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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조회수 | 2,429
작성일 | 05.10.21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한 단어로 말하라고 하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사랑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바로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모세의 십계명에 기초를 두고 있던 유대교의 율법은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통하여 번영을 이루다가 솔로몬이 죽고 난 후에 나라는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나뉘어진다. 기원전 721년에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이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멸망하고, 그후 기원전 586년에 남쪽 유다왕국마저 바빌론 제국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한 후에 유대인들은 나라 없는 백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선택받은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것에 대해서 심각한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들의 신학적 반성 결과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그래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는 것만이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명예를 회복하고 현실적으로는 유대 왕국을 복원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곧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여 율법을 세분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예수님 시대에는 마침내 율법의 세부조항이 613가지에 이르게 되었다. 예수님 시대에 와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곧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율법에 치중하던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의 맹점은 율법의 본 정신인 사랑을 잃어버렸다는데 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강조하였고 당시 일반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강조하셨다.

오늘 복음의 맥락도 철저하게 율법을 신봉하고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올가미를 걸기 위하여 율법서에서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한 계명인가에 대하여 물었던 것이다. 이 물음에 대하여 예수께서는“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계명이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하느님께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로서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계양식이 변화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문성호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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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인 사랑

‘사랑’이란 글자와 ‘사람’이란 글자는 비슷합니다. 단지 ‘o'과 'ㅁ'이 다를 뿐입니다. 둥글둥글 하고 원만한 ‘ㅇ'은 사랑답습니다. 모가 나 있는 ’ㅁ'은 그 때문에 사람이 살아가면서 상처를 겪고 고통을 얻을 수 있음을 말하는 듯해서 사람답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다 보면, 모가 난 ‘ㅁ’이 깎이고 갈려서 ‘사랑’으로 가까이 가지 않나 여겨집니다. 그리고 ‘사람’이란 말을 축약시켜보면 ‘삶’이 됩니다. 따라서 ‘사랑’과 ‘사람’과 ‘삶’은 서로 무관하지 않는 것 같고, 사람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것은 참으로 본질적인 요소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계명이고, 둘째도 이와 같다고 하시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첫째 계명, 둘째 계명으로 분류하셨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계명인 것입니다. 이웃사랑 없는 하느님 사랑은 있을 수 없고, 만일에 있다면 그것은 위선적인 사랑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은 눈에 보이는 이웃 사랑을 통해서 잘 드러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여러분은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어디서 나오는지 여러분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사랑할 수 있는 그만큼, 여러분은 지상에서 하느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무슨 응어리진 것이 생각나면 먼저 그와 화해하고 예물을 바치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성체 조배를 하고, 미사에 참여하고, 피정을 하는 그 모든 것도, 하느님과 함께 나 자신 그리고 이웃을 언제나 염두에 두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웃의 어려움을 도외시한 채 행한 묵상과 관상은 의미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면서 그 이웃 안에 있는,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한다면 참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바로 그 순간 바로 거기에 하느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설사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웃사랑을 온 정성으로 실천하면, 그는 어떤 넘치는 기쁨을 느낄텐데, 그 기쁨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구별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된 하나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만나는 이웃 안에서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고, 우리의 기도 안에서 항상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전동기 신부
  |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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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파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고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네 마음을 다 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정신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대답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오늘 복음 구절 외에 복음서들 안에 더 보이지 않습니다. 복음서들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 사도는 그 서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사랑을 모릅니다...그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1요한 4,8-10) 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이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상대는 바리사이파 율법 교사였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누구를 상대로 한 말이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를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율법 교사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게 하기 위해 율법 조항들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인간 삶의 모든 가능성을 가상(假想)하여 각 상황에서 지켜야 하는 율법의 차림표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율법 조항은 600개를 넘었습니다. 율법을 다 배우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들을 바리사이파 율사들은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율법 조항이 이렇게 많다 보니 사람들은 율법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의 삶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시게 하는 지침인 율법이었지만, 이제 율법은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덫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의 삶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율법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 예수님이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율법의 조항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기원은 이집트 탈출을 앞둔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준 10계명에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탈출기는 하느님이 모세와 계약을 맺으셨다고 말합니다. 그 계약의 내용은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고, 이스라엘은 그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준해서 살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준해서 산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받들어 사람들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일”(탈출 33,19 참조)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모세는 그 실천을 열 가지로 나누어 기록하였습니다. 그것이 십계명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율사들이 생기고, 성전에서 제물 봉헌을 전담하는 제관들이 생겼습니다. 율사들은 율법의 중요성만 강조하고 제관들은 제물 봉헌만 과장한 나머지 이스라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고,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치는 데만 정신을 쓰게 되었습니다. 본(本)과 말(末)이 전도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지침으로서의 율법이었고,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자기 노동의 대가를 이웃과 나눈다는 것을 상징하는 제물봉헌이었는데, 하느님을 잊으면서 구원을 받겠다는 욕심은 율법도 제물 봉헌도 지키고 바쳐서 사람의 뜻을 이루는 수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시선은 무자비하게 되었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제물을 바치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고 외면하였습니다. 선하신 하느님이 사라지자 무자비한 율법의 노예들만 있는 유대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준수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 계명을 비롯하여 율법을 소홀히 한다고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비난 받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에 구원은 율법 준수로 인간이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열리는 삶의 공간입니다. 현세든, 내세든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자녀가 아버지로부터 배워서 인간이 되듯이 신앙인은 하느님으로부터 배워서 하느님의 자녀 되어 하느님 나라를 산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도 인자하십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가 6,35-36).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비와 사랑이 하느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질문하는 율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계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은 율사가 질문에 그 단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율사들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계명’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율법이라는 계명에만 집착하였기에, 예수님은 그들이 집착하는 그 현장에 하느님을 심으십니다. 계명만 생각하고 율법을 무자비하게 적용하여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지 말고, 하느님에 대해 깨달아서 하느님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분의 사랑을 이웃을 위해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은 계명이나 율법을 주고 심판하기 위해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군주(君主)들과 강자(强者)들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기 위해 계명 혹은 법으로 질서를 세웁니다. 그들이 주는 계명과 법은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은 사람들을 참으로 자유롭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서 베푸신 결과라는 사실을 압니다. 우리 생존의 시작에 베푸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아버지라는 하느님에 대한 호칭입니다.

