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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늘나라 백성이 지녀야 할 모습
조회수 | 3,319
작성일 | 05.11.18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며,
전례력으로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주일입니다. 즉 우리는 세상의 왕국이 아니라 그리스도 왕국에 속한 백성이며, 그리스도가 우리를 다스리는 진정한 왕임을 고백하고 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장엄하게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 ‘크리스토스’의 우리말 표기이며,
헬라어 ‘크리스토스’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번역입니다. ‘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을 읽다 보면 왕과 예언자들이 기름부음 받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시대에 ‘메시아’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실 정치적·종교적 지도자, 즉 다시금 강력한 유다왕국을 건설할 왕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초대공동체는
예수 부활을 체험하고 나서 ‘그리스도’가 정치적·종교적 권력을 누리는 왕의 의미를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사업도 유다인을 넘어서 인류 해방이라는 종말론적 무게를 포함한다고 알아듣습니다. 따라서 이미 초대공동체에서부터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님께 붙여진 고유한 호칭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반면에 오늘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왕좌에 앉는 장면으로 출발합니다. 연중 31주일의 ‘달란트의 비유’와 연중 32주일의 ‘열 처녀의 비유’는 하늘나라, 즉 그리스도 왕국에 들어갈 사람들과 그렇지 않을 사람들에 대한 비유였습니다. 반면에 오늘 복음은 매우 직설적으로 그리스도 왕국에 들어갈 사람이 지녀야 할 삶의 태도를 제시합니다. 종교 규정의 형식적인 면이 아니라 일상의 구체적 행위로 그리스도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랍게도 당시 유다의 종교 계명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차원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삶의 구체적 선행이 종교적 계명보다 더 결정적인 조건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씀은 계명과 율법만을 강조하던 당시의 유다 종교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은 역동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데 우리는 어느덧 또다른 율법을 만들어 그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을 흘려버린 안타까움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실로 그리스도 왕으로 섬긴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함께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늘나라 백성이 지녀야 할 모습입니다. 그 출발은 오늘 복음이 전하듯이 우리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 대한 형제적 관심이며, 이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에 왕이신 그리스도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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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최승정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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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을 준비하는 마음

「그래서 이 자들은 영원한 벌을 (받으러) 갈 것이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러) 갈 것입니다」(마태 25,46).

겨울을 재촉하는 늦 가을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가운데, 이미 깊어버린 가을의 황량한 들판과 떨어져 비에 젖어 흐트러진 낙엽이 뭔가 사람의 마음을 허전하고 쓸쓸하게 합니다. 답답한 마음에 훌쩍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우연히 틀어 놓은「섹스폰」곡 모음의 애절한 가락들이 분위기를 한껏 돋구어 주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교회의 전례주년도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마지막이란 단어는 그 자체로도 사람의 마음을 심란하고 불안하게 합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마지막 주일이지만 그 때마다 또한 반복해서 지난 1년을 후회하고 똑같은 결심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지금이 불경기라고들 합니다. 하기는 불경기란 어떤 분이든 언제든지 있어 왔고, 또 그렇게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다른 모양입니다. 회사마다 무슨 기구 축소니, 명예퇴직이니 하는 말들이 쉽게 나오고, TV는 30․40대 퇴직자들의 처절한 구직 현장을 방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TV드라마도「가을 소나타」나「아내가 있는 풍경」등 40․50대의 명예 퇴직자들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봉급 생활자들은 이런 것을 보고들을 때마다 남의 일 같지 않아 가슴이 두근거리고, 자기도 언제 회사를 그만 두게 될 지 불안하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명예퇴직이 꼭 불운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군인들이 계급 정년이나 연령 정년에 걸려서, 30대나 40대에 제대한 사람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결국 대부분의 군인들은 40․50대에 모두 예편을 합니다. 불안했던 마음이야 그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그래도 대부분 성공적으로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왔습니다.

