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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연민과 봉사의 실천
조회수 | 3,085
작성일 | 05.11.18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왕이라 일컬었던 것은
그분이 과거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시는 구원자였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은 그분이 열어놓은 구원의 새로운 삶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우리가 세례 받는 것은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로마 6,4)라고 가르치십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잘 지키고 성전에 잘 바쳐서 하느님으로부터 축복받는 것이 구원이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은 세례로써 과거의 삶에 죽고 예수님이 보여 주신 구원의 새로운 삶을 살라고 말합니다.

옛날에는 나라에 왕이 있었습니다.
백성은 왕의 나라에서 왕이 공포한 법을 지키며 왕이 제시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제시한 삶을 삽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는 예수님을 왕이라 일컬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미사에서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줄 내 몸이다,.. 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라는 말씀을 상기하면서 성찬에 참여합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예수님을 기억하고 배워서 그분의 삶을 우리의 것으로 합니다. 예수님이 당신 스스로를 내어주신 그 대인관계와 그 생명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오늘의 세상에는 왕이 없습니다.
나라는 이제 왕의 것이 아니고 백성의 것입니다. 백성이 나라를 위해 일꾼들을 선택합니다. 백성은 임금님의 나라에서 황공하게 살지 않고, 자기 나라에서 당당하게 삽니다. 아직도 왕이 있는 나라들이 있지만, 이제 왕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의전을 위한 상징적 인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옛날 왕이 당연히 있던 시절에
‘그리스도 왕’이라는 칭호가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칭호를 축일 이름으로 사용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린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최후심판 이야기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발생한 구원의 삶이 지녀야 하는 가치관을 설명하는 비유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이야기에 열거된 사람들은 굶주린 이, 목마른 이, 나그네, 헐벗은 이, 병든 이, 감옥에 갇힌 이들입니다. 한 마디로 어려움에 처한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쉽게 외면당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복음은 그런 사람들을 영접하고 그들에게 도움이 되게 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그런 사람들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하는 새로운 삶은 외면당한 이웃들 안에 하느님을 보고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사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별의 벽을 만드는 것을 거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십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말하면서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우월하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유대교는 굶주리는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감옥에 갇힌 이는 모두 하느님이 버렸다고 가르쳤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런 이들과 함께 계신다고 믿으셨습니다.

인간은 항상 자신의 우월함을 찾습니다.
인간은 모든 구실을 동원하여 자기의 우월함을 추구하고 그것을 과시하면서, 자기 삶의 보람을 느끼려 합니다. 먹을 것을 풍요롭게 가진 사람이 굶주리는 사람 앞에, 옷을 잘 입은 사람이 헐벗은 사람 앞에,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 앞에 우월감을 느낍니다.

바리사이,
율사, 제관들은 율법과 제사의례를 구실로 많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면서, 자기들 스스로는 의인이라고 우월감을 가졌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월감에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스스로 우월감을 가질 수 없는, ‘이 보잘것없는 형제 중에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당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우월감을 가질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지도 못합니다. 오로지 다른 사람들의 연민과 봉사가 그들을 인정합니다. 그들은 연민과 봉사의 은혜로움을 알고 있습니다. 연민과 봉사는 예수님이 실천해 보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계명과 성사에 충실하면,
하느님이 축복하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재물도 주고 권력도 주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나 한 사람을 축복하시지 않고 모든 이를 축복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극소수의 사람을 축복하여
많은 사람이 박탈감을 느끼게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최후만찬에서 당신의 죽음이 “많은 사람을 위한”(마르 14,24)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받은 축복이 온 세상을 위한 축복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은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성, 우리의 우월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우리가 연민과 봉사를 실천하는 계기가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십니다. 부모는 자녀 모두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실천하신 것은
많은 사람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만 혜택을 받아 그것으로 그들이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실천하신 병 고침과 용서는 유대교가 만들어 놓은 사람 차별을 없애는 연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한 연민이고 봉사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우리도 인간 차별을 없애는 연민과 봉사의 구체적 몸짓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병든 이를 돌보아 주고, 감옥에 갇힌 이를 찾아주는 일은 우리 인간이 만들어 놓은 차별을 없애는 축복의 몸짓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린 새로운 삶은 이런 몸짓에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연민과 봉사를 자기도 실천합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그 몸짓들을 구체적으로 그려 보인 것입니다. 복음은 법이 아니고 강요도 아닙니다. 법과 강요는 우리 삶의 향기로움을 빼앗아갑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구원의 새로운 삶, 향기로운 삶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인간이 만든 차별을 하느님까지 동원하여 당연시하지 않고, 연민과 봉사의 실천이 살아서 움직이는 하느님의 향기가 있는 삶으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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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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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심판 기준

