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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환난 이후 종말의 희망이
조회수 | 1,091
작성일 | 12.11.17
교회 전례력이 막바지에 이르러 복음은 종말에 대해 말씀하신다. 성경의 종말 이야기는 솔직히 쉽게 와 닿지 않는다. 마지막 예언인 종말이 현실과 거리감이 있다. 깨어서 준비한다는 의미를 종종 잊기 쉽다.
 
하지만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종말의 기다림과 준비가 매우 강했다. 오늘 복음은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알리고 있다. 동시에 그 전에 우주의 환난, 곧 해와 달이 어둡고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떨어지며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리는 무서운 징조를 예언하고 있다.
 
거룩한 곳을 잃어버리는 환난
 
성경의 묵시록적 특징이 드러나는 종말은 먼저 구약의 예언자 또는 성조의 인격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을 통해 나타난다. 종말은 환난과 재앙의 발생을 서술하고(마르 13, 24-25), 박해의 그 순간에 위로를 전한다(13, 26-27). 그 후 선택된 자들에게 보장된 낙원인 새 세상이 열린다(13, 29-30).

오늘 복음은 위로가 빠진 상징적 이미지로 종말을 전한다. 그래서 종말에 관해 부정적 생각과 그릇된 종말론이 생기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종말을 예수님이 선포하신 기쁜 소식과 하느님 나라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오늘 복음 핵심인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에서 '오신다'는 동사는 '주님께서 지금 이미 오셨다'는 완료형이다. 주님은 임마누엘이시고, '오시기로 된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은 오셔야 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하느님 신비가 거행되는 전례 속에서 지속된다. 미사 때 하느님 말씀의 봉독, 천사들의 목소리와 합창단의 찬미가 주님 앞에 모여 성체를 나눠 받아 모시고 기도하는 공동체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말씀과 나눔은 어제도 오늘도 아니 내일도 끝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구약의 많은 예언자가 하늘과 땅의 환난을 외쳤다. 그들의 예언은 미래에 대한 선견지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사람들에게 알리는 하느님 말씀이었다. 그것은 명의(名醫)의 바른 진단과 같다. 사람은 사는 대로 병도 얻지만, 그에 따라 치료도 한다. 그렇듯이 모든 죄는 재앙과 환난의 결과를 내포한다. 곧 계속 죄를 짓는다면, 하느님 은총의 비는 멈출 것이다. 그러므로 환난과 재앙을 방지하기 위해 변화해야 한다. 변화가 일어날 곳은 바로 백성의 거룩한 장소인 성전과 사람 속 성전인 마음이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예언의 주된 장소는 하느님 도시인 예루살렘과 성전의 산 시온이다.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가장 큰 재앙과 환난은 거룩한 곳이 바로 신성을 모독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마치 하느님이 버리셨듯이 그곳은 더 이상 거룩하지 않고, 성전은 더 이상 기도하는 장소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환난이고 재앙의 뿌리이다.
 
신성한 마음을 잃어버리는 환난
 
신약의 예루살렘은 이제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곳의 첫 제단은 인간 마음이다. 하지만 아직도 환난과 재앙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 마음은 하느님의 맛을 잃어버렸고, 하느님과의 관계도 느슨해졌다. 종교의 믿음은 물질과 세속적 흥미로 대체된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이지만 그 실천에는 무신론자들과 다르지 않다. 하느님의 거룩한 아름다움은 그 마음에서 제외됐다. 마음이 완고하게 된 것이다. 그 신성한 마음은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이것이 재앙의 뿌리다.

성경은 종말 예언의 의미를 다르게 전한다. 곧 환난과 재앙은 멸망의 길로 가는 결정적 징표가 아니다. 성경은 문자적 의미에서 재앙을 종말의 비극으로 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은 나쁜 영향력을 가졌지만 사람들이 멸망의 길로 가는 데 전혀 결정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악은 시간의 한계를 가진다. 신학자들은 세상살이에서 모든 징벌은 사람을 치유하기 위한 하느님의 약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치유될 사람에게도 시간은 제한돼 있다.

영성가 테오판 레클르소는 말한다. "마치 악이 항상 급하게 우리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교회의 모든 박해자는 그렇게 교회를 공격한다. 악은 박해자를 존경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악과 박해자들과는 반대로 느리고 태만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므로 급하게 서두르는 것은 약함의 징표다. 악마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악마들의 날과 시간은 이미 계산되고 한계를 지니고 있기에 시간이 별로 없다. 그래서 악은 일을 마치기 위해 급하게 움직이고 잔인하게 서두르기를 원한다. 하지만 하느님은 자유로운 영원성을 지니신다."

