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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이혼, 그 뜨거운 감자
조회수 | 669
작성일 | 15.09.29
한집 혹은 두세 집 걸러 이혼가정이 생겨나는 ‘꽤 심각한’ 우리 사회 현실 앞에 ‘죽어도 이혼만큼은 안 된다’는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는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신자들도 밥 먹듯이 어기는 상황 속에서 구색만 갖춰놓은 교회법처럼 여겨져 씁쓸합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왜 끝까지 강경하게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를 고집하고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을까요?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는 바로 예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씀을 바탕으로 한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이혼은 가능하다’는 유다 이혼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새로운 혼인 관련 율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입니다.

흐트러진 백성들의 생활을 다시 한 번 바로잡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윤리질서의 회복을 위해,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쇄신을 위해 단행하신 예수님의 혁신 작업이 바로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의 설정이었습니다.

혼인을 통해서 부부는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라고 강조하십니다. 결혼한 두 사람이 갈라선다는 것은 한 육체를 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리하고 부자연스런 일임을 선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선언하십니다. 언제나 흔들리고 유한한 인간이 제정한 것이라면 세월이 흐름에 따라 파기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불멸의 것입니다. 그것을 파괴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시고 선포하신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이기에 우리 가톨릭교회는 단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구체적인 현실, 세태, 상황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언젠가 ‘가정과 혼인’을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늘 소년원이나 분류심사원, 교도소를 찾아다니고, 가출 비행 청소년들을 일상적으로 접하면서 은연중에 제 머릿속에는 이런 사고방식이 고착화되더군요.

부모의 불화, 별거, 이혼=자녀들의 고통, 방황, 일탈행위, 비행

그래서 제가 쓴 글도 부모의 이혼은 곧 자녀들의 비행과 직결되니 절대로 이혼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해서든 부모가 참으라는 식의 내용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얼마 후, 몇몇 분들의 피드백을 받았는데,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참으로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 억지스런 논리로 상처 입은 분들께 정말 죄송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도 좁은 안목을 지니고 살아왔습니다. 이혼했다고 가정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혼가정 청소년이 다 비행청소년이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이혼했지만, 자녀들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더 훌륭하게 성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었습니다.

언제나 부족한 인간이다 보니 누구나 다 판단착오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루어지지 말았어야할 잘못된 결혼도 고려해 볼 수 있겠습니다.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한 평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지옥과도 같은 하루하루인데, 어떻게 한 평생을 참겠습니까?

다양한 케이스들을 접하면서 원칙을 철두철미하게 준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각각 개별인간들이 겪고 있는 말 못한 사정들, 고통들, 어쩔 수 없는 상황들도 고려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 그리스도 신자된 도리로써 목숨을 걸고 실천하고자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미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교회 차원에서의 진지한 사목적 배려가 필요하겠습니다. 이혼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가족 구성원들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교회는 구체적이고 다양한 사목적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혼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모든 가정과 구성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이 주님 안에서 다시금 빨리 추스르고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시길 청합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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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제 완고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어 주님의 말씀을 새겨듣게 하소서.

▪ 세밀한 독서  (Lectio)

복합적인 이유는 있었겠지만 남편의 실직이 이혼 사유가 되었다는 어느 가정의 이야기를 들으며, 혼인에 대한 신의와 충실성은 상실되고 물질적이고 편리 위주의 가치 속에서 가정이 깨진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렸습니다. 그런 우리의 사고에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오늘 말씀은 혼인에 관한 원초적인 진리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모세의 이혼장 규정은 가부장제 사회구조 안에서 남자한테 버림받은 여인이 새 출발 할 수 있도록 여성의 존재가치와 존엄성 그리고 권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신명 24,1-4) 그러나 이런 애초의 취지와는 달리, 예수님 시대에 와서 남용된 이혼장은 지극히 사소한 일에서조차 남편이 아내를 소박하는 구실이 되었습니다. 율법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혼과 재혼을 쉽게 허락했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아내를 버리는 관례를 단죄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마태 5,31-32; 루카 16,18)

그래서 그들은 이혼에 대한 질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이혼법을 폐지하는 말씀으로 율법을 어기도록 유도하고자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고 시험합니다.(마르 10,2) 예수님께서 “모세는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3절) 하시며 모세의 계명에 대해 되묻자 바리사이들은 “이혼장을 써주고 버리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4절)라고 ‘허용사항’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아내를 버려도 된다는 허용의 이유를 사람의 ‘완고한 마음’(5절)에 두고 있습니다. ‘완고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옹고집으로 자신의 의견이나 목적만을 고수하는 우매하고 딱딱한 마음입니다. 사람의 딱딱한 마음에는 구원과 행복 그리고 평화를 위한 사랑의 질서를 받아들일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이혼에 대해 말할 때 예수님은 모세를 넘어서 창조의 본래 질서, 곧 혼인에 대한 보편타당한 진리의 말씀을 하십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6-7절; 창세 1,27; 2,24) 처음부터 하느님은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어 남녀 관계의 기반을 ‘평등’에 두고 있습니다.

혼인은 남녀가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사랑으로 “둘이 아니라 한 몸”(마르 10,8)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인한 남녀는 이제 육체적 결합을 통해 영적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또한 혼인은 단순히 남녀의 쌍방 계약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축복이 전제된 은약恩約으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됩니다.”(9절) ‘맺어주다’, ‘짝짓다’라는 말의 어원은 ‘하나의 멍에를 지고 간다.’는 의미에서 나왔습니다. 부부란 하나의 멍에를 함께 지고 가는 사람들로서 혼인의 단일성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부부가 이혼을 한다 해도 하느님께서 친히 짝지어 주신 혼인 유대는 해소되지 않습니다.

일치된 부부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절대적이고 변함없는 사랑의 표상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대해 지닌 사랑처럼 서로를 위한 희생이 담긴 사랑을 전제로 합니다.(에페 5,24-25 참조) 부부가 서로 장점만을 취하고 약점을 배격하고자 한다면 둘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의 나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는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과도 같습니다.(마르 10,15) “하느님의 나라는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14절)이라는 예수님 말씀에서 오늘날 부부의 소명과 행복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마태 5,3-8; 마르 3,31-35 참조)

▪ 묵상 (Meditatio)

우리 영혼은 가정에 뿌리내리고, 가정에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부모한테 배우지 못한 사랑은 그 자체로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탓일까요? 성인이 되었어도 때때로 제 안의 아이가 사랑을 투정합니다. 오직 부부를 통해서만 보내주시는 하느님 사랑의 씨앗을 각 가정은 얼마나 보유하고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문득 저희 수도공동체의 일치를 통해 보내주시는 하느님 사랑의 씨앗은 어떤 빛깔인지 그리고 그 씨앗을 맺기 위해 저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 기도  (Oratio)

아들들이 일어나 그를 기리고 남편도 그를 칭송한다. 우아함은 거짓이고 아름다움은 헛것이지만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은 칭송을 받는다.(잠언 31,28.30)

►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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