전례주년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 교회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낸다. 특별히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왕 대축일로 지내는 의미는, 이 세상의 종말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함이며, 나아가 세상의 종말에는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셔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러 오실 것임을 알려줌으로써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다시 한번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말씀도 최후의 심판 장면을 상세하게 보여주면서 심판의 기준은 무엇보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마태오 25. 40)임을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최후 심판의 기준은 바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이웃 사랑의 정신이며, 이 이웃 사랑의 정신은 당신 자신을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와 동일시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으로서 인간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불가분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 하면 우리와는 확연하게 다른 특별한 존재로만 생각한다. 즉 인간이 누릴 수 없는 영광과 권위, 찬란함과 웅장함을 가지신 초월적인 분, 그래서 우리와는 전적으로 다른 세계에 계시는 분으로만 생각한다. 물론 이 사실은 분명한 진리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초월적인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속에서 중요한 부분을 잃어버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은 초월적인 분이지만 동시에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지 그분을 초월적인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분은 우리의 찬양과 공경의 대상으로만 머무르게 되고 이제 우리에게는 그분과의 사랑을 주고받는 일 보다는 섬기고 숭배하는 일에만 전념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 그분은 숭배와 흠숭, 찬양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분이지만 또한 우리 삶의 현장 속에서 똑같이 만날 수 있는 분이다. 영광의 세계에서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굶주리고 목마르고 외로움을 느끼는 구체적인 한 개인과도 깊은 유대를 맺고 계신 분이다. 바로 이 분이 우리가 믿고 왕으로 고백하는 주님이시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굶주리고 목말라하고 병들어 괴로워하는 예수님을 우리 삶의 자리에서 찾아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그들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을 발견하고 의식할 때, 우리의 삶은 한층 성숙한 모습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마태오 25. 46)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김근배 아벨 신부
  |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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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람

오늘 우리들이 지내는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메시아로 오신 주님을 왕으로 모시기로 다짐하는 날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이 세상과 사람을 섬기는 왕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도 역시 이웃과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인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우리의 다짐과 함께 주님께서 우리를 섬기는 하느님의 본연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우리가 비켜갈 수 없는 필연의 과정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서서 주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순간 어느 누구도 당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이 우리에게 올 것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섬기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의 가르침을 알고 있기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음을 오늘 복음은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복음은 세상을 섬기신 주님 본연의 모습을 알려 줍니다. 굶주리고, 헐벗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어 외로울 때, 병들고 감옥에 갇혔을 때 이들을 위한 나의 작은 희생이 최후의 심판 때 주님 앞에 선 우리의 두려움을 막아 줄 것입니다.

이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임금으로 오신 주님은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을 선택하라고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또한 아무리 힘들고 어렵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하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고 주님께 신뢰를 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딘가 모르게 형평성을 잃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형평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만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인데 나는 나만을 위한 세상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준엄한 심판을 오늘 복음은 가르쳐 줍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진정한 임금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낮추셔서 임금으로서의 참된 모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행동 지침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진정한 임금은 바로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본연의 자세를 잃어버리지 않고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세상의 진정한 임금으로 세우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과 우리를 섬기신 임금이십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주님 본래의 모습을 묵상하고 이를 닮으려는 축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섬기러 오신 주님의 길을 뒤따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왕으로 오신 주님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왕으로서 가르쳐 주십니다.

