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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조회수 | 165
작성일 | 17.12.14
[의정부]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신부님 축일 축하드려요!!울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반짝반짝 닦으러 먼저 오신 세례자 요한 성인...이 시대에도 우리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길을 반짝반짝 닦으러 먼저 보내신 분이 신부님이 아닌가?!!하는 행복한 상상을 해봅니다. 축일 다시 한 번 축하 드리구요, 낼 새벽 미사 때 기도 안에서 찾아 뵐께요.”

오늘이 제 축일이냐고요? 아닙니다. 언젠가 제 축일 전날 잘 아는 수녀님이 제 홈피(???)에 남긴 축일 축하 글입니다. 축일을 앞두고 받은 따뜻한 축하 글에 기뻐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론 ‘나는 정말 세례자 요한처럼 예수님이 오시는 길을 반짝반짝 닦으며 잘 살고 있나’하는 반성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대림 3주일입니다. 어느덧 대림초에도 불이 세 개나 켜져 있는 걸 보면서, 오실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다가왔음을 느낍니다. 대림 시기가 시작되면서 오실 예수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계획한 것들이 있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그 뜻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해 합니다.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세례를 베풀고 다녔던 요한이 혹시라도 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을 테고, 그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는 아니더라도 엘리야나, 기다리고 있던 예언자 정도는 되지 않을까’ 하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만일 요한이 자신을 “내가 바로 너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그리스도다”라고 했어도 사람들은 그 말을 다 믿었을 것 같습니다. 또는 엘리야나 기다리던 예언자라고만 했어도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활동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그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만 대답합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시큰둥했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자신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예언자도 아닌 사람에게는, 별 관심도 없고 쉽사리 무시해 버릴 준비가 이미 되어 있던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는 주님께서 오시는데 있어 참으로 중요한 소리였습니다. 한없이 겸손한 모습으로, 주인공이기를 철저히 사양했던 그 소리는 주님을 맞는 가장 값진 준비였고, 기다림이었습니다. 나를 드러내려고 할 때, 그래서 내가 하는 일들과 봉사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할 때, 바로 그러한 때에는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내가 아니라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려고 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보다는 나를 드러내고, 내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하려는 마음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 깊이 뿌리내려 있는 본성과 같은 것이고, 또 그 유혹이 너무나 달콤하고, 때로는 내 자신도 모르게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늘 깨어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기도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한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깊은 곳을 바라보면서 기도 하는 일!!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들의 모습은 무엇보다도 겸손한 모습이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겸손함으로 예수님께서 오시는 길을 반짝반짝 닦는 참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 의정부교구 김형근 세례자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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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勝負(쇼부)’쳐! 해 바?

사제는 대부분 교회 신자들 속에서 일하면서 살아가는 사목자들입니다. 사목자란 양들을 치는 목자란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홋카이도에서 사목하고 있는 저는 얼마전 일본 오키나와에서 한국 신부 연수회를 가졌는데, 그때, 오키나와 주교님이 일본에서 사목하고 있는 저를 비롯한 여러 한국 신부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일본 신자들을 사목하러 일본에 왔다면 재고해 봐야 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일본에서 사목자가 아닌 선교사로서 일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교님의 말씀은 우리 한국 신부들의 사목이 일본의 기존 신자들을 향하기 보다는 비신자를 겨냥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선교적인 사목자를 바라는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일본 신자들에게 매주일 미사 참례를 하라고 하거나 고백성사를 자주 드리라고 말하고 또, 주위 친구들이나 친척들이 성당에 나오도록 권유하라는 말을 하면 그들에게서 호응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왜 저런 말을 하는가’하는 의아한 표정을 그들의 얼굴에서 읽곤 합니다. 아직도 제게는 신앙적, 문화적, 역사적 차이에서 오는 높은 걸림돌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목자보다는 예언자적인 선교사에 가까운 분입니다. 불호령하는 선교사, 진리를 위한 승부사였습니다. 승부한다는 말이 일본어로는 ‘勝負(쇼부)’라고 합니다. 저는 어릴 때 뜻도 모르면서 동네 친구들과 놀 때 이 단어를 자주 썼습니다.

‘야, 쇼부쳐! 쇼부해!’ 라고 말입니다. 저는 지금도 감히 일본의 복음화를 위해 ‘勝負(쇼부)’를 시도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인의 생활 습관, 문화 그리고 일본인의 근성 등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적극적이고 개방적으로 복음적인 승부를 할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승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과 복음을 통한 서로의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씩 위대한 승부사 세례자 요한의 전구를 청해 봅니다.

‘세례자 요한이여, 저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도전해봐, 그들과 복음으로 쇼부쳐!’

