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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그리스도께 합당한 신뢰와 사랑을
조회수 | 3,198
작성일 | 05.11.18
오늘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왕 대축일’로써 전례력을 마치는 날이다. 교회가 전례주년 마지막에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권이 전례적으로 영성적으로 전례주년 전체를 종합하면서 총체적인 묵상자료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진정으로 우리가 모두 우리의 ‘전부’이신 그리스도께 합당한 신뢰와 사랑을 드리며, 우리의 생활이 종합되어 그리스도의 신비에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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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 34장 11절-12절.15절-17절 : 너희는 나의 양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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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왕권이란
통치권과 지배권만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긍정이며, 그분의 영광에 ‘우리를 결합시키는’ 그분의 의지이다. 즉 우리 모두를 초대하시는 ‘참여적’ 왕권이시다.

제1독서에서
‘목자’라는 개념은 ‘왕의’ 품위로 나타난다.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목자이신 왕으로 드러내신다. 그러나 다른 왕들과는 다른 왕이시다. 즉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이시다. 사랑의 왕권이지 지배의 의미나 착취의 의미가 아니다. 그분은 길 잃은 양떼를 찾으러 가시고 다친 양들을 돌보시고 보호해 주신다.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암시이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길 잃은 양을 찾으러 가는 “착한 목자”(요한 19,11-18)로 제시하셨다. 그러면서 당신의 양떼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과 헌신을 통하여 ‘왕권’을 행사하신 그분의 모습을 내다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랑의 왕권이라 하여 ‘심판’의 왕권마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말씀이 마지막 구절에 나타나고 있다(17절). 왕권에의 참여라는 구원을 위한 왕권이지만, 단죄할 수도 있는 왕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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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 : 고린토 1서 15장 20절-26절.28절 : 만물을 완전히 지배하시는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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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께서는
그리스도의 왕권이 긴장과 싸움을 통하여 확보된다고 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보장된다고 한다. 그분은 ‘죽음’을 쳐 이기셨기 때문에 ‘왕’이시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이 승리에 참여케 하시며 ‘새 아담’ 즉 새 인류의 영적인 머리이시다(21-22절).

맨 처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당신의 왕권의 승리에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부활한 첫 사람”(20절)이라는 상징적 표현은 지상의 첫 결실들이 나중에 얻게 될 수확의 ‘보증’이듯이 우리 부활의 보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왕권은 완성되지 않았다. 죽음이 아직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은
종말론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죽음을 이기신 후 모든 만물은 하느님의 직접적 절대 통치권 하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이 마지막 결정적 통치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사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 자신과 더불어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이다. 우리가 없다면 그분은 하느님께 바칠 ‘왕국’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께 속해있는 것 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다스리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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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5장 31절-46절 :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 최후의 심판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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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왕’으로서 동시에 ‘심판관’으로서 드러내신다. 여기서 심판관이 주시는 ‘나라’는 당신을 충실히 섬긴 보상이며, 당신이 다스리시는 ‘왕권’이 있음을 의미한다(34절). “나라를 차지하여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다스리실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다스리시기를’ 원하신다.

함께 다스린다는 것은
역사 내에서 그렇게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분의 왕권은 갑자기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매일의 행위를 통해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분의 왕권이 드러나고 또 인간이 그 왕권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분의 최후의 ‘심판’의 기준에서 나타나듯이, 형제들의 괴로운 몸과 마음 안에 계신 그분의 ‘위격’에 행하는 사랑의 크기에 좌우될 것이다(35-36.40절).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들”이란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있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하는 문제와는 상관없다. 그들은 그저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 버림받거나 소외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들의 불행한 처지와 다름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구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목록들이다(이사 58,7; 토비 4,16 참조). 이제 예수께서는 여기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시고, 그것을 거절하는 행위를 준엄하게 다루신다고 하신다. 바로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지상생활에서
예수께서도 가난하셨고 당시 사회로부터 압박과 핍박을 당하셨으며 거부와 배척을 당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러”(요한 1,29) 오신 분으로 어디서든지 악을 고발하고 단죄하셨다. 그래서 불의를 당하는 사람들 편에 항상 가까이 계셨던 분이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재평가이며 모든 인간의 손상된 몸과 마음속에 원래 새겨져 있는 품위에 대한 재인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 항상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분을 받아들일 때만이 인간의 품위를 진정으로 증진시킬 수 있고 인간의 모든 어려움과 원의를 해결해갈 수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현존하실 수 있도록 그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이웃을 통해서이다. 특히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이다. 바로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사랑을 거절하는 것은 바로 그분을 거절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당신의 삶을 통하여 ‘섬김’과 ‘십자가에 내어주심’에서 얻으신 것이다. 이 삶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그 ‘왕권’을 인간들에게도 참여하게끔 해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삶을 우리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영광의 나라에서 그분의 왕권에 참여하고 생명을 차지할 것이다. 이웃 안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도록 항상 깨어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도우심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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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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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늘은 교회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주일이다. 교회는 한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주일을 ‘그리스도 왕 대축일’로 정하고,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왕이심을 경축한다. 그리스도 왕….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우리의 왕이시고, 우리는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있는 백성이라는 의미이다.

