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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갑질 신부님, 주교님께 이를 거예요!’
조회수 | 144
작성일 | 18.11.23
‘갑질 신부님, 주교님께 이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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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중 34주일. 벌써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다. 마지막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나온 한 해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이번 한 해도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다사다난했던 시간들이었지만, 전 세계 다방면에 걸쳐 유난히 ‘갑질’이라는 키워드에 이목이 집중된 시간이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닐 듯싶다.

‘갑질 신부님, 주교님께 이를 거예요!’

‘갑질 신부님! 주교님께 이를 거에요’ 본당에서 몇 차례 들었던 어느 교우의 귀여운 협박(?)이다. ‘갑질 신부님’… 스스로를 성찰해 볼 때,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갑질의 주된 대상은 솔직하게 고백하건대, 그 교우분이 아니라, 예수님이었다.

빌라도의 눈에는 죄수 가운데 하나의 모습으로서 있는 예수님은 그저 조롱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라고 물었겠지. 아무리 눈을 씻고 쳐다봐도 왕다운 모습을 찾기가 힘들었을 테니… 우리는 그러지 않았을까?

나의 바람과 기도와 간절한 요청대로 해 주지 않으시는 주님을 향해 ‘이것도 안 들어주시면서 나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것도 못해 주시면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입니까?’라는 원망, 실망의 마음을 가져보지 않았을까? 주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입으로 고백하면서도 실상 내가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았던가?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관심 있는 것만 앞세우지 않았던가? 적어도 예수님의 왕으로 고백한다면, 그리고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과 좋아하시는 것, 그분의 가르침을 더 우선했어야 했다.

하지만 반대로 왕을 곁에 모시고서 내 마음대로 했다면 이것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갑질 중의 갑질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갑질 신부님!!’이라는 귀여운 협박이 장난으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왕’을 대상으로 갑질을 했으니….‘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라는 빌라도의 말이, ‘당신이 그러고도 하느님의 자녀요? 당신이 그러고도 주님의 사제요?’처럼 들려온다.

그래서 오늘은 빌라도 앞에 죄수의 모습으로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진정한 왕의 모습을 발견할 줄 아는 신앙을 갖게 해달라고 청하는 날이 아닐 것 같다.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주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내 마음대로 행동하는 나의 모습에서하느님의 자녀다운, 주님의 사제다운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더 어려울 테니까! 부디 구름을 타고 오실 주님께서 이런 엉터리같은 내 모습에서 그래도 하느님의 자녀다운 구석을, 주님의 사제다운 구석을 조금이라도 찾아봐 주시기를 아니 찾아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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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교구 소재나 가브리엘 신부 : 2018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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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 18,33ㄴ-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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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 권한은 사람들을 구원하거나 구원하지 않을 권한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거나 주지 않을 권한입니다.

‘그리스도 왕 대축일’은 온 세상의 주님으로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주권을 기념하고 경축하는 날이고, 동시에 더욱 확실하게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권한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2-25).”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모든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나라입니다. 그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시작될 때 영원한 생명도 시작된다는 뜻입니다.(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이미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도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라는 말씀은,‘믿는 일’도, ‘회개하는 일’도 모두 ‘지금’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빌라도가 ‘아무튼 당신이 임금이라는 말 아니오?’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임금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36-38ㄱㄴ)”

(여기서 우리말 번역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로마제국의 총독이 식민지 이스라엘의 보잘것없는 죄수를 재판하면서, 죄수에게 정중하게 존댓말을 쓰고, 그 죄수는 해라체 말을 쓰면서 총독을 상대로 말을 완전히 놓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실제 현실에서는 총독은 죄수에게 말을 놓고, 죄수는 존댓말을 쓸 것입니다.물론 서양 말에는 존댓말과 반말과 해라체 말이 구분되지 않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말로 번역할 때에는 우리 말 어법대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아무에게나 말을 놓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말 번역에서 예수님의 말투를 보면, 조금도 겸손하지 않습니다. 아무에게나 해라체 말을 쓰면서 말을 놓으신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예수님을 높여 드리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온 세상의 주님으로 섬기고 공경하지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위압적이고 교만한 예수님이 아니라 겸손한 예수님입니다. 200주년 성서에서는 제자들에게도 존댓말을 사용하신 것으로 번역했는데, 다른 번역들에서는 그런 예수님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번역자들은 예수님을 높여 드린다는 생각만 하고, 겸손한 예수님은 아예 생각을 못한 것은 아닐까? 교회 지도자들의 교만한 권위주의의 한 모습을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여기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나라는 이 세상과 상관없는 딴 세상의 나라라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의 방식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세속의 나라는 권력자들이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성령으로 가득 찬 ‘영적인’ 나라이고, 믿음과 말씀과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나라입니다(루카 22,24-27).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이 세상은 예수님의 나라에 속합니다. 이 세상과 예수님의 나라는 대립 관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 안에 있고,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입니다. 이 세상은 많은 것이 결핍되어 있고, 어지럽혀져 있고, 미완성 상태입니다.예 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세상을 변화시켜서 당신의 나라로 바꾸려고 오셨습니다. 그 나라는 모든 것이 충만하고, 모든 면에서 완성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힘이 없어서’ 수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마태오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너는 내가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2-54)”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세속적인 힘으로(무력으로) 하시는 일이 아니라, 말씀과 사랑과 희생으로 하시는 일입니다.

(사랑은 아무 힘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그 무엇보다도 더 강한 힘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사랑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모범입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입니다.)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라는 말씀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려고 사람으로 오셨다는 뜻이고,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라는 말씀은, 사람들을 구원하라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뜻입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라는 말씀은,“구원받기를 바라는 사람은 내가 선포한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다.” 라는 뜻입니다.

현세적인 일에만 집착하면서 구원받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구원받지 못하게 됩니다.

빌라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서 “진리 따위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라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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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 2018년 11월 25일
  |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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