이번에 수능시험을 치른 학생들은 그 결과를 기다리며 약간은 느긋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첫 지원에서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수험생들이 아직도 해방감에 젖어 들기는 이릅니다. 여전히 많은 학생들은 밤잠을 줄이고 독서실을 찾아야 합니다. 입학시험에 합격 불합격 판정을 불안해하며 기다리는 심정은 누구나 경험해 봐서 다 잘 압니다. 그래서 합격자 발표 현장은 환호와 좌절이 극명한 장소가 됩니다. 그러나 대학 입학이 인생의 전부가 아닐 뿐 아니라, 학창생활의 전부도 아님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대학에 떨어졌기 때문에 전화위복이 된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여러 가지 마지막을 겪게 됩니다. 무엇이나 시작한 것은 마감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항상 새로운 시작이기도 합니다. 역시 연중 마지막 주일도 지나고 나면 새로운 전례주년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중에

도 이 생에서는 최후의 마지막이 있습니다. 다른 마지막은 재도전의 기회가 있지만 이것만은 재도전의 기회가 없습니다. 생을 마감하는 죽음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새로운 생의 시작을 믿습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분명히 내게도 닥칠 마지막이건만 마치 나는 그것과 상관이 없는 양 살아갑니다. 직장을 떠나게 될까봐 불안해하는 회사원 같지도 않고, 대학에 지원해 놓은 학생들만큼 조마조마 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분위기에 따라 죽음을 생각하면 약간 심란할 정도입니다.

창밖에는 계속 가을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습니다. 감나무의 잎새는 모두 떨어지고 빠알간 감알만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비를 맞은 감은 더 진한 색깔을 드러내는 듯하고 땅에 떨어진 잎사귀는 우중충한 색깔이 되어 젖은 쓰레기처럼 되였습니다. 내일이라도 비가 그치고 햇살이 나면, 주인은 어지럽게 뒹구는 낙엽을 비로 쓸어 불태워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감알은 조심스레 따서 바구니에 담아 집안으로 들여갈 것입니다. 그 감은 먹은 사람의 살과 피가 되어 같은 생명을 누리며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세상을 함께 살고서도 악인과 의인이 갈라지듯이, 한 나무에 달렸던 감과 잎이 갈라지는 순간에 나는 감의 신분이 될지, 아니면 낙엽의 신세가 될지,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입에는 침이 바짝 말라 버렸습니다.

서경윤 신부
  |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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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진리

오늘 교회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냅니다. 󰡐그리스도 왕󰡑이란 그리스도께서 임금이요, 왕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임금이신 그리스도는 세속의 권력과는 거리가 먼 분입니다. 그분은 오히려 세속의 권력자에게 사형 선고를 받으셨던 분입니다. 빌라도는 군중들 앞에 예수님을 세우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빌라도의 짧은 말은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채찍으로 만신창이 되고 피를 철철 흘리며 우리 앞에 서 있는 이 볼품 없는 인간이 무슨 놈의 왕이란 말인가?”

예수님은 그러나 왕이신 분입니다. 그분은 진리의 왕입니다. 주님께서는 빌라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왕이라고 당신이 말했습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습니다”(요한 18,37).

요한복음에 의하면 하느님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17,17). 하느님은 사랑이니까(1 요한 4,8), 사랑의 말씀이 진리가 됩니다. 이렇게 사랑과 진리는 늘 함께 갑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진리가 있고, 진리가 있는 곳에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 1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 요한 4,7-8).

사랑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구체적입니다.
진리 역시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진리는 어렵지 않습니다(至道無難 지도무난).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진리가 드러내는 구체적인 사랑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해 주듯이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신경을 써 주십시오. 나에게 해 주듯이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십시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이렇게 다시 풀어 써 봅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진리의 꽃을 아름답게 피우십시오. 사랑과 진리의 꽃에서 피어난 열매가 바로 구원임을 명심하십시오. 사랑은 굶주리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사랑은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병든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사랑의 왕으로, 진리의 왕으로 살아가신 분입니다. 주님을 닮아 사랑의 왕으로, 진리의 왕으로 한 번 잘 살아보자는 것이 우리네 신앙생활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자는 것 입니다.

그렇게 살아가기를 희망합니다.

박성칠 신부
  |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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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의 왕이신 예수님

구둣방을 하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자기는 살만큼 살았고 이제는 하느님 나라에 잘 가는 것만이 유일한 소망이라고 늘 생각했습니다. 노인은 죽기 전에 예수님을 꼭 한 번만 뵙게 해달라고 밤낮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한 덕분인지 노인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예수님이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내일 내가 찾아가겠노라."
 
