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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부족한 것 하나
조회수 | 1,076
작성일 | 12.10.12
형제자매 여러분, 한 주일 동안 행복하셨습니까? 지난 주 말씀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 중에서도 ‘부부의 관계’ 이야기였습니다. 모두들 하느님 앞에서 서약한 부부관계를 잘 맺으며 잊지 않고, 행복하게 살고 계시겠지요?

이번 주일에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들려주시는지 잘 듣고 실천해 보기로 합시다.

제가 가끔씩 교우 여러분에게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왜 사시나요?’,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그러면 어떤 분은 죽지 못해 살고 있다고 하시고, 어떤 분은 자식 때문에, 어떤 분은 천국 가기 위해, 어떤 분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 등등의 대답들을 합니다.

‘그러면 신앙 생활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는 한참 있다가 “복 받으려고요.”,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요.”, “천국 가려고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요.”라고 답을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현세의 삶과 죽음 후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행복’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저 세상인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것은 수많은 갈등 속에서 이 땅 위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던져지는 화두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통해 그 답을 보라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축복해 주신 다음 길을 떠나시는데 재물을 많이 가진 청년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묻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마르 10, 17) 하자 예수님은 계명을 지킬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는 어려서부터 그것은 모두 잘 지켜왔지만 그래도 뭔가가 부족한 것 같아서 묻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보시고 흐뭇해하시면서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10, 21)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그 사람은 재산이 많았으므로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10, 22)고 합니다. 그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른 사람은 현세에서는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10, 30)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어떤지요? 다른 모든 계명은 다 지켰는데, 마지막 하나를 내놓지 못하고 꽉 움켜쥔 채 예수님께 등을 돌린 어리석은 부자 청년이 혹 우리 자신은 아닌지를 돌아봅니다. 남에게 해롭게 하지 않고, 가족을 사랑하며 주일 잘 지키고, 피정이나 신앙세미나, 기도회 같은 모임에 열심히 쫓아다니면서 기도 열심히 하고, 교무금ㆍ헌금 잘 내는데, 이 정도면 신앙인으로서 잘 살고 있지 않은가? 라며 반문하거나 가끔 그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살기 어렵고 바쁜 시대에 태어나 그렇게 하는 것만도 정말 훌륭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삶의 목적은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신앙인조차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놓은 경우가 많습니다. 많지 않은 재산이나 돈 때문에 동료, 형제자매, 부모 자식 간에 서로 다툼으로써 죄를 짓는 경우들을 참 많이 봅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이기심, 좀 더 높은 지위와 좀 더 큰 평수의 집, 좀 더 많은 땅, 좀 더 큰 자가용차가 ‘나’를 자유롭게 할 거라는 생각에 매여 있다면, 그 사람은 이 모든 것들에 스스로 구속된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기심과 욕심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스스로를 눈멀게 합니다.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며 나만 잘 하면 된다는 생각은 옆을 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어리석은 구속입니다. 부자 청년도 이렇게 자신이 남보다 낫고 잘하고 있다는 생각과 재산을 모아야 산다는 욕심에 구속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재물이나 명예, 권력 그 어디에도 매임이 없는 자유로움을 만들어가는 삶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구속에서 헤어나기 위해서는 오늘 제1독서의 말씀에서처럼 생각이나 지식, 욕심에 묶여 있을 것이 아니라 지혜의 영을 받아 “지혜를 황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지혜 7, 8)하는 삶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하는 것은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계명을 잘 지키고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과 욕심을 버리고 떳떳하고 정의롭게 살아가는 데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음, ‘어떻게 살아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은 예수님께서 부자청년에게 하신 말씀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10, 21)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진 것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이웃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자청년에게 재물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버리고 자유를 선택할 것인지를 결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청년은 “울상이 되어 떠나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모은 재산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살아가면서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 그 잣대가 되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을 구속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구속에서 해방되어 구원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부자청년에게 이기심이나 욕심에 구속되지 말고 그 모든 물욕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며 사는 소극적인 사랑보다는 언제 어디서든지 가진 것을 나누고 자유롭게 함께 할 수 있는 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할 때 진정으로 행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내게 가장 소중한 것조차 하느님 앞에 내어놓아 이웃과 나누며 섬기며 살 때 비로소 주님이 주시는 ‘참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청년에게 “와서 나를 따르라.”(마르 10, 21)하시며 하나 더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제2독서의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 4, 12)는 말처럼 힘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 따라서 모든 것을 버리고, 가진 것을 나누며 함께하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든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 29-30)라는 말씀이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어떠한 삶을 택할 것인지 지혜롭게 선택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2독서의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드려야 하는 것입니다.”는 말씀처럼 날마다 우리는 하느님과 예수님께 감사드리며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나누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부자청년에게는 가난한 자들과 나누지 못한 ‘재물’이 ‘부족한 하나’였다면, 지금 ‘나의 부족한 하나’는 무엇인지 기도와 말씀 속에서 찾아 그것을 주님 앞에 내어 드리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이 주시는 이 땅 위의 축복과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참 행복’의 귀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안동교구 정상업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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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법