조동성 신부
  |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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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자녀로서의 삶

교회 전례력으로 오늘은 일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연중 마지막 주일은 그리스도왕 대축일 미사로 봉헌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태오 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게 될 때 사람의 아들은 마치 옥과 석을 갈라놓듯이 분명히 갈라놓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곡간에 벼를 거두어들이기 위해 쭉정이는 바람에 날려 버리겠다는 말씀이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자녀로서의 존재 이유와 마땅히 삶 안에 실천되어야 할 일들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주님 앞에 나설 때 우리가 누릴 희망과 기쁨이 무엇이며 우리가 주님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승리의 월계관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썩고 진리를 잃어서 하느님의 말씀을 한낱 자신의 구원 방패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신앙인들에게 주님은,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너희의 믿음도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인으로 살아오면서 그 많은 시간 동안 하느님 자녀로서의 삶을 다하지 못했다면,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너는 들포도를 맺었느냐?”(이사야 5, 4)고 주님께서 따지듯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세상 창조 때부터 너를 위해 준비된 이 영광을 차지하여라. 너는 내가 굶주리고 내가 목말랐을 때 내가 헐벗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 나를 돌보아주었다. 언제 제가 주님을 돌보아드렸단 말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너의 형제들 중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어려운 사람 그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우리의 왕이신 주님은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왕으로 모시는 아버지 하느님은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많은 이들 중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어려운 이웃에 대한 더 따뜻한 마음으로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주님은 우리를 더욱 사랑과 평화가 충만한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전재완 안드레아 신부
  |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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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과 파멸, 종말에 심판하실 주님

오늘 제1독서에서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친히 양 떼를 찾아 보살펴 주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에제 34,11) 당신은 유배로 인해 흩어져 있던 당신의 양 떼 이스라엘을 구해 내고 보살피실 것입니다. 당신 몸소 그들을 먹이고, 그들을 누워 쉬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에서 노래하는 시편 23장 말씀 그대로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네.” 주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시기에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좋은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에제 34,16)고도 말씀하십니다. 양 떼에 속해 있다고 해서 다 같은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들 가운데는 다른 양들이 먹어야 할 것을 대신 빼앗아 먹고, 약한 양들을 밀쳐대는 힘센 양, 곧 거들먹거리며 교만을 떠는 나쁜 양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백성들을 유배라는 힘든 상황에 빠트렸던 임금과 그의 신하들, 높은 지위를 누리던 유다의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또한 유배라고 하는 어려운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들을 배불리는 양들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여기에 덧붙여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에제 34,17)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과 염소를 함께 기르곤 했는데, 우리의 예상과 달리 양들은 순하기는 하지만 게을러서 움직이기조차 싫어하는 짐승입니다. 그래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염소가 없으면 병에 걸리기도 쉽고, 길을 찾아 나서기도 어렵습니다. 반면 염소들은 겉으로 보기에 양들을 못살게 구는 듯 보이나 실제로는 게으른 양들이 움직이도록 만들어 주며 어려운 길이나 위험에서 양들이 벗어나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레 50,8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빌론 한가운데에서 칼데아인들의 땅에서 도망하여라. 거기에서 빠져나와 양 떼 앞에서 걷는 숫염소들처럼 앞장을 서라.” 이렇게 보니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는 하느님 말씀은 마치 다른 양들의 것을 빼앗아 먹은 뒤 누워서 살만 찐 못된 숫양과 사람들에게 비난받지만 오히려 그들을 이끌고 가며 삶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숫염소 사이에 시비를 가려주겠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염소의 이미지가 다소 부정적이게 된 데에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의 영향이 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오른쪽에, 염소들을 왼쪽에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신 뒤 오른쪽 사람들에게는 구원을, 왼쪽 사람들에게는 파멸을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때문에 염소들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생겨나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염소가 양보다 나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이 되면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가 분명히 드러나고 갈리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 목자는 양과 염소를 우리에 넣을 때 추위를 타는 염소는 우리 안쪽에, 더위를 많이 타는 양은 우리 바깥쪽에 따로 구분해서 재우는데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둘로 가르는 행위 자체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참된 임금이심을 고백하는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종말 때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와서 옥좌에 앉을 재판관이심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곧, 종말이 되면 모든 이들을 그 행실에 따라 심판하시어, 어떤 이는 구원으로, 어떤 이는 파멸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이 말씀과 함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재판의 기준도 명확히 밝혀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굶주리고, 목마르며, 나그네로 살고, 헐벗으며, 병든 이들을 어떻게 대하였느냐입니다. 그들을 주님 대하듯이 대한 이들은 구원을 얻게 될 것이고, 그들에게 아무것도 베풀지 않은 이들은 파멸에 이를 것입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전례력 마지막 주간을 지내고 있는 오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우리는 예수님의 판단 기준으로 볼 때 어느 쪽 편에 서게 될 이들인지에 관해 깊이 되돌아봅시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7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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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교회는 연중 마지막 주일을 맞아‘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기념합니다. 계속 흘러가는 시간 안에서 이번 주간이 더 각별한 것은 주님 앞에서 한 해를 되돌아보고 주님 안에서 한 해를 정리하는 숙고와 묵상의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왕이신 그분, 세상에 오실 하느님의 아들을 기다리며 교회의 새해가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백성을 이끌어 생명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관심은 언제나 우리의‘죄’에 쏠려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왕권이 세운 공정입니다. 용서받은 죄인들이 도무지 갚을 길 없는 엄청난 은혜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심판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마음이 드셨나요? 혹시 마음이 졸아들거나 가슴이 철렁하진 않으셨나요? 하지만 오늘 말씀의 핵심은 우리를 자책에 빠지고 겁에 질리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날 그 자리가 바로 하느님 자비의 현장이라는 걸 오늘 제1독서 말씀이 밝혀주니까요. 주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서 들려주신 고백을 또다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것입니다.“너희 나의 양 떼들아……”

