명을 저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이것을 다른 말로 ‘경천’(敬天)이라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애인’(愛人)이라 합니다. 이‘경천애인’을 우리그리스도교의 최고 가르침이라 할 수 있는데, 구약의 모세오경에 기록되어 있는 엄청난 분량의 ‘율법’ 내용을 예수님은 너무나 명쾌하게 두 가지 ‘사랑’으로 요약합니다. 그런데 더 대단한 일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등한 위치, 똑같은 무게로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느님 사랑’만 강조하셨다면 하루에 몇 시간씩 하느님과 대화 나누고, 하느님에 푹 빠져 살면 된다라는 식의 ‘혼자만의 신앙’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만약 예수님이 ‘이웃 사랑’만을 중요한 계명으로 내놓으셨다면, 마치 종교가 아니라 박애주의를 실천하는 ‘자선단체’처럼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이 두 가지 사랑의 계명은 둘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빠지거나 어느 한 쪽으로 너무 쏠려서도 안 될, 즉 ‘이웃 사람들을 무시한’ 오로지 하느님 사랑만도 아니고, 또 ‘하느님을 외면한’ 단순한 이웃 사랑만도 아닌, 하느님과 이웃 모두를 향한 ‘두 사랑’의 균형과 조화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임 교황인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웃 문제, 사회적 문제보다도 오로지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살고 있는 요즘 세태를 보면서 살짝 생각의 각도를 비틀어 봅니다. 만약에 악마의 유혹이 있다면 우리도 자칫 그런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악마는 아주 열심하고 철저하게 하느님을 향하도록 부추기면서, 그렇게 하느님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에게 ‘다른 곳에 한눈팔아서는, 안되고 세상과 이웃에게 시선을 흩뜨리지 말라고 유혹합니다. 그리고 그럴듯한 이유를 댑니다. ‘아니, 내가 딴 데 한 눈을 팔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을 따르겠다는데, 이런 나를 보고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라는 유혹입니다.

혹은 ‘이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들고, 내 신앙 하나 제대로 유지하기도 힘든데, 남들에게 관심 갖고 그들을 챙기라는 말, 내 코가 석 자인데.’라는 생각 또한 유혹입니다. 유혹은 다독이며 달랠 문제가 아니라, 단호하게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이명찬 신부>
  |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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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랑하십시오”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10월에 가장 바쁜 가수가 누구인 줄 아십니까? 가수 이용이라고 합니다. 그가 부른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 때문입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가사와 서정적인 멜로디가 10월이라는 계절에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10월의 마지막 주일에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가족과 가을 여행을 떠나 보는 것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잊고 있었던 분들이 있다면, 전화라도 해보고, 한번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저도 며칠 전 우연히 군대생활을 기록했던 ‘추억록’을 보았습니다. 군복을 입고 찍었던 28년이 지난 사진들을 보았습니다. 함께 근무했던 친구들이 제대하는 저를 위해 적어주었던 글을 보니 가슴이 ‘찡’했습니다. 부는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과 그리움, 사랑은 이 가을에 잘 어울리는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엘 다녀왔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강론을 했기 때문에, 제 말을 실천하고 싶기도 해서,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 선산을 다녀왔습니다. 어머님은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조금 멀고 힘은 들었지만 모처럼 어머님과 함께한 가을 여행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내장산 근처에 있는 5대조 할아버님의 묘소를 다녀왔습니다. 증조부 할아버지의 묘소는 고향 선산에 모셔져 있는데, 5대조 할아버지는 박해 때 순교를 했기 때문에 험한 산속에 모셨다고 합니다. 저도 이번 여행에서 처음 5대조 할아버지의 묘소를 방문했습니다. 험한 산길을 올라, 말없이 계신 할아버님의 묘소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모진 박해를 당했고, 순교하신 조상께서는 사제가 되어 인사를 온 후손을 보시면서 흐뭇해 하셨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고향 어르신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후손들이 조상들의 묘소를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는 것은 조상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조상을 찾은 후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순교하신 조상께서는 이미 하늘나라에 계실 것이다. 우리가 그분들의 묘소를 찾는 것이 그분들께 도움이 되지 않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조상들은 하늘나라에서 바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다.” 저는 고향 어르신의 말씀을 들으면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어쩌다 한번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에 찾아간 것은 그렇게 내세울 일도 아니고, 조상님들께 큰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제게 신앙의 뿌리를 알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었고, 저의 영적인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좋은 일을 한다고, 희생을 한다고 하였지만 결국 그 결과는 제가 하느님께 더 깊이 나아갈 수 있는 기회였던 것입니다. 고향으로 가고 오는 길에 어머님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바쁘다는 이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어머님과 깊이 있는 대화를 거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탈출기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가난한 사람, 고아나 과부를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받을 것이 있어도 무리해서 그들의 처지가 너무 힘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과부나 고아를 돌보아 주는 것은 우리가 선행을 베푸는 것이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나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은총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온 마음과 생각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몸처럼 여러분의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율법과 계명의 근본 정신입니다.”