그럼 여기서 우리 각자에게 질문해 보자. 과연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나의 진정한 왕으로 모시고 있는가? 이 질문에 신자라면 누구나 ‘예’ 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세례성사 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자 왕으로 모시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백성들이 언제나 자신의 왕과 함께 하듯이, 나도 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겠다는 다짐을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다짐대로 살아가지 못할 때가 더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이라고 하면, 우리 삶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취미 생활을 하듯 신앙생활을 바라볼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모시겠다는 우리의 다짐을 희미하게 만들어, 그저 성당에 와야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려 하고, 성당 밖에서는 그분을 잊고 살아가게 한다. 이는 왕과 함께 해야 하는 백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백성 따로, 왕 따로의 모습에 더 가깝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따로, 따 로’의 모습을 원하지 않으신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도 이점을 분명히 하신다.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매 순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려 했던 이들과 그저 필요할 때만 함께 하려 했던 이들이 어떠한 평가를 받는지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진정 왕으로 모시는 백성이라면, 언제나 충실하게 함께 해야 함을 강조하신다. 즉, 우리 모두는 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돌보심 안에 있다는 것을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충실히 모시겠다며 그분을 선택한 그분의 백성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나의 왕으로 모시겠다고 다짐한 만큼, 그분의 돌보심 안에 있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면서 그분과 함께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자신을 그분께 맡겨야 한다. 무엇이 걱정인가?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나은 것이 세상 어디에 있는가? 어떤 것도 예수님의 돌보심보다 나은 것은 없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백성으로서, 그분의 돌보심에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왕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백성인 우리 모두를 당신의 나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주님, 받으십시오. 저의 모든 자유와 저의 기억과
저의 지성과 저의 의지를 당신께 되돌려 드리나이다.”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기사가 된다는 것에 너무나 기뻐했던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의 기도)

인진교(요셉) 신부
  |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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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왕 예수 그리스도!

‘왕’이란 모든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으며, 군사상 통수권을 지닌 국가의 최고통치자입니다. 우리는 알렉산더대제, 줄리어스시저, 샤를대제, 정복자 나폴레옹, 칭기즈칸 등 역사속 많은 왕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세력을 세상에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대단한 통치자였어도 그세력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왕국과 사상은 영원히 지속되지 못했으며 그저 역사의 한장으로 후대에 남겨졌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아무리 세력을 떨쳐봐야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왕은 누구이십니까? 우리의 왕은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세상의 왕들과 달리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하느님’이십니다. 무한한 성격을 지닌 하느님나라는 그 어떠한 한계도 없는 영원한 세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무한하고 영원한 하느님 나라로 초대 받은 백성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백성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승리자요, 왕이신 예수님은 세상뿐만 아니라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까지도 정복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이 세상과내세의 삶에서 구원해 주실 왕은 예수님 한분뿐이십니다. 역사상 그 어떤왕도 백성에게 베풀어줄수 없었던 영원한 행복과 삶의 가치를 가져다주는 왕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라는왕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왕예수님께서는 이세상의 왕들과는 달리 국가를 장악하거나 통치권을 앞세우지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실천만을 강조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힘으로 장악하는 ‘통치’가 아닌, 사랑의법을앞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백성인 우리는 그분의‘사랑의법’을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며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늘나라로 들어갈수있게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계십니다.‘가장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것이 바로 왕이신 예수님께 해준 것과같다’는 이웃 사랑의 가르침이 가슴속 깊이 와닿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가르침을 믿고 실천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준비한 나라를 차지하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깊은 책임감과 배려심이 느껴집니다. 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를 위해 모든것을 전수해 주신 진정한 왕예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을 갖고 그분의 백성임을 자랑스럽게 여깁시다!

