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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이웃 사랑
조회수 | 2,284
작성일 | 05.10.21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이웃 사랑, 특히 약자에 대한 보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출애굽기의 - 계약편으로 - 십계명의 정신에 따른 법 규정집 중 약자 보호에 관한 내용으로, 특히 나그네·과부·고아·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보호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이는 법 이전에 상식에 속하며, 인간성에 기초한 하느님의 요구이자 명령입니다. 그 누구도 날 때부터 절대적으로 부귀영화를 보장받은 것은 아니기에 서로 돕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공동체의 교우들이 신·망·애의 삼덕 안에서 성실한 삶을 살고 있음에 대해 기뻐하며 이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자기들만 간직하지 않고 주변의 도시에 널리 전달합니다. 즉 복음 선포에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란 기쁜 소식의 단순한 전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업적을 되새기고 그것을 본받는 행위이며 실천입니다.

오늘의 마태오 복음은 십계명을 요약한 사랑의 계명,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愛主愛人), 또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은 십계명에 기초한 여러 세부적 법 규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그것은 248조항의 명령법과 365조항의 금령법을 합하여 613조목이나 됩니다). 법 조항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다원화되고 복잡해졌다는 뜻도 됩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복잡한 이 사회를 단순화시키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단순한 분이시고, 사랑의 본질 또한 단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613조항의 법과 십계명. 결국 그것을 사랑 하나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기만 한다면 문제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먼저 내어주는 행위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죽이면서 이웃에게 먹이가 되는 희생 제사입니다. 사랑은 그래서 이웃과 동화되는, 하나가 되는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 작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그리고 예수님을 바로 사랑 자체라 부르는 것입니다.

양완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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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여라!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우리는 사랑하라는 말씀을 수없이 들어왔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말을 무척이나 힘겹게 받아들인다. 우리는 영원한 고향, 즉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순례의 길을 걷고 있다. 이 순례의 여정에서 우리를 따뜻하게 대해 주는 이웃의 사랑을 맛볼 때, 그 사랑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지 깨닫게 된다. 우리는 사랑을 주고받음으로써 우리의 부족한 삶을 채워나간다. 사랑은 체험이지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삶 안에서 말로 표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다.

예수님은 오늘 율법과 계명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 사랑을 살아가라 하신다. 이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모든 율법과 계명을 지킨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계명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과 계명의 중심이기에 사랑이 없는 계명은 형식적이며 위선일 뿐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랑은 일치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 이 사실을 알면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의 실천만이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믿음을 온전히 나타내는 것이다. 진실한 사랑의 실천은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웃에게 감동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알고 실천하는 이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가 있는 것이다. 진실한 사랑의 실천이 살아 있는 참 신앙을, 참 믿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진실한 사랑의 실천만이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은 메말라 가고 황폐화되고 무서워졌다. 우리의 가정도 더 이상의 따뜻한 안식처가 되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진실한 사랑의 부재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한 사랑은 우리들이 겪는 이 모든 것을 극복하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구원의 길을 본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우리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복음을 살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상을 깨고,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이 사랑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며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는 길은 오직 사랑이다. 여전히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신다.

이동주 시몬 신부
  |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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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사랑하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막시밀리아노 콜베’(1894~1941) 성인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서슬퍼런 지옥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탈출한 수감자 때문에 차출되어 아사감방(물 한 모금 주지 않고 굶겨 죽이는 감방)에 끌려가던 10명의 수감자 중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한 명의 수인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었던 분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콜베 성인은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 13)는 예수님의 말씀을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콜베 성인 때문에 극적으로 살아난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랑과 은총의 주인공인 그의 이름은 ‘가죠프니체크’였습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그

리고 훗날 자신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으신 콜베 성인의 시복식에 참석하게 되고 영광스럽게 교황 바오로 6세도 알현하게 됩니다. 가죠프니체크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결하신 콜베 신부님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가시어 내가 그분 죽음으로 덤의 생애를 살게 되었는데, 신부님의 숭고한 죽음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하여 훗날 그분을 뵙기가 죄스럽습니다.”