인간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기적이고 또 배타적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긍정하고 자신을 방어하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그 자세는 우리 생명의 기원이신 하느님에서 고립되고, 이웃에서 고립되어 자기 자신을 긍정하며 사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에 정신을 빼앗기고, 율법으로 자기 자신을 방어하여, 자기의 구원을 자기 힘으로 쟁취하려 하지 말고,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의 일을 배워 이웃에게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로우셔서 우리도 이웃에게 자비로워야 하고, 하느님이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랑하시는 분이라 우리도 이웃에게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숨 쉬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서공석 신부
  |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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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사랑, 그 이중성에 대하여

오늘 복음의 이른바‘사랑의 이중 계명’이라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한 편으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구분이라는 모호함과 함께“이웃 사랑이 혹여 하느님 사랑을 흐리게 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당혹스러움을 느끼곤 합니다. 일찍이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런 혼란스러움 때문에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오! 주님, 저를 용서하소서. 저는 해와 별과 글라라와 자매 모두를 사랑합니다. 오직 당신만을 사랑해야 할 것을…”그러자 그에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답을 하지요.“프란치스코야 나는 해와 별과 글라라와 자매를 모두 함께 사랑하노니, 너 사랑하는 것 나도 사랑한단다.”

이중성이라는 단어, 그것은 인간의 삶과 관련되어질 때, 조금은 부정적인 느낌이 강합니다.‘이중인격자’,‘이중적 태도’등. 라틴어에도‘두 마음을 품다’라는 뜻에서 비롯된 디아볼루스라는 말은 악마를 가르키는 단어입니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교 윤리라고 말하는‘사랑의 이중 계명’에서 때로 느끼는 당혹스러움은 어쩌면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 태도에 그 한 원인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이며‘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고백은 하면서도 정작 그 사랑의 방식이 우리 개인, 혹은 우리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굴레에만 닫혀 버릴 때, 다시 말해서 사랑의 주도권이 하느님이 아닌, 내가 될 때 그것이 사랑의 이중적 태도입니다. 따라서‘사랑의 이중 계명’이 사랑에 대한 이중적 태도에서 벗어나는 길은 결국 하느님께서 어떻게 사랑하시는가를 들여다보고, 사랑의 주도권을 하느님께 돌려드림으로써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모든 것을 던졌던 프란치스코가 이제 사랑의 혼란스러움 앞에서 하느님께서 그 이중적인 면들을 친히 벗겨 주심을 체험했듯이 말입니다. 사랑에 있어 그 주도적인 역할은 프란치스코가 아닌 바로 하느님 그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주도권을 내어드린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방식을 철저히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 방식은 이러합니다. 죽을 수 있는 하느님, 아니 죽음을 굳이 받아들이는 하느님, 흔들리지 않음이 아니라 오히려 흔들리는 사랑, 그 흔들림에서 결국 당신의 삶마저 내려놓는 사랑,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 하느님의 얼굴, 하느님의 사랑 방식입니다.

때로 우리의 사랑 방식은 내 자리, 내 뜻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를 죽이는 사랑,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덜 사랑하는 길이 아니었는지 돌이켜 반성해 봅니다. 이번 주간 하느님의 그 놀라운 사랑 앞에 순간을 살듯이 사랑하고, 영원을 살듯이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부산교구 천경훈 프란치스코 신부>
  |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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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믿음을 두고 있는 이들이 그분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지극히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자 할 때 그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눈으로 뵐 수 있는 분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을 표현하겠지만 뵐 수 없는 분을 사랑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나름대로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기도를 드리고, 당신의 말씀을 들으며, 사랑을 드리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은 하느님께 사랑을 드리기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유익함을 줄 뿐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이 우리가 사랑을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 해결점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라고 일러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직접 사랑을 드리는 대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 가운데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기본적인 욕구를 가진 인간이기에 누구나 자신이 더 사랑받고 좋은 대우를 받기를 갈망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미워하고 타인으로부터 손가락질 받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웃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사랑으로 다가서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과부나 고아를 억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를 위해서는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사랑으로 보듬어주고 해악을 입히지 않으며,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자비의 사랑을 실천하며,‘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으로 그들과 하나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스스로에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더라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당신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 그 사랑을 실천하는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교회의 심장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불타는 사랑의 빛으로 우리 자신의 사랑을 키워서 어려운 이웃에게 실천함이 가장 큰 계명임을 기억하게 합니다.

▦ 부산교구 김명선 신부 - 2017년 10월 29일
  |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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