이도걸(아드리아노) 신부
  |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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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맞으면서, 임금이신 예수님을 생각하니 행복의 노래가 저절로 나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 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 오늘 화답송인 시편 23장의 내용을 곱씹고 곱씹을수록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맛을 더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께 이처럼 고맙고 감사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처지를 정말 잘 알고 계시고, 나와 항상 함께하시며 내 편이 되어 주시고, 내 숨은 사정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셨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분은 나를 위해 철저히 봉사하신 분이시기에, 내 고마움의 마음이 그분을 유일한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예수님은 임금님이시고 주님이시며 목자이면서도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나를 위해 철저히 낮아지시며, 심지어는 나를 당신의 임금으로 모시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까지 합니다. 내가 굶주려 배고프다고 칭얼거릴 때 먹을 것을 마련해 주셨고, 내가 목마르다고 외칠 때 마실 것을 주셨으며, 내가 세상의 나그네였을 때 따뜻하게 맞이해주셨으며,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셨으며, 내가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셨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찾아 주셨던 분이 바로 그분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나를 위한 철저한 봉사자셨으며, 내가 청할 때 한 번도 거절하지 못하는 종이셨으며, 내 뒤에서 지켜봐주시고 떠받쳐주는 든든한 후원자셨고, 내가 넘어질 때 일으켜주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셨으며, 말로 다 못할 내 기도를 대신해준 기도의 대가(大家)셨으며, 내가 우울할 때 대신 울어주며 나를 기쁘게 해준 광대셨으며, 내가 먼 길을 갈 때 먼저 준비하시며 앞길을 비추는 등불이셨습니다. 나의 당신이 되어 주신 당신은 나로 말미암아 울고 웃으시며, 나의 행복을 위해 나의 전부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 당신이 누구신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은 가끔, 아니 매번 나를 위한 바보이셨습니다. 당신의 모든 일을 다 내려놓고, 마치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나에게 빠져 버린 것 같은 당신! 다 무너져가는 당신의 몸, 당신의 체면, 당신 영광의 자리마저 다 내동댕이치고 나만을 최고로 여긴 당신! 나만을 섬기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지시는 당신! 나를 살리기 위해 그 어떤 희생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으며, 실제로 모든 것을 팔아 나를 구해주시는 당신! 나를 영광스럽게 하려고 당신의 봉사와 사랑과 희생을 감추고 조용히 침묵하시는 당신! 꿈에라도 나타나기를 바라며 조금이라도 좀 더 함께하고자 하는 당신! 나의 말 한마디를 곱게 간직하며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온몸을 바치는 당신! 나의 전부가 되어 주신 당신!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시지만, 당신은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고 하시지만, 당신은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셨습니다.

저 자신을 되돌아보니, 저는 당신 때문에 다시금 살아난 사람이며, 당신 때문에 살아갈 힘을 얻는 사람이고, 당신 때문에 세상 살맛을 느낀 사람입니다. 당신 때문에 저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옮기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당신은 꽃길을 마련해주셨으며, 나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당신 마음에 곱디곱게 기록해 두셨으며, 나의 거동 하나하나에 당신은 감동하며 살며시 웃으셨습니다. 당신은 나의 존재 자체로 행복해하셨습니다. 당신은 내가 당신 아닌 다른 곳에 마음을 두어도 내색하지 않으셨으며, 내가 두 마음을 품어도 당신은 화내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부정을 다 아심에도 당신은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친히 나를 씻어주는 정화수가 되어 주셨습니다.

당신은 제 삶의 목자라는 권위도, 주님이라는 전지전능도, 임금님이라는 영광도 전혀 드러내지 않으시지만, 당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든 것에 있어 저의 목자이며 주님이시며 임금이심을 고백합니다. 한편으로 죄송스럽지만,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어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저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최인각 신부
  |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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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들은 자기 오른 쪽에

예수님께서는 종들에게 탈렌트를 맡기고 떠난 어떤 사람의 비유를 통해 당신께서 맡기신 탈렌트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말씀하시고 난 뒤에, 이어서 최후의 심판 때에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맡겨진 탈렌트를 잘 사용해서 최후의 심판 때 오른쪽에 세워질 양들이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며, 나그네를 따뜻이 맞아들이고, 헐벗은 이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든 이들과 감옥에 있는 이들을 돌보아 주려는 마음을 갖고, 행동에 옮기려 합니다. 그러한 마음이 우리 안에 가득하기에,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외면하였을 때에는 고해소를 찾아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청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가장 작은 이들을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종종 그들의 약삭빠른 의도가보이거나,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가 바로 내가 미워하는 사람일 때입니다. 그러나 삿된 의지가 뻔히 보일지라도, 내가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적어도 그들을 위한 따뜻한 마음을 내 안에 가지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임금이심에도 몸소 굶주린 이들, 목마른 이들, 헐벗은 이들,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해당신을 바치셨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라틴인 에피파니우스 교부의 시선은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굶주리시고 목말라하십니까? 하늘과 땅 위의 모든 것을 만드셨고, 하늘의 천사들과 땅 위의 모든 민족을 먹이시며, 세상의 어떤 것도 필요로 하시지 않는 그분께서 이 헐벗은 사람이라는 말입니까? 이는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정해야하는 사실이고, 이렇게 생각하면 믿기 쉽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본성 안에서 굶주리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성도들 안에서 굶주리십니다. 주님은 당신 본성이 아니라 당신의가난한 이들 안에서 목말라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겪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도 성도들 때문에 이 모든 일을 그들과 함께 겪습니다”(라틴인 에피파니우스 『복음서 주해』 38 참조).