시편은 "하늘에 좌정하신 분께서 웃으신다. 주님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 마침내 진노하시어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분노하시어 그들을 놀라게 하시리라"(시편 3,4-5)하고 말씀하듯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다. 이것이 종말의 희망이다.

대전교구 곽승룡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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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의 부르짖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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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미사 후, 성당 정리를 하고 있 는 데 50 대로 되어 보이는 한 중 년 여성이 찾아왔습니다. 허름한 차림에 얼굴도 좀 초췌한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사무실로 가셔 지갑에서 돈을 조 금 챙겨 갖 고 나왔습니다. 제 가 있는 중 앙시장성당은 노숙자나 어려운 분들이 요셔서 점 심 값 이 나 차 비 를 달 라 고 종종 있어서 이번에도 그런 경우려니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매님을 친교실로 안내하였습니다. 인스턴트커피를 한 잔 드리고 나서 그 자매 님 의 얘기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집을 나온 얘기, 먹고 살려고 어쩔 수 없이 사창가를 전전긍긍했다는 얘기, 또 거기서 도망쳐 나온 얘기, 그리고 병에 걸려서 병을 고치려고 절에 들어갔다는 얘기, 그 절에 있던 스님 한테 성추행을 당한 얘기 등등---

그런데 이 얘기들을 중구난방으로 하는 통에 제대로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뭐라 맞장구를 치기도, 대꾸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저 잠자코 듣기만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훌쩍 넘어버렸습니다. 저는 속으로 ‘이제 돈을 좀 달라고 하면 도와주고 이 자리를 정리해야겠다’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자매님이 “신부님, 시간 많이 뺏어서 죄송합니다. 사실 제 얘기를 누구한테 할 수도 없고, 들어줄 만한 사람도 없어서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긴 시간 제 애기를 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하고는 부리나케 옷을 챙겨 성당 문을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제가 꽁무니에 대고 인사하는 것으로 이 만남은 끝이 났습니다.

오늘은 ‘세계 가난한 이의 날’입니다. 오늘날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가난은 단순히 경제적 어려움만을 의미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의 소외가 드러난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교황님께서 담화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가난한 이들이 사회에 온전히 통합될 수 있도록”교회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칫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무언가를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그 자매님에게 제가 돈을 주려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필요한 것은 가난한 이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주님처럼 우리도 가난한 이를 소외 시키지 않고 그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무심하지 않고, 깊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내려올 때, 우리가 가난한 이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그분을 닮아 있다면 참으로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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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교구 김다울 클레멘스 신부 : 2018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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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대학교의 심장전문의 레빈 박사가 회진 중 한 의식불명의 노인에게서 제3심음(第三心音)을 들었습니다. 제3심음은 처음에는 희미하게 들리다 심장이 멈추기 직전 아주 크게 들리는 소리입니다. 제3심음이 크게 들리면 그 사람이 죽음 직전에 와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제3심음은 평소에 쉽게 들을 수 없기 때문에 박사는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황급히 제자들을 불러 노인의 심장소리를 듣게 했습니다. 제자들은 들뜬 목소리로 “잘 들립니다. 이게 제3심음이었군요. 뚜렷이 들립니다.”라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박사는 노인의 가족들에게는 장례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가 되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혼수상태였던 노인의 상태가 호전되더니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곧이어 심장 상태 역시 급속하게 호전됐고, 제3심음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1주일이 지난 후 노인은 심장이 완전히 정상이 되어 퇴원했습니다.

퇴원하는 날, 박사는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이렇게 심장이 좋아 지리라고는 저 자신도 생각 못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말했습니다. “아니, 의사 선생! 지난 번 아침 회진 때 당신과 당신 제자들이 내 심장소리가 잘 들린다고 무척 기뻐하지 않았소?” 학생들이 “잘 들린다.”고 말한 것을 노인은 가물가물한 의식 상태에서 “자신의 심장이 드디어 살아났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노인의 심장은 다시 에너지를 얻어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던 겁니다.

삶의 활력은 희망에서부터 시작하고 이 희망은 믿음에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바로 들음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위의 ‘심장소리가 뚜렷이 들린다’는 의사들의 말을 듣고 희망을 가지게 되었던 노인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도 “믿음을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주에서부터 우리들은 독서로 묵시록의 말씀을 듣습니다. 이 말씀은 예리코의 눈먼 이에게 하신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언하시는 희망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이 주시는 치유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알아듣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한 주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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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교구 민병섭 신부 : 2018년 11월 18일
  |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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