오늘 1독서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혜의 가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왕권보다도, 보석이나 금은보다도, 건강이나 미모보다도 더 귀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혜가 진정 그만한 가치를 지닌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힘써 얻어야 할 지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 마디로 대답하기 곤란합니다. 성경의 여러 책들이 지혜를 주제로 다루고 있지만, 하나의 통일된 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지혜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혜서가 말하는 지혜가 무엇인지는 간략히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지혜서 6장에서 9장에 따르면 지혜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하느님의 영입니다. 즉 오늘 1독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영을 받는 것이 세상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가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이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 1독서는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습니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 있었다’(지혜 7,11)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이 말씀은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는 열왕기 상권 3장 13절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말씀대로 지혜서의 저자로 여겨지는 솔로몬 왕은 오직 지혜만을 하느님께 청했지만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유한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지혜서의 말씀은 ‘돈돈돈 돈에 돈돈 악마의 금전’이라 노래하는 돈타령과는 달리, 돈을 모든 우환의 근원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재산을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구약성경은 일반적으로 부를 의로움의 증거요 하느님 축복의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부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은 악인들의 번영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가진 재산은 의로움의 증거나 하느님의 축복일 수 없습니다. 욥기 20장은 악인들이 악행으로 벌어들인 재산은 살모사의 독이 되어 결국 그들 자신을 죽인다고 합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은 두 종류의 부를 말하고 있는데,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영을 받은 이들이 누리는 부만이 가치가 있습니다. 부정하게 부를 형성한 이는 아무리 세탁하고 포장해도 오늘 2독서의 말씀처럼 사람의 속마음까지 헤아리는 하느님께서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일견 다른 말씀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형성 과정과 관계없이 부 자체가 구원을 가로막는 악한 것처럼 그려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부자가 예수를 찾아와 영생의 비법을 묻는데,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울상이 되어 슬퍼하면서 떠나갑니다. 외경 가운데 나자렛 복음서는 보다 생생하게 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떠나갔다고 전합니다. 그것을 본 예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부자에게 재물은 악한 것이니 모든 재산을 버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집도 땅도 버리고 산에 들어가 풀 뜯어먹으며 살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자캐오가 자기 재산 절반을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누겠다고 했을 때 예수께서 감동하셔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선포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많이 나눌 수 있다면 재산이 많을수록 좋습니다. 오늘 예수의 말씀은 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이 하늘나라에 합당한 자세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됩니다.

바늘귀의 비유도 이 맥락과 맞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에는 바늘의 눈이라 불리던 작은 샛문이 있었습니다. 낙타는 제 등에 지워진 짐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이 문을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재물에 대한 집착을 등에 지고 있는 한, 부자는 하늘나라의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말이겠습니다.

► 안동교구 함원식 이사야 신부
  |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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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한 가지 부족한 것

옛날에 어느 의좋은 형제가 함께 산길을 가다가 우연히 금 덩어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는 뛸 듯이 기뻐하며 금덩어리를 똑같이 나누어 가졌습니다. 꿈에 부풀어 기분 좋게 길을 가던 형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말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다가 형제는 어느 큰 연못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m갑자기 걸음을 멈춘 동생이 금 덩어리를 꺼내 연못 속으로 집어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형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니 얘야, 너 무슨 짓이냐?” “저는 금덩어리가 생긴 순간부터 형이 없어졌으면 하는 못된 생각이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어요. 형님, 그래서 금 덩어리를 버렸습니다.” 그러자 형이 동생 손을 잡으며 말했습니다. “잘했구나. 나도 그랬단다.” 그러고는 자신의 금덩어리도 꺼내 연못 속으로 힘껏 던져 버렸습니다.

두 형제가 형제애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으면 둘이 함께 가는 길에 아마 비극이 벌어지지 않았을까요? 돈이면 무엇이나 다 된다는 황금만능주의의 사상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복음 말씀은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서 재물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삶의 목적”이 되고 생명보다 가족애보다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는 재물입니다. 그런 재물을 많이 소유한 청년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제자로 부르시지만 그는 머뭇거리다 포기합니다.

무엇이 그를 돌아서게 했습니까?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 주어라.”(마르10.21)는 스승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부자 청년을 머뭇거리게 한 것은 재물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재물에 대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재물의 위력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 어떤 힘보다” 강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그런 “재물”을 없앤 뒤에 오라고 하십니다. 그는 실천 할 수 없었고 재물의 든든함을 포기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바로 재물이나 황금보다도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반성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하느님과 재물,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무엇이, 또는 누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6.24)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인생을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라고 곧잘 말합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는 너무나 자주 알맹이 없는 이론과 구호에 그치고 맙니다. 실제 생활에서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 진리에 어긋난 삶을 꾸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재물의 힘을 하느님의 힘보다 강하게 여기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재물의 힘에 굴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은 재물이 넘쳐나도 부족함을 떨치지 못합니다. 물질에 사로 잡혀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시고 재물을 관리하고 잘 쓰도록 맡기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뜻 있는 일에도 희사하며 교회 발전을 위해서도 협조해야 하겠습니다.

▦ 안동교구 조상래 다미아노 신부 : 2018년 10월 14일
  |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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