꿈을 깬 노인은 어찌나 기쁘고 신바람이 나는지 새벽부터 온 집을 쓸고 닦으며 부산하게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침부터 눈이 빠지게 예수님을 기다렸지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저녁이 다 됐는데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 날도 찾아온 사람은 어김없이 헐벗은 거지, 동냥 나온 굶주린 모자, 앞 못 보는 소경, 그리고 몇몇 손님이 전부였습니다. 기다리다 지친 노인은 "아유, 그럼 그렇지. 아무리 꿈속이라지만 예수님이 내게 오실 리가 있겠나. 개꿈이었나 보네"하며 무척 실망스러워했습니다. 그날 밤 하루 종일 긴장 속에 지낸 노인이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는데 또 꿈속에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을 보자 노인이 대뜸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예수님, 오늘 저에게 오신다고 약속하시고선 왜 오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지요.
 
"무슨 소리냐? 내가 오늘 세 번이나 너를 방문했는데… 한 번은 거지의 모습으로, 또 한 번은 굶주린 모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소경의 모습으로 말이다."
 
오늘 복음 말씀 그대로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며 만나고 싶어하고 예수님 말씀을 한 마디라도 더 듣고 싶어 하며, 천국에 가고 싶은 열망으로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루에도 수없이 마주치는 거지들, 인간다운 삶을 외치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 치료비가 없어서 병원에서 쫓겨난 사람들, 학교에 가서도 한 끼 먹을 것이 없어서 물로 배를 채우는 결식아동들, 그들이 바로 당신이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들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왔었노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해 주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너무나도 나 중심적이고 이웃에게 배타적이며 물질주의에 젖어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참으로 편치 않은 말씀입니다. 우리시대 성향과는 전혀 다른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웃을 위한 선행만이 우리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분께서 만드신 심판의 유일한 기준이라는 사실입니다. 죽은 후에 우리가 심판을 받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기준은 소외받고 힘든 이에게 얼마나 위로를 주고 나눠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불편해도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모습은 이런 나눔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영원한 세상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그에 걸 맞은 준비를 하면서 살아가십시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바른 준비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노후대책에 관심이 많지요. 노후를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하고 건강해야 한다면서 열심히 준비합니다. 물론 노후를 위한 준비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한 준비가 그것입니다. 노후를 위해서는 몇 억을 준비했지만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가난한 이웃을 위한 나눔의 통장이 비어 있다면 그 사람은 미신자들과 다름없는 삶을 산 사람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경고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그리스도는 우리 왕이십니다. 그분의 왕국은 오늘 복음 말씀을 실천하는 자에게만 열려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특히 어려운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이기양 신부
  |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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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염소

우리는 양입니까? 염소입니까? 양의 무리 속에 염소가 끼어 있으면 얼핏 보기에 비슷해 보이지만 양과 염소는 분명히 다릅니다. 양도 염소도 각기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양이라면 털이 곱슬곱슬하고 통통한 게 순하다는 인상이 떠오르고, 염소라면 뿔과 수염이나 있으며 고집이 센 놈들로 기억됩니다. 양은 순해서 타인에게 쉽게 다가가지만, 염소는 고집이 세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습니다. 양이 타인 지향적이라면 염소는 자기 중심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양입니까? 염소입니까?

가끔 텔레비전 뉴스에 청와대에 경제인들이나 사회 각계 유력한 지도자들이 초청되어 식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세히 보면 대통령 옆에 앉거나 같은 식탁에 앉은 사람들은 초청된 사람 중에서도 더 높은 지위의 사람들이거나 재력이 큰 재벌들 순서입니다. 여러 개의 식탁이 있고 저 구석에 앉은 사람들은 대통령 얼굴도 잘 안 보이고 말 한번 붙여볼 수도 없습니다. 거기에도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정말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청와대에 가보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대통령보다도, 역사상 어떤 왕보다도 위대한 분이시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훗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왕좌에 앉아 모든 민족 앞에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보잘것없는 사람 중에서도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을 챙겼는지 챙기지 않았는지를 따지신다고 했습니다. 그 큰 영광에 싸인 그리스도 왕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기준은 커다란 업적이 아니라, 바로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 건네준 빵 한 조각, 물 한 모금, 옷 한 벌이며, 병자와 옥에 갇힌 사람을 찾아갔던 그 발걸음이라고 했습니다. 작지만 따뜻한 그 선행이 바로 위대한 그리스도 왕께서 가장 반기시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보잘것없는 사람을 챙겼으면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는 양이 되는 것이고, 챙기지 않았으면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나는 염소 신세가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스스로 양인지 염소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도 양이겠지 하고 있지만, 우리가 자기 안에 갇혀 이웃에게 다가가지 않고, 할 수 있는 작은 선행들을 하지 않고 있을 때, 우리 턱에는 수염이 자라고, 우리 머리 위에는 뿔이 자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말구유에 태어나셨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는 군마(軍馬)가 아닌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으며, 최후의 만찬 때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극히 겸손한 그분이 바로 왕 중의 왕이시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깊고 솔직한 기도와 통회로써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의 염소 됨을 없애야 합니다. 즉 자기를 자랑하는 수염과 타인을 밀쳐내는 뿔을 뽑아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열쇠는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주위에 그런 사람을 챙기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먹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아직 염소인가 봅니다. 염소는 작은 일에도 고집을 부립니다.

