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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예수님은 나의 왕인가?
조회수 | 3,601
작성일 | 05.11.18
묵상길잡이 : '왕'이라는 말은 민주화를 갈망하는 요즘 귀에 거슬리는 단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왕'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분은 참으로 당신을 우리 죄인들을 위한 제물로 바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죄와 죽음을 이기신 왕이 시기 때문이다.

1. 왜 하필 왕인가?

오늘은 전례적으로 한해를 마무리하는 연중 마지막 주일이며, 그리스도 왕 주일이다. '왕'이란 단어는 민주화를 부르짖는 요즘 전제군주적인 냄새가 많이 나기에 거부감을 갖게 하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왕'이란 요즘의 '대통령'처럼 우리가 뽑아서 일꾼으로 삼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갈아치울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왕'은 나라의 주인이요, 백성도, 땅도, 산천(山川)도, 심지어 들짐승과 산짐승까지도 나라님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왕'이란 바로 '주님'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 왕',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당신의 왕권을 확립하셨는가?

2.예수님은 악(惡)과 죽음을 이긴 왕이시다.

예수의 십자가 위에 써 붙인 죄명(罪名)은 '유대인의 왕 나자렛 사람 예수'였다. 예수님은 이 세상 권력에 뜻을 둔 적이 결코 없었지만, 본의 아니게 정치범으로 몰려 죽으셨다. 당신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을 가장 비인간화시키는 죄(罪)와, 인간을 짓누르는 제일 두려운 공포의 대상인 죽음을 극복하셨다. 그리하여 죄와 죽음에서 인간을 해방시킨 진정한 왕이 되셨던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죽음을 뛰어넘는 결정적 승리에 도달할 수 있었는가?

그분의 생애를 보자.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루가2,48-49) 아들은 모친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였다. 예수님은 12세 때부터 자신의 특별한 소명을 느끼셨고, 세례 때부터 세상 사람들을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는 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당신의 사명임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기 위해 많은 인간적인 갈등을 겪으셔야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내가 이렇게 마음을 겉잡을 수 없으니 무슨 말을 할까? '아버지, 이 시간을 면하게 하여 주소서'하고 기도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고난의 시간을 겪으러 온 것이다."(요한12,27)하셨다. 수난을 목전에 둔 겟세마니 동산에서도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제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가22,42)하며 기도하셨다. 예수님이 가셔야 할 그 소명의 길은 '자신을 바쳐 많은 이들을 살리는 고통받는 야훼 종의 길'이었다. 그 길은 인간적으로 멀리 도망치고 싶은 고통과 수난의 길이었지만, 예수님은 항상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며 그 길을 묵묵히 가셨다.

끝내 예수님은 큰 쇠못이 당신의 손발을 뚫어 십자가에 못 박히기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예수를 보고 "네가 유다인의 왕이라면 자신이나 살려 보아라."(루가22,37)하며 야유를 퍼붓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꼼짝도 못하고 죽음만 기다려야 하는 이 순간은, 완전한 패배의 순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순간은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일생동안 따라다니던 끈질긴 유혹을 끝내 물리치고 당신을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복종시킨 진정한 승리의 순간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도망갈 수 없게 됨으로써, 자신을 이기고 죄인들을 위한 숭고한 제물로 자신을 바쳐 죽음을 넘어서는 결정적인 승리를 얻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 '이제 다 이루었다'하시며 고개를 떨어뜨리시며 숨을 거두셨다."(요한19,30)

이렇게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제물이 되어 죽으심으로 인간의 이기심과 아담의 불순종이 엮어 낸 모든 죄업(罪業)을 말끔히 씻으셨다. 이로써 인간성과 인류는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그 아들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속박에서 풀려났습니다."(제2독서)하고 고백한다. 드디어 예수님은 '만물의 으뜸이 되시고'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우주의 왕'이 되셨던 것이다.

3. 예수는 내 안에서 '왕 노릇'하시는가?