이렇게 우리는 오늘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은 한 점 한 획도 어긋남 없이 실천하시는 신비의 주님을 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모든 자녀를‘찾아서 보살피고’흩어져 헤매는 길에서‘구해 내며’몸소‘데려와 먹이고 누워 쉬게’하시겠다는 약속을 만납니다. 우리의 상처를‘싸매 주고’우리의‘원기를 북돋아’주시기 원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용서와 화해뿐입니다. 우리들이 당신의 생명을 놓치지 않기만 바라십니다. 오늘 당신의 자녀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날, 주님의 오른편에 서지 못하고 기껏 염소 자리에 몰려 있다면 주님 심정이 어떠실까요? 그런 광경이 벌어진다면 우리 꼴은, 우리 심정은 또 어떨까요? 그 심각한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우리 안에서 어설픈 교만을 치우고 알량한 자존심을 베어내야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뜻을 진심으로 따르는 은혜를 갈구해야겠습니다. 그날, 주님의 오른편에 서서“오라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축복을 받는 비결은 작은 일에 쏟은 정성과 작은 사람을 위한 사랑과 사소한 것에 보탠 작은 위로에 있다는 걸 깊이 새기기 바랍니다. 하여 우리 모두가 그날 하느님만이“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라고 고백하는 튼실한 믿음인으로 우뚝 서시길, 소원합니다.

▤ 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2017년 11월 26일
  |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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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믿고 희망하며 늘 사랑하고 더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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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력의 막바지 주일,
왕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선포하며 기쁨을 누립니다. 그런데 올해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 같습니다. 기쁨을 훼방하는 여건이참 많으니까요. 설상가상 ‘사랑의 해’ 플래카드가 치워질 텐데 그마저 아쉽습니다. 세 해 동안 믿음을 키우고 희망을 탄탄히 하여 충만한 사랑을 살고자 다짐했던 교구민들의 설렘이 기억나기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일을 미루고 뒷걸음을 쳐야 했던 아픔이 아직도 고스란하니 그렇습니다.

뜻하지 않았던 ‘거리두기’는
이웃과의 만남을 단절시켰고 ‘비대면’이라는 생경한 상황에서 우리는 사랑할 기회를 접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믿습니다. 이 스산한 환경
이 더 많은 분들께 더 큰 영혼의 갈증을 발견하게 했으리라고 말입니다.

