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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가장 큰 계명
조회수 | 2,871
작성일 | 05.10.21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종교 지도자들이 까다로운 질문들을 던집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의 복음입니다. 어느 율법학자가 묻습니다. "선생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는 사실 예수님에게만 주어졌던 질문은 아닙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율법 계명들을 요약하는 일을 곧잘 했습니다. 말하자면, 더 큰 계명 안에 더 작은 계명들을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그를 통해 얼마나 통찰력 있는 율법학자인지 가려낼 수 있었고, 이름도 날리게 됩니다.

예수 시대의 큰 율법학자였던 힐렐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어느 이방인이 당시 힐렐과 쌍벽을 이루던 율법학자인 샴마이에게 물었습니다. "제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에 율법을 가르쳐 주신다면 저를 개종자(改宗者)로 삼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샴마이는 그를 괘씸하게 여긴 나머지 막대기를 들고 쫓아냈습니다. 그 이방인이 이번에는 힐렐에게 가서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화를 내기는커녕 "당신이 당하기 싫은 일을 당신 이웃에게 하지 마시오. 이것이 율법의 전부요, 나머지는 모두 풀이입니다. 가서 이것을 익히시오" 라고 답변했답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의 질문에 두 가지 계명으로 답합니다. 그 유명한 사랑의 이중 계명입니다. 몸과 정신과 생각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보여주는 구절(37절)은 신명 6,5에서 왔고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구절(39절)은 레위 19,18에서 끌어왔습니다. 율법학자의 교묘한 질문에 구약성서 구절을 들어 적절하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 두 계명을 중첩시켰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하느님과 인간을 완전히 별개의 존재로 간주했습니다. 인간이란 그저 하느님에게 잘 보여야 하기에 그분이 주신 율법을 충실하게 지켜야 구원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도 인간을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이 종종 등장합니다. 제1독서인 출애 22,20- 26에는 하느님이 보잘것없는 과부와 고아를 돌보시는 분으로 나옵니다. 그분은 과부와 고아들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들의 기도를 절대로 외면하지 못합니다. 1데살 1,5ㄷ-10에서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교우들의 믿음을 칭찬합니다. 그들은 참으로 모범적인 신앙인들이라 주님의 가르침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안에서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가졌기에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사실 하느님이야 우리가 아무리 떠받든다 한들 조금도 달라지실 분이 아닙니다. 충분히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관심도 인간에게 쏠려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 중 누구도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하느님과 사람을 보는 그들의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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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크고 첫째가는

인생의 경륜이 쌓이면서 제가 대답하기 싫어하는 종류의 질문이 있습니다. '가장' 또는 '최고'와 같은 수식어가 붙는 질문들입니다. 예를 들어, '신부님은 어떤 음식을 가장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곤란해집니다. 어떤 때는 한식이 좋지만, 어떤 때는 중식이, 어떤 때는 일식이, 어떤 때는 양식이 좋기도 합니다. 음식은 골고루 먹어야 건강한 것인데, 딱히 특정 음식을 집어내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매운 음식 빼고는 다 좋아합니다'라고 두루뭉술하게 답변을 합니다.

본당에서 사목하시는 모 신부님은 몇몇 신자에게 자신이 최고로 좋아하는 음식을 솔직히 말했다가 후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구역반 모임에 갈 때마다 자신의 수저 앞에는 늘 그 음식이 올라와 곤혹스러웠다고 합니다. 실제로 '가장' 또는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는 질문은 즉각적으로 응해서는 안 되고, 시간적 여유를 갖고 신중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또한 답변을 할 때도 가급적이면 '가장'이나 '최고'라는 단정적 표현을 떼어내는 것이 현명합니다. 오직 한 가지만이 '가장'이나 '최고'가 될 수 있기에, 본의 아니게 그것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위험을 피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질문을 받습니다.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는 표현대로, 그는 예수님의 답변에 시비를 걸기 위해 질문을 던집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율법의 계명들이 613가지에 이르렀고, 바리사이들에게도 어떤 계명들이 보다 중요한가에 대한 일치된 견해가 없었습니다. 율법 교사는 그 많은 계명 가운데 예수님이 한 가지를 선택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저 없이 답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분명하게 덧붙이십니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저는 이 표현에서 예수님의 강렬함을 느낍니다. 율법 교사는 시비를 걸려고 '가장 큰' 계명이라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가장 크고'에 덧붙여 '첫째가는' 계명이라고 단정적으로 답변하십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에게 시비를 걸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은 당시 율법의 613가지 계명에는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둘째로 꼽으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도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 교사의 함정을 파놓은 질문에 빗대어, 시비 거리를 전혀 제공하지 않으면서도, 당시의 수많은 계명은 모두 제쳐 놓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훨씬 중요하고 큰 계명임을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더 나아가서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는 예수님의 표현은 사랑이 모든 계명과 가르침의 근본임을 극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최상급의 표현은 사랑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자 정체임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큰', '가장 우선적인', 그리고 '최상의' 계명으로 꼽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우리들 자신의 삶에서도 '가장 큰', '가장 우선적인', '최상의' 실천으로 드러나고 있는지를 반성해 봅니다.

