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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예수님
조회수 | 145
작성일 | 18.02.11
[청주] 나병환자를 치유하신 예수님

연중 시기가 시작된 지도 몇 주가 지났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시며 세상의 온갖 악과 싸우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두 주일 전에는 카파르나움에서 악령을 추방하셨고, 지난 주일에는 열병이 든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셨다고 했습니다. 악령의 추방과 죄의 사함, 그리고 병자의 치유는 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모든 병이 악과 죄의 결과라는 복음서의 견해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는 모든 곳에서(복음화), 사람은 더욱 참 사람이 되어 갑니다(인간화).

오늘은 나병에 걸린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수천 년 동안 나병에 걸린 사람은 육신으로나 영혼으로나 이미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요셉푸스 플라비우스 같은 로마의 역사가는 “나병에 걸린 이는 죽은 이와 모든 면에서 다르지 않다”고 했고, 쿰란 문헌에서는 “나병에 육신을 얻어맞은 이는 하느님 백성의 모임에 들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듣는 민수기의 말씀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전합니다(13장). 나병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느님의 관계를 찢는 악의 집합소처럼 인식되었습니다. 육신은 병들어 신음하는데 사람들은 그를 외면하고 가까이 다가갈 수 없으며,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죄인이라는 절망이 나병에 걸린 이들의 영혼을 갉아 먹고 있었습니다.

나병을 앓는 아픈 이가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다가와 자신을 깨끗하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주님께서 보이신 첫 반응은 그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드러내시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장기, 특히 엄마의 태가 움직이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쓰는 이 단어(스플랑크니조마이)는 성서에서 오직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람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드러내는 데에만 사용되었습니다. 교부들은 이 단어를 “다른 이와 고통을 함께 나누다”(쿰 파티오르)라는 뜻으로 옮겼습니다.

예수님은 손을 뻗으시어 나병 환자의 몸을 만지십니다. 말씀만으로 그를 치유하실 수 있었지만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대셨다고 분명하게 언급합니다. 그것은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그 사람도 불결해지므로 일체의 접촉을 금지하였던 당시의 규범과 관습을 예수님께서 어기셨다는 뜻입니다. 이 후 주님께서는 마을 안으로 공공연하게 들어가실 수가 없게 되셨습니다(45절). 당시의 율법 규정을 따르자면 나병 환자와의 접촉으로 예수님께서도 불결한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규정과 관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의 마음을 나누셨고 우리의 고통을 짊어지셨습니다.

이사야서에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53,4). 라틴어 번역본은 맨 끝의 말씀을 이렇게 옮겼습니다. “우리는 그를 나병환자처럼(quasi leprosum) 심판했습니다.”

그때처럼 지금도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룩한 교환으로 우리는 오늘도 깨끗한 사람,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고통 받고 소외된 이들에게 당신의 손을 뻗기 원하십니다. ‘지역 사회와 함께 하는 교구 공동체의 해’를 보내며 우리에게 이웃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과 불쌍한 이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의지를 키워주시기를 주님께 청합시다.

▦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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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지금은 사랑할 때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방법이 아닌 당신의 방법으로 사랑하심으로써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바꾸어 주십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당시 나병환자는 사람구실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회적인 권리를 가지지 못할 뿐 아니라 그를 만지는 사람도 불결해 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외딴 곳, 광야에서 살아야 했습니다(1열왕5,7). 산송장처럼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그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마르1,41). 하시고 감히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행동을 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깨끗해진 그에게 단단히 당부하셨습니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르1,44). 우리는 어떤가요? 어렵고 힘든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기나 합니까? 혹 잡아주고는 생색내려고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나요?

좋은 일을 하셨으니 소문이 나서 인정 받고 어깨에 힘을 주셔야 하거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행동에 대해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유명해 지고 싶은 사람, 인기를 누리고 싶어하는 사람으로 오해 받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또한 정결법을 고수하는 이들의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나병환자가 사회로 돌아가서 일상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주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마땅히 행할 일을 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결코 누구에게 인정 받고 칭찬받기 위함이 아님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어루만져 주고 보듬어 주는 것은 인기를 얻고 예쁨을 얻기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살기 위한 것뿐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점점 더해져서 이제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 곳에 머무르셨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 들었습니다(마르1,45).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부정한 사람이 되어서 외딴 곳에 머무르셨지만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는 것은 그분께 분명한 능력과 향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간직하고 예수님의 향기를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면 사람들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나병환자들을 어루만진 더러운 손이 더럽지 않게 여겨지는 순간 우리의 손은 예수님의 손이 될 것입니다.

주변의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 못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이들이 내가 돌보아야 될 사람이라고 받아들여진다면 그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고 하느님의 눈에 드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감히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을 뛰어 넘었고 변두리 외딴 곳에서 새 생명의 싹을 틔우셨습니다. 소외되고 버려진 부정한 사람들의 한가운데서 그들의 새 삶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활동은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기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바오로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로마5,8).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은…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고린 1,17).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우리도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사랑하기를 기뻐해야 하겠습니다. 매 순간이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는 기회이고 축복의 때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못 봐서 애타고, 미워하는 사람은 봐서 애가 탄답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고 그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하기를 그치지 맙시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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