고찬근 루카 신부
  |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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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인데, 교회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경축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믿는 분, 곧 하느님 사랑의 최고 현현(顯現)이실 뿐만 아니라 믿기 위해서 우리가 일치되어야 할 분”임을 다시금 새겨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신앙의 빛」 18항)

나의 양 떼야, 너희를 구해 내겠다(에제 34,12.17 참조)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신앙의 해 개막 미사 강론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 신앙의 중심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습니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자가 ‘이스라엘 목자들’(에제 34,1-10)의 태만으로 양 떼를 잃는 결과를 초래한 사실을 언급한 후에 이어지는 이른바 ‘좋은 목자’이신 하느님에 대하여 선포한 내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양 떼를 찾으시고, 보살피시고, 구하시고, 쉬게 하시고, 도로 데려오시고, 싸매 주시고, 원기를 북돋아 주시는”(에제 34,11-16 참조) 분이십니다. 사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콜로 3,17 참조) 하느님의 구원에 깊이 의탁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2)

그리스의 신학자 카바실라스(N. Cabasilas)는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는 그분이 우리가 지음 받을 때의 원형(原形)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들 안에 이미 그분께서는 충만히 현존하신다”(안젤로 아마토 추기경 「예수 그리스도」 참조)고 가르칩니다.

오늘 제2독서는 바오로 사도께서 “그리스도의 부활”(1코린 15,1-11)에 이어서 “죽은 이들의 부활”(1코린 15,12-34)에 대하여 선포하신 내용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서학자 스탠리 B. 매로우 신부님은 「바오로 서간과 신학」에서 “부활의 확실성에 대한 유일하고 참된 증거는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신앙인의 생활뿐이다”라고 강조합니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께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 준 것과 해 주지 않은 것(마태 25,40.45 참조)

교부학자 만리오 시모네티(M. Simonetti)가 엮은 「교부들의 성경 주해 : 마태오 복음」에 “지상의 목자는 동물의 몸 생김새에 따라 가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영혼의 생김새에 따라 사람들을 가르십니다”라는 해설이 있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십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 25장의 ‘열 처녀의 비유’(마태 25,1-13), ‘탈렌트의 비유’(마태 25,14-30)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는 ‘최후의 심판’(마태 25,31-46)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세 가지를 관통하는 이미지는 “가름, 나눔, 구별, 식별”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길을 택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은 앵무새처럼 입만 살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마음과 손을 지녀야 합니다”라고 권고하십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성 대 레오 교황님께서는 “하느님께 속한 영혼이 자기 몸을 다스리는 것 이상으로 더 왕다운 것이 있겠습니까?”라는 말씀으로 우리의 소명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교형 자매 여러분, 요한 바오로 2세 성인 교황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와 역사의 중심이시다”라는 정의로써 당신의 첫 회칙 「인간의 구원자」를 시작하십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신앙의 해 폐막 미사 강론에서 “그리스도는 창조와 백성과 역사의 중심이시다”고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중심이신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유일한 왕’이십니다. 이미 그분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모습을 몸소 보여 주셨는데, 지금도 우리가 그 길을 따라 살도록 끊임없이 이끄십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를 닮아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모습을 갖추는”(갈라 4,19 참조) 구원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시길 빕니다. 아멘.