나는 나에게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나를 얼마나 이겼는가?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해방과 자유는 자신을 얼마나 이겼는가에 달려있다. 예수님이 죽음을 넘어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된 것은 자신을 온전히 내 놓는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순명으로 된 것이었다. 나에게 있어 예수는 누구인가? 참된 해방, 구원에 이르는 길은 바로 예수님이 가신 그 길에 있음을 깨닫자. 이 깨달음이 없이는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나의 모든 삶이 예수 중심의 삶이 되어 예수님이 나에게 왕 노릇 할 때, 그 때 나에게 주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다.

유영도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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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흘리는 왕

연중 34주일 전례력으로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주일입니다. 교회는 이날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정하여 예수님이야말로 진정한 왕이시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간 역사 안에는 많은 왕들이 존재 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많은 왕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위대한 왕은 대왕이라고까지 일컫는 조선의 4대 왕 세종일 것입니다. 최근 한글 창제 탄생의 비밀을 밝히는 내용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뿌리 깊은 나무’라는 드라마에서 우리는 세종대왕의 다른 면을 보게 됩니다.

한국의 국어인 한글을 창제하신 분이니만큼 매번 언사에 조심스럽고, 표준어만 사용할 것 같고, 품위 있을 것 같고, 학식이 깊어 풍겨 나오는 아우라(Aura)가 심히 다가가기 어려울 것 같았던 인물 세종대왕 하지만 드라마 속 세종의 모습은 지금 시대에서도 격하다고 할 수 있는 말(‘우라질’, ‘지랄’, ‘젠장’)을 기분 내킬 때마다 내뱉고 그 옆에서 조마조마하며 지켜보는 상궁, 궁녀들이 있으나마나 상관없이 자신의 기분을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사실 이 드라마는 펙션(Faction)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드라마로, 사실을 의미하는 펙트(Fact)와 허구라는 의미의 픽션(Fiction)이 합쳐진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상상력을 가미한 퓨전사극이기에 고정관념 속의 위대한 왕인 세종의 다른 면모를 보고 웃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러한 허구적인 사실이 가져다주는 웃음 속에서도 우리의 시선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했던 것은 조정의 대신들과 세종과 벌어지는 대립이라는 역사적 진실이었습니다. 나라의 주상이었지만 상황(上皇: 이방언)과의 왕권행사에 대한 대립으로 자기 마음대로 왕권을 펼칠 수 없었던 세종의 회환과 중국 성리학의 질서로부터 벗어나기 위함과 동시에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하여 한글 창제를 계획하고 그것을 은밀하게 돕던 신하들이 하나둘 죽어갈 때 흘리던 세종의 눈물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합니다.

우리가 오늘 경축하여 기리는 왕 또한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과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인간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신 메시아이신 예수, 하지만 드라마 속 세종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철저히 세종에 반대하던 신하들과 같이 우리 인간은 온전히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철저히 순종하여 가난하고 병들고 죄인들과 함께하는 그분을 완고한 마음으로 거부하고, 하늘나라가 왔다는 기쁜 소식에 철저히 귀를 막아 반대하였으며, 종국에는 자신들의 손으로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의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오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했을까요?

연중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가 살아온 삶을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해주는 종말의 심판에 빗대어서 말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지막 주일을 복음과 함께 잘 준비하여 고대하던 메시아의 탄생을 고대하는 대림시기를 잘 준비하도록 합시다.

권기덕 안셀모 신부
  |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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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왕 예수

예수님은 그리스도(왕)입니다.
높은 곳 하늘에서 낮은 곳 땅으로 내려오셨기에 왕입니다.
예수님은 섬김 받기 위해서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되신 분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마태1,23)
그분이 차지하는 낮은 자리는 섬김 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섬기는 하느님이지 섬김 받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임마누엘이 섬기는 작고 보잘것없는 생명도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노자(老子)는 도덕경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 故能爲百谷王.
“강과 바다가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스스로 낮추기를 잘하기 때문에,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됩니다.”
골짜기 물들이 큰 바다로 흘러들 수 있는 까닭은
낮은 곳에서 모든 골짜기를 섬기는 강이 있기 때문입니다.