남을 위한 희생과 봉사는 자랑할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이를 도와주고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생색을 낼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환난과 박해를 이겨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른 사람들에게 큰 축복이 주어지리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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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무한한 사랑의 나눔

매월 두 번째 주일에는 본당에서 진귀한 풍경이 벌어집니다. 신자분들 각자 미사를 드리러 오시면서 한 손에 콩 한 봉지, 쌀 한 주먹, 식용유 한 통, 설탕 한 봉지 등 조금씩 집에서 가져와서 미사 때 봉헌합니다. 가정 방문이나 환자 방문을 하면서 느낀 바로는, 결코 생활 사정이 넉넉지 않을 텐데,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가진 것을 더 가난한 이들과 나누고자 이러한 나눔을 실천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매월 둘째 주일을 ‘자선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본당 신자들의 나눔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은 “도대체 이러한 나눔의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라는 것입니다. 마치 콩 한 조각이라도 나누어 먹듯이, 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는 마음은 분명 사랑하는 마음, 자비로운 마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건 없는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 확신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저희 신자들은 하루하루 주어지는 삶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도우심을 충분히 느끼고, 그것에 감사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사랑과 감사가 각자의 마음에 가득 차 있기에, 그 사랑이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흘러넘쳐 이웃에게까지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가장 큰 계명들을 저희에게 알려 주십니다. 이두 가지 계명은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게 될 때, 자연스럽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가득히 채우게 되고, 그 사랑이 흘러넘쳐 나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해 받은 우리의 이웃들은 다시 한 번 그 나눔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더더욱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무한한 사랑의 나눔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며,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우리 마음에 가득히 채우고, 우리가 받은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 흘러넘치는 사랑을 나 자신과 우리의 이웃들에게 나눈다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저는 또다시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 달 두 번째 주일을 기다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봉헌 시간 때 하느님의 사랑을 양손에 가득히 들고 나오는 예수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쁨 가득한 표정으로 그 사랑을 나누어 받고 돌아갈 또 다른 하느님의 자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과테말라 신자들처럼, 하느님 안에 머물며,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가득히 채우고 나눌 수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 서울대교구 김현진 토마스데아퀴노 신부 - 2017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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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황금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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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양한 종교, 도덕, 철학에서 발견되는 원칙 중 하나가 ‘황금률’입니다. 황금률은 ‘타인이 해주었으면 하는 행위를 하라’라는 금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른 황금률은 타 종교의 그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제1독서(탈출기 22장 20절-26절)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해방하시고 그들에게 주신 십계명(율법)을 설명해 주시는 구절입니다. 구약의 백성이 이집트에서 이방인 노예로 살았기 때문에 그때를 생각하며 다른 이방인들을 억압하지 말라는 내용과 이어서 과부, 고아, 채무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이 소개됩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속담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입니다.

제2독서(테살로니카 1서 1장 5ㄴ절-10절)는
테살로니카의 이방인 출신 신자들이 꿋꿋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에게 감사와 격려를 표현하기 위해 바오로 사도가 쓴 편지입니다. 테살로니카 1서는 신약성경 중 가장 먼저 쓰인 글로서,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이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기쁘게 지내며 이웃에게 좋은 표양이 되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연중 제30주일 복음(마태오 복음 22장 34절-40절)은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대화를 나누시는 장면입니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라는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의 율법들을 인용하시며 대답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기 6장 5절)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기 19장 18절)라는 것이 그분의 답변인데, 이 두 계명을 가리켜 ‘사랑의 이중 계명’이라고 부릅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핵심은 결국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그러면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은 어떠해야 합니까?

단지 성당에 와서 바치는 미사만이
하느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와 사랑 실천인지, 이웃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은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할 시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빼면 ‘앙꼬 없는 찐빵’과 다를 게 없습니다.

나의 의무보다는
나의 권리를 위해 큰소리치고, 내가 이웃에게 베풀지 않은 사랑과 배려에는 무관심한 채 내가 받은 피해에만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도, 그리스도인다운 모습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생명과 사랑은 거저 주어진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신앙은 헤아릴 수 없는 큰 은총입니다. 하느님과의 이 소중한 사랑 체험에 힘입어, 우리는 일상이 되어 버린 고통의 시기를 이웃을 향한 사랑의 황금률로 채워가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각자의 일상 속에서 사랑의 황금률을 어떻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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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0년 10월 25일 <서울대교구 주보>에서
  |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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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믿음보다 강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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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해
모두가 고생하며 마음을 움츠리고 살다 보니 계절의 작은 변화를 살피는 재미도 눈치가 보이지만, 그래도 가을은 속절없이 아름답게 깊어만 간다.

