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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주님을 찾는 사람들
조회수 | 130
작성일 | 17.12.14
[원주] 주님을 찾는 사람들

어떤 사람이 최후의 만찬 때에 주님이 사용하셨던 성배를 찾아 떠나는 길에 성문 앞에서 굶주림에 허기진 걸인을 만났습니다. 그 걸인은 그에게 한 끼의 식사를 구걸을 했지만 그는 거들먹거리며 본체만체 지나쳤습니다. 주님의 성배를 찾아나서는 길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세상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고 심한 고생 탓에 몸에 병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성배를 찾아 나설 때와는 달리 머리는 백발이 되었고 거들먹거리던 모습도 많이 겸손해 졌답니다.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집을 향해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성문을 들어설 때, 떠나면서 구걸하던 걸인이 또다시 자기에게 한 끼의 식사를 구걸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전과는 달리 그에게서 연민의 정을 느꼈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빵을 그에게 건네고 허리에 차고 있던 쪽박으로 시원한 생수까지 떠다 주었답니다. 그 순간,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 손에 들려 있는 그 쪽박이 바로 나의 성배니라."

주님을 찾아서 평생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지만 결국 지금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가난하고 불쌍한 나의 이웃이 바로 주님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지요.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우리는 주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찾는 사람이라면 주님이 가르쳐 주신 방법으로 찾아야 합니다. 물론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주님을 찾아 만나기도 하지만 주님이 가르쳐 주신 방법이 가장 확실하고 틀림없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바로 가난하고 불쌍한 우리 이웃들 속에서 주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면 주님도 우리를 외면합니다. 교회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면 주님도 우리 교회를 외면할 것입니다.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탄절이 연중행사가 아니라 정말 주님을 만나는 은총의 날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가장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우리들 곁에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전에 주님이 가난하고 불쌍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고 지금도 그들과 함께 계신다면 그들을 찾는 것이 주님을 찾는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번 대림절에는 어떤 형태로든 우리 곁에 함께 계시는 주님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날들을 만들어 봅시다.

▥ 원주교구 위종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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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우리는 더욱 작아져야 한다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한 치과병원에서 지난 9월18일 치료를 끝내고 집으로 내려오던 중,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하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를 수없이 뇌까렸다,

내용인즉 경기도의 어떤 도시에서 32평 아파트에 사는 어머니들이, 24평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자기의 아이들과는 같은 반에서 공부하도록 할 수 없으니, 반 편성을 따로따로 해달라면서, 자녀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나와 3일 동안 농성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24평에 사는 아이들이 32평에 사는 아이들을 때리고, 그 아이들의 물건을 훔쳤을 뿐만 아니라, 24평에 사는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주는 가정 교육이 문제라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의 이야기도 라디오에서 나왔는데, 어떤 아이들은 서로 싸운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싸웠지만 별문제를 느끼지 못했다는 듯 말하기도 했다. 자라나는 아이들끼리 놀다보면 때로는 싸움을 하기도 한다. 싸움하는 것을 잘했다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엄마들이 나서서 자녀들이 공부할 수 없을 만큼 학교에서 농성하는 모습이란, 그것도 32평, 24평을 나누는 모습이란 깊이 생각해볼 일이 아닐 수 없다. 1평짜리 집도 없는 나같은 사람이 볼 때도 32평이나 24평이나 도토리 키재기 같아 보이는데, 굳이 구분을 한다면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아니라, 가진 자와 조금 덜 가진 자의 구분이 있을 뿐일텐데, 그것이 그렇게도 큰 벽을 만드는 이유가 된다니 여간 슬픈 일이 아니다.

돈과 명예에 가리워진 하느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자신이 지닌 위치나 소유나 입장 때문에, 자신을 낮추고 겸손되이 엎드리기를 힘들어하는 이들이 어디 학교에서 농성을 했다는 그 어머니들뿐이겠는가. 생각해보면 겸손을 말하고 싶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내가 그래도 신부인데 그렇게 할 수 있나, 도대체 신부를 뭘로 알고 있나"하는 따위의 생각으로, 겸손이 자리해야 할 마음에 교만과 아집과 독선을 그 얼마나 품어왔던가.