어느 한 나라의 왕이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내가 만약 입헌군주제의 왕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던져 봅니다. 내가 왕이고, 나의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움직이는데, 오히려 저들을 섬겨야 한다니 가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굳이 그렇게 할 필요까지 없는 자리에 계신 전능하신 분이 일부러 인간이 되어 세상 오셨고, 그러한 낮춤을 도대체 알지도 못하는 이들을 위해 당신의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장 34절 참조) 라고 고백하며 죽어간 우리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섬김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장 작은 이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계시는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때문에 최후의 심판 때에 오른쪽에 세워질 양이 됩니다.

▤ 수원교구 한창용 시몬 신부 : 2017년 11월 26일
  |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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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차별 없이 공정하신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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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기에 유대교라는 뿌리에서 출발한 그리스도교가 많은 박해를 겪으면서도 발전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민족의 차이, 문화, 신분, 남녀의 차이가 만연하던 시기에, 소수의 사람만이 행복해지고 구원을 얻는 사회가 아니라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까지 모두 행복을 누릴 수 있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도 말씀하십니다.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오 복음 25장 32절, 40절 45절).

양은 아무도 해치지 않고
온유하며 누구에게 해를 입어도 저항하지 않고 견디는 인내 덕분에 의로운 사람을 나타내고, 반면 염소는 변덕, 자만심, 호전성 같은 악덕을 특징으로 갖고 있어 악인을 나타냅니다(「교부들의 성경주해」 中). 그리고 이 말씀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잘잘못에 따라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됩니다.

다함이 없는 본성을 지니신 분께서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혔다 하시는 데, 정말 그분이 본성 안에서 그러셨을까요? 아닙니다. 당신의 종들 안에서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악인들이 단죄받은 이유도 다른 것이 아니라 당신의 종들 안에서 굶주리고 목말랐을 때 보살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양과 같이
오른쪽에 자리한 의인들은 선(善)을 행하고도 자신이 그 선을 행했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일상 안에 사랑이 담긴 선이 자연스레 녹아있기에, 그들이 선을 행하는 것은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염소와 같이 왼쪽에 자리한 사람들은 사랑이 결여된 형식을 더 지향하기에 듣고서도 못 들은 척하고, 이해하고서도 이해하지 못한 척합니다. 그저 외면할 뿐입니다.

차별 없이 공정하신 하느님께서
지금의 나를 바라보실 때 내가 서 있는 위치가 어느 쪽에 자리 하고 있는지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악인들이 심판 때에,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감히 서지 못하리라”(시편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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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진우 베드로 신부
2020년 11월 22일 <수원교구 주보>에서
  |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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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2   [부산] 연민과 봉사의 실천  [6] 3091
791   [안동] 구원의 길  [4] 3022
790   [대전] 희망을 품고 살아 갑시다.  [1] 1567
  [수원] 그리스도께 합당한 신뢰와 사랑을  [5] 3198
788   [춘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3] 3183
787   (백) 연중 제34주일 그리스도왕 대축일 독서와 복음  [1] 2759
786   [수도회] 모든 것이 다 선물입니다  [2] 2164
785   [청주] 주인을 바라보는 눈  179
784   [군종] 내가 가진 작은 것에서 부터  [1] 2234
783   [인천] 주님께서 주신 탈렌트  [2] 2354
782   [마산] 나의 달란트 어떻게 쓸까?  2328
781   [춘천] 착하고 성실한 종  [1] 2280
780   [수원] 결실을 맺는 활동적인 신앙생활  [3] 2410
779   [광주] 착하고 성실한 종, 악하고 게으른 종  144
778   [원주] 시든 꽃과 같이  2359
777   [서울] 하느님의 구원 계획  [5] 2647
776   [전주] "묻어둔 달란트를 적극 활용하자”  [1] 2515
775   [의정부] 받은 탈란트를 이웃을 위해  [1] 1774
774   [대구] 자비·겸손·찬미·평화·사랑  [1] 2268
773   [대전]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161
772   [제주] 탈란트의 가치  167
771   [부산] 받은 것을 베풀고 나누고 살자  [1] 2441
770   [안동] 모든 이에게 주신 선물  2066
769   (녹) 연중 제33주일 독서와 복음 (탈렌트talent의 비유)  [4] 1879
768   [수도회] 일상에 대한 진지한 접근  [1] 2591
767   [전주] ‘즉시 그리고 기쁘게’ 나누는 삶  2670
766   [서울]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3] 2916
765   [인천]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  [1] 1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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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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