이제 올해 남은 두 달은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최소한 할 것은 하면서 은총 속에 살아보았으면 좋겠다. 오랫동안 사회적으로 합의된 안전 위주의 일상에만 매달려 살다 보니 이제 믿음 생활은 고사하고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라는 말도 매우 어색하게 들리는 듯싶어서 더욱 그렇다.

오늘 복음을 보면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다. 당시 유다인들은 인간 삶의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중요한 것 248개, 비교적 덜 중요한 것 365개 등 613개의 율법을 규정해 놓았다. 그리고 이것들이 인간의 삶을 의미 있고 보람되게 만드는 근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자기들이 정해 놓은
율법의 중요도에 대한 기준이 너무 모호해서 때때로 자기들끼리 갑론을박하며 무엇이 더 중요한지 다툼이 있었기에, 가장 중요한 계명,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계명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물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라고 대답하시면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놓치고 있던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히셨다.

오직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수백 가지의 율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고, 그 사랑이 모든 율법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신다.

사실 율법 교사는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가 정당하고 옳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질문을 했던 것이다.(루카 복음 11장 29절)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어 올바른 신앙생활을 구하고자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가 옳다는 것을 예수님께 확인받고 싶어서 ‘자기 사랑’이 넘친 행동을 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루카 복음 18장)에도 나오는 교만한 유다인의 전형적인 모습이자, 신자로서의 행함은 없이 드러냄만을 중요시하는 우리의 이중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율법 교사의 이중성을 심하게 꾸짖으시며, 우선 자기 위주의 이기적인 삶의 방식을 버려야만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신다. 이것은 율법과 믿음으로 공고히 산다 하여도 자기를 내려놓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하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사랑은 관심’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율법 교사들처럼 자신의 믿음이 종교화되어있지는 않은지 때때로 살피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더욱 관심을 갖고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복음 13장 34절)라는 말씀을 항상 실천해야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강하더라도 그 위에 사랑이 더하지 않으면 율법주의에 떨어져 더욱 완고해지고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이다.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복음 10장 3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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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임상만 신부
2020년 10월 25일 <가톨릭평화신문>에서
  |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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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잔한 음색의 가수 심수봉이 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에 대통령의 만찬에 함께 했었습니다. 어느덧 41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당시에 장충동에서 석간이었던 동아일보를 배달하고 있었습니다. 신문은 호외를 발행했습니다.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경제성장과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했던 대통령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긴급조치와 중앙정보부를 통해서 무고한 사람을 가두고 간첩으로 조작하면서 장기집권을 하였던 대통령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게도 10월 26일은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가수 심수봉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을 겁니다. 시련과 아픔이 있었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서 새롭게 가정을 이루고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만든 노래가 ‘사랑밖에 난 몰라’입니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대 내 곁에 선 순간 그 눈빛이 너무 좋아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때문에 내일은 행복할 거야. 얼굴도 아니 멋도 아니 아니 부드러운 사랑만이 필요했어요. 지나간 세월모두 잊어버리게 당신 없이 아무것도 이제 할 수 없어 사랑밖에 난 몰라.’

시간을 되돌려 2000년 전 갈릴래아를 생각합니다.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 예수님을 만나서 삶이 변화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망과 고통의 삶이었지만 감사와 기쁨의 삶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어부들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눈이 멀었던 소경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소경은 예수님 때문에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운명에 처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운명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저 여인에게 먼저 돌을 던지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여인의 죄를 묻지 않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어 드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사랑밖에 모르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입니다. 둘째도 이와 같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루가복음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
그렇다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강도를 당해서 쓰러진 사람이 있었는데 사제와 레위인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을 업고 여관으로 데려갔습니다.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치료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까?”
율법학자는 대답하였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하십시오.”

오늘 탈출기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가난한 사람, 고아나 과부를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받을 것이 있어도 무리해서 그들의 처지가 너무 힘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과부나 고아를 돌보아 주는 것은 우리가 선행을 베푸는 것이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나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가난은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분들의 불편을 함께 고민하고,
나눈다면 그곳에서부터 하느님나라는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난과 질병, 굶주림과 헐벗음이 있는 것은 재물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의료의 수준이 낮아서도 압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입을 것이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소유하려고 하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눈다면,
우리가 서로의 접근을 쉽게 받아들인다면,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공감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넉넉하게 채우고도 많은 것들이 남을 것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예수님 시대에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한다면 오억 명을 먹이고도 넘치도록 남을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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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0년 10월 25일
  |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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