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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애주애인(愛主愛人)
조회수 | 2,189
작성일 | 05.10.2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이중계명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니다.“‘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이두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마태오 22:37-40)

저희 본당 교우들께서는 단체모임이나 친교시 건배를 할 때 "   를 위하여" 하면 "애주애인"하고 모두 응답합니다. "애주애인"을 마음에 새기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애주애인"의 마음으로 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습니다.(마태 7:24) 그러나 주님사랑(愛主)과 이웃사랑(愛人)없이 사는 사람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마태 7:26)

사랑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공기 물, 햇빛 처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전부입니다. 사랑은 모든 문제의 답입니다. 사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하고 절대적인 사랑에 대하여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몇가지 지적하고 고치고자 합니다.

(1) 가짜 사랑을 참 사랑으로 잘못알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 사랑은 상대방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짜 사랑은 나의 행복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고,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2)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줄 수 있는데, 마치 자기가 사랑을 많이 갖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요한1서 4:7) 기도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행위입니다.
(3)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은 많으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부족합니다.
(4) 사랑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많으나, 사랑을 주는 사람들이 부족합니다.

교우여러분!  참 사랑을 알고, 하느님의 사랑을 여러분의 마음 안에 가득히 채우  시고, 참 사랑을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예수님을 첫째로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 장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1서 4:20)

장희성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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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며

요즘 우리 사회는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경제대란 속에서 ‘잔인한 10월’이라는 말이 나오고, 유명인들의 자살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안타까움과 허전함을 주고 있습니다. 또한 ‘베르테르 효과’로 불리며, 곳곳에서 모방 자살로 충격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교회에선 하느님만이 생명과 죽음의 주인이라고 가르칩니다(신명 32,39).사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7-8참조). 자살은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의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이며, 자신을 사랑하고 완성시켜 나가야 할 인간의 의무를 회피하는 것입니다.

자살은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아무리 그 동기가 순수하고 고상한 것이라 하여도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는 큰 죄악(가톨릭 교리서 2280~2282항 참조)이라는 것이 과거나 현재나 변함없는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지만, 자기를 사랑해야함도 포함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이에 예수님은 첫째 계명으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서구절은 본래 신명기 6,4-9절까지의 말씀으로 옛날부터 유대인들이 ‘쉐마’라고 해서 아침저녁을 암송하는 유명한 성서구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6,4-5).

율법학자의 질문은, 율법 중에서 우열을 가려서 예수님을 옭아매려는 속셈일 수도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솔직하고도 순수한 의미의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심각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지켜야 할 계명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구약성서 중에서도 율법서라 불리는 ‘토라’(모세오경)에는 613개의 계명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계명을 다 지키자면, 그 법에 얽매여,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법을 다 지키는 사람들은,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연히 그 사람들은 교만에 빠지기 쉬웠고, 안 지키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무시하기 일쑤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고단한 삶으로 법을 다 지킬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법을 철저히 다 지키고 산다한들, 그 법의 핵심인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모든 율법의 완성인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그러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다른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즉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사랑하기 쉽습니다. 자기에게 이익을 줄 것같은 사람은 사랑하기 쉽습니다.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사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마태5,46).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깡패도 할 수 있고, 범죄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랑은 믿지 않는 일반인이 우리보다 더 잘합니다.

누구나 할 수 없는 사랑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는 것, 자기에게 이익을 줄 것 같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는 것, 가진 것이 없고 초라해 보이는 사람도 사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신앙인의 사랑입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답변을 숙고하여 그 심오한 진리를 깨닫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휠씬 더 낫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루가12,34)며, 율법학자를 칭찬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는 말을 듣도록 합시다.

하느님 나라와 보다 가까이 있기 위해 사랑하면서, 누구나 할 수 없는 사랑을 하며,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며 삽시다.

허춘도 토마스 신부
  |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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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가장 큰 계명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반대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있었던 몇 가지 논쟁을 제시합니다. 세금 논쟁(22,15-22), 부활 논쟁(22,23-33), 큰 계명 논쟁(22,34-40), 다윗의 자손 논쟁(22,41-46) 등 입니다. 이런 논쟁의 주된 목적은 우리가 짐작하듯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기 위한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려고 의논 했었고(22,15) 오늘 복음에서 또다시 ‘한데 모였다’는 것은, 예수님을 적대하는 이들의 모임이 정기적이고 조직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한데 모인 바리사이들 중 한 사람이 그들을 대표해서 물음을 제기합니다. 아마 이 사람은 바리사이들 가운데 출중하고 율법 지식에 탁월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당대에 율법 학자들이 오래도록 사색하고 논의하던 물음을 제기합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마태 22,36)

당대에는 준수 규정 248조항과 금지 규정 365조항을 합하여 모두 613조항을 율법 규정으로 준수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인지를 묻는 물음이라, 전체 율법 규정에 통달하지 않고는 답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어떤 누구도 딴죽을 걸 수 없도록 열심하다는 신앙인들이 날마다 여러 차례 바치던 쉐마 기도문에 담긴 신명기 6,5의 말씀을 꼽으십니다.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으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도 이와 같다면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둘째’는 중요도의 순서가 아니라 나열된 순서일 뿐입니다.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산상설교의 말씀과 연관시켜 본다면, 여기서의 이웃은 친지들만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구체적인 지침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5,43-48). <마태오 복음, 이우식, 참조>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나누고 봉사하며, 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노력들은 하느님 나라를 ‘지금 여기’에서 보여주는 훌륭한 징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신자분들 중에는 안타깝게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다른 사람보다 열심히 봉사하면서, 옳은 것을 위해 노력하면서, 성실히 기도하면서도 자신은 부족하다고 여기거나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기대치가 높거나 자존감이 낮아서, 또는 지나친 책임감이나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부정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상태가 지속되다 보면 인간관계가 어려워져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내적 상태에서는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해도 스스로 만족할 줄 모르게 되고, 만족을 모르니 행복에서 멀어져 있게 됩니다. 결국 의도치 않게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못한 모습입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를 들면, 기대치를 조금 낮추는 것입니다. ‘이정도면 괜찮아, 항상 모든 일을 잘 할 수는 없잖아,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는 없잖아’라고 생각하는 자세에서 비롯됩니다. 또,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격려할 줄 아는 것입니다. ‘힘들었지만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어, 정말 수고 많았어, 앞으로도 어려움이 있겠지만 이제는 잘 할 수 있어’라는 자세에서 옵니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이정도면 괜찮지, 누가 뭐라해도 흔들리지 않을거야’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높이는데서 나오고, ‘모든 것을 내가 감당할 필요는 없어, 나도 돌봄이 필요한 사람이야’라며 지나친 책임감을 줄이는데서 비롯됩니다. 쉬운 길은 아니지만, 노력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여정을 통해서 성숙한 신앙인으로 조금씩 거듭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반대자들의 무리와 마주하십니다. 그들은 이미 그분에게 올가미를 씌우려고 작정하였습니다. 그들의 이런 속마음을 아시고도 예수님께서는 화를 내지 않으십니다. 불안해 떨지도 않으시고, 한결같은 모습으로 굳건하십니다. 자존감이 확고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이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을 사랑하면 흔들리지 않고 더욱 깊이 있게 이웃과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안동교구 황영화 마티아 신부 - 2017년 10월 29일
  |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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