▥ 의정부교구 송영준 비오 신부
  |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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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 )이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고 자선 주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길게 전개되고 있 습니다. 요한은 자신을 그리스도라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다만 ‘주님의 길을 곧게 내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에 불과하며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갖추지 못했다.’며 자신을 낮춥니다. 하지만 요한은 자신을 낮추면서도 사람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며 요르단 강에서 열심히 세례를 베풀면서 주님의 오심을 성실히 준비 하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규봉’이라는 이름을 ‘속명’이라고 부르고 ‘가별(가브리엘)’을 ‘본명’이라 부릅니다. 이것은 우리 가 본래의 고향인 ‘천국본향’으로 돌아갈 때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 안에서 ‘규 봉’이라는 이름은 잠시 살아갈 세상에서 사용하는 ‘속명’에 불과하고 ‘가별(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이야말로 진짜 이름인 ‘본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세상 안에서 살지만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하느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예수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라고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사실 우리 중의 어 떤 이도 스스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생명을 허락하셨고 우리 모친의 태를 열어 이 세상에 보내주셨기에 우리가 지금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 본명을 받은 것도 분명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 새로운 이름, 곧 ‘본명’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오심을 전심으로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과 비교조차 할 수 없지만 2014년, 대한민국이라는 시공간 안에서 복음을 증거 하라고 불리고 있는 이는 요한이 아니라 바로 우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오실 길을 준비하라고 우리를 이 시대의 요한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것을 위해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이신 예수님처럼 살 수는 없고 세례자 요한처럼 온전히 투신하기도 어렵지만 그만큼은 못해도 지금보다 내 가정과 직장을, 나의 본당과 지역 공동체를,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우리나라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더 좋도록, 조금 더 좋도록 노력할 수는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조금 더 고민하고 몸부림치면서 살고 또 그렇게 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느님께 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 )이었다.’

▥ 의정부 김규봉 가브이엘 신부
  |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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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널 사랑해서 하는 말이야”, “너한테 관심 없었으면 이런 말 하지도 않아”. 이렇게 우리는 종종 진심어린 사랑으로 동료에게 조언을 하거나 잘못을 지적하며 신랄하게 비판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아무런 태도의 변화를 보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상대방의 조언에 대해서 자신의 잘못을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인정하더라도, 감정적으로는 인정할 수없는 상황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상대방이 나의 진심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겸손이 부족하다며 또다시 비판하기도 합니다. 애초에 상대방을 향해서 진실 된 사랑으로 뻗어나가던 ‘너-중심’의 사랑이, 종국에는 거부당한 내 사랑에 대한 분노로 소급되는 ‘나-중심’의 사랑으로 대치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애초에 진실 된 사랑을 담은 선의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의 반응에 대한 인간적인 서운함과 미움의 감정으로 대치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느님 사랑에서부터 오는 것이라 믿으며 행하는 실천들 그 이면에는, 때때로 타인과 세상을 자신의 의도대로 조종하고 만들어가려는 교만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의 ‘영적 식별을 위한 규범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에서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진실 된 사랑이 우리의 인간적인 감정과 만나는 접점에서악마의 교활한 간계가 시작됨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악마의 주요 목적은 하느님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마는 하느님 사랑의 실재를 공격할 수 없으므로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인간의 정서와 감정에 교묘히 침투하여 공격하고, 결국 거짓 사랑을 진정한 하느님 사랑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마는 하느님을 인격적이고 사랑 가득하신 분으로서가 아니라 엄격한 율법 안에서 죄인들을 벌하시는 무서운 심판자로서 인식하게 만듭니다. 또한 신앙을 이상적, 도덕적 관념의 세계로 격하시키도록 우리 안에서 수작을 부리며, 우리가 하느님과의 친밀한 내적 관계 없이도 신앙생활을 잘 해나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착각은 위선의 가면으로 포장되어 우리도 모르게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종 우리는 나의 미움과 증오를 건설적 비판이란 이름으로, 열등감과 두려움을 고집과 완고함이란 이름으로, 결단력과 용기의 부족을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개인적인 성취욕과 교만을 사도적 열성으로 포장하며 살아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식별 없는 ‘거짓 사랑’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과,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거짓 사랑’에서 ‘진정한 하느님 사랑’으로 나아가려면, 그리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 안에서 그분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우리의 태도가 하느님을 이용하는 것뿐이면서 마치 하느님을 사랑해서 그렇게 하는 것처럼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일상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사랑의식별 과정’이 필요합니다. 내 믿음과 사랑의 실체가 내 자신인지, 하느님의 뜻인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 의정부교구 김동규 바오로 신부 : 2017년 12월 17일
  |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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