김영춘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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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습니다.

대놓고 얘기하진 않더라도 명절 같은 때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있다고 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끼리 끝까지 즐겁게 지내려면 ‘정치 얘기는 절대 금지’라는 함구 규칙이 암암리에 가족들을 지배한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요즘 교회 내에서도 사회적 문제를 바라보는 견해 차이로 서로 생각이 엇갈리면서 찬성(지지)과 반대(비난)로 나뉘어, 서로가 서로를 몹시 불편해하는 가슴 아픈 모습을 가끔 보게 됩니다. 나와 생각이 ‘다름’은 생각의 ‘차이’일 뿐 ‘틀림’은 아니라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의 현실은 별로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 사랑 - 이웃 사랑’ 말씀이 나옵니다. 이 두 가지 계명을 저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이것을 다른 말로 ‘경천’(敬天)이라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애인’(愛人)이라 합니다. 이‘경천애인’을 우리그리스도교의 최고 가르침이라 할 수 있는데, 구약의 모세오경에 기록되어 있는 엄청난 분량의 ‘율법’ 내용을 예수님은 너무나 명쾌하게 두 가지 ‘사랑’으로 요약합니다. 그런데 더 대단한 일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등한 위치, 똑같은 무게로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느님 사랑’만 강조하셨다면 하루에 몇 시간씩 하느님과 대화 나누고, 하느님에 푹 빠져 살면 된다라는 식의 ‘혼자만의 신앙’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만약 예수님이 ‘이웃 사랑’만을 중요한 계명으로 내놓으셨다면, 마치 종교가 아니라 박애주의를 실천하는 ‘자선단체’처럼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만큼 이 두 가지 사랑의 계명은 둘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빠지거나 어느 한 쪽으로 너무 쏠려서도 안 될, 즉 ‘이웃 사람들을 무시한’ 오로지 하느님 사랑만도 아니고, 또 ‘하느님을 외면한’ 단순한 이웃 사랑만도 아닌, 하느님과 이웃 모두를 향한 ‘두 사랑’의 균형과 조화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임 교황인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이웃에게 눈을 감으면 하느님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이웃 문제, 사회적 문제보다도 오로지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위해서 살고 있는 요즘 세태를 보면서 살짝 생각의 각도를 비틀어 봅니다. 만약에 악마의 유혹이 있다면 우리도 자칫 그런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악마는 아주 열심하고 철저하게 하느님을 향하도록 부추기면서, 그렇게 하느님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에게 ‘다른 곳에 한눈팔아서는, 안되고 세상과 이웃에게 시선을 흩뜨리지 말라고 유혹합니다. 그리고 그럴듯한 이유를 댑니다. ‘아니, 내가 딴 데 한 눈을 팔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을 따르겠다는데, 이런 나를 보고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라는 유혹입니다.

혹은 ‘이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들고, 내 신앙 하나 제대로 유지하기도 힘든데, 남들에게 관심 갖고 그들을 챙기라는 말, 내 코가 석 자인데.’라는 생각 또한 유혹입니다. 유혹은 다독이며 달랠 문제가 아니라, 단호하게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이명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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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사랑하십시오”