사도 성 바오로께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에페 1, 7)

진실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 많은 나를 위하여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끔찍한 죽음의 길을 가셨고, 그로 인하여 우리가, 내가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고귀한 사람이 나를 위하여 대신 죽음을 택하였다면, 우리는 남은 생애를, 그분 때문에 거저 얻어진 삶을 얼마나 더 잘 살아야겠습니까?

하물며 하느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음을 택하셨는데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얼마나 더 잘 살아야겠습니까. 실로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는 까닭은, 앞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드려도 갚을 수 없는 은혜이지만, 미력하나마 우리의 전부인 사랑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분께서 전부를 다하여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씀을 뽑으라면 다음 말씀일듯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세 1, 27)

보잘것없는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 훗날 당신을 거슬러 죄를 지을 것을 뻔히 아셨던 하느님의 지극한 인간 사랑은 창조주인 하느님 모습으로 인간을 만드셨다는 것에 있습니다. 인간을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하신 까닭은, 당신을 볼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이 이웃들을 보면서 당신을 ‘보라’하신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사도 성 요한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 20)

내 곁에 있는 이웃은 바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대신 죽음에 보답해 드릴 수 있는 길은 이웃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구원으로 가는 길입니다.

예전 어느 가수가 불렀던 <백만 송이 장미>라는 노랫말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어오라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 나라로 갈 수 있다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지막 최종 목표는 하느님 아버지의 집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돌아가야 할 내 그립고 아름다운 별은 바로 하느님 나라, 그 별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별,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은,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 것입니다.

이웃이 하느님이고, 이웃이 예수님입니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의 가르침이 그러하고, 예수님께서 ‘최후의 심판’ 가르침에서 엄히 지적하신 말씀이 그러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

애덕송 기도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근원이시며…” 사랑의 첫 발신지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미 사랑의 전파를 받은 자녀들입니다. 이제는 그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배광하 신부
  |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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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사랑, 가장 큰 계명

구약성경 중에 율법서라고 불리는 책은 구약성경의 첫 다섯 권인 모세오경에 해당합니다. 모세오경은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다섯 권을 말하는데, 유다인들이 말하는 율법 규정들이 바로 모세오경에 나와 있는 내용들입니다. 중세시대의 어떤 학자가 모세 오경에 나온 율법 규정들을 계명별로 정리했는데, 그 계명의 갯수가 총 613개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마태 22,36)라는 어떤 율법 교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하여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 이 그것이라고 답하십니다. 613개의 계명을 단 2개의 계명으로 요약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굳이 나누어서 이야기하니까 2개의 계명이지 결국은, 모든 율법이 사랑의 계명 하나로 요약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복음 말씀은, 내 삶이 하느님 뜻에 잘 맞추어져 가도록 노력하는 데에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사랑의 실천’ 임을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먼저 율법의 하나하나 조항을 지키려고 접근하기보다, 먼저 내 일상 안에서 사랑을 실천할 때, 율법의 조항들도 자연스럽게 지켜지기 마련입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건, 무슨 말을 하건, 무슨 행동을 하건 그것이 사랑을 바탕으로 할 때, 내 모습은 자연스럽게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가꾸어 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 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 이웃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한 주간,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크고 작은 나의 일상에서 사랑을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특별히 나와 의견이 달라 갈등을 겪고 있는 이웃이나, 원한을 품고 있는 이웃이 있다면, 더 열심히 사랑하고자 노력합시다. 그를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형태의 율법 조항들을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조항으로 요약해 주셨습니다. 내 삶의 기준으로 613개 조항이 담긴 두껍고 무거운 율법서를 선택하기보다, 사랑이라는 단 한 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얇고 가벼운 율법서를 선택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춘천교구 2017년 10월 29일
  |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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