겸손한 말 한마디는 타인에게 사랑과 희망을 심어주지만, 교만한 말 한마디는 타인에게 좌절과 증오심을 심어주며, 겸손한 말 한마디는 자신을 성숙시키고 타인을 일으켜 세우지만, 교만한 말 한마디는 자신을 멸시받게 하고 타인을 아프게 찢어 놓는다.

미국의 유명한 웅변가 무디 목사가 하루는 어떤 곳에서 15분간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연설을 하였는데, 연설이 끝나자 청중 속에 있던 대학교수 한사람이 “무디 선생, 당신의 15분 연설 중에 16곳이 문벌적으로 맞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한다.

교수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얼마나 틀리고 있는가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무디는 “교수님, 저는 배운 것이 부족하여 그렇습니다. 그런데 교수님, 저는 배운 것이 없어 무식하긴 해도 인류를 사랑하사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데, 교수님은 그 많은 학식을 가지고 인류구원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대답했다. 교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지닌 학식과 위치와 입장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을 교만으로 채웠으며, 대장간 출산 무디의 마음을 아프게 찢었던 것이다,

복음에 나오는 세자 요한은 요즘 말로 말하면 낭만이 넘치는 사나이요, 말 한마디로 가슴을 적셔주는, 마음이 아침 이슬 같은 시인이다. 그의 모습은 낙타 털옷에 가죽띠, 들꿀과 메뚜기를 잡아먹는 낭만주의자처럼 보여지고, 자신을 일컬어 오직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일 뿐이라든가, 주님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존재라든가, 하는 표현은 얼마나 겸손한 시인의 표현인가.

이처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자신을 우러러 보며 찾아왔던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그리스도께 자라를 마련해 드리고자 하는 놀라운 겸손으로 대답하시는 모습, 그것이 바로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 아닐까?

세자 요한에게서는, 자신이 지닌 명예나 명성, 인기나 위치 때문에 생겨날 수 있는 교만이나 타인과의 벽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을 숨기고 낮추며, 오직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드러내려 함으로써 “그분은 날로 커지셔야 하고 나는 날로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는 말씀을 몸으로 사셨다,

겸손․낭만이 넘치는 사나이 요한

옛날 한 시골 소년이 낚시를 하는데, 낚싯대 대신에 나뭇가지를, 낚싯바늘 대신에 구부러진 핀만을 가지고 많은 고기를 잡았다. 그런데 도시에서 온 어떤 이는 최고의 낚시 도구을 가지고 오랫동안 낚시를 했어도 한 마리도 못 잡았다. 마침 낚시를 끝내고 돌아가는 소년에게 도시의 낚시꾼이 “어떻게 그렇게 많이 잡을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소년이 말하기를 “성공의 비결은 저를 드러내지 않고, 제가 보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라는 것이었다.

세자 요한도 자신을 우러러 보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빛이 아니요, 다만 빛을 증언하는 광야의 소리일 뿐이며, 뒤에 오시는 위대한 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하면서, 자신을 숨기고 겸손되이 엎드렸다.

나는 누구인가! 조금 더 넓은 집에 산다는 것, 조금 더 머릿속에 지식이 있다는 것, 조금 더 높은 명예와 높은 위치에 올라가 있다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를 가리며 살아오지 않았던가. 돈이 많아 하느님을 버리고, 장사가 잘 되어 주일을 못 지키며, 지식이 많아 하느님 말씀을 외면하는 이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언제나 나를 첫 자리에 두고 그리스도는 나보다 뒤에 두며 살아왔던 나의 삶. 이제 그 교만의 삶에서 벗어나 2천년 전 요한이 살았던 겸손의 삶,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하신 삶이 나의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원주교구 김영진 신부
  |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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