▤ 서울대교구 정연정 신부 : 2017년 11월 26일
  |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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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동네를 가도 폐지를 모으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몇 분씩 볼 수 있습니다. 어르신들에게 마땅한 일거리가 없다 보니 버려진 폐지나 고철 따위를 주워 조금이라도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고생을 하십니다. 고령화 시대로 들어선 우리 나라의 어르신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얼마 전 아주 감동적인 기사를 읽었습니다. 한 할머니께서 자신이 종종 이용하는 무료급식소에 1년간 폐지를 주워 모은 100만 원을 기부한 사연이었습니다. 혼자 사는 그 할머니는 무료급식소에서 자주 점심을 해결해왔는데 봉사자들의 헌신적 사랑에 뭔가 도움을 줄 수 없을까 하여 폐지를 줍기로 했습니다. 할머니는 새벽 1시에 일어나 주택가를 돌며 폐지나 고물을 모아 팔았습니다. 이렇게 버는 돈은 하루 3천 원 정도였습니다. 할머니는 목표로 했던 100만 원이 모이자 무료급식소에 기부를 했습니다. 주변에서 할머니에게 찬사를 보내자 부끄러워하며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폐지를 주워 더 많은 사람을 위해 기부하고 싶다”고 했답니다. 돈 때문에 부모를 버리고 형제와 의절하기도 하는 황금만능주의 세상에서 진정한 삶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따듯해집니다.

교회력에 따르면 오늘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이며 올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 한 해를 생각하며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반성해 봅니다. 솔직히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면 늘 그렇듯이 만족보다는 후회가 더 많습니다. 정말 나의 삶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늘 함께했는가? 특히 얼마나 이웃 사랑을 실천했나를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권력으로 국민들을 통치하는 다른 왕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그분은 가장 비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분께서 가르치시는 모든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과 용서와 평화 그리고 겸손이었습니다.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최후의 날에 모든 이들을 심판하십니다. 그 기준은 분명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이웃 사랑의 실천 여부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모범을 따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하신 진정한 왕직은 권력을 장악하여 백성을 억누르는 임금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희생하시며 사랑으로 백성을 섬기는 봉사직입니다. 진정한 봉사직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보상 없는 나눔과 순수한 사랑의 실천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예수 그리스도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말씀을 마음에 잘 새겨야 하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허영엽 마티아 신부 : 2017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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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갑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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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갑을관계가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립니다.

보통 계약서에서
주도권을 지닌 쪽을 ‘갑’, 반대쪽을 ‘을’이라고 기재함에서 유래합니다. 갑을관계 문화는 위아래를 철저히 구분해, ‘갑’은 자신보다 아랫사람이라고 판단되는 ‘을’에게 무례하게 대하며 ‘을’은 ‘갑’의 권위에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맞춰야 한다는 문화입니다.

‘갑질’과 반대되는 ‘을질’도 존재합니다.
‘을’이 상대적 약자임을 역이용하여 ‘갑’의 정당한 권리 행사를 방해하고 ‘갑’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이번 주일 성경말씀에서
갑을관계로 잘못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나옵니다.

제1독서(에제 34,11-12.15-17)에서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나 이제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에제 34,17)고 말씀하십니다.

복음(마태25,31-46)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태 25,32-33)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이 축일을 기점으로 전례력의 한 해를 마무리하는 교회는 최후 심판에 관한 말씀을 경청합니다.

최후 심판의 핵심은
양과 염소를 가르는 기준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와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25,45)를 기준으로 하느님의 마지막 심판이 내려질 것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 여정을 어떻게 걸어왔는지에 따라,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을’을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 최후 심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갑을관계로 따지자면,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을’로 사셨던 분입니다. 제2독서(1코린 15,20-26.28)에서 “아드님께서도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는,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1코린 15,28)라고 바오로 사도는 선포합니다.

우리를 위해
죄 없으신 분이 누명을 뒤집어쓰고 돌아가셨기에,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세상에 밝혀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참된 ‘을’로 사셨던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물론 ‘을’로 산다는 것은 자존감을 떨어뜨립니다. ‘을’로 산다는 것은 억울합니다. ‘을’로 산다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과 함께 ‘을’로 산다는 것은 기쁨이며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기에서 ‘갑’으로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을’로 살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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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
2020년 11월 22일 <서울대교구 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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