외부적 활동에 제약을 받아야했던 만큼
주님과의 해후는 더 잦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랑은 결코 슬로건에 맞추어 솟구쳤다 사그라드는 그런 시시한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의 해’에 더 많은 사랑을 실천하지 못했던 아쉬움과 사랑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했던 회한까지도 축적된 사랑의 동력이 될 것이라 믿어 봅니다.

성경은
세상의 위기가 하느님께서 “내버려 두시어”(로마 1,24) 외면하는 때일 수 있다고 기록합니다. 세상이 힘들어지는 것은 곧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재정비되어야 하는 시기라는 의미로 읽어집니다.

삶에서
가장 우선되던 것을 내려놓는 결단을 요구하는 다급한 상황이라 싶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뵙고 영광과찬미를 올리는 오늘, 진정 왕이신 예수님의 뜻을 제대로 살아냈는지를 세밀히 따져보는 지혜를 요구하시는 것이라 새기게 됩니다.

과연 어떤 마음으로
이 대단하고 의미 깊은 주일을 맞으시는지요? 그동안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믿음 생활을 하셨는지요? 그리스도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충신의 자세를 진정 살으셨는지요? 주님의 백성다운 품위를 지키는 하느님 자녀에 걸맞은 삶을 살아내셨는지요?

이 작은 인간이
하느님 사랑을 품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입니다. 당신처럼 믿고 희망하며 사랑하는 삶을 온전히 살아낼 수 있을 터이니, 감격입니다.

우리의 새해가 왕이신 예수님의 어명에 충실함으로 하느님께 기쁨이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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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2020년 11월 22일 <부산교구 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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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4   [수도회] 예수님을 따르는 길  [1] 2782
803   [제주] 우리 주교님, 나의 주교님  84
802   [원주] 가깝고도 먼 길  [4] 3075
801   [광주] 누가 우리의 왕인가  [1] 2757
800   [서울] 하늘나라 백성이 지녀야 할 모습  [7] 3319
799   [군종] 자신을 내어 놓는 삶  [1] 1737
798   [인천] 그리스도 우리의 왕  [4] 3014
797   [의정부] 사랑하라는 계명  [3] 2565
796   [대구] 심판의 기준  [2] 2717
795   [마산] 예수님은 나의 왕인가?  [4] 3596
794   [전주] 최후의 심판  [3] 3007
  [부산] 연민과 봉사의 실천  [6] 3085
792   [안동] 구원의 길  [4] 3019
791   [대전] 희망을 품고 살아 갑시다.  [1] 1566
790   [수원] 그리스도께 합당한 신뢰와 사랑을  [5] 3197
789   [춘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3] 3179
788   (백) 연중 제34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독서와 복음  [1] 2753
787   [수도회] 모든 것이 다 선물입니다  [2] 2161
786   [청주] 주인을 바라보는 눈  176
785   [군종] 내가 가진 작은 것에서 부터  [1] 2231
784   [인천] 주님께서 주신 탈렌트  [2] 2352
783   [마산] 나의 달란트 어떻게 쓸까?  2326
782   [춘천] 착하고 성실한 종  [1] 2277
781   [수원] 결실을 맺는 활동적인 신앙생활  [3] 2407
780   [광주] 착하고 성실한 종, 악하고 게으른 종  140
779   [원주] 시든 꽃과 같이  2353
778   [서울] 하느님의 구원 계획  [5] 2644
777   [전주] "묻어둔 달란트를 적극 활용하자”  [1] 2511
776   [의정부] 받은 탈란트를 이웃을 위해  [1] 1772
775   [대구] 자비·겸손·찬미·평화·사랑  [1] 2262
774   [대전]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159
773   [제주] 탈란트의 가치  166
772   [부산] 받은 것을 베풀고 나누고 살자  [1] 2437
771   [안동] 모든 이에게 주신 선물  2063
770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탈렌트talent의 비유)  [4] 1877
769   [수도회] 일상에 대한 진지한 접근  [1] 2590
768   [전주] ‘즉시 그리고 기쁘게’ 나누는 삶  2667
767   [서울]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3] 2913
766   [인천]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  [1] 1473
765   [수원] 깨어 있음의 중요성  [4] 3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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