높은 곳에 머물면 작고 보잘것없는 형제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낮은 곳에 머물면 작고 보잘것없는 형제도 크고 높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 왕 예수님의 왕도(王道)는 섬김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基督人-크리스챤)은 그리스도 왕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으로부터 섬김 받는 사람입니다.
그분으로부터 섬김 받기 때문에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 그리스도인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왕다운 사람(그리스도인)입니다.

강영구 신부
  |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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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 하느님 뜻으로 세우고, 하느님 품에서 펼치고, 하느님을 모시는 나라입니다. 세상을 설계하신 하느님 뜻을 담은 “말씀” 하느님 나라 설계도입니다. 이 설계도에 따라 인간은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짓습니다.

하느님 뜻을 이 땅에 세우는 일, 성사입니다. 하느님 뜻을 담은 “말씀”이 사람이 되신 일, 은총입니다. 말씀은 성사로 드러나고, 성사는 은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교회는 성사를 전례에 담아 은총을 이 땅 위에 끝없이 펼칩니다.

미사 전례 안에서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이야기를 담은 성경을 읽고 시편을 노래합니다. 미사 전례는 빵과 포도주에 하느님 영을 실어, 하느님과 인간의 결합을 기념합니다. 이 결합이 내뿜는 기운이 성사에 담은 은총입니다.

시간 전례는 계속해서 성사에 담은 은총을 노래합니다. 세상의 시작, 성장, 마침은 하느님 뜻을 온전히 세상에 전하신 말씀 안에서 이뤄집니다. 교회는 시간 전례를 통해 설계도인 말씀에 비춰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계속 짓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 이 땅에 짓는 하느님 나라의 낙성을 전례 안에서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느님 뜻을 담은 말씀, 사리사욕 한 점 없는 공익을 앞세운 마음입니다. 삿된 욕망을 모두 걷어 내야 보이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 마산교구 함영권 신부 : 2017년 11월 26일
  |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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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우리가 꿈꾸는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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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낮추시며 우리를 위해 봉사하시는 왕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대축일을 맞이하여
‘왕은 어떤 왕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과거에 봤던 “광해-왕이 된 남자”란 영화의 명대사가 생각났습니다. ‘가짜 왕’이 된 주인공 ‘하선’과 도승지 ‘허균’이 나눈 대사를 통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연결해보았습니다.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는 왕,
진정 그것이 그대가 꿈꾸는 왕이라면 그 꿈 내가 이루어드리리다!” 사람들이 꿈꾸는 왕은 백성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진정으로 섬기는 왕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 인간을 군림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섬기러 오셨습니다. 인간을 섬기기 위해 하느님이심, 즉 신성을 버리고 인간이 되신 왕입니다.

“나로 인하여
그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왕이 되지 않겠소이다!”

“임금이라면
백성들이 지아비라 부르는 왕이라면 내 그들을 살려야겠소.”

임금을 위해 백성들이
죽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지만, 오히려 자신을 왕이라 부르는 백성들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고 그들을 살리겠다는 왕, 이런 왕이 되고 싶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죽는 것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인간을 살리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죄 많은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희생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백성들은 자신의 왕을 지아비라 부르듯이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은 자녀인 우리 인간을 살리기 위해 애쓰신 것입니다.

“그대들이 말하는 사대의 예.
나에겐 사대의 예보다
내 백성들의 목숨이 열 갑절 백 갑절은 더 소중하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신 만큼,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비천한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신적 영광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왕을 원하며,
그 왕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교회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일인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온 누리의 왕으로 선포하는 데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구원계획을 세우셨고,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파견하시어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사업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코린토 1서의 말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2)

우리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들의 왕으로 받아들이며, 그분을 섬기며 살아갈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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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정근 요한 신부
2020년 11월 22일 <마산교구 주보>에서
  |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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