10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10월에 가장 바쁜 가수가 누구인 줄 아십니까? 가수 이용이라고 합니다. 그가 부른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 때문입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가사와 서정적인 멜로디가 10월이라는 계절에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10월의 마지막 주일에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가족과 가을 여행을 떠나 보는 것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잊고 있었던 분들이 있다면, 전화라도 해보고, 한번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저도 며칠 전 우연히 군대생활을 기록했던 ‘추억록’을 보았습니다. 군복을 입고 찍었던 28년이 지난 사진들을 보았습니다. 함께 근무했던 친구들이 제대하는 저를 위해 적어주었던 글을 보니 가슴이 ‘찡’했습니다. 부는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과 그리움, 사랑은 이 가을에 잘 어울리는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엘 다녀왔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강론을 했기 때문에, 제 말을 실천하고 싶기도 해서,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 선산을 다녀왔습니다. 어머님은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조금 멀고 힘은 들었지만 모처럼 어머님과 함께한 가을 여행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내장산 근처에 있는 5대조 할아버님의 묘소를 다녀왔습니다. 증조부 할아버지의 묘소는 고향 선산에 모셔져 있는데, 5대조 할아버지는 박해 때 순교를 했기 때문에 험한 산속에 모셨다고 합니다. 저도 이번 여행에서 처음 5대조 할아버지의 묘소를 방문했습니다. 험한 산길을 올라, 말없이 계신 할아버님의 묘소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모진 박해를 당했고, 순교하신 조상께서는 사제가 되어 인사를 온 후손을 보시면서 흐뭇해 하셨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고향 어르신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후손들이 조상들의 묘소를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는 것은 조상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조상을 찾은 후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순교하신 조상께서는 이미 하늘나라에 계실 것이다. 우리가 그분들의 묘소를 찾는 것이 그분들께 도움이 되지 않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조상들은 하늘나라에서 바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신다.” 저는 고향 어르신의 말씀을 들으면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어쩌다 한번 어머님을 모시고, 고향에 찾아간 것은 그렇게 내세울 일도 아니고, 조상님들께 큰 도움이 되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제게 신앙의 뿌리를 알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었고, 저의 영적인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좋은 일을 한다고, 희생을 한다고 하였지만 결국 그 결과는 제가 하느님께 더 깊이 나아갈 수 있는 기회였던 것입니다. 고향으로 가고 오는 길에 어머님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바쁘다는 이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어머님과 깊이 있는 대화를 거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탈출기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가난한 사람, 고아나 과부를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받을 것이 있어도 무리해서 그들의 처지가 너무 힘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과부나 고아를 돌보아 주는 것은 우리가 선행을 베푸는 것이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나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는 은총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온 마음과 생각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몸처럼 여러분의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율법과 계명의 근본 정신입니다.”

남을 위한 희생과 봉사는 자랑할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이를 도와주고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생색을 낼 일도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환난과 박해를 이겨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따른 사람들에게 큰 축복이 주어지리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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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무한한 사랑의 나눔

매월 두 번째 주일에는 본당에서 진귀한 풍경이 벌어집니다. 신자분들 각자 미사를 드리러 오시면서 한 손에 콩 한 봉지, 쌀 한 주먹, 식용유 한 통, 설탕 한 봉지 등 조금씩 집에서 가져와서 미사 때 봉헌합니다. 가정 방문이나 환자 방문을 하면서 느낀 바로는, 결코 생활 사정이 넉넉지 않을 텐데,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가진 것을 더 가난한 이들과 나누고자 이러한 나눔을 실천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매월 둘째 주일을 ‘자선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본당 신자들의 나눔을 바라보며 드는 생각은 “도대체 이러한 나눔의 마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라는 것입니다. 마치 콩 한 조각이라도 나누어 먹듯이, 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는 마음은 분명 사랑하는 마음, 자비로운 마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건 없는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라 확신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저희 신자들은 하루하루 주어지는 삶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도우심을 충분히 느끼고, 그것에 감사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사랑과 감사가 각자의 마음에 가득 차 있기에, 그 사랑이 자연스럽게 마음에서 흘러넘쳐 이웃에게까지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가장 큰 계명들을 저희에게 알려 주십니다. 이두 가지 계명은 결코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게 될 때, 자연스럽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가득히 채우게 되고, 그 사랑이 흘러넘쳐 나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해 받은 우리의 이웃들은 다시 한 번 그 나눔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고, 더더욱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무한한 사랑의 나눔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며,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우리 마음에 가득히 채우고, 우리가 받은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그리고 그 흘러넘치는 사랑을 나 자신과 우리의 이웃들에게 나눈다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저는 또다시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 달 두 번째 주일을 기다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봉헌 시간 때 하느님의 사랑을 양손에 가득히 들고 나오는 예수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쁨 가득한 표정으로 그 사랑을 나누어 받고 돌아갈 또 다른 하느님의 자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하지만 하느님 안에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과테말라 신자들처럼, 하느님 안에 머물며,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가득히 채우고 나눌 수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 서울대교구 김현진 토마스데아퀴노 신부 - 2017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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